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 - 「선교 탐방」
한·호 선교의 뿌리를 찾아
 
크리스찬리뷰
경남성시화운동본부 및 일신기독병원 임원진

▲ 호주의 한국 선교 뿌리를 찾아 탐방길에 오른 경남성시화운동본부와 일신기독병원 임원진들이 멜본스카츠교회를 찾았다. ⓒ Christian Review  

호주의 한국 선교 120년을 기념해서 고국에서 교계 지도자들과 부산 일신기독병원 관계자들의 멜본 방문이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일행들은 한·호 선교의 뿌리를 보고 싶어했다. 먼저 호주에서 한국에 처음으로 파송한 데이비스 선교사의 파송예배를 드렸으며, 한국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호주장로교회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스카츠교회(The Scots’ Church, Melbourne)의 방문으로 선교 탐방은 시작됐다. 멜번 시내 중앙에 위치한 스카츠교회는 현재 현지인들의 예배뿐만 아니라 300여 명에 이르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스카츠교회 본당에 들어서자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Robin Battlerham)가 일행들을 위한 환영연주로 선교 탐방이 시작되었다. 바하의 오르간곡이 각종 무늬로 장식된 창들을 휘돌아 벽을 타고 우리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어쩜, 저렇게 웅장하게 지어졌을까?’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듣는 동안 화려한 교회당 이곳저곳을 살펴보면서 중세 시대의 교회상이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현대의 교회 건물과는 차별화된 탁월한 양식, 그리고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그런데 왠지 은혜롭지만은 않음은 어째서일까?

‘왜 모든 삶이 교회에 집중되었던 시절이 가장 신앙의 암흑기였을까? 모든 훌륭한 음악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으로 지었던 시절이었는데... .’

지금은 박물관처럼 관광객들에게 들려지고 보여야만 하는 호주의 옛 교회들을 보며 마음이 안타까웠다. 다행히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한국을 비롯한 통가와 아시아 교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 스카츠교회에서 윤희구 고신 총회장(우측 2번째)이 기도하고 있다. ⓒ Christian Review

한·호 선교의 밀알 데이비스의 모교회

점심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일행은 두 번째 방문인 St. Mary’s Anglican Church로 향했다. 이번 선교탐방의 핵심인 데이비스 선교사의 모교회다. 한․호 선교 120 주년의 밀알 데이비스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신앙 훈련을 받았던 뜻 깊은 교회다. 특히 이 교회의 3대 담임인 맥카트니 목사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교에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고 한다. 데이비스와 그의 형제와 누이들 또한 그의 신앙 도전에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데이비스의 남동생 타보는 데이비스의 뒤를 이어 인도의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

“데이비스의 누이 사라도 인도 선교사로 가게 되었지요. 그녀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사연이 하나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찬송가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현재 이 교회의 담임인 듀리(M.J. Durie) 목사가 그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찬송가는 바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라는 곡이었지요. 그녀는 이 찬송가에 은혜를 받고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 불러 줄 수 있냐는 우리들의 부탁에 듀리 목사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그래서 그의 독창을 듣는 대신 우리 모두는 한 목소리로 찬양을 드렸다.

 
▲ 듀리 목사에게 기념품을 전달하는 창신대학 강병도 총장 ⓒ Christian Review    
 
이 교회는 성공회 소속으로 호주 장로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을 받은 데이비스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데이비스는 스무 살 때 성공회 소속으로 인도에서 2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했었다. 말라리아에 걸려 귀국한 후 멜본대학을 졸업하고 코필드 그래머 스쿨을 설립하여 교장으로 있던 중, 조선 선교를 호소하는 영국성공회 울프 선교사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게 되어 조선으로 나갈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가 속한 성공회에서 선교비 지원을 받지 못하자, 빅토리아 주의 장로교회로 적을 옮겨 목사 안수를 받고 교인들과 주변 친지들의 도움을 얻어 조선으로 선교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호주 명문대를 졸업하고 교장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한 젊은이가 조선으로 선교의 꿈을 품고 떠났지만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서울에서 5개월 가량 어학공부를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운송 수단이 좋지 않았던 시절 1천5백 리를 걸어서 스무날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천연두와 폐렴에 걸려 하루 만에 죽게 된다.

그의 마지막 죽음을 지켜보던 게일 선교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에 대해 뭔가를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높고 달라서 이 소식이 데이비스의 누나를 통해 호주 교회에 전해지게 되었고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호주장로교회는 조선 선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고 100여 명에 이르는 선교사들이 헌신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데이비스가 조선 선교에 대해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신 것이다. 구원도 헌신도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 듀리 목사(왼쪽)와 정원준 목사(앞줄) ⓒ Christian Review    
 
데이비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코필드 그래머 스쿨’

현 교장인 스티븐 뉴톤 박사의 안내를 받아 우리 일행은 학교 곳곳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이 학교의 8대 교장이라고 한다. 데이비스가 시작했던 당시 상황하고는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의 정신은 학교 곳곳에 남아 있는 듯했다. 특히 학교 예배당에는 데이비스가 히브리서 4장 1절을 바탕으로 기록했다는 학교 이념이 적혀 있었다.

