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한인연합교회 추후남 권사

김명동/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5/27 [11:21]

▲ 6월 호 표지     ⓒ크리스찬리뷰


 


 
 
 
 
 
 
 
 
 
 
 
 
 
 
 
 
 
 
 
 
 
 
 
 
 
 
 
 
 
 
 
 
 
 
 
 

 
 
92세 어머니의 인생고백 ‘안 해본 일 없지’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버우드 정부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는 추후남(양후남)권사. 6.25전쟁은 그에게 삶의 전환점이었다. 난리통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새로운 삶도 열어주었다. 인민군에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은 남편은 그 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면 앞길이 까마득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생업을 위한 일터로 나갔다. 안 해본 일이 없다. 옷 장사, 야채 장사, 떡 장사, 쌀 장사, 과일 장사, 그리고 미군부대 PX물건 장사도 했다. 몰염치한 인간이 되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렇게 살았다. 악착같이 장사를 해서 아이들을 키웠다. 공부도 시키고 시집장가를 보냈다.

“요즘이야 대학 나온 것이 뭐 대수야 되겠냐마는 그 땐 힘들었어요. 몸 부서져라 일해야만 했지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떻게 살아왔나 싶어. 하나님의 은혜지요.”


▲ 수영으로 건강 지키는 92세의 젊은 할머니 추후남 권사     ⓒ크리스찬리뷰
  



 
 
 
 
 
 
 
 
 
 
 
 
 
 
 
 
 
 
 
92세로 10년째 수영으로 건강관리

자유형, 평영,
 
 
배영 거뜬히 100m 왕복

추 권사를 만났을 때 처음 떠오르는 형용사는 ‘건강하다’였다. 그는 92세의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꿋꿋한 품격과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 아까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보니까 수영실력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그래요? 하하하”

(호호호가 아니라 하하하 크게 웃었다)

- 안 힘드세요?

 “잘 못해”

(겸손한 답이었지만 본인 스스로 만족스러우신 듯 했다)

- 아휴, 그 연세에 대단하시지요. 저보다 실력이 좋으세요.

“글쎄, 작년까지만 해도 모르겠더니만 이젠 힘들어”

10년이 넘도록 수영을 하고 있다는 그의 수영실력은 자유형, 평영, 배영으로 거뜬히 100m를 왕복하고도 힘이 남는 실력이다.


▲ 추후남 권사는 매주 화ㆍ금요일 오후, 시드니 올림픽 파크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물폭포를 즐긴 후 스파를 하고 귀가한다.     ⓒ크리스찬리뷰
 


 

 
 
 
 
 
 
 
 
 
 
 
 
 
 
 
 
 
 

 
▲ 수영한 후 추후남 권사    ⓒ크리스찬리뷰


 

 

 

 

 

 

 

 

 

 

 

 

 

 

 

 

 

 


 
 
“병원에서 무릎을 수술해야 된다고 해서 날짜까지 받았었는데 안했어요. 그러니까 의사가 그러면 수영장에 가서 물속에서 걸으래요. 그렇게 해서 올림픽 수영장을 다니게 됐는데 하루는 물에서 걸으면서 남들이 수영하는 걸 보니까 나도 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시도를 해봤어요. 그랬더니 몸이 뜨더라니까.

뜨니까 허우적거리기 시작했어요. 수영을 그렇게 하게 됐어요. 배운 건 아니고요. 요즘은 일 주일에 두 번 가는데 수영을 40분 정도하고 물 쏟아지는 데로 가서 물을 맞고 다시 물이 도는데로 이동해서 뒷걸음질로 10바퀴 돌아요. 그런 후 스파에서 20분 정도 앉아 있다가 샤워하고 돌아옵니다.”


▲ 수영 후에 물폭포를 즐기는 추후남 권사    ⓒ크리스찬리뷰


 

 

 

 

 

 

 

 

 

 

 

 

 

 

 

 

 

 

 

 
 
이 말 끝에 자연스럽게 음식이야기까지 꺼냈다.

