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호주 복음주의의 역사 심포지움
호주 기독교의 지난 2백 년을 돌아 본다
 
스튜어트 피긴,번역:김석원
지난 17일 크리스찬리뷰와 예수마을이 공동으로 ‘호주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적 유산과 한인교회에 반응’이란 주제로 시드니제일교회에서 특별 심포지움이 열렸다.

주강사로는 ‘호주복음주의의 역사’저자이자 맥콰리대 호주기독교사상과 경험연구소 소장인 스튜어트 피긴 교수, 한인교회의 반응에 관한 주제강사로는 이기훈 목사(시드니온누리교회), 원광연 목사(시드니영락교회 EM), 주경식 교수(SCD 한국신학부)가 나와 발표했다. 

기대보다 신학생과 2세들의 참여가 부진했던 면은 있지만, 한인교계의 목회자,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의미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이번 세미나는 ‘호주복음주의의 역사’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 이미 피긴 교수의 ‘호주복음주의 역사’ 발췌연재가 크리스찬리뷰를 통해 발표됐고, 시드니새순교회 선교팀 지원으로 단행본 발행을 준비 중이다. 또한 이번 포럼을 시작으로 계속적으로 다양한 교회와 기관들의 관련 포럼, 연구회, 호주순례단기선교프로그램 구성 등을 지원하여 교계 전체에 담론 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호주복음주의 유산의 이해를 통해, 한ㆍ호 교류와 영적지평의 확대, 2세들에게 남길 영적 이민교회의 유산을 보다 구체적이고 건강하게 만들어보기 원한다.
이번 호부터 포럼 내용을 요약하여 주강사인 스튜어트 피긴 교수와 주경식 교수의 발표내용을 지상중계한다.
 
앞으로 2백 년간 한인교회는 호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오늘 밤 나는 지난 2백 년간 호주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뽑은 열 가지 교훈을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다. 이를 통해 기독교가 호주 전체를 발전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한인교회가 호주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기 원한다.
 

 호주 복음주의의 역사 심포지움 주강사 ‘스튜어트 피긴 교수 ⓒ크리스찬리뷰

 
▲  주제강사 이기훈 목사 ⓒ크리스찬리뷰

▲  주제강사 원광연 목사 ⓒ크리스찬리뷰

 
    주제강사 주경식 목사 ⓒ크리스찬리뷰

▲   사회를 맡은 장경순 목사 (예수마을 대표) ⓒ크리스찬리뷰
 
1.‘위대한 남쪽의 땅’ 호주는 오랫동안 예언적인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호주가 기독교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은 1788년 호주 정착뿐 아니라 유럽인들이 호주의 존재를 알기 전부터 예언되어 왔다.

5백 년전 일어난 유럽의 종교개혁을 이끈 칼빈은 주님 재림 전에 복음이 세상 끝까지 증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세상 끝이란 호주가 자리한 유럽 반대편을 의미했다.
당시 호주는 4만 5천 년 동안 아보리진들이 살아왔던 땅이었지만, 칼빈의 시대에는 아직 유럽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호주에까지 복음이 전달됐다는 점에서는 칼빈의 예언이 맞았던 것이다.

그 후인 1606년 오순절 주일에 패드로 패르난데즈 데 퀴로라는 포루투발 항해사 자신이 발견한 ‘남쪽땅에서 남극까지의 전역’을 ‘오스리알리아 델 에스피리투 산토’로 명명했다.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퀴로는 테라 오스트랄리스의 사람들을 교회에 인도하는 사명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었다.

