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씨앗을 심은 호주 선교사들 - 서두화 목사 (Rev. Alan Stuart)복음 전파의 열정, 겸손과 섬김의 모습으로 한국 선교와 이민교회를 이어준 현장 목회자
솔직히 인터뷰 대상으로 서두화 목사를 세 번째로 선택한 것은 뉴카슬이 시드니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선택은 숨기고 싶은 게으름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지만, 빡빡한 제작 현장에서 피차못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참동안 인터뷰를 위한 사전조사를 하다보니, 어쩌면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시간을 달려 간 서두화 목사 자택은 이전에 알고 있던 주소에서 이미 옮겨진, 아내를 보내고 혼자 남겨진 아버지를 걱정하는 아들들이 뒷마당에 지어놓은 듯한 그래니하우스에 자리하고 있었다. 부산일신병원에서 태어나 문창교회 김석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큰 아들 크리스토퍼(한국이름 서형일, 1959년생)가 우리를 기쁘게 맞이하며 준비한 점심은 잡채와 동그랑땡. 고기도 없이 너무 달게 볶은 약간은 묘한 잡채였지만, 성의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충분히 상쇄할만 했다. 한국말을 많이 잊어버려서 미안하다며 영어로 진행된 인터뷰였지만, 50년 전 기억으로 되돌아가자, 느껴지는 공감대는 우리가 같은 문화권에 속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편집자 주>
- 1926년에 빅토리아주 서부 호쉠(Horsham)에서 태어나셨더군요. 가족과 신앙배경은? “아버지는 호삼장로교회 장로로, 회계와 JP로 일했던 평범한 장로교인 가정이었습니다. 1941년 멜본으로 이사를 간 뒤에는 캔터베리장로교회를 다녔습니다. 저희는 사 형제였는데 다 은행, 회계일 등을 했지요. 저와 막내 조지는 목사가 되었고, 조지는 자유주의적 신학을 따르긴 해도 지금까지 찬양시집을 세 권이나 냈습니다.” -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엘리트학교였던 멜본 스카치칼리지를 졸업하셨지요? 그런데 16세부터 6년간 멜본 부두관리공사에서 일하며 공부했다고 나오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집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자 지금은 RMIT가 된 멜본기술대학에서 토목기사과정을 공부하며 현장견습생으로 일하다가 취직하게 된 것입니다. 49년부터는 멜본수도공사에서 설계기사로 일했지요.” - 멜본수도공사 때 야간으로 멜본대를 다녔고, 54년부터 오몬드 칼리지(당시 장로교신학교)를 가셨지요. 진보적인 신학노선을 걷던 학교라고 알려졌는데 어떤 분위기였습니까? “멜본대에서는 철학과 영문학 특히 정치학을 공부했지요. 그러나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오몬드칼리지도 제가 감수할 만한 수준의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치던 학교였습니다. 특히 성경연구에서는 신약의 데이비스 교수, 구약의 헥터 교수가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맨슨과 도드의 책도 좋아했습니다.” - 1956년 한국선교를 자원하셨지요. 전쟁직후 한국의 열악한 상황을 봐서는 특별한 결단같은데, 그냥 목회를 하실 생각은 없으셨나요? “사실 전 처음부터 그냥 한국 선교사가 될 준비를 했습니다. 아내가 된 리타가 이미 한국 선교사로 나가있어서 저도 당연히 한국선교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PFA 집회를 통해 한국선교사들의 보고를 자주 접하면서 자라왔고, 그즈음 한국 선교 지원자도 많았고, 기존 한국선 교사들과도 관계를 많이한 편이었습니다.” - 리타(Lita) 사모님의 영향이 컸던 모양이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아내(한국이름 문의덕)는 빅토리아주 벤디고 장로교회 출신으로 멜본대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뒤 4년 정도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그후 로랜드여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교회에서 여성전도사(Deaconess)로 일하기도 했고, 저희 결혼도 거기서 했지요. 결혼하기 전까지 1955부터 2년간 마산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되어, 창신학교와 마산지역 농촌사역 등을 했지요. 우린 편지로 연애를 했는데, 한국선교 이야기를 항상 해주었어요.”
- 1957년 10월 파송을 받으셨는데 후원교회가 따로 있으셨나요? “목사안수를 받고 멜본 노스 박스힐의 쿠낭하이트 장로교회에 잠시 목회를 하다가, 특별한 훈련은 없이 바로 멜본의 캔터베리장로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드리고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때 설교를 조지 앤더슨 선교사(전 한국선교사로 귀국 후 오랫동안 빅토리아주장로교 선교부 총무를 지냈다)가 해주었습니다. 따로 후원교회는 없었고, 교단지원 외에는 개인적으로 교제하며 연락하던 교인들이 좀 있었지요.”
