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재단 이사장 이형자 권사

디아스포라는 세계선교의 횃불입니다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3/08/01 [11:14]
 
▲ 기독교선교횃불재단 이사장 이형자 권사     ©크리스찬리뷰
 
영향력
 
최순영 장로와 이형자 권사, 이들 부부의 업적은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에 이르는 한국 기독교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 교회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각종 대형집회의 가장 큰 후원자로, 할렐루야 축구단, 횃불재단, 극동방송국, 초기 두란노서원 성장과 온누리교회 설립과정에서 이들 부부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필자 역시 그 영향력의 수혜자 중에 하나이다. 84년 공채로 입사한 한 언론사의 수습기자 딱지를 떼고 부서 배치를 받아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을 때, 친구 C군이 찾아왔다. 하얀 봉투 속에서 정사각형 음각도장처럼 <빛과소금>이라 찍힌 막 창간된 잡지를 꺼냈다. 처음 명분은 원고청탁이었고, 본론은 그 다음이었다.

“우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같이 일합시다.”

두란노서원은 당시 무명의 신생출판사였다. ‘연예인교회 퇴직금’을 의미 있게 쓰고자 설립만 해놓고, 영국으로 떠난 하용조 목사를 대신하여 윤영탁, 고무송 장로(당시)가 운영하면서 양은순 사모의 <사랑과 행복에의 초대> 등 몇 권의 가정 관련 도서와 세미나용 바인더로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터였다. 그의 스펙으로 입사할 만한 회사가 아니었다.
“거긴 어떻게 들어가게 됐소?”

“우리 교회 할렐루야축구단 어느 선수가 권해서요.”

“그게 사실은~”하고 시작된 그의 말에서 <빛과소금>의 발행인은 최순영 장로로서 ‘숨어서 섬기는’ 실질적인 역할을 다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몇 달 후 필자도 두란노의 멤버가 되었다.
 
그해 연말, 여의도의 아이콘 63빌딩이 완공됐다. 최순영 장로가 <빛과소금> 편집위원과 편집진들을 63빌딩내 48층 거버너스 멤버스 클럽으로 초청하여 송년회를 해주었다. 지정석이 없었던 관계로 입장순서대로, ‘낮은 자리’부터 앉는 겸손함이 배어있던 편집위원들이라 맨나중에 입장한 필자는 꼭 한 자리 남은 곳에 앉을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최 장로의 오른쪽, 이만열 장로(전 숙대 교수,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왼쪽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최 장로는 당시 한국의 최고층인 63빌딩에 대해 “이 빌딩은 아내가 기도로 낳은 건물”이라고 아주 간단히 간증하고, 강변 야경을 구경시켜 주었다.

본지는 25년 전 이형자 권사가 발행하던 <크리스찬 타임즈>의 호주지사로 출발했는데 크리스찬리뷰 창간과 동시에 크리스찬타임즈는 안타깝게 폐간되었다.

▲ 한국의 랜드마크로 알려진 서울 여의도에 있는 63빌딩    

이달의 ‘리뷰초대석’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빌딩까지 기도로 낳을 만한 ‘기도의 어머니’ 이형자 권사를 초대했다. 매무새 하나 목소리 하나 흩트리지 않고 진지하고 담담하게 최근 당한 질곡의 세월까지 들려주었다.
 
기도로 얻고 기도로 세우다
 
최 장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대한생명과 신동아화재해상 보험을 부친으로부터 인수받았고남대문 회현동에 있던 사옥을 옮기고자 했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었다. 

“하루는 출근하면서 대한생명 사옥을 지으니 기도를 좀 해달라고 해요. 부지도 없는 상태였고, 높이 이야기도 안해요.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저한테 큰 은사는 없었고 그저 기도만 할 따름이었지요. 기도만 하면, 그리고 잘 나오면 잘되겠다는 정도고, 기도가 답답하다면 뭐가 막혀서 안되겠구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이때 그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남편이 갖다 준 서류를 놓고 대한생명 부지를 허락해 달라고, 막상 기도를 하는데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기도를 하려니 절벽처럼 가슴에 뭐가 막히고 해서 기도를 하다하다 못해서 서류를 남편에게 다시 주면서, ‘기도가 왜 막혀요? 땅을 구하려는데 왜 막혀요?’하니 ‘그래요? 당신이 기도를 열심히 해줘서 회사도 잘되고, 당신이 기도를 잘해야 땅이라도 좋은데 사지 않을 거요?’하길래 다시 놔두고 기도했습니다.”