그는 항해을 시작하면서 교황 클레멘즈 8세의 축복과 십자가상을 선물로 받았다. 그의 배 기수는 지구본을 딪고 있는 사도 베드로상으로 꾸며져 있었고, 이를 통해 온 세상에 교회를 세우려는 뜻을 드러냈다. 퀴로는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뉴 헤브리디스 (지금의 바누아트)에 상륙했다. 자신이 사람들이 상상해오던 ‘위대한 남쪽땅’을 발견했다며 감격하며 이곳을 ‘오스리알리아 델 에스피리투 델 산토’ ‘성령의 남쪽땅’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724년, 지금으로부터 약 3백 년전, 기독교가 낳은 최고의 부흥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는 호주의 역할을 예언했다. (그는 호주를 ‘테라 오스트랄리스’ 혹은 ‘홀란디아 노바’ 뉴 홀랜드라고 불렀는데, 이 두 곳이 다른 곳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이사야 42장 4절 ‘섬들의 그의 법을 앙망하여’라는 말씀을 읽다가 이 예언을 했다. 당시 호주는 가장 큰 섬이자 대륙이었다. 그는 테라 오스탈리스와 홀랜디아 노바가 복음을 받아들여 세계 복음화에 공헌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2. 호주는 유형지로뿐 아니라 위대한 선교비전 속에 개척되었다
 
학교에서는 영국이 1776-83년 미국독립전쟁으로 미국 식민지를 잃고, 보낼 곳이 없어진 죄수로 감옥이 가득 차자 대안을 찾기 시작했고, 1770년 호주 동부해안을 거쳐 보타니만(시드니)에 닿은 쿡 선장은 이곳을 새로운 유형지로 삼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호주를 보고 다른 생각을 가진 영국인들도 있었다.

존 웨슬리의 대각성운동 후 사회적으로 새로운 역동적 요소로 자리잡은 복음주의자들은 이 식민지를 태평양 전체의 복음화기지로 사용하기 원했다. 여기엔 두가지 내용이 더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복음을 사회를 개혁할 힘으로 보았고, 죄수들도 이곳에서의 복음전파를 통해 금방 변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원주민들 역시 금방 복음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들은 당시 영국성공회 안에서 나중에 노예제 폐지를 주동한 윌리엄 윌버포스가 이끄는 복음주의자 그룹이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운동 이전부터 윌버포스는 기독교로 회심한 직후부터 호주의 선교적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최초 호주 파송선에 복음주의계 리차드 존슨 목사를 동승시켰다.

1788년 2월 3일 최초 파송선이 시드니에 도착한지 두 번째 주일부터, 존슨은 시드니만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블라이 스트리트와 헌터 스트리트 구석에 그 자리를 기념하는 표식이 서 있다. 1792년 이 자리에서 호주 최초의 교회가 섰다. 리차드 존슨이 호주에서 선포한 첫 번째 설교는 시편 116편 12-13절을 본문으로 한 것이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호주의 기독교 도입은 남반구에 복음을 심는 기회로 사용하기 원했던 영국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이뤄졌고, 이를 통해 전세계 복음전파의 서막을 열기 원했던 것이다. 이들의 원대한 비전 내용에는 죄수 계층의 회복ㆍ원주민들의 회심ㆍ호주를 근거로 남태평양 도서선교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원대한 비전이었고, 한국교회도 역시 이런 비전을 가진 교회로 알고 있다. 이점에서 월버포스의 유산의 계승하게 될 교회로 한국교회에 대한 기대가 크다.
 
3. 유형지는 복음을 통한 사회 개선이라는 기적을 이뤄냈다
 
이송된 유형수들은 곧 변화되었다. 일반 역사가들은 이점을 잘 놓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기독교가 호주사회형성에 ‘훌륭하고도 주도적인’ 공헌을 했음을 증명한다. 그는 ‘유형 식민지의 개선은 사회적 기적이었고, 복음주의적 복음의 열매’였고, 보편교육제도, 노동조합운동, 호주연방의 구성 역시 근본적으로 모두 복음주의 기독교의 성과라고 지적했다.

‘유형수의 흔적이 지배적이었던’ 사회를, 단지 복음선포를 통해서뿐 아니라 기술학교, 은행, 도서관, 인성개발협회, 구제협회 같은 기독교인들이 세운 많은 기관을 통해 변화시켰다. 스코트랜드 출신의 한 역사가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컸던 다른 부분들로. 학교, 신문(선량한 언론), 독점기업과의 싸움, 시민의 권리와 의회제도의 확립를 포함시킨다.
 
