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씨앗을 심은 호주 선교사들

울산 산업선교에 헌신한 노승배 선교사 (Rev. Barry M. Rowe)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1/28 [09:59]
노승배 선교사(Rev. Barry Maxwell Rowe)는 전형적인 호주연합교회 선교사다. 그의 선교는 처음부터 산업현장의 모순과 문제와 싸우는 산업선교에 초점이 있었고, 교회와의 관계도 줄곧 에큐메니컬 운동 쪽으로 향해져 있었다. 또 호주연합교회 설립 후 한동안 위축된 호주교회의 한국선교의 영향을 받아 호주로 돌아온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가 한국에서 한 마지막 사역도 호주장로교선교부가 호주연합교회 선교부로 바뀌는 전환기를 이끄는 것이었다.

한국사역 후 한국에서 시작한 산업선교의 정신은 호주에서도 농촌을 배경으로 노동의 삶과 영성을 결합시키려는 여러 가지 시도로 표현되었다.

은퇴 후 현재 앨버리(Albury)에 거주하고 있는 베리와 조앤(Barry & Dorothy Joan Rowe) 선교사 내외는 인터뷰 형식보다는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수기문 형식의 서신을 보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읽기 쉽도록 인터뷰 형식으로 바꾸었음을 밝힌다.<편집자주>

- 베리 선교사님의 가족 배경을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코후나(Cohuna)장로교회를 섬기던 장로 가정에서 세 형제 중 첫째로 1935년 12월에 태어났습니다. 코후나와 질롱 칼리지에서 공부했고, 가족이 모두 멜본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교회는 빠지지 않고 다녔지요. 정유공장에서 잠시 일하다가 오몬드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1964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젊은 시절의 노승배 선교사(Rev. Barry Maxwell Rowe)

안수 3년 전 당시 간호사였던 아내 조앤 워런(Joan Warren, 한국명 원혜숙)과 결혼했구요. 신학교 졸업후 친구 우택인 선교사(Rev. Richard F. Wootton)가 1964년 한국 선교를 자원하면서 저도 이듬해 한국 선교를 지원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원혜숙 선교사(Mrs.Dorothy Joan Rowe)

 당시 빅토리아주 장로교 총회는 해외선교를 격려하던 분위기였거든요. 1965년 7월, 한국으로 임명을 받아 아내와 두 딸 쉐른(Sherrin)과 안드레아(Andrea)를 데리고 호주를 떠났습니다. 후일에 서울 세브란스병원과 부산일신병원에서 두 딸을 더 낳았습니다.” 

▲양지직업훈련원을 방문한 노승배, 원혜숙 선교사 부부와 큰딸 쉐린(가운데) ⓒ크리스찬리뷰
 
- 선교사들께서 한국어 교육을 받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은데, 초기 한국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부부가 같이 2년간 공부했습니다. 오전 개인 교습, 오후 강의 참석과 숙제, 저녁에는 복습으로 매우 집중적인 교육 시간이었지요. 주일에는 휴전선 주변의 미군기지에서 설교를 했고, 이 밖에는 영락교회와 유니온교회를 출석했습니다. 그때 당시 경상남도 북동부지역에 막 세워지고 있던 산업단지에서 울산산업선교회 일을 하기 원했고, 선교부도 그렇게 임명했지요.

저희 가족은 3년간 평범한 한국 가옥에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고, 같은 자리에서 낮은 반상에다 밥을 먹어야 했지요. 바닥은 연탄불로, 냉장고는 가솔린 발전기를 돌려 사용해야 했습니다. 먹거리는 지역 시장에서 사다 먹었고, 당시 한국 정부시책에 따라 열심히 잡곡밥을 해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들은 당시 울산산업단지내 미국인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양지재활센타 초기 시절, 신익균 원장과 노승배 선교사 가족(19 68), 양지재활센타 학생들과 함께(1978) (위에서 아래로) ⓒ양지동산

- 이미 선교사님이 한국에 가셨을 때는 한국의 장로교단 분열에 따른 갈등이나 선교부 재산 문제 같은 것은 거의 정리된 상태라, 선교일 자체에 더 관심을 가지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울산에 가신 것입니까? 그곳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당시 선교회에서는 산업화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많았고, 친구 우택인 선교사는 이미 영등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도시산업선교회에 임명된 상태였습니다. 새롭게 산업단지가 세워진 울산은 두 번째 선교 대상지였지요.

저는 울산에서 세 가지 사역을 했습니다. 첫째는 그 지역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을 도와 주변에서 막 시작되고 있던 산업화, 도시화에 맞는 적절한 사역을 개발하는 일이었습니다. 둘째는 새로운 산업단지에 유입된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예배와 설교를 준비하고, 성경공부를 진행했습니다. 셋째는 신익균 장로와 함께 신체장애자들을 위한 자활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 울산에 가실 때 당시 한국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어떤 영적 필요를 보고 그곳으로 가셨나요?