▲ 2011 한민족 재외동포 세계 선교대회에서 찬양하는 최순영 장로(오른쪽) 와 이형자 권사  ⓒ횃불재단    

이때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여쭙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하나님 땅이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층수가 있습니까?’라고 간절히 여쭙는 기도를 드렸다. 놀랍게도 ‘여의도 모래사장에 지으라. 높이 제한이 60층을 지으라’라는 세미한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전혀 뜻밖이었어요. 59층도 말고 60층을 지으라고 말입니다. 그때 당시로는 어림도 없는 말이지요. 대한민국에 그런 높이가 있을 수도 없고, 사옥을 짓는데 대한생명에 그만한 돈도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 뜻이라면 또 한번 들려주세요’했더니, 다시 세미한 음성으로 ‘59층도 말고 60층으로 지으라’라고 들렸습니다. 그래서 ‘진짜면 또 들려주세요’했더니, 세 번이나 똑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쭤보고 응답받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저녁에 남편에게 ‘이거 좀 생각 밖의 일인데, 하나님이 여의도에 60층을 지으라고 하시네요’했어요. 그 당시 부지로 나온 땅이 배재고등학교 자리와 잠실, 그리고 여의도에 6천 평이 나왔다고 해요. 기도 응답대로 여의도를 정했습니다. 여의도 땅은 3천 평씩 잘라 파는데, 투표를 해서 한강 쪽이냐 아니냐를 정해요, 마침 우리가 한강 쪽으로 나왔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요.”

그러나 첩첩산중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33층이 제일 높은 빌딩이었고, 건축법은 14층 이상은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60층이란 계란으로 바위 치는 도전이었다.

“60층을 지으라고 하니 남편도 처음엔 화를 막 냈습니다. 그렇게 지을 돈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60층 다 지어 뭐하느냐고 화를 막 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라고 하신 것이니 그럼 마음대로 하시오’했어요. 그것으로 싸울 수도 없고 말입니다.

▲ 양재동 횃불선교센타 전경     

그런데 며칠 후에 남편이 ‘여행을 다녀올 테니 짐을 싸라’해요. 그렇게 여행을 한 열흘 다녀오더니 뭘 내놓았어요. 전 세계에서 고층빌딩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왔더군요. 캐나다 트윈빌딩, 필라델피아 빌딩을 비롯해 유명한 빌딩사진을 막 내놓는 거예요. 남편이 참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아내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고, 찍어 왔구나’하고 생각하니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하여 설계를 시작했다. 60층 빌딩 대만계 미국인 설계자에게 의뢰했다. 그가 기도하면서 얻은 영감인 ‘기도하는 손’을 형상화한 황금색 빌딩은 그렇게 잉태됐다. 그것을 부부는 항상 품에 품고 다녔다.
 
구국기도회, 기도로 뭉치다
 
60층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다. 서울시장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최 장로는 말할 수 없는 무안을 당하면서 도전했다.

“그러면 지하 60층을 짓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지하 60층을 짓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당시 박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해도 안됐다.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이야기해도, 박 대통령이 너무 높다고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이 허락을 안내준다고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이 내준다고 해도 어떻게 짓느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저도 모르겠으니 하나님이 지으십시오’했어요. 그랬더니 너무 남편이 어이없어 하는 거예요, ‘이 설계비가 얼만데 물어내겠느냐?’해요. 알았다고 했지요.”

