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가장 큰 미전도 종족입니다
 
대담|송기태 사진|권순형,영락교회
 
▲ 목사의 아들로 3대째 기독교 신앙을 이어온 가문에서 태어난 이철신 목사.      © 크리스찬리뷰
 
이철신 목사, 그는 한국교회 상징과도 같은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의 법통을 잇고 있다. 실향민의 애환이 담긴 교회답게 통일한국을 대비하여 북방선교에 전력을 쏟고 있는 그는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이기도 하다. 이번 달 리뷰초대석에 그를 초대하여 그의 신앙여정과 미래비전을 들어보았다.

- 목사님 반갑습니다. 먼저 목사님의 성장과정과 회심체험을 듣고 싶습니다.

“예, 저는 3대째 기독교 신앙을 이어 온 가문에서 태어나 목사 아들로 교회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제 밑으로 자녀들이 4대를 손자, 손녀들이 5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 마당을 뛰어다니며 자라면서 성가대와 여러 봉사활동을 하면서 열심있는 신앙생활로 교인들이 ‘작은 목사’라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 서울 중구 저동에 자리잡고 있는 영락교회 전경. 1945년 12월 2일 베다니전도교회(영락교회 옛 이름)로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27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 영락교회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체험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말이었습니다. 겨울방학 때 가족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서 회심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경험한 회심을 모태신앙인 저에게 바울의 회심처럼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집회는 눈물 흘림 기도하고 박수치며 찬양하며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온통 울음소리와 박수소리와 기도소리로 가득찬 집회가 부담스럽기만 했습니다. 모두들 정신나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집회를 이끄시는 목사님은 계속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회개할 것이 없는 완벽한 신앙이라고 자부했거든요.

그런데 옆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눈물범벅이 되어 회개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틈에서 저는 쭈뼛쭈뼛 앉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나는 회개할 것이 정말 없는데... 나처럼 학교생활 교회생활 열심히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속으로 이런 교만한 생각을 하면서 주위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 점점 저는 그 시끄러운(?) 집회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회개라는 말을 수십 번 듣다 보니 ‘나도 회개라는 것을 해볼까?’하면서 회개거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옆 사람에게 슬쩍 물어보았습니다.

‘저, 무엇을 회개해야 하나요?’ ‘학생 다 회개하세요, 생각과 삶과 학생의 모든 것을 다 회개해야 해요.’

그래도 막막해하던 저에게 어떤 분이 다가와 십계명을 놓고 하나씩 짚으며 회개해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아! 십계명’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저는 조용한 산으로 올라가 찬송가 뒤쪽에 있는 십계명을 펴놓고 하나씩 죽 읽어보았습니다. ‘제 일은~~~’ 한참 동안 읽어 내려갔지만 저는 안식일을 범한 적도, 간음을 한 적도, 도둑질을 한 적도 없었기에 당연히 회개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다시 훑어보아도 회개의 마음이 생기지 않아 멍하니 앉아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한경직 목사 10주기 성묘예식에서 기도하는 이철신 목사(20 10. 10)     © 영락교회

‘회개할 거리를 찾지 못하는 나 자신, 아니 회개할 거리가 없다고 자신하는 나의 교만한 생각이 죄는 아닐까?’

이것이 첫 번째로 떠오른 저의 회개거리였습니다. ‘그래, 나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이었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교만이 하늘을 찔렀어.’

이렇게 시작한 저의 회개는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성령께서 교만한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그 죄를 회개케 하심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지은 죄들의 현장 화면을 생생하게 보여주시는데, 어디 도망갈 데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입으로 가슴으로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지만,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의 죄를 놓고 심판하실 때는 얼음처럼 얼어붙어 꼼짝을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정말 눈물 콧물 다 쏟았습니다. 저한테 그렇게 눈물과 콧물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완전히 자아가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심과 동시에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회심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줄 알았는데 내가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의 구주가 되셨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얼마나 기쁘고 평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 지난 7월 시드니영락교회 창립 32주년 기념 부흥성회에서 말씀을 전한 이철신 목사.      © 크리스찬리뷰

- 그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는 회심 사건 이후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진지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릴 때 어머니의 젖꼭지를 깨문 것까지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평안을 고백하는데, 그가 경험한 모든 것이 제가 고스란히 느끼는 것임을 발견하고 다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기쁨의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고, 주변의 풀잎들이 온몸을 흔들어 제 회심을 축복해 주는 듯했습니다.