“혈압 약은 작년부터 먹고 있는데 당뇨가 좀 있어요. 그래서 단 것을 못 먹게 하니까 메주콩 있잖아요? 그 메주콩을 믹스에다 넣고 우유 좀 붓고 밥을 조금 넣을 때도 있어요. 갈아가지고 아침을 먹고요, 점심은 노인학교에 나가서 먹고 저녁은 밥을 먹는데 혼자니까 압력밥솥에다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해서 데워서 먹어요. 죽도 끓여서 놓고요. 그냥 이렇게 대충 살아요.”

- 반찬도 직접 만드나요?

“반찬은 큰 며느리가 늘 해 와요. 곰국도 끓여다 주고 과일도 사다 주고요. 아이들이 도와주니까 걱정이 없어요. 청소도 우리 아들이 가끔 와서 해주고요”

추 권사는 다양한 사회활동과 봉사활동으로 시드니 통합노인회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지금도 노인프로그램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버스를 타고 참석한다. 여기에 빠지는 법이 좀체로 없다. 그의 스케줄은 마치 연예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짜여있다.

 월요일 : 전철타고 교외로 여행 (뉴카슬, 고스포드 등)

 화요일 : 오전|시드니한인연합교회 중보기도회

                    오후|수영(시드니 올림픽 수영장)

 수요일 : 시드니통합노인회(한인회관)

 목요일 : 시드니순복음교회 노인대학

 금요일 : 시니어대학(시드니중앙장로교회)

                    오후|수영(시드니올림픽 수영장)

 토요일 : 시드니순복음교회 영한예배(영어예배)

 일요일 :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예배 참석


그의 기상은 예수님의 기도시간이었던 미명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장의 묵상으로 하루를 여는 그의 기도는 그날 하루 동안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성실하게 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바람이다. 물론 새벽기도는 자녀들뿐 아니라 교역자와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기도 부탁받은 사람들까지도 기도 식구 명단에 얹혀진다.

기도 후에 그는 식탁에 앉아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가진 뒤 아침식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영어·일본어도 척척, 내 별명은 ‘교통부장관’

사람들은 그를 ‘교통부장관’이라고 부른다. 그게 어찌된 일인가.

“글쎄, 나도 몰라. 연합교회 추 권사 모르면 간첩이라면서 그렇게들 불러. 아마 시드니에서 산지가 오래됐으니까 그런가, 하여튼 사람들이 날 다 알아봐. 거의 시드니한인연합교회를 거쳐 간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인심도 안 잃었는지 모두들 자기네 교회 권사님 같다고 그래. 젊은 아이들까지도 그런다니까.

사실 난 어디를 가도 한 번 간 데는 딱 알아요. 스트리트 이름까지 안 잊어버리니까. 그러니까 심방을 가도 차들이 많이 오고가는 거리면 집 찾기가 어렵잖아요. 나를 데리고 다녀. 같이 가면 고생 안하고 한 번에 찾을 수 있으니까 안심이 된대요. 노인들끼리도 놀러간다든지 하면 추 권사 차 탔느냐? 탔다, 그러면 됐다 가자. 그러고요.”

그랬다. 그는 노인들 사이에서 인기 ‘짱’이다. 서로 의견이 분분할 때도 직접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준다. 영어와 일본어 실력도 보통이 아니다.

- 영어도 잘 하신다구요?

“남부끄러워 죽겠네. 쪼금해요.”

▲ 버우드 자택에서 기자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추후남 권사     ⓒ크리스찬리뷰


 

 
 
 
 
 
 
 
 
 
 
 
 
 
 
 
 
 
 
 
 
(그러면서 얼른 커피를 권했다. 올림픽 수영장에서 수영을 마친 그를 집으로 모셔다 드리기 위해 운전을 시작했을 때 'turn left' 'keep going'이라고 길을 가르쳐 줄 때 순간 놀랐다. 그리고 일본어까지 한다고 했을 때는 좀 신기했다.)