그러자 남편에게 펀뜻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60층이라, 그러면 트윈 빌딩? 30층을 두 개 그렇게 지을까? 그렇게 해도 60층이 아니냐?’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것이 큰 시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브라함도 아들 늦게 주니 이스마엘 낳았듯이, 남편도 더디 응답되니 중간에 헤맨 것 같습니다. 그때 제 믿음은 지금보다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어느 날, 10•26이 터졌다. 갑자기 일어난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이때 CCC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가 다음해,  80년 3•1절을 기해  ‘구국비상기도회 금식기도회’를 구상했다.

“김 목사님께서 사람을 보내셨어요, 당시는 우리나라에 기독교 TV가 없어서 5분 스팟 광고를 KBS, MBC 뉴스 시간대에 내려면 4500만 원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 광고 어떻게 안되겠느냐고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한참 있다가 콘티빵 회사 상무한데 이야기해놓겠다고 해요. 그리고 루디아에서 헌금하고, 횃불회 시간에 그 이야기 하니 앉은자리에서 800만 원이 나와서 5천만 원인가를 해드렸습니다.

▲ 횃불재단 이미지     

한얼산기도원에서 ‘전교인 전교회 전성도 구국금식기도회’ 취지와 슬로건으로 스팟 9시 뉴스 시간에 광고로 나갔습니다. 전국에서 구름떼처럼 교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가 ‘서울의 봄’ 시절이었는데, 3부요인이 참석하고,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씨까지도 올 정도였습니다. 쟁쟁한 분들이 오시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해요. 그때 제 나이가 30대였는데, 그분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뒷모습만 지켜 보았습니다.”
 
법까지 바꾼 하나님의 승리
 
그렇게 성황리에 끝났지만 남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할 틈도 없이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오랫동안 축구협회회장과 한국 최초의 프로축구팀인 할렐루야축구단을 창단하고 이끌어던 남편 최 장로가 어느 날 불쑥 한마디 했다.

“당신 군에 아는 분 없어요?

“왜요?”

“할렐루야 구단 몇몇 선수가 군대 있는데 전국체전에 참가시키려면 군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이 권사는 잠깐 생각했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군종감이었다.

▲ 2006년 3월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할렐루야 축구단. 할렐루야 축구단은 1980년 창단됐다.   

“당시 한남동 횃불회관에 신앙 좋은 육사 생도들이 와서 3박 4일씩 리트릿을 했어요, 그러면 음식도 제공하고, 함께 오신 군종감과 63빌딩 이야기도 하고 여러 대화를 나누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분께서 ‘그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하면서 육사생들과 함께 저희를 위해서 통성기도를 해주곤 하셨어요.

제가 아는 분이 그분 뿐이라 연락을 드렸더니 신앙 좋은 황영시 장군을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경동교회 장로님이신데, 성격이 밝고, 사모님은 육군중앙교회 권사로 신앙이 너무 좋은 분이십니다.”

그렇게 황 장군과 최  장로는 만나게 되었다.

“우리 할렐루야 구단 선수 중에서 군에 입대한 3명이 전국체전에 나가야 하니 그날만 잠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도 있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신앙이야기와 시국이야기를 하고, 마지막 헤어질 때에 황 장군이 한마디 했다.

“장로님, 그냥 가시다니요. 혹시 부탁할 것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이 말을 들은 최 장로는 호주머니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63빌딩 설계도가 생각났다.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꺼내 황 장군에 보이며, 그동안 건축법상 겪은 여러 가지 애로사항을 털어놓았다. 황 장군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 설계도를 두고 가시오, 다음에 연락드리리다.”

그는 ‘정확한 장군’이었다. 다음날 아침 전화가 울렸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반응이 좋았다고 했다.

“아마 전 사령관께서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았나 봅니다. ‘일본에도 고층건물이 있으니 우리나라에도 그런 빌딩이 있어야지요. 우리나라 경제에 그런 빌딩이 하나 있으면 좋은데, 내주시오’하여 결정이 난 것입니다.

그 후에 18년간 시행해오던 건축법이 개정되고 63빌딩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향하여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4대문 밖에 건축물의 높이 제한을 다 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지만, 법까지 바꿔지면서 하나님이 ‘내가 해주겠다’고 하신 것은 반드시 이뤄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후 3년 동안 공사기간 중 안전 사고 하나 나지 않고 완성된 63빌딩은 88올림픽을 비롯 각종 국가 홍보물에서 한국의 랜드 마크로 떠올랐다.
 
