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5/27 [16:39]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박해와 수난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한다. 지금 이 시대가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어 있고, 그렇지 않아도 직장 문제, 자녀 문제, 정치 문제, 건강 문제 등 온갖 스트레스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교회에서까지 무슨 박해냐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호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박해를 당하고 핍박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박해를 당하고 있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예수님 때문에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무엇 때문에 당하는 박해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거짓 중상모략을 당하고 온갖 악한 말을 듣는 것이다. 즉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박해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당하는 치욕과 수모, 예수님 때문에 들어야만 하는 모든 비방과 악한 말들이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제자들이라 부르신 무리들에게 전해주신 말씀이다.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며 산에 올라온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조금은 부드럽고 유연하게 말씀하셔도 될 것 같다. 하나님 나라의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영생에 대해, 구원에 대해, 천국 보화에 대해 말씀하셔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박해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박해를 받아야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유대교를 버리고 자신을 따라온 최초의 제자들에게 귀에 듣기에 편한 말씀, 마음에 부담감이 없는 말씀, 열렬히 환영하는 말씀을 전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제부터 박해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박해를 받은 것처럼 너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요 15:20),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요 16:33)고도 하셨다.

바울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했고, 베드로 역시“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벧전 4:14)라고 했다. 이렇듯 성경은 줄곧 박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박해를 이야기 하라

그렇다면 교회는 박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아야 한다고,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당해야 한다고 전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에 대해서는 수없이 말하면서도, 내가 받아야 되는 고난과 박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은 누리면서도,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박해와 고난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박해를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따랐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가족을 잃었고 직업을 잃었다. 따돌림을 받았다. 나중에는 동굴 속에서 숨어지내야 했고 산속에서 유리해야 했고, 사막에서 방황하다가 끝내 굶어 죽기까지 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형장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순교를 당해야 했다.

그리스도인의 박해 가운데 가장 처절한 경우는 순교이다. 세계기독교백과사전의 편집자인 데이빗 버렛에 의하면, 매년 30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다. 이는 하루에 무려 833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다. 버렛은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순교자가 될 가능성은 200대 1이고 선교사일 경우 이 가능성은 50대 1로 줄어들고, 원주민 선교사라면 20대 1이 될 것이라고 썼다. 박해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박해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당하는 박해

육체적인 핍박과 순교만이 박해가 아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의 박해는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받는 경제적, 시간적, 인격적 불이익이나 손해, 비난과 오해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쉽게 설명하면, 일 주일 내내 고된 일을 하고 오직 주일 하루만 쉴 수 있는 성도가 피곤한 몸이지만 주일날 교회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남보다 일찍 나와서 예배당 좌석을 정리하고 성가대 연습을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이런 헌신과 봉사가 없으면 더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다. 또 예배 시간에는 가게 문을 닫고, 월요일에 중요한 시험이 있지만 반드시 주일 예배를 드리고, 탈세의 유혹을 이겨내며 정직하게 사업을 하고, 뇌물이나 청탁을 받지 않고 공명정대한 공직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손해가 있고, 시험 성적이 좋지 않고, 세금도 많이 내고 승진하는데 불이익을 당하는 일들도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작은 박해들이다.

이렇듯 박해는 주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순교와 같은 특별한 삶으로부터 우리가 보통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경제적 시간적 손해와 손실, 윤리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박해에 직면해 있는 인생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돌려대야 하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도 주어야 하고,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야 하고,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가야만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박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박해는 박해로만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 놀라운 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천국은 사후 세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굳이 박해를 당해해야 될 이유가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 박해를 받든 안 받든 나중에 죽어서 다 들어가는 곳이 천국인데, 굳이 박해를 받은 자만이 복 있는 사람이겠는가?

그래서 천국은 지금 우리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영광스러운 나라가 지금 내 심령에 임하는 것이다.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내 안에 임하는 것, 이것이 천국이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의 인생이 왜 그리도 무기력하고 답답한가? 왜 새로워지지 못하고 상처 때문에 두려워하고 아파하는가? 하나님과 접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원하고 신비롭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야 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손을 잡아야 일어설 수 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천국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곳이 천국이다.

그런데 천국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우리가 박해 받는 그곳에 임한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고 예수님 때문에 눈물흘리고 예수님 때문에 상처받는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스데반 집사가 박해의 현장에서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였다. 돌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박해의 현장에서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다. 그는 돌무더기 속에서도 천국을 소유하고 있었다.

높은 산이든 거친들이든, 초막이든 궁궐이든 예수님이 임하시는 곳이면 그곳이 천국이다. 박해의 극심한 현장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천국이다. 그래서 우리는 박해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다. 등에는 채찍을 맞으셨고 얼굴에는 침뱉음과 따귀를 맞으셨고, 입고 계시던 옷마저도 벗겨지는 수모와 치욕을 당하셨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셔야 했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셔야 했고 옆구리는 창을 찔리셔야 했다. 끝내는 생명마저도 무참하게 강탈당하셨다. 그러나 그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에 임했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자.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수치와 모욕을 기꺼이 받도록 하자.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받아야 되는 손해와 위험도 감수하자. 그때, 우리에게도 천국이 임할 것이다. 이 땅에서도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광대하시고 신비로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크고 놀라운 하늘의 상급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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