4. 19세기 호주는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화’된 나라였다
 
이점은 초기 호주 정부 정책이 현장에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NSW주는 유형지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교화시킬 제도를 세워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런 일에 종교를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교회를 잘 유지하기엔 인구는 너무 흩어져있었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죄수들이 주류였다.

그러나 당시 총독 리처드 버크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지금도 NSW주 도서관 앞에 동상으로 남은 이 총독은 매일 기도모임으로 하루를 시작했던 사람이었다. 부인 엘리자베스도 헌신적이고 종교적인 박애가였고, 딸 패니는 복음주의자 출신의 영국 수상이었던 스팬서 퍼시벌과 결혼했다.

1836년 버크 총독은 교회령을 발표했다. 이 법에 따르면, 정부는 성공회, 카톨릭, 장로교 그리고 1839년부터는 웨슬리파 감리교회에 재정지원을 해서,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 월급을 줄 수 있도록 했다. 교회령의 서론을 보면, 이 법령은 ‘기독교의 발전’과 ‘국가에는 좋은 국민을, 사회에는 좋은 사람’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법률은 국가건설을 위해 교회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법은, ‘19세기 호주에 교회관계법으로는 가장 영향력이 큰 법률’로 평가된다. 이를 통해 교회는 몇 년 사이에 목사와 교회 성도수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교회도 정부지원을 최대한 활용했다. 지금도 NSW주 시골 마을을 가보면 확인되듯이, 마을마다 성공회, 카톨릭, 장로교, 감리교 교회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비용으로 종종 같은 길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세워졌다. 어느 교단이든 새로운 모양으로 교회를 새로 지으면, 다른 교단도 바로 뒤를 따랐다.

안소니 트롤립이라는 영국의 소설가는 1871~2년 호주를 방문해 쓴 글에서 ‘어디를 가든지 2개 이상의 교회가 발견된다... 사람들은 교회 짓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호주인들은 이런 ‘은혜의 도구’를 충분히 공급받아, 주요 도시마다 적어도 네 명의 목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를 통해 호주는 명목상이라도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가치관에 있어서도 매우 기독교적 색깔이 강했다.

호주는 국교 분리원칙을 따른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국가건설을 위해 교회와 국가가 협력하는 일은 흔했다. 최근에는 노동당 정부가 구세군교회에 나우루로 송환될 난민들을 돌봐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교회와 국가 관계가 이슈가 된 것 같다. 이 둘이 너무 가까운 것도 때로는 별로 건강하지 않다. 정치권력에 가까우면 부패의 위협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서도 국가건설을 위해 호주에서처럼 교회와 국가가 협력해 왔다는 근본적인 사실은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5. 호주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사회학자 막스 웨버는 자본주의가 개신교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신교인들은 직종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명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다고 설명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수도자나 신부가 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열심히 일함으로써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고, 이를 투자하여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호주야 말로 자본주의의 발전과 기독교의 역할에 대한 베버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좋은 예가 아닌가 싶다. 1900년까지 호주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살던 나라였다. 한국도 웨버 이론의 또 다른 좋은 예다. 개신교회는 한국의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호주는 원래 영국의 의회가 지배했다. NSW주를 비롯한 주들은 당시 식민성 장관이자 윌리엄 윌버포스의 절친인 제임스 스테판 부자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름을 가졌다)의 발안으로 자치령이 되었다. 호주는 남녀 모두에게 투표권을 준 보통선거제를 도입한 최초의 나라 중 하나다.

