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중보기도

이인규 | 입력 : 2012/08/27 [09:10]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이인규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cafe.naver.com/anyquestion) 카페 대표시삽
저서 <신사도운동의 정체와 비판>, <다른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이번 칼럼에서는 신사도운동에 주장하는 ‘중보기도’라는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다. 일반적으로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남을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볼 때에 필자는 - 비록 중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고 하여도- 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더 열심히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사실 성경에 없다. 그래서 한 장로교 교단은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공식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신사도운동이 사용하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중보기도의 의미와는 잘못된 개념들이 많이 숨어 있다. 왜 신사도운동가들의 중보기도가 비성경적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는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한 이유는 그 죄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중보자가 있었다. 그래서 ‘중보’와 ‘중보기도’는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점은 신사도운동에서는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말하는 중보기도는 예언을 뜻한다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을 하는 자들은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증거로 구약성경 구절만을 주로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약에서도 ‘중보자’가 있다는 성경적인 증거를 단 하나도 인용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중보자들이 증거하듯이 중보사역의 가장 큰 상급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중보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선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30쪽).

“오늘의 중보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충성스러운 중보사역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지 않으실 때가 많은 것이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31쪽).

물론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중보자가 필요하였으며, 그 중보자들이 곧 기름부음을 받는 제사장이었으며, 선지자였으며, 사사와 예언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중재하는 중보자였다. 그는 허락된다면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위탁하기도 하였다(출32:30-34).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0-32).

이사야 역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중보자로서의 사명을 요청하였다(사 6장). 다시 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숯불로 입술을 지지는 정화적인 절차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그러나 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휘장이 찢어진 사건과 그로 인하여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신사도운동은 왜 언급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예수가 대제사장이 되시므로 이제는 구약의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또 예수가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므로 이제는 구약의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모세의 중보자적 사명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까지로 제한된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요1:17, 갈3:19-20). 자신을 사도로 칭하든, 선지자로 칭하든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자신에게 중보자적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큰 오류를 낳는 행위가 된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를 세워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신약에서,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더욱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사람 예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위와 같은 말씀이 있는데도 왜 신사도운동에서는 구약의 성경구절만을 인용하면서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고 주장할까? 신사도운동에서는 신사도운동은 자신들이 사도이며 선지자라고 하는 것도 부족해 이젠 자신들을 중보자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중보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 오류를 낳게 된다.

예수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온전한 중보자다. 하나님은 선지자나 예언자, 사사를 통하여 혹은 천사를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자신의 말씀을 전하여 왔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이다(히브리서 1:1-2). 즉 예수그리스도가 계시의 종결이며, 성경이 곧 예수그리스도를 기록한 것이다.

중보 기도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만 한다.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듯이 중보자가 된다는 주장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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