- 1957년 12월 한국에 도착하셨는데, 당시 호주선교부는 한국어 습득을 매우 강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목사님도 한글공부를 많이 하셨나요? 당시 호주선교부의 한국 선교 상황은 어떻게 비쳐지셨습니까? “호주선교부는 먼저 2년간 한국어 습득에 전념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선교사 부족으로 좀 더 일찍 현장에 투입되기도 했지만요. 저도 일 년간 감리교 선교사가 서울에서 운영하는 언어학교를 다니다가, 연세대 부산캠퍼스가 생기면서 첫 학생으로 자리를 옮겼고, 네 번째 학기는 인천에서 연세대 학생들과 같이 기숙하면서 서울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마산에서 만난 친구들 덕분이었습니다.
선교사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차, 월급이 잘 지급되어 문제는 없었지만 당시 선교상황은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콜빈 선교사가 귀국한 뒤 헤즐딘 선교사가 일제 때 호주 선교부 재산을 복구하는 문제로 고생을 했지요. 당시에는 무단점유자들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선교부는 무상임대를 허락해주었지만 이들이 저희에게 따로 철수 대가를 요구해서 골칫거리였습니다. 당시 한국선교부는 딕 케년 선교사가 가장 선임이었고 정기모임도 있었지만, 거의 모든 주요결정은 호주본부에서 직접 내렸습니다. 선교사 부인들은 따로 임무가 주어지진 않았지만, 아내는 자발적으로 선교부 회계를 하다가 아이들이 오고난 뒤에는 홈스쿨링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요.” - 1959년부터 통합측과 합동측 장로교의 분열사태가 일어납니다. 당시 선교사화해위원회에 배속되어 중재를 하신 것으로 나오는데요.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문제는 경기노회의 임원선거에서부터 출발했지요. 여러 가지 부정선거시비가 있었고, 미국의 보수선교단체인 NAE의 지원을 받은 그룹이 주도권을 잃어가면서 선거를 거부함으로서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전라도 광주, 순천, 하동을 돌면서 중재를 시도했지만 이미 모두가 마음을 먹은 상태라 별 소용이 없었지요. 제가 보기에는 특별한 신학입장의 차이보다는, 일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서로 너무 경직되어 더 이상 서로를 맞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더 큰 원인 같았습니다. 당시 린튼 선교사의 주도로 선교사들이 화해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을 돌았고 날씨 문제로 제주도만 가지 못했는데, 결과적으로 모든 노회가 분열로 간 반면 제주도만 분열이 되지 않았더군요. 어쨌든 덕분에 저는 한국어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한 채 사역에 뛰어들었고, 다시는 한국어를 마스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 60년에는 마산노회에서 부산노회로 이적했고, 현재 부산장로회신학대학의 전신인 부산신학교와 고등성경학교(같은 학교에서 다른 과정으로 제공)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셨지요? “교수를 보내달라는 한국 교단 요청에 호주장로교선교본부에서 내린 결정 때문이었지요. 당시에는 너무 환경이 열악해서 따로 교재도 없었고, 저 역시 강의를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주제별보다는 성경본문의 의미를 풀어가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 부임하자마자 4.19혁명(1960년)이 일어났지요? 특히 마산 지방은 고문으로 죽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 발견으로 잠시 수그러진 학생 데모가 다시 촉발된 곳이었는데.. “3월 1일인가 대통령선거에 참여하고 온 한국인 선교부 서기는 당시 부정 선거 상황이 부끄러웠는지 선거에 대해 침묵을 하더군요. 그날 저녁 제가 성경공부반을 인도하고 있는데, 같이 참여하던 군목도 밖의 분위기가 심란해서 그런지 집에 가지 않더군요. 그런데 200야드 전방에서 총소리가 났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지요. 마산 전역이 계속해서 데모로 가득했습니다.” - 목사님과 주현신 목사(전 멜본한인교회 담임)의 아버지 주경덕 목사와의 인연이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버님을 학교에 취직도 시켜주고 신학공부도 하게한 은인을 50년 만에 멜본에서 다시 만났다고 감격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안하게도 저는 따로 그분을 기억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그런 분들이 학교에 많았거든요. 그리고 당시에는 학교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 부산신학교에 문제가 따로 있었나요? 실제로 호주장로교 선교부로부터 65년 모든 재산을 기부받아 든든한 입장이었지만, 독자적인 안수과정은 71년에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건 총회가 안수과정은 (서울광나루)장로회신학교로 통일시키려고 했고, 그밖의 지방신학교는 중앙에 학생을 보내는 일종의 준비학교처럼 운영이 됐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학교 문제는 별로 자랑스러운 기억이 못됩니다. 