호주는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 중의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주의 체계를 가졌다고 평가된다. 호주 민주주의는 기독교 국가에서만 가능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시민의 투표권, 사회적 책임 의식, 기회의 공평성,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정의, 법치, 질서와 재산권 보장, 권력 분권, 다양성안에서의 통일성, 표현과 조직 결사, 예배, 의식 개인 판단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6. 금광붐 때 지방의 도시화와 지역기반을 세웠다
 
1851년 NSW주와 특히 빅토리아주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1851~61년간 호주 인구는 세 배로 늘어났고, 사회 혼란이 호주를 휩쓸었다. 가장 큰 변화는 빅토리아주의 인구와 부가 NSW주를 능가하면서 호주의 상업중심지가 된 것이었다. 이는 캘리포니아의 붐에 이어진 사건이었다. 미국의 금광붐은 멋대로의 탐욕과 폭력의 시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호주의 경우는 달랐다. 이것은 처음부터 갑자기 나타난 금광지역에도 교회가 활동했기 때문이다.

NSW주 총독 챨스 핏츠로이(1846-1854)는 금광지역에 여섯 명의 목사들을 각각 260파운드의 월급을 줘서 보냈다. 빅토리아주 총독은 당시 복음주의적 모라비안파 교도였던 챨스 조셉 라 트로브로 복음주의계 주교였던 성공회의 챨스 패리에게 구호문제와 질서유지에 자문을 받았다. 주교의 부인 프란스 페리는 광부들에게 배푼 의료자선 활동으로 유명하다.

당시 금광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사역했던 이들은 감리교도였다. 이들은 교회와 주일학교를 세우고, 지역 평신도설교자를 활용해서, 따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릴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멜본의 교회건물, 특히 감리교계 건물들도 크게 늘어났다. 광부촌이었다가 주요지역중심이 된 발라렛이나 밴디고 같은 지역도 교회 단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벤디고에서는 20세기 마지막 고딕부흥기양식의 교회가 세워졌다.

NSW주 최초의 장로교목사였던 존 던모어 랭의 모습은 지금도 윈야드 역앞에 동상으로 남아있다. 그는 광산촌 안정을 위해서 기독교가 어떤 중요한 공헌을 했는지 이렇게 증언한다. 1875년 랭은 1834년에 처음 발간된 그의 유명한 책 ‘NSW의 역사와 통계’ 최종판을 냈다.

여기서는 많은 광산촌을 방문한 뒤 ‘예외없이 어느 곳에서나 질서정연하고, 존경받는 교회출석자와 교회당, 아이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금광 지역은 이제 정상적인 식민지산업이 자리잡았고, 광산촌마다 많은 광부들이 가족을 데리고, 정부의 토지판매 때 구입한 땅에 자기 집을 짓고 살고 있다.’
 
7. 호주에서도 진정한 부흥이 있었다
 
사람들은 호주에는 부흥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오해하지만,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다. 한국어판으로 곧 나올 ‘호주 복음주의의 역사’를 보면, 19세기 동안 71번의 부흥사건이 발견된다. 이것은 외국에서 수입된 감동 이상의, 참다운 성령의 부으심이 나타난다. 19세기 호주 내 부흥은 존 왓스포드라는 감리교목사와 분리되어 생각하기 힘들다. 호주 태생 최초의 감리교 목사인 그는 1860년 버크스트리트 감리교회의 한 예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교회 건물을 가득 채운 성도들에게 나는 ‘성령을 위축시키지 말라’라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시간이었다. 성도 모두가 크게 감동을 받았고, 불가항력의 힘이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큰소리로 자비를 구했다. 지나가던 경찰이 놀라 확인차 들어왔지만, 사고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러 앞으로 나왔는지 셀 수도 없었다. 이백 명 이상이었다. 큰 학교 교실이 신앙을 문의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20세기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벽지에도 성령을 부어주셨다. 1969년 8월 ‘참 자유’라는 선교집회가 남호주 애이레반도의 포트 오거스타에서 250킬로 떨어진 두디나에서 열렸다. 강사는 뛰어난 성공회계 복음주의자 제프 핑험이었다. 개회부터 많은 이들이 몰려 주최측을 놀라게 했다. 결국 더 큰 장소로 옮겨야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혹은 창문 너머로 설교를 들어야 했다.