“원래 울산은 주변 농수산물을 거래하는 작은 마을이었다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지요. 당시 한국인들은 대가족으로 살면서 나무, 돌, 산 기타 자연적 현상들에 숭배하는 에니미스틱 종교나 불교를 통해 영적 필요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업단지가 생기면서 인력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농촌을 떠나 온 사람들은 과거의 정서적 지원체계와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울산산업단지에는 많은 외국인도 있었고, 한국인 근로자들은 주로 대학졸업자로, 단지 내 좋은 주거시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서적 외로움은 마찬가지였지요. 또한 단지 개발을 위해 많은 농토들이 수용되면서, 기존 농가들은 길로 쫓겨나 집과 직장이 새로 필요한 실정이었지요. 물론 공장 건설기간에는 이들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이들은 울산으로 들어와 울산 시민이 되었습니다.

제 목표는 "울산의 기독교인들에게 앞으로 20년 후까지 살만한 도시로 울산을 준비할 의무가 있음을 주지시키는 일"이었지만 물론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았지요.”

- 당시 급격한 산업화로 한국사회는 영적 공동 상태에 있었다는 사회학자의 지적이 맞았던 모양이네요.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이셨습니까?

“현장을 둘러보면서 울산지역 산업선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과도 동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왜냐하면 당시 필요했던 것은 단순히 산업현장에서 전도하는 것 이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비슷한 관심을 가진 분들과 연구위원회를 만들어 현장 파악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주요 공장 다섯 곳에 대표를 보내어 조사했고 이것은 제 눈을 열어주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산업선교, 더 나가서 교회의 선교사명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접하는 지역사회 앞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증거자로, 하나님의 정의가 널리 퍼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주로 현장보다는 연구를 하셨나요?

“물론 현장으로 나갔지요. 당시는 차를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제가 지역 목사님들의 픽업을 해줘야 할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저의 비전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지역교회가 삶의 실제와 별 관련이 없다고 느끼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이와 함께 정유공장 안에서 주 3회, 저녁마다 비기독교인들과 성경공부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그룹이 커지면서 울산시내로 자리를 옮겼고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이 중에는 영어성경공부를 요청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또한 토요일 저녁마다 예배·교제·토론 시간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공장별로 인도하도록 했지요. 그러나 작업 일정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공장 쪽에서 인도하지 않을 때는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의도는 공장별로 사람들이 따로 노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어요. 어쨌든 공장을 직접 방문하여 사람들을 만나 신앙상담을 하는 일도 했습니다. 한국문화에서는 직접적인 접촉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니까요.

이밖에도 1971년 문을 연 울산공업대학에서 저는 영문학과를 도울 일이 있었는데, 당시 대학생선교회에서 저를 대표로 추대하는 바람에 청년들과 접촉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들이 졸업 후 울산산업공단에 취업하면서 도시산업선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거리가 되었습니다.” 
 
 
- 한국인 지도자들이나 지역교회와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좋은 편이었지요. 저희 사역에 가장 열정적인 후원자로는 울산제일교회의 이권석 전도사와 홍 장로가 기억납니다. 한 번은 공장의 미국인 관리인 부인으로부터 단지 안의 한국 아이들을 위해 주일학교를 여는 것이 어떻겠는가 제안을 받았습니다. 단지 내 한국인 근로자들이 교사가 되고, 이 전도사와 홍 장로가 이들을 훈련시켰지요.

현대자동차가 공장을 세웠을 때도, 이 전도사는 저와 함께 초교파 예배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포장 상자로 만들어진 간이 쉼터에서 예배를 드렸고, 이후에는 가게에 딸려있는 작은 방으로 옮겨갔습니다. 저는 교회의 당회장으로서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1972년에는 교회신축까지 할 수 있었지요.

이후에도 교회는 교제와 사랑으로 자라났고, 평신도를 세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양정교회라고 불린 이 교회는 1974년 완전한 자립을 하고, 주변에 두 개의 새로운 교회까지 개척하게 됩니다.

이밖에도 이 전도사와 홍 장로는 주택공제조합을 만들고, 공장노동자와 어려운 이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공장건설에 농터를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고 새로운 작업환경에 적응하도록 많이 도와주었지요.

이 두 사람은 기독교, 비기독교인 할 것없이 지역사회 필요를 위해 교회에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길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 직원들이 여가시간에 나서서 가르치는 유치원과 중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청년부도 지역청년들이 널리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개발시켜 나갔구요.

지역교회들과는 처음부터 산업선교 위원회를 통해 협력을 해 왔습니다. 여러 교회들의 일반 프로그램 안에 산업문제가 자연스럽게 토론되고 흡수되어 다루어졌습니다. 이들 중에는 당시 지역사회가 시급하게 느끼고 있던 노동과 생활조건 개선문제에 대한 토론의 장을 만날 수 있었지요.