횃불회의 기적
 
77년 어느 날, 새벽기도회 때 엎드려 있는데, “산봉우리마다 마른 가지마다 횃불에 불을 붙여라”음성을 들었다. 그에게 새로운 소명이었다. 이 소명을 순종하기로 하고 모임을 시작했다. 첫모임은 단출하게 3명이 모였다. 친구 하나와 여동생. 시작은 미약했지만 이 모임은 오늘날 세계에 불을 밝히는 ‘횃불’의 발화점이었다(횃불회 소개는 문답 참고).

횃불회의 사역이 점점 확장되고 커지면서 기존의 한남동 회관이 협소했다. 더 넓은 회관이 절실했다. 일은 엉뚱하게(?) 풀렸다.

▲ 2011 한민족 재외동포 세계선교대회에서 개회를 선언하는 대회장 이형자 권사     

“어느 날, 남편이 ‘청와대 경호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도로 땅을 가져가라고 하더군’해요. 현재 횃불회관 자리인 그 땅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 후 사저를 짓겠다고 그 땅을 헐값에 강탈해가다시피 했다. 통치 말기에 그 땅을 다 정비해놓고 5공 비리에 관련되자 그 땅을 다시 팔겠다고 연락한 것입니다.

결국 팔 때보다 세 배를 더 주고 사왔지요. 그 땅을 찾자 남편에게 그동안 횃불회관을 지으려고 안쓰고 저축했던 정성이 담긴 돈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 액수만큼인 3백 평만 가지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이 못마땅했지요, 아무 말도 안하니 일 주일 후에는 5백 평으로, 그래도 반응이 없자, 나중에 1천 평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반응을 안보이자 남편이 불쑥 ‘욕심쟁이’라고 내뱉더군요.

부모 형제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욕심쟁이’란 말을 남편에게서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남편은 백기를 들고 ‘당신 그땅 3,800평 다 가져요’하더군요. 그때 제 입에서 ‘할렐루야!’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 한민족 재외동포 세계선교대회에 참가한 해외 동포들이 개회식에서 인사하고 있다.     

1991년 10월 30일 횃불회관 준공식 때 필자도 참석했다. 그날 이 권사는 트리니티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이후 횃불회를 바탕으로 다양하게 사역을 펼쳐갔다.
 
특히 횃불 전액 장학금으로 한국의 주요 교단 신학교 교수 150명 넘게 배출한 것과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신학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부부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할렐루야교회 창립과 섬김이다.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시고, 기념예배당을 지어드리려 대치동에 정사각형 테니스장을 봉헌했습니다. 나날이 부흥하여 1천여 명 되는 교회로 성장했는데, 갑자기 이종윤 목사님이 충현교회로 가시고 김상복 목사님이 오셔서 교인들이 더욱 많이 늘었습니다. 자리가 비좁아 양재동 횃불회관으로 잠시 옮겨 3, 4년후 분당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 자리가 종교부지로 불교 조계종이 들어갈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안사겠다고 하여 할렐루야교회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산을 하나 샀는데 비싸지도 않고, 온 성도들이 기쁜 마음으로 헌금하여 건축하는 도중 IMF가 왔습니다. 3,4년 동안 아래층만 짓고, 체육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김 목사님 정년퇴임 전에 교회 완공할 예정으로 진행했는데, 마침 남편이 감옥에서 잠깐 나왔을 때, 건축위원장하고 준공한 다음 감옥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때 사면되어 나와 김승욱 목사님을 모셔왔습니다.”
 
질곡의 세월
 
그렇게 기도로 낳고, 기도로 세운 63빌딩을 18년을 지켜왔는데, 정치자금을 주지 않고, 보수파라는 몇몇 이유로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어 빼앗기고 말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의 빌딩, 22개의 회사, 집까지 다 빼앗아 갔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된 사건인데, 김 전 대통령이 ‘내가 그것을 빼앗으라고 했다’고 생생하게 녹화된 비디오도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민감한 사항에 대하여 입조심을 합니다.