“하우징 오피스나 센터링크에 갈 때도 내가 직접 다녀요. 아이들한테 신세 안져요. 내가 이집으로 이사 오기 전 건너편 정부 집에 살았어요. 집도 넓고 좋았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요. 그래서 하우징 오피스에 직접 찾아가 ‘I am very hard, I want elevator place"라면서 집을 옮겨달라고 했는데 한 달 만에 이 집이 나왔어요. 아이들한테 떳떳하지요.”

바쁘게 살다보니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다.

“그저 부지런히 움직여야 치매도 안 걸린대. 그래야 남도 도와줄 수 있지. 남 도와주며 사는 게 재미있고 즐거워.”

 
▲ 추후남 권사는저녁 식사 후 성경을 읽고 일기예보를 본 후 8시쯤이면 기도하고 잠자리에 든다.     ⓒ크리스찬리뷰


 

 

 

 

 

 

 

 

 

 

 

 

 

 

 

 

 

 

 

 

평상적인 저녁식사는 6시 반쯤, 저녁 후 성경을 읽고 7시 30분쯤에는 일기예보를 반드시 본다. 8시쯤이면 방으로 들어가 기도하고 잠자리에 든다.
 
▲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주일예배에서 찬양하는 추후남 권사     ⓒ크리스찬리뷰


 

 
 
 
 
 
 
 
 
 
 
 
 
 
 
 
 
 
 
 
 
6.25로 남편과 사별, 남겨진 삼 남매

추 권사의 고향은 경상북도 의성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에서 자라 스무 살에 출가했다. 남편 양재호 역시 불신자였다. 그래도 추 권사는 어릴 때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다.

“그때 외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20년이 지나 교회에 나갔는데도 줄줄 외워지더라고요.”

새살림을 영양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안동으로 이사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불신자인 남편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읽던지 밥 먹을 때도 옆에 성경을 펴놓고 밥을 먹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6.25전쟁이 터졌다.

“남편이 빨갱이들한테 끌려가 매를 맞고 병이 들었어요. 시집갈 때 가져간 옷도 팔고 장사도 하면서 약을 사댔는데 결국은 죽었어. 우리 양반이 나하고 한동갑이었는데 똑똑했어요. 그때 나이 서른다섯이오.”

(오랜 상처처럼 새겨져 있는 깊은 사연이다.)

 이미 슬하에는 삼 남매를 두었었다. 꽃다운 나이였다. 앞이 캄캄했다.

▲ 60대의 젊은 시절(?) 추후남 권사 가족사진     ⓒ 추후남


 

 
 
 
 
 
 
 
 
 
 
 
 
 
 
 
 
 
 
 
 
"주님, 이 어린 것들과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참으로 가진 것 없는 살림이었다. 무던히 몸을 놀려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쌀 한 톨이 없더라고. 자식들을 바라보니 기가 차요. 그러나 갑자기 무슨 일을 하겠어요. 할 수 없이 친정(의성)으로 가니까 어머니가 무명을 짜서 두 필을 주더라고요. 그걸 팔아서 살림보태고 그 뒤로 안 해본 것 없어. 야채장사도 했고 떡장사도 했고 시골 다니며 곡식을 거두어 안동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거지 뭐.”

 그러나 삼 남매는 그의 삶이었고 노동의 힘이요, 원천이었다. 어린 자식들 앞에서 펑펑 울 수도 없었고 슬픔은 고스란히 속으로 가라앉아 그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경제적 어려움이야 차치하고라도 자식들의 앞길을 생각할 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논을 얻어 모를 심어놨는데 비가 와서 싹 쓸어갔어요. 참 허망하더라고. 그리고 나니까 부역(노역)에 또 나오라고 하는데 우리는 남자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배당이 있으니까 그 일을 해야만 되는 거야. 할 수없이 자갈을 지게에 지고 가다가 그만 넘어져 둥글었어요. 이때 얼마나 서글펐으면 죽음까지도 생각했겠어요. 혼자 같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죽자니 아이들이 있지요 살자니 견뎌내기가 힘들지요 너무 난감했어요.”