당시 한국교회 내부 정치상황에 대해 지혜롭게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2년간 부산신학교장 임기는 1964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학교가 속한 부산노회는 평안도 출신과 남한 출신 간의 힘겨루기가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원래 기독교가 강했던 평안도에서 전쟁 이후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생긴 상황이었지요. 부 교장으로 임명된 분이 남쪽 출신이었는데 평안도출신들은 교수를 부산 출신만 시킨다고 불만이 많았지요. 반대파들이 학생수업거부까지 선동하고... 그래서 저는 교장직을 내려놓고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출신을 새 교장으로 임명했는데도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함경도 출신으로 평안도 쪽과 또 사이가 안 좋았더군요.” - 이 문제를 풀때 다른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나요? “실제로 저 혼자 씨름했어야 했습니다. 호주선교사들은 여러 지방에 흩어져있었고, 자기 영역이 따로 있어서 서로 별로 도움을 줄 형편이 못 되었지요. 그렇지만 제가 교장으로 있는 동안 멜본 스카츠 교회(담임 고든 포웰 목사)의 도움으로 당시 시급했던 강의실을 증축할 수 있었습니다.
- 그동안에도 시청각교제개발과 나환자촌에서 사역을 하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당시 이 장로란 분의 부탁으로 개인적으로 지역기독교연합단체를 도와 시청각교재를 같이 만들었지만 특별한 사역은 아니었습니다. 고아원을 돕기도 했는데, 그것은 호주장로교 사역은 아니었고, 미국 선교사 일을 제가 개인적으로 돕는 수준이었습니다. 실제로 저에게 가장 큰 보람은 나환자 사역이었지요. 호주선교사 노블 맥켄지가 부산 동남쪽 오륙도에 세운 상애원을 비롯하여 다대포의 성화원, 상애원이 개척한 김해군의 두 개 교회 등을 계속해서 도왔습니다. 특히 상애원 교회는 설교와 성찬식을 인도하러 자주 갔었습니다. 한 번은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성찬식을 하기가 쉽지 않아서, 성찬대를 장로들 인도로 8개 테이블로 나누어 배치하고, 저 역시 강단위 성찬대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아래로 내려와서 인도를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감격하더군요. 특히 손이 뭉개져서 쓸 수 없는 이들이 많아 원형으로 둘러싼 신자들에게 잔을 직접 장로님들이 나누면서 말 그대로 ‘성찬을 나누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요. 특히 불운했던 이들의 신앙은 정말 도전적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일반사회의 관심도 적었지만, 자신들이 가진 작은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했고, 특히 추수감사절마다 헌물하는 모습은 모두에게 모범이 될 만했습니다. 저희는 이들을 친구로 대했지만, 특별히 그랬기보다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지요. 항상 말할 때는 존대하고 아플 때는 심방을 갔는데, 당시 많은 이들이 전염 우려 때문에 꺼리던 모습이어서 그런지, 그런 저희에게 매우 고마워했습니다.” - 가족들은 불편해 하지 않으셨나요? “도리어 저희 아이들은 상애원 식구들과 피크닉 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사실 아이들은 어디를 가나 금발이나 흰색피부를 호기심으로 만져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불평이 많았는데, 상애원 사람들은 서로를 만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여서 도리어 그것이 아이들에겐 더 편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상애원생 모두가 저희 아이들을 매우 예뻐해서 피크닉을 가면 너무 먹을 것을 많이 줘서 탈이였지요.”
- 고아들을 위한 기술학교로 유명한 양지동산 설립에도 관여하셨나요? 신익균 장로는 서 목사님의 권유로 울산으로 가서 베리 로우(노승배) 선교사를 도와 장애인기술학교인 양지동산을 세우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던데요. 그밖에 울산지역에서 산업선교를 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가 따로 산업선교현장에 뛰어든 일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신익균 장로 등을 도왔고, 신 장로가 이후 울산의 베리 선교사의 언어교사가 되면서 그 뒤에도 그의 일을 돕게 되었지요. 결국 이 사역은 남자기술학교가 되었고, 신 장로가 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주선교부는 한국전부터 계속해서 일반 구호사업을 계속해 왔습니다. 매년마다 호주의 교회들이 구호물자를 보내주면 저희가 내용에 따라 일부는 일신병원에 일부는 고아원으로, 일부는 가난한 지역 교회로 보냈습니다. 리타가 그 일을 주로 했지요.”