남편은 다니엘처럼 하나님이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기적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찾아줄 것이다. 걱정하지마. 이미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미 너희 것이니 마음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숨막힐 듯이 돌아가는 소용돌이 속에 터져 나온 것이 유명한 ‘옷로비 사건’이다. 엄격한 용어로 말하면 ‘명품 옷값 대납 거부사건’이다.

▲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1 한민족 재외동포 세계선교대회(비전 나이트)에서 참가국들의 국기가 단상에 입장했다.    

“그 날이 최 장로 생일이라, 우리 집에서 제부 하용조 목사 부부와 저희 부부가 있을 때 옷가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검창총장 부인을 비롯한 고위인사 부인들이 명품옷을 가져가고 저에게 옷값을 받으라고 한 것이예요. 한두 푼도 아니고 자그만치 1억이 넘는 돈이에요. ‘무슨 그런 일이 있느냐? 못내겠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했지요.

감히 검찰총장 부인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일을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오히려 내가 남편의 어려운 상황을 피하려고 명품옷으로 로비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재판까지 만장의 진술서를 쓰고, 1심부터 3심까지 무죄 나오고, 특검, 청문회까지 해도 무죄고,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왔는데, 끝까지 물고 늘어지더군요. 그 이후로 남편은 2년 8개월 실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때 사면을 받았습니다.”

1999년도에 일어난 이 사건의 충격 때문에 이후 7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가장 어렵고 힘든 질곡의 세월에도 이 권사는 선교를 향한 열정이 식지 않았고, 오히려 더 활발하게 돈이 아닌 하나님만 바라보며 달려왔다. 2007년 워가(WOGA)대회를 기점으로 다시 회복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제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 권사님의 가정 신앙이 굉장히 뿌리가 깊고 좋은 걸로 아는데 들려주십시오,

“외가의 친정 아버지의 할머니 두 분이 계셨습니다. 친할머니와 양할머니인데, 두 분이 초대교회 선교사님들에게 전도받아 예수님을 믿으셨습니다. 성령받고 방언도 하셨습니다. 친정이 서울인데, 할아버지는 사업을 하시면서, 믿으셨는지는 모르지만 그 할아버지에게 일감을 받아 만든 돈으로 할머니 두 분은 개척교회 건축헌금을 하실 정도였습니다.

친정아버지가 그분들의 큰 아들, 팔 남매의 장남으로 큰 손주셨는데, 두 분이 열심히 큰 손주를 위해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 장남의 큰 딸로 태어난 저도 그분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6살 때 성령 체험을 하고, 하늘나라 빛을 받았습니다. 유치원에서 빛이 너무 강렬하게 창문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확 들어와 비쳤습니다. 그 광선은 너무 아름다웠고, 그 신비로움에 그만 황홀한 심정이었습니다. 너무 빛이 비치어 뱅뱅 저 혼자 돌았던 기억이 있고, 빛을 봤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예수님 뵙는 체험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공부한 다음 45년 이화여대 법정대학 설립교수로 부임하여 법대학장 두 번 한 이병길 교수입니다. 아버지는 학자로 정치학 개론, 공산주의 비판 등의 강의를 대강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저도 이대 교양학부 시절 아버지 강의를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앙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매주 대신교회에 나가셨습니다. 김활란 총장님이 대학 중강당에서 하시는 바이블 클래스에 항상 어머니와 저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 2014년 7월 서울에서 개최 예정인 차세대 한민족 디아스포라 세계선교대회 홍보차 시드니를 방문한 이형자 이사장을 비롯한 횃불재단 관계자들을 시교협 월례회에서 시교협 회장, 장경순 목사가 소개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이때 김활란 총장님과의 일화가 있습니다. 김 총장님은 새벽기도회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제가 고 1때, 교수님 사모님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셨어요. ‘내일 전화벨이 따르릉 울리면 내가 깨우는 신호로 알고 새벽기회에 다 참석하세요’하셨는데 그 다음날 아무도 나오지 않고 김 총장님과 저만 나왔어요, 그러자 그분이 ‘우리 둘이 붙들고 기도하자’하시면서 ‘주님, 뜻대로 이루소서~~’하시며 줄줄 기도를 하시는데 평생 못잊을 기도회였습니다.