꽤 긴 세월, 노동일을 하면서 나이를 먹다보니 조금씩 힘에 부쳤다. 또 노동일은 아이들의 아침을 챙기기도 전에 나가야 했고 일이 계속되는 것도 아니어서 계속 다른 일들을 알아보는 번거로움도 컸다. 무엇보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들 건사도 문제였다.

“이때 서울을 오가며 장사를 하게 됐어요. 보따리장사지요. 사과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팔고 서울에서 내려올 때는 비누 치약 등 생활필수품 등을 가지고 안동으로 내려와 팔았어요. 그러다가 외제 장사하는 사람을 알게 돼 양담배까지 팔게 됐는데 그때는 아무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지요. 그러다가 양키물건 장사를 해보라는 권유에 서울로 올라가게 됐지.”

말끝에 북받쳐 기어코 일어나 부엌으로 가 냉수를 한 컵 마시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어. 처음에는 초등학교만 생각했는데 초등학교 졸업하니까 중학교 보내고 중학교 졸업하니까 고등학교를 보내고 싶은 거야. 그리고 자식들을 제대로 공부시키려면 도회지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지.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굳은 결심 끝에 서울 회현동에다 집을 사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했다. 산비탈에 있는 작고 허름한 판잣집이었지만 재산목록 1호였다.

“아이들하고 셋방살이를 한다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양키물건 장사하며 생긴 별명 ‘안동 아줌마’

“일선지구에 있는 미군부대에 가서 피엑스(PX)물건을 받아다 주로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에 넘겼어요. 저녁에는 수금하러 다니고요. 이문이 박했지만 그래도 재미가 있었어. 그러니까 개미같이 벌어 모은 돈으로 우리 가족이 산거야.”

PX물건을 옷자락 여기저기 쑤셔놓고 부대에서 나오다 헌병대에 들통이 났을 때는 단박에 죽는 줄만 알았다. 합동단속반이 나오면 모두 벌벌 떨었다. 맨발로 줄행랑치기도 했다. 단속에 걸리면 물건 하나하나마다 벌금이 매겨졌다. 세관 직원이 물건들을 모두 싣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니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세관원 눈을 피해 두리번거리며 잔뜩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시장사람들은 그를 ‘안동아줌마’로 불렀다. 경찰도 안동아줌마로 통했다.

“하루는 같이 하던 여자가 의정부 경찰서에 붙들려 구속이 됐어요. 빼내야 되겠다 생각하고 돈을 거둬 빼냈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라. 장사를 그만두려고 했을 정도니까.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고민을 하는 거야. 엄마가 그렇게 불안 속에 사니까 그 장사 안하면 안 되냐고.

그리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우리가 공부하지 말자 그러고. 그런데 나중에 친구 하나가 미제물건 안하고 일제물건을 했댔어. 소개를 받아 나도 미제물건을 접고 일제물건을 했는데 나중에는 홍콩물건까지 취급했지. 이 일을 시드니 올 때까지 한 거야.”

그렇게 해서 두 아들은 대학교까지 내처 다녔다. 덕분에 딸도 가르칠 수 있었다. 딸은 어머니를 돕고 싶다며 무학여고를 졸업한 후 곧바로 취직했다.

▲ 딸의 가족들과 함께     ⓒ 추후남


  

 

 

 

 

 

 

 

 

 

 

 

 

 

 

 


 
“형편이 안 좋으니까 딸애가 그래요. ‘엄마, 나는 대학에 안 들어가도 괜찮으니까 오빠하고 동생하고 대학 보내’ 자기는 대학을 안 가겠다는 거야. 공부도 잘하고 학교에서 잘 보아서 졸업하자마자 학교에서 취직을 시켜줬어.”

