가난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6/25 [12:07]
▲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후 캔버라 시티 유나이팅 쳐치 앞에서 포즈를 취한 변조은 목사©크리스찬리뷰
 
한국에서나 이후 호주로 돌아와서도 사회참여문제에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셨는데, 막상 한국교회는 매우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특히 목사님이 활동하시던 때는 베트남전이 이슈였고, 한국교회는 베트남전 참전에 열렬히 지지를 보냈다. 목사님은 여기에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

“내가 호주로 돌아왔을 때 베트남전은 이곳의 핵심 문제였다. 내 친구들에서도 징집 거부자들을 도왔다. 내게 신약을 가르쳤던 데이비드, 맥카티도 자기 집에서 징집 거부자들이 숨을 곳을 제공했다.”

- 1972년 귀국 전후로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회 재산이 많이 정리됐다. 마산노회 기록은 존 브라운 선교사의 귀국으로 호주 한국 선교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고 평가했는데, 이것이 옳은 평가라고 생각하는지? 이미 한국사역의 주도권을 통합 교단에 넘기신 것으로 아는데.... 그 후에는 한국교회사에서 별다른 호주 선교사들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목사님 귀국 후에도 호주장로교 선교회의 한국선교가 어떻게 이어졌다고 보시는지?

“호주선교회 마산지부, 내가 살던 집이었는데 남은 재산을 창신·일신·평신도훈련원에 분배했다. 마산선교지부에 있던 선교사 숙소는 창신학교로 보내고, 부산선교지부 재산은 일신병원에, 진주 재산은 진주노회로 간 것으로 기억한다.

▲  경남 거제시(거제도) 소랑리 마을을 바라보는 변조은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내가 귀국함으로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가 방향이 바뀌지는 않았다. 선교는 세 분야로 계속 이어졌다. 첫째는 일신병원인데, 리더쉽은 넘어갔지만 호주선교부가 손을 뗀 것은 아니다. 둘째는 양지동산, 기술학원, 셋째는 산업선교로 이어졌다. 산업선교는 재작년(2010년)까지 계속해서 청년들을 파송했고 지금까지 24명이 가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군사정권때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넷째는 내가 신학교를 떠난 후에 장학금을 주어서, 여러 (한국 학생들을)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산업선교는 계속 진행됐고, 민주화운동은 후원을 했다기보다는 뒤에서 격려했다. 또한 호주의 교인들이 한국에서 군사정권 아래서 일어나는 탄압 현실을 잘 알려주는 방식으로, 민주화운동을 격려하고 도왔다. 1972년 이후 돌아온 후에 6~8명 정도가 영등포에 가서 일했다.

▲거제도 녹산으로 가는 정기 여객선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1976년 매혜란 선교사, 매혜영 선교사가 10년 후, 85년 안덕희 선교사, 95년 바바라 마틴 선교사가 호주로 돌아왔다. (그렇게 이어졌다는 뜻)”

- 한국선교를 통해 목사님의 이후 사역에 어떤 영향이 미쳤다고 생각하시는지?

“많은 부분이 있다. 첫째는 농어민의 신앙과 삶이 나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그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며 신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도 많이 배웠다. 

▲  변조은 선교사는 배 뒷편에 짚차를 싣고 거제도 선교를 다녔다.    ©크리스찬리뷰

둘째는 특히 영등포 선교를 통해, 교도소에 가든말든 신경쓰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헌신과 결단의 모습에서 많이 배웠다. 한편으로는 한경직 목사님같은 보수적 한국 지도자들에게도 많이 배웠다. 싸울 때는 싸우고 헤어질 때는 웃고 헤어지는 지혜도 그 중 한 가지다. 신학교를 통해서도 많이 배웠다. 학생들에게도 배웠고 교수들에게도 격려를 많이 받았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때 나는 연희동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김기태 목사님, 주선애 선생님같은 분들을 만나면서, 도전도 받았지만 격려도 많이 받았다.

양지기술학원을 경영한 분들도 대단한 분들이었다. 신익균 장로님, 내가 마산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린 정원사였는데, 나중에 노승배 목사(Rev. Barry Rowe)의 동역자가 되었는데, 그들은 우연히 숨어있는 장애인들을 부산에서 발견하여 그 사역이 시작되었다. 한두 사람을 자기 집에 데려가서 기술을 가르쳐주었고, 그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다.

지금까지 2천여 명 이상을 자립시켰고, 그 사역을 보면서 도전과 격려를 많이 받았다.”

▲  양지동산을 방문한 변조은 목사     ©크리스찬리뷰

호주선교사들은 복음을 지적인 면보다는 삶이나 실천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현재 한국교회는 이런 유산에 비해서는 많이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역사를 읽어보니 도전을 더 많이 받게 된다. 1910년에 한국에 도착한 매혜란, 매혜영 자매의 아버님(Rev. James N. Mackenzie)은 27년 동안 상애원을 경영했다. 벌써 그때부터 선교회의 방향은 결정됐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인으로서 가장 소외된 사람을 돌봐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  한ㆍ호 선교 12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강의하는 변조은 목사       ©크리스찬리뷰

 
 
 
 
 
 
 
 
 
 
 
 
 
 
 
 
 
 
 
 
 
 
 
 
 
 
 
 
 
 
 
 
 
 
 
 

 
 
1909년 매혜란 자매의 어머니(Kelly)는 백정 해방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으로 백정이 교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약자들을 도와줘야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

나는 한국교회가 실천에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시작했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성경의 모든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모든 지도자들에게 많은 한국 교인들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모세가 직접 오경을 적었다고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하는 것은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고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이다.

사람들은 치우치기 쉽고, 교회성장운동에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동시에 젊은이들이 가득한 큰 교회들을 보며 부러워하지만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오랜 시간 동안 좋은 인터뷰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글/김석원|크리스찬리뷰 객원기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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