설교는 죄와 사탄에 매인 인간의 상태와 어둠과 육신, 세상 의 영향력,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참다운 자유함에 관한 성경내용이었다. ‘십자가가 치워주신 자리에 성령이 채우신다’라고 그는 선포했다. 집회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기독교와 무관심했던 이들까지 참석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능력으로 드러나신 전형적인 부흥의 현장이었다. 지역 전체에 하나님이 같이 하심이 느껴졌다. 아내만 보내고 자신은 집회에 참석하지 않었던 한 농부는, 밭을 갈다가, 큰 확신이 느껴져 바닥에 내려앉아 주님께 자신을 드렸다고 한다. 또 다른 불신자였던 농부는 모임에 참여하길 꺼려했는데, 뒤늦게 갔다가 자리가 없어서 강단 바로 앞에 앉았어야 했다.

후에 그에 따르면 “선포자의 확신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나는 그가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가 그럴 수 있다면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모임 중에 하나님의 임재는 그를 흔들었고, 들은 진리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회심하고 집회를 통해 치유가 일어났다. 경의 경험이 모든 집회마다 경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마디 말도 못한 채 30분간 경이로운 눈으로 앉아있었다.

지금 호주교회를 보면 눈에 띄는 부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참다운 부흥은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 (오소독스), 바른 감정적 반응 (오소카디아), 바른 실천 (오소프락시스)과 같이 나오는 것이다. 시대나 교회전통에 따라 ‘집단적 성령부음의 경험’이나 ‘방언’같은 독특한 부흥의 표현 방법이 있었지만, 이것이 지금에도 꼭 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부흥의 모습은 호주교회 속에서 여전히 발견되며, 동시에 한국교회가 이를 위해 자신의 부흥 경험을 호주교회와 더 적극적으로 나누어주길 기대한다.
 
8. 호주 자본주의의 개선을 도왔다
 
19세기의 마지막 이십 년간, 호주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통해, 이후 노동당을 통한 참여로 호주자본주의의 문제를 순화시켜왔다. 양쪽 모두 기독교 가치관이 바탕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예로 노동조합 조직과 활동의 선구자로 광부, 양털깎기, 노동자조합(AWU)을 시작한 스팬서가 있다. AWU은 지금까지 호주 노동조합으로서는 가장 오래되고 큰 조직으로 남아있다.

멜본에 있는 본부는 스펜서 하우스로 알려져 있다. 스펜서는 장로교 장로이자 감리교 설교자였다. 그는 노동자의 권리유린을 보면 예수님이 보였을 반응을 자신이 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l892년 이렇게 썼다. ‘새 노동운동은 가장 위대한 사회개혁가였던 나사렛 그분의 가르침에서 나왔고. 그 분을 당연히 따라야 한다.'

1890년 부두파업에서 노동조합이 극적으로 패배한 뒤, 노동자들은 정치계로 눈을 돌려 1891년 NSW주 노동당을 만들었다. 1891년 새로운 노동당은 주선거에서 35석을 얻었다. 당시 뽑힌 의원 중에는 이후 NSW주 최초의 노동당계 주수상이 된 맥고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성공회 평신도 설교자이자 복음주의의 아성이었던 레드펀의 세인트 폴 교회의 주일학교 부장이었다. 의원 존 패건도 감리교 평신도설교자이자 캐링톤 교회의 주일학교 부장이었다. 패건과 함께 나란히 당선된 알프래드 애든도 감리교 평신도설교자였다. 그는 맥고웬 정부의 수상으로도 일했다. 또다른 전 광구출신의 조셉 쿡은 감리교 목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던 금주운동가였다. 그는 서부시드니의 하틀리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1913년에는 연방수상이 되었다.