어머니는 대신교회 권사로 신앙이 좋으셨습니다. 자녀들을 데리고 가정예배를 늘 드렸을 정도입니다. 가정에서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에게 매일 편지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대 부속고등학교를 마치고 이대 동양화과로 진학한 다음에는 김활란 총장님의 전국복음화운동본부에 적극 참여하면서 전국으로 돌면서 전도여행 했습니다.

수요예배 때는 김흥호 목사님의 설교가 비록 성령충만한 설교는 아니지만, 도인처럼 설교하셔서 재미있게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절은 왜 절인지 아시느냐? 절하는 곳이라 절입니다’는 식의 설교였습니다. 어쨌든 제 신앙에 가장 영향을 주신 분은 김활란 선생님입니다. 신앙과 전도 열정, 선생님의 순수한 성정, 인격에서 많은 영향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신약신학 공부를 가르치면서 예수님 이야기도 많이 하시고, 은혜도 많이 받았습니다. 책으로는 요한 웨슬리, 찰스 웨슬리 형제의 책을 많이 읽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 장로님과 결혼은 어떻게 하시게 됐습니까?

“남편은 아버지가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최순영 장로의 누님이 당시 이대 김경희 교수님과 동창이었는데, 김 선생님에게 색시감을 소개해 달라고 했답니다. 김 선생님이 김 교수님 딸이 대학 4학년인데 딴 데서 찾지 말고 여기서 찾으라고 권했고, 아버지는 당시 32세 청년 사업가인 최 장로를 만나고 소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남편이 그때는 가업도 이어받지 않은 상태였고, 시아버님 회사에 다니는 큰 사업가가 아니고, 마대짜는 공장 사장이었습니다. 시아버님은 전시에 부산에서 고무공장을 하셨는데, 당시 고무신이 그 공장에서 나올 정도로 돈을 많이 버셨고, 전시 때 군량미 납품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버실 때, 시어머님은 부산 초량교회 다시시며 건축헌금도 적지 않게 하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 횃불회 설립 과정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34년 전 두세 명의 친구, 친지들이 저희 집에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시작한 구국기도모임이 전국 각지에 말씀과 성령의 횃불, 기도의 횃불로 크게 일어난 것이 횃불회의 시작입니다.

그 이후로 횃불회는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모인 부부횃불, 미용인들이 모이는 미용인횃불, 군선교를 위해 군장성들을 비롯 군인들이 함께하는 기드온횃불, 고아원 원장님들이 모이는 사회사업횃불 등, 직업별, 직능별 횃불회가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횃불회는 한때 전체 회원이 1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큰 횃불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저희는 매년 횃불대성회로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저희는 횃불 대성회를 할 때마다 40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와 성령충만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갈급한 심령 가운데 큰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모임은 구국기도회로 발전해 여러 단체가 연합하여 매달 1,500여 명이 횃불선교센터에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 그럼 그 횃불회의 설립동기와 비전 그리고 핵심가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기독교선교횃불재단은 1980년대 한남동의 한국 기독교선교원으로 시작된 초교파 선교단체입니다. 영적리더들을 세우고 섬기는 것은 저희의 비전이자 사명입니다. 이 비전과 사명을 위해 횃불회(목사, 사모 등 영적리더들을 위한 연장교육 프로그램)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은 매년 봄ㆍ가을학기 동안 매주 월요일마다 정기적으로 전국 13개의 주요 도시(서울, 일산, 대전, 대구, 안동, 진주, 전주, 부산, 울산, 안산, 경남남부, 창원, 제주)에서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횃불재단의 핵심 가치는 말씀과 기도와 성령입니다. 지난 34년 동안의 횃불재단의 사역은 한국 교회와 세계 선교사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뜨거운 기도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성령 충만으로 전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그동안 치러온 횃불회 사역의 굵직한 일들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십시오.