- 그렇다면 한국에 계시는 동안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의 방향은 매우 평이하게, 새로운 사역을 공식적으로 개척하거나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자체가 점점 줄어들었지요. 일부에서는 아예 호주선교부가 한국에서 철수해서, 저희보다 훨씬 돈이나 열심히 컸던 미국북장로교 선교회가 저희 지역을 맡아 더 적극적인 투자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 1968년 호주로 돌아오신 후 7년간 NSW주 지역선교담당자로 일하셨지요. 그 후에도 한국선교에 계속 관계를 가지셨나요? “처음에는 별로 그러지는 못했는데, 1973년 멜본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할 때 관여하면서, 다시 연관을 맺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한인들만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임시적으로 하자는 말에 속아서(?) 버우드교회를 빌려 시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후 한인교회의 발전을 보며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남자들이야 직장에서 시간을 주로 보내니까 상관없지만, 집에 주로 있는 여자들은 긴장 해소 방법이 필요했고 그 점에서 한인교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배는 제가 다른 사역 마친 뒤에 가서 설교를 했고, 리타가 주일학교에서 가르쳤지요. 후에 저도 동 링우드 연합교회에 부임하면서 직접관련은 중단됐지만, 1997년 한빛교회 설립을 도운 일도 있었습니다.” -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을 보면서 많이 뿌듯하셨을 텐데,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의 공과를 따진다면? “저는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로 자라난 것이 가장 기쁩니다. 저는 교회연합운동을 찬성했지만, 제가 속한 연합교단이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것을 보면서, 이제는 한국교회로부터 배워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보람은 신익균 장로 같은 분을 도운 것입니다. 58년쯤 창신학교 이사회에서 우리에게 고아 한 사람을 대학에 보낼 수 있도록 후원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신 장로였지요. 그러나 저희는 그럴 돈이 없었습니다. 그때 선교부에 미국에서 한 부부가 한 주 정도 묵고 있었는데, 미국의 호텔 비용만큼을 방값으로 내고 갔지요. 남편은 나중에 ‘컴패션 compassion’ 을 세운 분이었는데, 이분들의 방값으로 신 장로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산대학을 거쳐 한양대에서 공부하면서, 후에는 테스 리치와 가디너 장로교회 장로였던 글랜 스미스가 후원을 했습니다. 그는 졸업 후 언어교사로 베리를 돕다가, 베리와 함께 장애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직장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이들을 위해 먼저 기술학교를 세웠는데, 화장실과 잠자리 시설문제로 남녀 공용이 어려워 결국 남자학교로 바꾸었지요. 이들은 기본적으로 시계, 라디오, 텔레비전 수선과 보석가공을 배웠습니다. 한국에서는 최초의 장애인기술학교였지요. 이들이 기술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면서 동시에 강한 신앙인이 되가는 모습에 정말 기뻤습니다.”
에필로그 한국어 공부가 어려웠는가란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불가능할 뿐이지요”라고 답하는 서두화 목사. 처음 한국어를 배우면서 마산 주변의 한 작은 교회에서 축도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은혜’대신 ‘은행’이라고 발음했다는 고백. 아마도 그때가 예수님의 은행과 공식적으로 거래한 마지막이었지만, 실은 뒤에서 매번 그분의 은혜를 인출해서 써왔다며 씩 웃는 모습이 소탈하다.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2주에 한 번씩 주변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매주 주중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서 목사는 여전히 복음을 전하기 즐겨하는 목자였다. 이들이 한국교회에 뿌린 씨앗이 다른 선교부에 비해 화려하지 못했을 지라도, 이후 호주 최초의 한인교회 사역까지 이어지면서, 어쩌면 가장 오랫동안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와 한인이민교회를 이어준 복음전도자였던 서두화 목사. 지금도 멜본에 가면 서로 그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옛 친구들의 전화에 정신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의 업적보다 아쉬움을 더 진솔하게 나누는 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성경적 원리를 확인한다.〠 글/김석원|크리스찬리뷰 신학편집부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