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생각

십자가의 길과 대속죄일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10/30 [16:10]

 “여행은 만남이다.” 길을 걸으며 '오늘의 사람'과 만나고, 유적지를 탐방하며 '어제의 사람'과 만나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내일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9월 한 달간의 성지순례를 마치고 ‘여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이다.

나는 9월 2일 배낭을 메고 출발하여 10월 1일에 돌아왔다. 배낭의 무게는 출발할 때와 동일하였으나, 몸무게는 무려 5Kg이 빠졌다. 운동을 해도 들어가지 않던 배가 어느새 근육질로 변해 있었다. 출발할 때는 Are you Japanese or Korean? 물었는데, 돌아 올 쯤에는 ‘Are you Philipino or Indonesian?’라고 묻는다. 

원래는 '사도 바울의 2차 선교지' 만을 답사할 목적으로 떠났으나, 무박 2일, 1박 3일 등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5개국 30여개 도시를 순례할 기회를 가졌다. 언어 중심으로 읽던 성서를, 현장에서 입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바울의 심정으로 바울의 사역지를 갔었고, 출애굽의 광야에서 '백성들이 왜 그렇게 많은 불평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정교회’교인들의 무리에 합류하여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도 해보았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유태인들이 1년에 한 번 지키는 ‘대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이었다.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

‘십자가의 길’은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 후, 무덤에 묻힌 곳까지 약 1Km 정도 거리를 14처로 나뉘어져 있다.  순례자들은 이 길을 걸으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곤 한다. 이 중 5처 처소는 ‘성분묘교회’ 내에 있고, 나머지는 이 ‘비아도로로사’의 도로변에 있다. 각 처소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어,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한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제5처소가 인상적이었다. 동으로 만든 둥근 판 위에 라틴어로 5이란 숫자가 있고, 그 위에 ‘예루살렘 십자가’가 부조되어 있다.

‘예루살렘 십자가’란 중앙 십자가를 중심으로 4개의 작은 십자가가 상하좌우에 있는 십자가를 말한다. 유태인에게 그 의미를 물어 보니,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평화, 다른 하나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4개국을 뜻한다고 한다. 베들레헴에서 만난 팔레스타인에게 물어 보니 작은 십자가는 자기 민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마치는 14번째 처소에 이르러, “왜 이 길이 무덤에서 끝나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오래 전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영화를 보았을 때, 부활 없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막을 내려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극장 문을 나온 적이 있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내가 믿는 ‘고난의 십자가’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대속죄일 (The Day of Atonement) 

나는 ‘십자가의 길’을 마치고, ‘신예루살렘’ 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유태인들은 ‘대속죄일’에는 금식하며 기도와 묵상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대로는 텅 비어 있었다. 가끔 묵상을 하며 길을 걷는 유태인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학생을 보았다. 옆에 앉아 ‘대속죄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던 중,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회당(Synagogue)이 시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여 분 걸어 ‘예루살렘 큰 회당’(The Jerusalem Great Synagogue)에 도착했다. 정문에는 경비가 서 있었다. 그는 내 소지품을 검사하고, 사진을 찍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하얀 옷을 입고 ‘카파’를 쓴 유태인들이 회당에 가득하였고, 찬양대가 찬양을 하고 있었다. 찬양대는 회중을 향하지 않고, ‘토라’가 있는 성소를 향하여 찬양을 하고 있었다. 유태인의 찬양은 대부분 시편에 곡조를 붙여 부르는 것이다. 나는 지난 8월 말에 ‘종교간의 대화’를 위하여 시드니에 있는 ‘임마누엘 회당’에 갔었다. 예배 인도자인 ‘랍비’가 회중을 향하지 않고, 성소를 향하여 집례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예배 인도자’가 먼저 ‘예배자’가 되지 않고는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예루살렘 큰 회당’에 와서 진정한 찬양은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글/김환기
호주구세군 다문화 및 난민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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