1972년에 특별히 지역교회들이 일반적인 교회정치를 뒤로 하고 범교단적으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해 울산 도시산업선교회 연례총회는 목회자들과 평신도 위원회가 통합되어 새로운 범교단 위원회로 태어나고 제가 그 담당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협력 관계는 1976년에도 울산지역 부활절 연합예배를 통해서도 확인되었습니다. 대부분 교단이 참여한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을 가지고 일곱 명의 목사들이 짧은 설교를 했지요. 이들이 던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대한 설교는 저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 주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 울산지역의 외국인 자문역들을 위한 사역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울산에는 세계 여러 곳에서 온 경영, 관리급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 호주 출신이었지요. 이들 대다수는 가족들과 함께 특별단지 안에서 따로 살았고, 가사일을 돕는 여러 명의 한국인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운전사, 정원사, 기타 관리인들도 한국인이었구요.

그러나 이들도 고향을 떠난 한국인들처럼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저에게 초교파교회를 이끌고 설교해 줄 것을 부탁했지요. 사람들은 주로 언어와 문화 장벽 문제로 저에게 찾아와 개인적인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호주장로교의 울산 사역하면 양지직업훈련원과 40여 년간 그곳을 지켜온 신익균 장로가 떠오릅니다. 그분을 어떻게 만나고 훈련센타는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원래 신 장로는 서두화 목사 댁에서 정원 일을 해주던 소년으로 기억합니다. 서두화 목사 추천으로 저와 같이 일하게 되었고, 호주선교부로부터 울산선교부의 서기이자 제 개인 비서로 고용되었지요. 저희는 지역에서 소아마비 등으로 신체장애자가 된 사람들을 접촉하고 도울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1969년 양지직업훈련센타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이 양지직업훈련을 방문하고 원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2010.10) ⓒ크리스찬리뷰

▲양지재활훈련원을 함께 세운 신익균 장로 부부와 노승배 목사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 지난날을 회고했다. ⓒ크리스찬리뷰

이 학교를 통해 저희 부부와 신 장로 부부가 모두 나서 젊은이들에게 시계, 라디오, 전자기기 수리기술, 은가공, 진주목걸이 제조기술 등을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그 후 40여 년간 신 장로의 지도력으로 학교는 발전을 이루었고, 한국의 다양한 정부기관의 재정지원과 자격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단순한 기술만이 아니라 자기존중의식, 독립심, 그리고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넣어주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깊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구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취직하거나 자영업을 시작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습니다.”

-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장애자 돕는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서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생각으로 양지직업센타를 시작하셨습니까?

“지역 산업이 커지면서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직장을 구할 수 있었지만, 장애자들의 구직 기회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시당하거나 조소의 대상이 되었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기 쉬운 분위기였지요.

당시 제 개인비서였던 신 장로는 조사를 통해 이런 분들이 울산에도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같이 장애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 미국인과 한국인 공장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라디오와 텔레비젼을 고치는 일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익균 장로와 양지동산을 설립한 노승배 선교사가 양지동산을 찾아와 기술을 익히는 장애인들을 격려하고 있다.(2010년 10월) ⓒ크리스찬리뷰

1969년부터 신 장로는 이 학교의 책임을 맡았고 부부가 같이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치있는 존재임을 느낄 수 있게 만들고 이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1972년 부산으로 옮겼고, 프로그램을 확대해서 다양한 직종 훈련으로 분야를 넓혔지요. 지금은 직업학교로서 특별시설과 정부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승배 목사(오른쪽)와 신익균 장로(가운데)의 젊은 시절 ⓒUCA Archive, Melbourne

- 1977년 호주로 돌아오셨는데 어떻게 귀국하게 되었는지요? 한국에서의 산업선교 참여 영향인지 오셔서도 매우 독특한 사역을 하셨지요?

“1977년경에 호주선교회는 한국사역을 계속 할 재정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결국 저희 가족도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때 저의 마지막 사역은 부산에서 호주연합교회의 탄생을 기념하는 일이었습니다. 한국에 주재하던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은 만장일치로 당시 호주에서 새로 만들어진 연합교회에 가입할 것을 결정했지요.

호주로 돌아온 후 저는 말리에 위치한 선레시아 교구 목사로 청빙을 받았고, 그곳에서 일하며 사역하는 '노동사제'의 삶을 살았습니다.(노동사제란 제2차 세계대전 후 노동자의 삶 속에서 같이 하며 사역을 하기위해 나섰던 프랑스 카톨릭 신부들을 가르킨다: 역주)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창원공원묘원에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고 개관식을 가졌다. 테이프 커팅 후 기념촬영한 노승배 목사(오른쪽 5번째)와 큰 딸 쉐른(오른쪽 첫 번째, 2010. 10.2) ⓒ크리스찬리뷰

후에는 교단일도 일 년간 했고, 방문 설교자로도 일했지요. 1990년부터는 앨버리로 옮겨서 심방, 예배인도 등을 돕다가 1995년 사역에서 은퇴해서 지내고 있습니다.

-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글/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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