- 재혼할 생각은 안 하셨나요?

“시집? 아예 생각을 안 했지. 자식들이 있는데. 그런데도 주위에서는 나를 시집보내려고 별별 짓을 다했지. 그 당시에는 이북에서 내려와 혼자 살고 있는 홀아비들이 많았거든. 언젠가는 우리 집 방에 있는 걸레를 홀아비 있는 방에 갖다 놓기도 하고 홀아비 방에 있는 걸레를 우리 방에 갖다 놓기도 하고 사람들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려고 이렇게 장난까지 했다니까. 지금도 그때 왜 시집 안 갔을까, 전혀 그런 생각 안 해요.”

추 권사는 시드니에 오기 전까지 성도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 캔버라 대한민국 대사관을 방문한 추후남 권사     ⓒ 추후남
 
 


 
 
 
 
 
 
 
 
 
 
 
 
 
 
 
 
 
 
 
 
 
 
 
늙었어도 자식들에게 손 안 벌려

추후남 권사가 시드니에 도착한 것은 1977년 1월 16일이었다. 큰 아들의 초청이었다.

“아들이 먼저 시드니에 와서 1차 사면령을 받아 나를 초청했어요. 원래 아들은 브라질로 가려고 스페인 말도 배웠었거든. 그런데 아는 사람이 호주로 권유를 해서 이곳으로 오게 됐는데 그땐 호주가 살기에 참 좋았어요.

아들이 처음으로 시드니 공항에 내리니까 이곳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일 안하겠느냐고 그러더래요. 일하겠다고 하니까 회사로 직접 데리고 가더래. 그래서 도착한 날부터 냉장고 회사에 들어가 일했어.

그때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일단은 일하지 말고 공부를 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75년도에 왔는데 온지 한 달 열흘 만에 사면령을 받은 거야. 그런 후 76년 8월에 결혼하고 다시 들어와서 나를 초청한 거지."

▲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서 설교목사로 잠시 섬겼던 지태영 목사와 함께 ⓒ 추후남 


 

 
 
 
 
 
 
 
 
 
 
 
 
 
 
 
 
 
 
 
그는 시드니에 도착한 후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 등록을 하고 오늘까지 건강하게 섬겨오고 있다.

▲ 92세 노인답지 않게 건강미 넘치는 추후남 권사     ⓒ 크리스찬리뷰
 
 


 

 

 

 

 

 

 

 

 

 

 

 

 

 

 

 

 

 

 



“내가 왔을 때는 교회는 시드니한인연합교회 하나밖에 없었어요. 이민 초기였으니까. 김상우 목사님이 계셨을 때인데 78년도에 내가 집사 임명을 받았어. 그 땐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거의 집사였으니까 집사도 투표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여 집사가 3명이 됐지. 그런 후 84년도에 권사 취임을 한 거야.

▲ 권사취임예배를 마친 후 기념촬영(앞줄 가운데 추후남 권사)     ⓒ 추후남


 

 
 
 
 
 
 
 
 
 
 
 
 
 
 
 
 
 
 
 
 
한번은 교회 초창기 바자회가 있었는데 메주콩을 50kg 사다가 메주를 쒀가지고 된장을 만들어서 팔고 쌀을 20kg 사서 송편을 만들어 팔았어. 밤에 그것을 만들면서 '하나님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드는데 많이 팔리게 해주세요'하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

썸머힐에 소나무가 있는데 누가 볼까봐 밤중에 가서 소나무 가지를 꺾어 가지고 그 솔잎을 깔고 송편을 쪘어요. 그랬는데 송편이 그렇게 맛있다고 그랬어. 우리 손녀가 송편을 하도 좋아해서 손녀 줄려고 내가 만든 송편을 살려고 갔는데 다 팔려서 못 샀어요.


된장도 그렇게 맛있다고 금방 다 팔렸지. 나도 못 샀다니까. 그 바자회 수입으로 우리교회 버스를 산거야. 지금은 없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지금 젊은이들 아무 것도 몰라요.