제가 회심한 날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만큼 너무나 선명한 체험이었습니다. 이 회심의 경험으로 저는 비로소 진정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겉보기엔 이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일상생활을 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질적으로 완전히 변화된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냥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에 교회생활을 했다면, 회심한 이후에는 알 수 없는 감동에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하고, 감사함으로 봉사활동에 임하게 되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 그리고 바로 신학교로 진학했습니까?

“사실 저는 교회 다니면서 좀 전에 말씀 드린 ‘작은 목사’란 말을 제일 듣기 싫었습니다. 목사 아들이던 저를 성도들이 그렇게 불러준 것이지요, 그때 저는 목사보다는 다른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정말 부담이 되었습니다.

▲ 한경직 목사 부부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영락동산(광해군 묘 소재) 7단지에 위치해 있다.      © 영락교회

그런데 부모님은 제가 목사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민한 사춘기를 지내던 청소년 시절,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교회나 목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만 골라서 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방식이 싫어 하루라도 빨리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서는 ‘지적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타종교에 관한 책들도 보고, 심지어 유교까지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아버지는 저의 반항에 어느 정도 포기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고등학교 때 회심을 경험하긴 했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도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지고 싶어 집을 떠나 입주과외도 하면서 일부러 아버지가 섬기는 교회에 안 나가기도 하면서 하나님과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에서는 역사학을 공부했습니다. 역사를 가르치는 대학 교수가 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시절 마음속에 끊임없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내가 일생 교수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하실까?’ 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 북방선교비전대회를 마치고(2010년)      © 영락교회

대학원 준비를 하면서 마음 한편에는 불편함을 넣고 다녔습니다. 졸업반이 되었을 때 하나님 뜻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친구들은 하나 둘 진로를 정해 나가는데 저는 계속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4학년 말, 전공과목 책들을 잔뜩 챙겨서 대한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대학원 준비를 하면서 작정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도원까지 왔는데 성경읽기와 기도에도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점점 성경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때처럼 성경이 재미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주르륵 읽어간 것이 아니라 전공과목 공부하듯이 노트에 적어가면서 때로는 암기도 하면서 밤새워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러기를 35일쯤 되었을 때 찬송하고 기도하자 제가 아버지한테 반항하고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우긴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우긴 일들도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 때문에 가족들과도 불편해졌지만 여전히 저를 위해 기도하시는 부모님이 생각났고, 그 기도가 저를 감싸는 듯했습니다. 그 순간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면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는 말씀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찬송 부르며 하나님 앞에 헌신을 결단하고 신학교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 탈북민 포용의 이론과 실체를 주제로 열린 제2회 한국교회와 평화통일 포럼에서 강의하는 이철신 목사                      © 영락교회

- 신학교 졸업 이후 사역은 어떻게 됩니까?

“신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농촌교회에서 1년 넘게 목회하면서 절실히 느낀 한 가지는 ‘나에게 리더십이 없구나. 내가 리더십이 전혀 훈련 안되어 있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리더십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리더십’이란 말도 잘 쓰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때 성경을 한시도 놓지 않고 헬라어, 히브리와 조직신학, 교회사도 열심히 공부했지만 실제 목회 현장에 몸을 던지고 보니 그런 것들보다 더 필요한 것이 리더십이었습니다.”

- 그때 많이 힘드셨군요.