저희 횃불재단은 1995년에 토마스 왕, 루이스 부쉬, 그리고 CCC대표셨던 김준곤 목사님과 함께 186개국 5천 명의 세계 기독교지도자들이 모인 GCOWE’95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우리는 그 대회를 통해 전세계에 12,000 미전도종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천 종족을 우리나라에 떠넘겼어요. 그때 하용조 목사님이 ‘1000종족을 제가 하겠습니다. 1000명의 선교사를 보내겠습니다’했어요.

저 개인으로는 100종족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95, 96년 97년에 횃불신학대학원대학교 시작했습니다. 미전도종족을 초대하여 공부시켜 줍니다. 섬나라에서 많이 오는데, 100종족을 훨씬 넘어 200종족, 800명, 외국인이 졸업생입니다. 3분의 2가 외국인이지요, 원주민 미전도종족 원주민 데려다 공부시킬 때, 조건이 꼭 너희 나라 들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2007년에는 80개국에서 1,200여 명의 여성지도자를 초청한 WOGA2007을 열었습니다.
또 2009년에는 김평욱 선교사와 함께 아프리카여성지도자대회를 우간다에서 열어 1,200여 명의 아프리카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아프리카 복음화를 위해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7월에는 2,000여 명의 디아스포라들을 초청한 제1회 한민족재외동포세계선교대회를 횃불선교센터에서 열었습니다.

내년 2014년 7월 7일부터 11일에는 제2회 차세대한민족재외동포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할 것입니다.

최근 횃불재단은 미전도 종족선교에서 한민족디아스포라선교로선교사역을구체화하면서 2010년에는 멕시코에서 중남미 한민족 디아스포라 대회를 주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계획에 따라 2012년에 중국과 카자흐스탄에서 각각 한민족 디아스포라 헌신자들을 현지의 선교사로 세우는 지역선교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 횃불회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통계에 의하면 전국 교회의 83%가 100명 미만의 소규모 교회들입니다. 횃불재단은 이런 교회들이 부흥하고 성장하기를 진심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014년 차세대한민족 디아스포라 선교대회를 통해서 이런 교회들이 3~4배 성장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선교하는 교회, 기도하는 교회, 성령충만한 교회가 결국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 다른 유사한 기관과 비교하여 횃불회의 차별화된 콘텐츠, 장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횃불회는 이렇다할 교육 기관이 없는 전국 각 지역에서 유일한 목회자 정기교육과정으로서 지난 20여 년간 지역목회자의 학문적, 영적 재충전과 교제의 공간을 제공하는 사역으로 한국교회에 헌신적인 봉사를 해왔습니다. 횃불재단의 횃불회 사역은 지난 20여 년간 한국교회와 목회자를 세우고 섬기는 비전과 사명을 위해 현재까지 입회 및 등록비 없는 무료세미나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횃불회의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회원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횃불회는 대도시 중심사역에서 점차 지역 거점 도시까지 확장하여 한국교회의 영적리더들을 섬길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도시마다 일정규모 이상의 평균 출석만 가능하다면 계속해서 횃불회 모임을 창립해 나갈 것입니다. 또한 지역 교회와 개척교회를 섬기는 횃불회로서 더욱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 2014 디아스포라 세계선교대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이 대회에서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는 일이나 비전, 사명 등을 설명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분명한 음성으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하시면서 저에게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첫째, 해외 동포들과 국내 연고지가 없는 동포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자매결연을 시켜주고 위로해 주라.

둘째, 선교지에서 태어나 그곳의 언어가 능통하고 문화와 풍습과 습관에도 이미 익숙한 현지 선교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한인 디아스포라 2,3,4 세를 불러서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선교사로 삼으라.

셋째, 한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어 민족의 정체성을 깨워 주어라. 이것이 반복되면 너희 민족이 튼튼하여지고 해외동포들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 2014 디아스포라 선교대회의 주요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십시오.

