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4/29 [10:58]

▲지난 2009년 4월 본지 초청으로 간증집회를 위해 호주를 방문한 강영우 박사가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강영우 박사와의 만남 

강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2009년 4월 4일 저녁 시간이었다.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분을 직접 만나게 되어 조금은 흥분되어 있었다. 그는 ‘크리스찬리뷰’ 초청으로 시드니에 왔다. 우리는 ‘벨모아’에 있는 한 식당에서 ‘오리구이’를 먹었다.

박학다식한 강 박사는 식사를 하며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네 발 달린 짐승보다 두 발 달린 짐승이 건강에 좋고, 두 발보다는 날아 다니는 짐승이 좋습니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하는 강 박사를 보면서 의문이 생겼다. 이분이 분명 ‘시각장애인’인데, 내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까지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강 박사님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세요” 나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는 중학교 재학 중 14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사고 후 그는 불빛조차도 볼 수 없는 '완전 맹인'이 되었다. 어머니도 충격을 받고 뇌일혈로 세상을 달리하였다. 결국 형제는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다 어느 목사님과 상담을 하던 중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힘을 얻고 좌절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강영우 박사 가족사진(오른쪽부터 첫째 아들 진석 씨 부부, 강박사 부부, 둘째 아들 진영 씨 부부)     © 강영우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영혼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그는 오래 전 중국을 거쳐 백두산을 다녀온 적이 있다.  차량으로 올라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턱에서 차를 세우고 안내원의 손을 잡고 걸어서 올라 갔다. 백두산을 육안으로 볼 수는 없으나 느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산속에 핀 꽃 내음을 맡아 보고 싶었고, 산새들의 지저귀는 울음소리를 듣고 싶었고, 울창한 나무들을 만져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그는  ‘보이는 백두산’보다 ‘더 아름다운 백두산’를 보고 내려왔을 것이다. 

강 박사는 '로타리 클럽 회원'이다. '로타리 클럽'과   '구세군'은 국제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호주에서는 주로 ‘붉은 방패 모금’(Red Shield Appeal ), 미국에서는 '자선냄비’(Christmas Kettle) 때 클럽내의 모금은 물론이고,  '자원 봉사자'로 거리로 나선다. 강 박사도 '시카고'의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자선냄비봉사'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결혼 30주년때 신혼여행지였던 부산 해운대를 다시 찾은 강영우 박사 부부. 이들 부부는 1972년 2월 결혼했다. ⓒ강영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

(Post Trauma Stress Disorder)

식사 중 그가 어릴 때 받았던 ‘외상’(trauma)이 화두로 등장했다. 강 박사는 1944년에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6.25 때 인민군이 동네를 점령하고 유지들을 다리 위로 불러 모았다. 그때 강 박사는 다리 밑에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일렬로 사람들을 세우더니 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총에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어른들의 모습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뇌리 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서 20명의 러시아 학자들과 함께 회담할 일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 어떤 사람이 “동무, 남조선에서 왔수까?”라는 질문을 하자, 너무 놀래 정신을 잃을 뻔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백지장이 되어 버렸다. 정신을 차린 후  “당신 누구냐”고 물으니, “고려인 출신의 러시아 학자입네다”라고 했다.

과거는 현재와 단절된 시간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서로 ‘상호 연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과거의 상흔’은 오늘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숨쉬고 있다.  의식이 ‘빙산의 일각’으로 오늘의 시간을 주관한다면,  ‘과거의 시간’은 물에 잠긴 '빙산’이 되어 무의식 속에서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상흔’을 치유하지 않고는 ‘오늘의 시간’이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많은 상처를 믿음으로 극복했다. 그의 상처는 그를 진정한 ‘치유자’로 만드는 ‘위장된 축복’이었다. 

상처가 사명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사람들은 상처받기를 원치 않지만, 아무도 상처를 피해갈 수 없다. 상처를 받을 때마다 남을 탓하거나 열등감에 빠질 것이 아니라, 상처가 사명임을 안다면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그는 바울의 가시를 알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 육체의 가시를 해결하여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할 수 있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강박사도 믿음으로 자신의 장애를 축복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그녀와의 운명적인 만남

‘왜 나에게?’

그는 건강아로 태어나 14세까지 정상 시력을 가졌었고, 외상에 의한 망막 박리로 시력을 잃어 가는 4,5년 동안의 약시로 사물을 볼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불빛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완전 맹인이 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에 겪은 쓰라린 아픔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는 ‘맹아부흥원’에서 점자와 타자를 배우고 맹아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날개 없는 천사를 만난다. 석경숙. 그녀는 당시 숙명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대한적십자 부회장으로 맹인에게 책을 읽어 주는 긍휼한 마음을 가진 여대생이었다.