“사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농촌 교회로 사역하러 간다고 하니 주변 분들이 대부분 말렸습니다. 그래도 그런 만류를 뿌리치고, ‘이 나라를 살리는 것은 농촌을 살리는 것이다’라는 소신을 갖고 농촌행을 감행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불타오르던 열정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공명심과 영웅심에서 발현된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군사정권시절이었고, 민주화를 향한 갈망이 대단했습니다. 산업화시대라 대부분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농촌이 피폐해져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젊은 혈기로 가득하던 저는 그런 농촌을 관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고려할 것도 없이 농촌으로 향했습니다. 자동차도 드나들지 않던 상당히 외딴 마을이었는데, 특정 성 씨를 가진 집성촌이었습니다.

▲ 영락교회는 군선교를 위해 6백여 군인교회를 건축했다. 사진은 지난 4월 육군 제5보병사단 수색대대 시온교회 헌당예배를 마친 후 기념촬영.      © 영락교회

그들은 타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천시했는데, 공교롭게도 타성 마을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교회 출석하는 그 특정 성 씨를 가진 젊은이가 두 명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나가자 마을에 부정 탔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은 더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의 첫 목회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단칸방에 낡은 옷장과 몇몇 세간으로 시작한 신혼 살림방은 두 사람이 대각선으로 누우면 꽉 차는 방에 연탄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그 마을은 닭을 많이 키웠는데, 그 때문인지 유난히 파리와 쥐가 많았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꿋꿋이 버티며 복음전도에 힘을 쏟았지만 여전히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가 부임하기 전의 담임 목사님은 여전히 그 마을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열심히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하셨지만 역시 전도가 쉽지 않아 미자립교회 보조금으로 생활이 안되니 생계수단으로 양계를 하셨는데 결국 교인은 안늘어나고 닭만 자꾸 늘어나는 형국이 되니 나중엔 목사직을 사임하고 양계에 전념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교회에 젊은 전도사인 제가 부임해가니 전임목사와의 관계도 어색했고, 예배시간도 농사일에 맞춰 당기기도 하고, 뒤로 미루기도 했습니다. 닭 모이 주는 시간과 겹치면 예배시간이 뒤로 미루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이 아닌 농사일이나 양계중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제직회를 하면 얼마 안되는 교인 중에 집사가 세 분 있었는데 매번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아 좀체 의견의 합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더니 나중에는 저의 설교가 어렵다느니 하면서 진정서를 내 시찰회에 불려 다니기도 했습니다.

처음하는 사역에서 심한 난관에 부딪히니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또 매달렸습니다. 참으로 목회는 늘 도전을 받는 사역임을 절감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 극복하였습니다. 이처럼 힘들게 사역하다 군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 이철신 목사(맨 앞)가 산상기도회에 목회자들과 함께 했다.(2009)      © 영락교회

- 그리고 유학도 다녀오셨지요?

“제가 늦은 나이에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동안의 현장 목회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학문과 폭 넓은 견문을 위해서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습니다만 유학생활은 제게 광야생활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족과 떨어져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가족들에게 내가 해야 할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낯선 문화 속에서 자존심이 상했을 때, 공부에 진전이 없고 성과가 낮을 때, 가족들의 어려운 소식을 들었을 때, 몸에 병이 들어서 괴로울 때, 더 많이 외로웠습니다. 이렇게 힘든 광야생활을 이겨낸 방법은 단 하나였는데, 그것은 기도였습니다.

기도실에 낮이나 밤이나 찾아가서 기도했습니다. 방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했고, 운동장에서 조깅을 하면서 기도했으며, 차를 운전하며 길을 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는 해결 방법이 없었습니다.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지 않으면 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않고는 마음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참 견디기 힘든 광야 생활이었지만, 그러나 그 광야생활은 저나 제 가족에게는 훌륭한 훈련의 기간이 되었습니다. 학문연구를 예정대로 잘 끝내고 다시 가족을 만났을 때, 가정과의 유대감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와 제 가족의 신앙이 몰라볼 정도로 성장하고 성숙했습니다. 광야생활은 힘든 것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익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 그 당시 이민교회도 경험하면서 장래 목회 비전을 다듬기도 했을 터인데요.