이 대회에 앞서 일주일간 단기선교프로그램(Outreach to Korea)이 있습니다. 이 행사는 해외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전국의 횃불회 소속 교회들을 방문하여 영어성경학교, 전도축제, 문화탐방을 하는 시간입니다. 해외 차세들이 한국 교회와 사회를 접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유산을 둘러보는 시간과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산업시설도 둘러볼 계획입니다. 대한민국의 분단 현실을 몸소 배울 판문점 방문도 계획되어 있습니다.

2014디아스포라 선교대회는 횃불센터와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립니다. 이 시대 최고의 강사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찬양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시간이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현장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 참가방법과 본 대회를 통하여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와 차세대에 기대되는 영향도 말씀해 주십시오.

“교회별로 단기선교팀을 구성해서 참여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외 차세대들에게 많은 재능과 은사를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차세대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령 충만입니다. 요엘서 2장 28절 말씀처럼 “내가 내 영을 부어주리니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2014년 7월 7일부터 11일까지 차세대한민족 디아스포라 선교대회가 횃불센터와 상암월드컵주경기장에서 열리는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는 국내외 65,000명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때 차세대들이 성령 충만을 경험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둘째, 참가자들을 선교사로 훈련시켜 세우는 것입니다. 아웃리치 투 코리아(Outreach to Korea)는 해외 참가자들이 한국의 자매결연 교회들과 함께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복음을 전하는 단기선교 프로그램입니다. 2011년 대회가 해외 디아스포라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한 대회였다면 이번 대회는 해외디아스포라 교회와 한국 교회와의 만남, 해외 디아스포라들 사이의 교류를 통해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강력하게 도전할 계획입니다.”

- 지금까지 사역에서 가장 보람된 일과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디아스포라 대회를 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그 일은 정부가 할 일이지, 한 선교단체가 할 수 있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11년 한민족 디아스포라 선교대회를 마치고 고려인들과 조선족들이 얼마나 우리의 관심에서 사라져 왔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들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마치 바람 부는 대로 흩어지는 씨앗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불러서 위로하셨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셨고, 지난 조상들의 역사가 단지 고난이 아니라 태어난 땅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많은 청년들을 보면서 큰 보람과 감격을 누렸습니다.”

- 이제 권사님께서 여생에 이루고 깊은 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내년이 횃불선교회 창립 35주년입니다. 제 젊음을 다 바쳐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선교에 매진해 왔습니다. 제 남은 여생도 ‘선교’에 쏟으려고 합니다. 지금은 대한민국도 여자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여성의 몸으로 횃불선교재단을 이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많은 기도의 동지들이 함께 해 주셨고,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 주셔서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 SBS라디오 한국어 프로그램에 출연, 주양중 PD와 인터뷰 중인 이형자 권사      ©크리스찬리뷰

2014년 내년 대회가 두 번째 디아스포라 대회입니다. 앞으로는 대륙별로 순회를 하면서 디아스포라 대회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민족을 176개국에 흩으신 것은 언어에 능통하고, 문화와 습관에 익숙한 세대를 통해서 그 나라의 선교사를 삼으시고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 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민족 디아스포라들이 요셉과 다니엘처럼 그 나라를 구원하고 부흥케하는 역할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민족 디아스포라 선교사역에 전심전력을 다할 때, 우리 나라의 경제와 문화를 더 튼튼하게 하시고, 교회를 더욱 부흥케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전 세계 한민족 디아스포라들을 통해서 펼치실 놀라운 일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2014년 7월 디아스포라 세계선교대회 홍보를 위해 시드니를 방문한 이형자 이사장을 포함한 6명의 횃불재단 관계자들은 시드니 지역 한인교회를 방문하는 한편 자문단(대표 주정오 목사)을 구성하고 EM사역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이 디아스포라 21세기 세계선교를 책임진 한민족으로서,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선교자원이 동력화되어 세계선교의 횃불로서 활활 타오르기를 기도하며, 이 일을 위해 새롭게 쓰임받는 것이 저의 꿈이기도 합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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