‘May work hard that you content rest'

지금은 학교의 규모가 커져 분교만도 3개가 더 있고 중국에도 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새로 지은 별관에는 컴퓨터실과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카페를 비롯한 거대한 체육관이 있어 학생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건 선교사의 좋은 이념으로 세워진 학교가 지금은 멜본에서 명문학교가 되었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입학의 문턱이 높다는 것이다. 연 2만 불에 달하는 학비는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금액이다. 단지 이 문제는 이 학교뿐만이 아니라 호주 전체 사립학교의 실정이다. 거의 명문학교는 기독교 재단인데 학비가 다 높다. 이 시점에서 기독교 근본 설립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집어봐야 하지 않을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행은 스티븐 교장이 안내하는 학교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물관이라고 해도 그 규모가 작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사진과 진열품들이 우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기록했다는 일기장과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급받았다는 당시 한글과 한문으로 기록된 여권이 그것이었다. 비교적 상태가 잘 보관되었다. 마치 보물섬 지도를 발견한 듯 권순형 발행인은 들 뜬 마음으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특별한 선물이라고 학교 측에서 준 뺏지를 자랑스럽게 가슴에 단 우리 일행들은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우리는 지금부터 코필드 그래머 스쿨의 동창생들입니다!”

일행 중 한 명이 외치자 모두들 싱글벙글 미소를 짓는다.


▲ 데이비스 선교사가 세운 코필드 그래머 스쿨 교정을 걷는 탐방단. ⓒ Christian Review  

헬렌 맥켄지 선교사의 장례식

부산 일신기독병원 관계자들에게는 이번 한·호선교 120 주년 기념대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일신병원의 설립자인 헬렌 맥켄지(한국명 매혜란) 선교사의 96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왔는데 생일잔치가 장례식이 된 것이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일신병원 관계자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10월 9일 금요일 오후 2시, 평소 그녀가 다녔던 딥딘교회에는 멜본 한인교회들과 본교회 성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양성대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존 브라운 목사는 조사를 통해 헬렌 선교사에 대한 감회를 이렇게 고백했다.

“헬렌은 여성운동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문직인 의사와 간호사로 훈련시켜 한국 사회 활동의 길을 여성들에게 열어주었지요. 그녀는 강한 여자였습니다.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부산에 산모들과 신생아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미군과 유엔 담당자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지요. 결국 일신병원을 설립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정말 열정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병원으로 나가 쉴 새 없이 일하는 모습을 제 자신이 여러 번 보았습니다.”

양성대 목사는 설교를 통해 헬렌 선교사와의 마지막 순간을 회상했다.

“얼마 전, 양로원을 찾아가 선교사님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하라고 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해 드리겠다고요. 그때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목사님, 일신병원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어요.’ ”

모두들 눈시울을 붉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을 사랑했던 여인. 뼈 속 깊이 한국을 담아왔던 선교사. 은퇴한 뒤 돌아온 고국 호주였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언제나 어린 시절과 결혼을 포기한 채 젊음을 바쳤던 한국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일신기독병원을 세운 매혜란 원장의 장례식이 양성대 목사의 집례로 딥딘교회당에서 열렸다. ⓒChristian Review    

한·호 선교 120주년은 단지 화려한 행사로만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존경받고 출세할 수 있는 학교의 교장직을 포기한 데이비스, 여의사로서 부와 명성을 포기하고 일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헬렌, 이들에게 있어서 선교는 단지 구호가 아닌 그들의 삶이었고 그들의 전부였다. 무엇이 이들을 이끌었기에 한국에 자신의 생명을 다 바칠 수 있었단 말인가? 성도들의 발걸음이 끊겨 교회가 극장과 식당으로 변해가는 유럽 교회의 뒤를 이어 한국의 교회들도 변해가고 있는 요즘 우리 모두 엄숙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헬렌 선교사를 생각하며 부른 언더우드 집안의 Dorothy Underwood(한국명, 원성희) 여사의 조가 중 ‘독생자를 부산에’라는 대목이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왔도다. 독생자를 부산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게 하시려 화목제로 보내셨도다. 화목제로 삼았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서로 사랑하면, 서로 사랑하면,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리로다!“☺

  
글/정원준 (멜본우물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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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0/30 [15:02]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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