“예, 제가 LA에서 사역하고 있을 당시, LA 흑인폭동사건이 일어났습니다. LA 흑인폭동사건으로 남부 LA흑인지역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성도들이 많은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었습니다. 또한 1994년에는 많은 희생자를 낳은 LA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 지진으로 교인들도 많은 피해를 받았습니다. 그때에 피해 입은 교인들 가정을 일일이 심방하며 위로하였고, 그들이 말씀과 기도로 치유되고 회복되는 과정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기인 1991년도에 동구권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때 전 세계가 북한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북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아무리 자료를 찾아도 미국 선교단체가 내놓은 북한 관련 자료는 거의 없었습니다. CIA에서 나온 자료가 전부였습니다.

남태평양 조그만 섬에 대한 자료도 있는데 북한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제 나름대로 두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는 북한이 워낙 폐쇄적인 나라이니 통계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신빙성있는 자료를 구하지 못한 것이라는 거지요.

둘째는 남한이 워낙 기독교가 자리를 잘 잡고 있으니 굳이 미국 선교단체가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남한 상황을 한반도 전체 상황으로 보고 북한을 미전도 종족으로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북한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미전도종족입니다.”

- 이제 영락교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전통적인 교회에 더구나 한국 교계의 거목이신 한경직 목사님이 사역하시던 곳이라 초기에 어려움도 많으셨다는 소식도 접했습니다.

“1997년 영락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영락교회 전통의 시작은 고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한 목사님은 우리 교회의 표준입니다. 교인들은 모든 목회자들을 ‘한 목사님은 이러셨는데’하며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합니다. 거기에 제가 미칠 수 없지요. 저도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대를 가진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는 영락교회 5대 목회자입니다. 5대까지 내려오면서 기준이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기준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에 기준, 즉 틀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정체성대로 목회해나가면 되지요. 이제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한 목사님의 목회 정신은 지금도 구현돼야 합니다. 그 전통을 바탕으로 영락교회는 언제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영락교회의 최대 장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안정된 교회라는 점입니다. 조금 어려움이 있어도 안정이라는 기조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일하다가 갈등을 겪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이 교인 전체에까지는 미치지 않습니다.

영락교회라는 배는 지금 평안한 가운데 순항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도 있었지만 미풍으로 그쳤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아 영락교회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새로움을 추구해나가야 합니다. 안정된 교회는 좋지만 늙거나 경직된 교회가 돼서는 안 됩니다.

전통과 품격을 지니면서도 젊은이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2000년 4월에 한 목사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종교계의 거목이신 한 목사님을 가까이서 뵈면서 그 분의 신앙과 온유한 인격에 많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신앙의 선배이신 한 목사님은 뵙기만 해도, 그 말씀을 들어도 예수님을 닮은 분이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온유와 겸손이 몸에 배신 분이셨어요.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영락교회 창립 초기에, ‘경건한 복음주의 신앙의 육성, 성서적 생활 윤리의 훈련, 교회연합정신의 구현, 세상에서 하나님 공의실현’이라는 4대 신앙지도원칙과 ‘교육, 선교, 성도의 교제, 봉사’ 라는 4대 목표를 정하여 우리 교회를 이끌어갈 기본적인 목회 원칙과 나아갈 방향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68년 동안 우리 영락교회는 일관되게 이 뚜렷한 기본 목회정신과 목적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 목사님께서 세운 이 4대 신앙지도원칙과 4대 목표를 충실히 이행해 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 이철신 목사      © 크리스찬리뷰

- 목사님께서는 통일사역에 각별한 정성을 쏟으시는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해서도 들려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영락교회는 1945년 공산치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이북 피난민들과 한경직 목사님께서 세운 교회입니다. 1992년도에 한 목사님께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일려진 템플턴상을 받았습니다. 템플턴 상금 103만 미국달러를 받은 즉시 전액을 영락교회에 북한선교헌금을 하셨습니다.