호주인들은 남자들의 동지애를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동지에는 하나님 아버지 아래 하나라는 신앙적 기초 위에서만 강조될 수 있는 이야기인 면도 있다.
 
9. 호주의 가정문화를 강화시켰다
 
호주 역사를 보면 세대를 걸쳐 그리스도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가족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거룩한 가문들’이라고 불렸고, 호주사회에 큰 공헌을 했다.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호주 기독교 가문은 남호주의 프래이포드가다. 1844년 ‘목사’ 토마스 플레이포드가 남호주에 와서 침례교회를 이끌었다. 1795년에 태어나 워털루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살상을 싫어해서 전장에서 일부러 사람을 피해 총을 쐈다고 한다.

1837년에 그의 아들 ‘선량한 톰’이 태어났다. 그는 과수원 농장주, 정치가, 주수상, 그리고 남호주 최초의 연방상원의원이 되었다. 1861년에 태어난 그의 아들 톰도 과수원을 했다. 그의 아들 중 1896년에 태어난 토마스 플레이포드경도 영연방에서 가장 오랫동안 주수상을 했다.

1945년에 태어난 그의 아들 토마스도 과수원을 했고 침례교목사였고, 1969년에 태어난 그의 아들 토마스도 목사였다. 토마스 플레이포드가는 6대에 걸친 기독교 가문이었고, 세대를 통털어 많은 공통점있었다.

육체적인 건강, 정직성, 독립적인 사고, 명예 혹은 사회적 인기에 무관심, 남의 돈을 사용하는 데 책임감, 지출과 소비의 조화, 허례허식 배제, 근면과 집중도 높은 업무, 온순한 성격, 공공업무를 가장 이상적인 일로 이해, 도박과 음주 배척 등으로 표현되는 강한 윤리성 등이 그것이다.

또 다른 위대한 기독교 가문으로는 페어팩스 가정이 있다. 존 페어팩스는 시드니모닝헤럴드의 첫 소유주중의 하나였다. 그의 자손 빈센트 페어팩스는 호주의 대표적인 자선가 중 하나가 되었다.

호주인들의 삶에 미친 종교적 영향력에 대한 연구를 보면, 교회 출석과 건강한 가정생활에 깊은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매주 교회를 출석하던 이들은 열심히 가정에 충실하고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부류였다. 이들은 아이들을 성실히 키우고, 이웃과 공공선을 위해 기꺼이 같이 참여하는 그룹이었다.
 
10. 호주의 사회적 자산 개발에 공헌했다
 
종교가 호주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호주에서 가장 관용적이고 덜 인종차별적인 부류며, 유용한 사람으로 살려는 뜻이 강하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더 있고, 다른 이들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사회공헌에 더 열심이고, 삶은 의미와 목적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남의 재산이나 신체를 함부로 하지 않고, 세금포탈이나 거짓말로 아프다고 일을 빼먹거나 기차요금 내지 않는 짓은 덜하는 경향이 있다. 

지역사회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청년활동이나 복지에 다른 그룹에 비해 세 배, 공공활동에 두 배, 그리고 인권운동에 3배 반 이상 참여한다. 2006년 수입기준 호주의 30대 자선단체 중 28개가 기독교계였다. 이들이 없었다면 사회는 더 힘들어졌거나 우리의 세금이 더 늘어나야 했을 것이다.
 
결론
 
호주가 가진 기독교 유산에 대한 앞에 열 가지 내용은 기독교 가치가 실제적으로 호주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1788년 이래로 기독교인들의 참여와 국가의 안정, 경제적 번영, 사회개혁 모두 깊은 연관이 있었다. 호주적 가치와 국가건설의 형성, 보존, 개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하나만 꼽는다면 단연 기독교다.

이것이 지난 2백 년간 기독교가 호주에 미친 영향이기도 하다. 호주의 한인교회는 앞으로 이백 년간 이와 같은 공헌을 이어나갈 기대를 안고 있다. 

글/스튜어트 피긴 교수
번역/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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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9/25 [14:06]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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