우리는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으레 함께 교회 주위를 돌며 풀 뽑고 청소도 하고 함께 커피를 마시며 교제하다가 집으로 오곤 했는데 요즘 사람들 알려나.”

추 권사는 화살을 교회로 돌렸다.

“옛날 신앙은 순수했어요. 교회가 숫자만 늘면 뭣해. 하나라도 옳게 하나님 뜻대로 바르게 해야지.”

기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드니에 사는 것이 만족하냐고.

“호주가 좋지, 한국은 너무 추워”

그러면서 이내 하나의 추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안동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는데 날씨가 굉장히 추웠어. 작은 트럭을 빌려 그 트럭 위에 짐을 싣고 그 짐 위로 우리 가족이 탔는데 우리 어린애들이 얼까봐 내 몸으로 푹 감쌌지. 어찌나 춥던지 내 몸이 얼어서 오줌이 나왔는데도 몰랐다니까. 그렇게 고생 했어요.

그런데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있었던 일이야. 내가 아는 분이 본다이 정선에 살았는데 그 집에 놀러갔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그 집에서 나와 버스정류장 벤치(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다 버스가 와서 탔지.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려고 하니까 키가 없는 거야.

아차, 내 가방. 가방 속에 키도 있었고 돈도 있었는데, 가방을 버스 정류장 의자에 두고 온 거야. 급하게 버스타고 다시 갔지. 가니까 가방이 그대로 있더라고요. 그때는 저녁 퇴근시간이었는데 그 의자에 사람들이 얼마나 앉아 있었겠어요. 그런데도 그대로 있는 거야. 열어보지도 않았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그때는 자동차 문도 안 잠그고 다녔으니까.”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소원이 뭐냐고 했더니 예수 잘 믿고 천당에 가는 것이고, 왔다가 일 잘못하고 가는 것 같아서 하나님께 죄송하고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계속 그런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식들이 잘 돼야죠. 부모의 소원은 다 자식들이 잘되는 것, 그거잖아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면 그저 그걸로 만족해요, 나한테 잘 안 해도 괜찮아요.”

- 이렇게 혼자 계속 사실 건가요?

“공연히 자식들에게 기대고 그렇게는 안 살 생각이요.”

멀고 험한 길이었지만 지나놓고 보면 고마운 일이 많다. 잘 자라준 자식들, 그럴 때마다 마음으로 도와주고 힘이 되어준 이웃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뜻있고 좋은 일을 계속하면서 남에게 짐 되지 않는 노후를 살려고 생각한다.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살아온 것, 말을 안 해서 잘 몰라”

인터뷰하는 그 식탁 위에는 커다란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 시드니중앙장로교회 시드니대학에서 게임을 즐기는 노인들(3째 줄 왼쪽 추후남 권사)     ⓒ 크리스찬리뷰


 

 
 
 
 
 
 
 
 
 
 
 
 
 
 
 
 
 
 
 
 
추후남 권사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와 "잘 가시오"하고 손사래를 쳤다. 사랑의 향기가 그 모습에서 흘렀다. 비록 몸은 쇠하였으나 주님 품에서 젖을 뗀 아이처럼 영원히 어여쁘고 어여쁘다. 오늘도 기도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냥꾼인 추후남 권사의 건강을 빌면서 차에 올랐다.

에필로그

‘안 해본 일 없다’는 말이 아팠다. 목이 메고 가슴이 저려왔다.

해방을 맞이하고, 38선이 그어지고, 6.25전쟁과 독재시대를 거쳐 살아본 사람의 말이다. ‘안 해본 일 없다’는 말은 아무에게나 나오는 말이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말이다. 흉내낼 수가 없다. 자식을 키워본 어미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생활을 ‘건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삶이 남긴 그 한마디가 바로 ‘안 해본 일 없다’일 것이다.

추후남 권사는 말끝에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고백했다.

기자는 이 말이 미치도록 좋았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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