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진을 파하라

이인규 | 입력 : 2012/10/19 [07:33]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이인규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cafe.naver.com/anyquestion) 카페 대표시삽
저서 <신사도운동의 정체와 비판>, <다른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최근에 유명한 일부 선교단체들과 많은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유명한 D양육프로그램에서 종이에 죄를 적어 불에 태우면서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그것을 “견고한 진을 파한다”라고 칭한다. 특히 D양육프로그램에서는 당사자가 종이에 죄를 적어 태울 때에 옆에서 참가자들이 “견고한 진을 파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다고 한다. 언제부터 기독교가 죄에 대한 회개를 이러한 무속적인 의식을 통하여 하였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회개(메타노에오)란 ‘방향수정’을 뜻하는 단어이며 불신으로부터 믿음, 죄로부터 돌이키는 내면적인 전향을 의미한다. 죄를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운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으며, 회개는 어떤 의식을 행해야 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이에 적지 않은 죄는 없어지지 않는가? 그 이후에 다시 짓는 죄는 하나도 빠트림이 없이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태우는가?

또 수백만원을 들여 중동지역으로 가서 땅밟기와 대적기도, 선포기도를 하고 오는 방식의 단기선교가 몇몇 선교단체들에 의하여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데, 과연 그 지역의 귀신들이 땅밟기와 대적기도에 놀라서 쫓겨나 이슬람 교인들이 기독교로 저절로 개종이 된다고 믿는지 묻고 싶다. 성경이 말하는 전도와 선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한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땅밟기나 귀신축사를 한 경우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한 단기선교 여행경비 일부를 현지선교사들에게 후원한다면 더 효과적인 선교비로 사용될 수 있다고 현지 전문선교가들은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더욱이 D 양육프로그램의 수양회에서는 쓰러짐과 넘어짐, 진동, 입신, 임파테이션 등과 같은 신사도운동의 현상적 집회를 도입하면서 그것을 용어를 바꾸어서 사용하도록 하거나, 외부에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가르친다는 제보까지 들어오고 있다.

다행히 2012년 예장통합 97차 총회는 극단적 신비주의를 도입 및 참여금지로 공식규정하였으며, 직통계시, 예언, 환상, 넘어짐, 금가루, 금이빨 사건, 입신이라고 구체적으로 일일이 언급하였다.

또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신사도운동의 인사들의 책을 발간하며 지역귀신에 위한 영적도해에 관한 책도 발간하고 있다. 또 너도 나도 마이클 비클의 아이합을 모방하여 24/7예배를 모방하며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실체가 되시는 예수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되심으로(히 9:11) 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구약의 장막을 회복할 필요가 없으며, 다윗은 24시간 7일 동안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견고한 진을 파하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연맹의 자칭 사도로서, 소위 예언자이며 중보자라고 하는 신디 제이콥스의 책 제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성경구절은 고후 10:4을 인용한 것인데, 이 성경구절을 살펴보자.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3-4).

본문을 잘 읽어보면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행동방침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은 우리가 비록 육체를 가졌으나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그 성령의 무기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견고한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미로서,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파하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고후 10:3-4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동번역]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느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비록 우리가 육신을 지니고 살지만 육신의 생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무기는 육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의 요새라도 파괴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견고한 진’은 헬라어 ‘오퀴로마’가 사용되었는데 ‘견고하다’는 별도의 뜻을 가진 단어는 없으며 그 의미는 원래 ‘성, 요새’라는 뜻이다. 즉 ‘성, 요새’라는 단어가 비유로 사용된 것이며, 즉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성령의 무기를 가지면 성과 요새와 같은 것들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비유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육체를 가진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이나 행위로서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만 한다고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본문과 정반대적인 해석이 된다.

예를 들자면 마 17:20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성경구절에서 믿음에 관한 앞부분을 생략하고 “우리가 산을 명령하면 옮길 것이다” 말하는 것과 같지 않는가? 더욱이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은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우면 죄가 없어진다는 무속적인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씀이다.

즉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구절의 내용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인간의 구성요소인 육체와 영을 이원화하는 내용이 아니라, 인간과 성령으로 구별하여 육체가 아닌 성령의 병기를 가지라는 뜻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육체를 갖고 있어서 제한이 있는 사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육체의 의지나 행동과 같은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 내용은 곧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1-17).

에베소서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인간이 만든 어떤 전신갑주를 입고, 인간의 방법을 따르는 어떤 종류의 허리띠나 흉배, 방패, 투구와 검을 쓰면 악한 영과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석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명한 선교단체와 양육프로그램은 성령의 무기에 대해서 종이에 죄를 적는 것이나 혹은 공개적인 죄 자백을 하는 것으로 왜곡시켜서 그것을 불태우거나 구호를 외침으로서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곧 육체적인 방법이 될 것이 분명하며, 그러한 선교단체의 양육프로그램을 통한 육체적인 방법으로는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더욱이 D양육프로그램은 많은 교단에서 교류금지로 발표된 가계저주론을 가르친다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들어오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 미치지 못하는 저주가 아직도 남아있는가? 그런 저주가 어느 인위적인 프로그램의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로 없어진다는 주장은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D양육프로그램을 비롯하여 G양육프로그램, 그 외에 더욱 많아진 유사 양육프로그램들은 비신학적이며 비성경적인 내용들을 가르치면서, 결국 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점조직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혹간 사람들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라는 본문을 인용하며 교리와 신학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말씀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런 문자적인 해석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학교도 가지 말아야 하며 공부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물론 비성경적인 이단교리와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이 되겠지만, 성경적인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체계적인 도움을 준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움으로서 죄가 없어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정통신학 자체는 구원이 아니지만, 성경을 요약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어느 신학교수는 정통신학은 구원을 가르치는 손가락이라고 하였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본문에서 파하는 모든 이론이라는 것은 학교의 공부를 포함한 모든 이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을 뜻하며, 이러한 교만을 파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어떤 권세를 파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제적인 권능이 암시되어 있다. “사로 잡아”(아이크말로티존테스)라는 단어는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명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것은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과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며,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지 말고, 죄를 종이에 적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는 이상한 의식을 하지 말자. 넘어지고 뒹구는 유치한 현상적인 집회를 그만 중지하고,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가르치며, 일 년에 몇 번씩 열고 있는 부흥성회를 좀 줄이고 성도들에게 건전하고 올바른 정통신학을 가르치는 시간을 만들자. 오늘날 이단들이 성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정통신학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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