“1962년 5월 셋째 주일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나를 누군가 버스 타는 데까지 데려다 주어야 했다. 이때 한 여대생이 명랑한 어조로 자원하였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숙대 영문과 1학년에 재학 중인 석경숙이에요”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때 남아 있는 시력으로 가까이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 고운 음성에 걸맞은 미모였다. 얼굴은 둥글고 윤곽이 뚜렷하며 눈이 커서 아주 복스러운 인상이었다.”

강 박사는 그녀를 처음 만난 그 날의 감격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임종을 앞두고 그녀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 그 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 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강영우 박사가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기념촬영 (2001년 2월) ⓒ강영우

No where 와 Now here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과연 이 결혼이 가능할까?  만약 이것이 가능했다면 그것은 전적인 ‘석은옥’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녀는 그날이 올 때까지 인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맹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드디어 1972년 2월이 되었다. 결혼식 날을 미리 잡고 준비는 했지만, 결혼식을 2주 앞두고 전격적으로 청첩장을 돌렸다. 예상했던대로 반응은 가지가지였다. 많은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녀의 친척들과 친구들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그 중에는 이해하고 격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실망했지만 지난 10년 동안 우리 둘 사이를 잘 알고 있는 터이라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결혼 후 도미해서 공부를 계속했다.  드디어 피츠버그 대학에서 3년 8개월 만에 한국인 최초 맹인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길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까지 한국에서는 맹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 관념과 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좋은 길을 예비하여 놓으셨다.

그는 인디애나 주 개리시 교육위원회에서 서류를 제출했다. 학생비자를 가진 그가 주교육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애초부터 없었다.

“인터뷰를 맡은 웨이드 박사는 내 대답에 아주 만족해하며 그 자리에서 인사부장을 불러 고용하라고 했다. 나를 고용하고 싶은 충동이 커서였는지, 아니면 주교육 공무원 자리에 감히 학생비자를 가지고 지망했다는 상상을 못한 탓인지, 무슨 비자를 가졌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인사부장은 고용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하더니 1월 3일부터 근무하라고 했다. 꿈 같은 일이었다.”

그 후에도 강 박사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그가 좋아했던 성경구절이 있다. 창세기 1장 27절과 로마서 8장 28절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비전’을 주었고, 로마서는 비전을 이루려다 보면 넘어지고, 자빠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분명한 믿음을 주었다. 넘어진 자가 실패한 자가 아니라, 일어나기를 포기한 자가 실패한 자이다.

강 박사는 절망 속에서 꽃피운 자신의 삶을 ‘노 웨어(No where)’가 아니라 ‘나우 히어(Now here)’라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노 웨어’(No where)  ‘아무데도 없다’가 아니라 ‘나우 히어’(Now here)  ‘지금 여기에 기회가 있다’는 의미다. 그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더라도 ‘절대로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힘을 주어 말하고 있다.
 
▲둘째 아들 진영 씨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있는 강영우 박사 ⓒ강영우

‘석경숙’에서 ‘석은옥’으로  

그녀가 2013년 5월에 시드니에 온다. 남편인 ‘강영우 박사 추모 음악회’에 참석과 '간증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꿈 많은 소녀 시절 그녀는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찌’와 영국의 ‘백의의 천사’'나이팅게일’을 가장 존경했다. 그녀는 베풀고, 섬기고, 나누고, 사랑하고 봉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발랄한 성격을 가진 소녀였다.

대학생이 되고 겨우 3개월이 지난 풋내기 때 그녀는 ‘강영우 학생’을 처음 만났다. 커다란 눈을 가진 이지적인 미남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에는 무서운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전혀 구김살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만남이 그녀의 운명을 바꿀 줄 누가 알았겠는가! ‘헬렌켈러’에게 ‘설리반 선생’이 있었다면 ‘강 박사’에게는 ‘석은옥’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누나와 동생 관계로 발전을 하였다. 그렇게 6년을 다정한 의남매로 지내던 어느 날, 강 박사는 용기를 내어서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나는 그녀에게 행복한 아내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석은옥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우리가 만난 후 첫 10년은 ‘석의 시대’, 그 다음 10년은 ‘은의 시대’, 그리고 그 후 10년은 ‘옥의 시대’라고 지칭하고 각각 그 의미를 부여했다. 석의 시대 10년은 맨발로 돌밭을 걸어가는 것 같은 고난의 시대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기간으로 정했고, 은의 시대 10년은 공통된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데 필요한 준비 기간으로 도미 유학을 경제 기틀을 잡아 행복한 가정을 가꾸고, 옥의 시대 10년은 인간 존엄성과 평등의 이념을 실천해 나가는 사회 봉사의 기간으로 정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사회에 봉사하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는 기간이라고 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맹인과 결혼할 생각을 했느냐?’, ‘맹인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열린문교회에서 열렸던 강영우 박사 초청잔치에서 주 시드니 김웅남 총영사(왼쪽)와 손잡고 찬양하는 강영우 박사(2009년 4월) ⓒ크리스찬리뷰 

“그러한 질문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내 중 하나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러면 남편의 사회적, 학문적 지위 때문이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다.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맹인이라는 것이 내가 행복한 아내가 되지 못하는 조건이 될 수 없듯이, 그가 사회에서 받는 존경이 나를 행복한 아내로 만드는 조건이 되지 않는다. 나는 강영우라는 한 인간, 보다 좁게는 한 남성을 사랑하여 결혼을 했지 맹인과 결혼하지 않았다.” 

▲  강영우 박사와 석은옥 권사 ⓒ석은옥

 ‘석은옥’에서 ‘석은옥주’로 

그녀는 남편으로 인하여 감격적인 순간들이 많이 있었다. 맹인으로서의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어려운 난관을 모두 물리치고 1976년 4월 25일,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이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별히 남편이 대통령 직속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임명 되었을 때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부시 대통령 앞으로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지 40년,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이제 칠순의 젊은 할머니가 되었다. 얼마 전 기독교 방송에 출연을 했다.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강박사 지어준 ‘석은옥’ 이름에 대하여 말했다.

“내 이름은 아직도 법적으로 ‘석경숙’입니다. 하지만 저는 ‘석은옥’이란 이름을 좋아합니다. 남편이 약속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제 이름 뒤에 한 자를 더 붙여서  ‘석은옥주’ 라고 불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은 주님의 인도에 따라 사는 ‘주의 시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 

‘주님의 시대’에 살고 있는 그녀는 여기저기서 초청을 받아 강연할 기회가 많아졌다. 최근 그녀는 3P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Praise the Lord, Pray to the Lord, Be Patient.’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인내하는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입술의 말’이 아닌  '삶의 고백’이었다.   
 
▲강영우 박사(가운데)와 두 아들. 안과의사인 첫째 아들 진석 씨(왼쪽), 오른쪽은 오바마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 백악관에 입성한 둘째 아들 진영 씨.ⓒ강영우
 
Well Being 과 Well Dying 

강 박사는 2012년 2월 23일 하늘나라로 갔다. 2011년 11월 29일 췌장암 선고를 받고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였다. 강박사는 맹인으로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했다.

“지금껏 난 축복받은 삶을 살아왔다. 나의 장애는 저주가 아닌,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축복이었다. 지난 50여 년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선물을 통해, 내가 감히 꿈꿀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일들을 나는 해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와 함께 했던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즐거운 성탄과 2012년 복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평범한 연말 인사로 시작한 그의 편지는 “최근 여러 번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 수술, 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로 끝을 맺었다.


▲ 원주민들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한 안과의사 프레드 할로우스 박사(Dr. Fred Hollows)의 묘지와 기념비가 NSW주 버크(Bourke) 지역에 세워져 있다. 프레드의 묘는 그의 유언에 따라 1970년 초 그가 사역했던 버크로 옮겨졌다.ⓒ크리스찬리뷰

현대의 키워드는 ‘Well Being’과 ‘Well Dying’이다. 진정한 아름다운 삶은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한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있다.

무슨 일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양나라 때의 화가 장승유가 용을 그린 뒤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그 용이 홀연히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인생의 죽음은 용의 눈에 눈동자를 그리는 것과 같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강박사는 멋진 삶을 살았고, 아름답게 완성하였다.

그는 임종을 얼마 앞두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유작인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를 읽으면 그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았으며, 또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는가를 알 수 있다.

▲  프레드 할로우스 박사 무덤에 남긴 글 ‘비전의 상실을 가슴 아파한 그분을 기념하며...’ⓒ크리스찬리뷰
 

아름다운 죽음 

책의 마지막 부분에 그가 아내에게 쓴 편지를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입니다. 시각 장애인과의 결혼이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 준 당신이 고맙고, 이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와 항상 같은 곳을 보면서 함께 해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함께 한 50년을 뒤돌아 보며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은 ‘감사함과 미안함’이란 두 단어였다.

강 박사가 경제적인 문제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 아내가 한 말이 그를 다시 일으켰다.

“세 살짜리 진석이의 손을 잡고, 간난 아기인 진영이를 품에 안고, 식료품점이라도 열어서 생계를 유지할 테니 집안 걱정하지 말아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길을 인도하여 주실 거라고 당신은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때 당신의 모습을, 신념에 가득 찬 당신의 목소리를, 나를 향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백 번, 수천 번 마음속으로만 하던 말을 이제야 글로 남깁니다.”

강 박사는 이렇게 편지를 마감했다. 

▲버크에 있는 프레드 할로우스 묘지 앞에서 기도하는 열린문교회 선교팀.ⓒ크리스찬리뷰

“당신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나를 늘 자신을 이끄는 등대라 불러 주던 당신, 그런 당신은 나의 어둠을 밝혀 주는 촛불이었습니다.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당신을 난 가슴 가득 품고 떠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이제 너희들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로 시작되는 편지는 “내가 너희들을 처음 품에 안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들과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너희들과 한 추억이 내 마음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운 축복이 늘 너희들과 함께 하기를 하늘나라에서도 아버지는 믿고 계속 기도할 거란다. 나의 아들 진석이와 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했고, 축복한다.”로 마무리했다. 

▲  생전에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들을 진료하던 프레드 할로우스 교수의 모습. 이 사진은 프레드 할로우스 재단의 트레이드 마크처럼홍보용으로 사용되고 있다.ⓒFHF
 

강영우 박사 추모 음악회  

강 박사가 떠난지 벌써 일 년이 조금 넘었다. 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도전과 비전’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2013년 5월 10일(금) 오후 7시 30분에  ‘열린문교회’에서 ‘강영우 박사 추모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 많은 음악인들이 뜻을 같이 했고, 교회는 물론이고 여러 후원단체가 함께 했다.

당일 입장료는 없지만 ‘기부금’(donation)은 ‘프레드 할로우스 재단’(Fred Hollows Foundation)에 보내기로 했다. 기부할 단체를 백방으로 물색하던 중 오래 전 본지 발행인이 열린문교회 선교팀과 호주 오지 선교여행 중 버크(Bourke)에 있는 ‘프레드 할로우즈 박사의 묘지’를 방문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시각장애자’와 호주 원주민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안과의사이다.

본지 2003년 7월 호에 실린 당시의 기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 프레드 할로우스는 19070년대 초 호주 오지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눈 치료를 위해 헌신했다. ⓒStephen Ellison 

<미래를 향한 소망과 꿈과 비전>

“우리 일행은 죠지 목사님의 안내에 따라 마을 끝에 있는 공동묘지를 방문했다. 그것에는 1970년부터 20여 년간 호주의 광야를 두루 다니며 가난한 원주민의 눈질병과 백내장을 치료해 주던 프레드 할로우즈(Prof Fred Hollows) 박사의 묘지가 있었다. 그분의 비석에 써 있는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닫혀버린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그분이 사용한 열쇠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꿈과 비전이 있었다.’ 그분의 무덤 위에 이름 모를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남겼다. 

‘비전의 상실을 가슴 아파한 그분을 기념하며...’

프레드 할로우즈 박사는 눈을 치료하는 안과 의사였지만, 그분이 가슴 아파한 것은 원주민들의 잃어버린 시력뿐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적 비전, 그리고 잃어버린 미래였다. 그분은 자신의 삶으로 원주민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그들의 꼭 닫혀버린 마음을 여는 열쇠를 찾아 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위한 비전이었다. 가난하고 한 맺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비전, 미래를 향한 소망과 꿈을 그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였다. 하지만 누가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열쇠를 사용하는 한 사람을 버크에서 만날 수 있었다......”
 
▲ 원주민 어린이들을 사랑했던 프레드 할로우스 교수 ⓒFHF

프레드 할로우스(Fred Hollows), 그는 누구인가? 

“인간의 본질은 남을 돕는 데에 있다. 그것이 바로 동물과의 차이점이다.”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 그의 말이다.

그는 1929년 4월 9일 뉴질랜드 더니든(Dunedin)에서 아버지인 ‘요셉’과 어머니인 ‘크레라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정의로운’(justice)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더니든에서 North East Valley 초등학교를 다니다 13살 때 전학하여 Palmerston North Boys’ 하이 스쿨을 다녔다. 학교 여러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을 했고, 밴드부에 속하여 트럼펫을 불기도 했다.

그는 웰링톤의 빅토리아 대학에서 학사를 마친 후, 더니든 신학교를 다니며 목사가 되려고 하다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대신 그는 ‘오타고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안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등산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던 프레드는 오타와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아름다운 산들을 등정할 기회가 있었다. 가끔 그는 친구들과 함께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Mt. Cook을 등반하곤 했다. 그는 1961년 ‘안과 전문의’(ophthalmology)가 되기 위하여 영국의 Moorfields 안과 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친 후 1965년 호주로 와서 NSW대학 의대 ‘협력교수’(Associate Professor)로 활동하였다. 1965년부터 1992년까지 그는 NSW 대학과 Wales Prince 병원, Prince Henry 병원의 ‘안과 분야’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두 번의 결혼을 했다. 첫째 부인인 Mary Skiller와 1975년에 사별한 후, 1980년 Gabi O’Sullivan과 재혼을 하였다. 1970년 초반부터 그는 NSW주의 소외된 지역과 원주민지역을 방문하였다. 그는 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원주민(Aborigin)에게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1년 Mum Smith 등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하여 호주 최초로 시드니의 레드펀에 원주민 병원을 건립했다. 점차적으로 호주 전역에 원주민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프레드는 의료진과 함께 3년 동안 호주 오지의 원주민 마을을 방문하며 눈을 치료하였다.

그의 사역이 알려지면서 호주 정부는 물론 뉴질랜드 안과 협회에서도 자금을 지원하여 National Trachoma and Eye Health Program(NTEHP)이 시작되었다. NTEHP는 호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치료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1987년 이집트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후,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에리트레아'(Eritrea)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폐허가 된 지역에 의료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네팔이나 에리트레아와 같은 개발도상국가들의 국민들은 기초적인 의료시설이 없어서 맹인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프레드는 개발도상국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그들을 위해 사역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결단이 그의 사역을 호주에서 세계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63세가 되는 1993년에 프레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사인은 폐와 뇌에 번진 암이었다. 그는 6년 전 암 진단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7명의 자녀 와 두명의 손주가 있다.

시드니에 있는 St. Mary 성당에서 NSW주 장례식으로 거행이 되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1970년 초에 사역을 했던 Bourke지역으로 옮겨졌다.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프레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일을 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도와 주었는가 등등. 그는 갔지만 ‘그의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프레드 할로우스 재단(Fred Hollows Foundation)

프레드는 죽기 6개월 전 아내인 가비(Gabi)에게 유언과 같은 말을 했다.

“가비, 나는 내일 죽더라도 상관없소, 하지만 내가 믿고 행한 모든 일들을 동료들과 함께 계속하여 주기를 바라오” 그의 뜻을 받들어 1992년 9월 3일에 ‘프레드 할로우즈 재단’이 발족되었다.

초기에는 소수의 직원들이 베트남, 에리트레아, 네팔에 초점을 맞추어 사역을 했으나, 후에 프레드의 뜻을 기리는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사역의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지금 ‘프레드 할로우스 재단’은 호주 내에서 국제개발을 주도하는 단체 중의 하나로서, 현재 42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호주 최악의 오지에 가서 사역도 하고 있다. 재단은 수술을 통하여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빛을 보게 하였고, 네팔과 에리트레아에 있는 렌즈 공장에서 5백만 개 이상의 렌즈를 보급하기도 했다.

2011년 한 해에만 ‘프레드 할로우스 재단’에서 한일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87,714 환자를 수술하여 주었고, 10,757명의 의료진을 훈련시켰으며, 50 여개의 의료 시설을 개보수하였고, 개발 도상국가에 $ 3,380.000을 보냈으며, 1,604,802 명이 넘는 환자를 검안하였다.   

‘프레드 할로우스 재단’의 비전은 분명하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부주의로 맹인이 되는 사람이 없고, 원주민들이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이다.” 맹인 5명 중 4명은 맹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 간단한 치료만 받는다면 정안인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가 발생된 후 수습하는 것보다,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의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현대는 ‘치료의학’보다 ‘예방의학’이 각광을 받고 있다.

‘프레드 할로우스 재단’은 ‘눈에 대한’ ‘치료와 예방’을 동시에 주도하고 있다. 금년 5월 10일 열린문 교회에서 열릴 ‘강영우 박사의 추모 음악회’를 계기로 ‘프레드 할로우스 재단’에 작은 관심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 한인사역(Korean Ministry) 및 수용소 담당관(Chaplain, Detention Cen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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