그 기금은 지금도 영락교회가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신을 본받아 영락교회 성도들 중에는 한 목사님 뜻에 따라 재산을 통일 후 북한교회 재건 기금으로 헌금하는 분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락교회에 큰 신앙적 유산입니다.

사역적인 면에서는 먼저 자유대한에 온 모든 탈북민들이 영락교회에 와서 생필품을 받아가고 있습니다. 영락교회는 과거 피난민 시절에 세워진 교회로 그 당시에 천막교회를 찾아온 분들에게 주먹밥을 제공했습니다. 먹을 것이 귀한 그 시기에 영락교회에서 주먹밥을 먹고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을 영락교회 담임목사에게 표현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기반으로 한 교회이기에 북한을 탈출해서 대한민국에 온 모든 분들에게 영락교회는 생필품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전달하는 모임을 갖을 때 영락교회의 땅을 밟는 기회를 가지고 아울러 복음을 듣는 시간이 됩니다.

아울러 북한선교사역에 있어서 영락교인들에게 북한을 이해시키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영락교회는 1998년부터 북한선교학교를 매기마다 100명 이상씩 모집해서 교육을 시켜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22기가 배출되었습니다. 이 교육의 목적은 영락교인들에게 북한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를 돕는 데 있습니다. 본 과정을 마친 분들 중에는 신청을 받아서 북중접경지역을 다녀옵니다.

이외에도 영락교회는 신의주에 있는 평안북도 소아병원을 현대화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필요한 소모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영락교회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북한 땅과 나누기 위하여 북한 어린이들과 환자들을 대상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 북한사역을 하시면서 특히 인상에 남은 일도 많았을 터인데요.

“남북 분단 60년, 지금 당장 통일이 되어도 정치적으로는 통일이 될 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통일이 되려면 최소한 60년이 더 지나야 할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남한교회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북한을 복음화시키고, 북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주체사상을 끄집어 내여 그 안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황장엽 박사가 한국에 온 다음 한 목사님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 많은 이야기를 나눈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제가 그분께 물었습니다.

‘황 선생님, 무엇이 북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주체사상입니까?’하니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어렵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주체사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상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북한 사람을 세뇌하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오히려 북한 사람들의 머릿속은 진공상태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황 선생님은 무엇이 북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황 박사의 대답이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지배하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대답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주체사상을 만든 사람이, 그가 기독교 집안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닌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다니’ 말입니다. 단지 그분의 누님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시집가면서 황 박사만 만나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박멸의 대상으로 보는 북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그의 누님은 용기 있게 전도를 한 것입니다. 노동당 비서인 자신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이야기하며 건실한 삶을 사는 누님을 보면서 존경의 마음이 생겼고, 우리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방법과 길은 기독교뿐이라고 했습니다.”

- 영락교회에서는 군선교와 학원선교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족복음화 사역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두 개의 큰 기둥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군선교이고, 또 하나는 학원선교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을 선교하는 데는 이 둘보다 더 좋은 황금어장은 없습니다.

일찍이 한 목사님은 이 사실을 절감하시고 여러 학교를 세우셨습니다. 현재 영락교회는 영락중학교, 영락고등학교, 유헬스고등학교, 대광초등학교, 대광중학교, 대광고등학교, 보성여자중학교, 보성여자고등학교 이렇게 8개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수고하는 교사들만 1천여 명이 됩니다. 이것은 영락교회가 한국사회에 기독교지도자를 배출한 사역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중점적인 사역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영락교회는 군복음화를 통한 민족복음화의 비전의 깃발을 높이 세운 교회입니다. 군교회 건축을 지금까지 600개 이상의 교회를 건축하여 헌당을 했습니다. 지금도 매년 1개 교회 또는 2개 교회를 지어서 헌당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아울러 장기 군목들 18명을 기도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 이제 마무리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사역의 꿈과 사역을 한 번 더 정리해 주십시오.

“개인적으로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은 기도와 경건훈련을 치열하게 지속적으로 하여,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일 아니,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어제와 똑같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경건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필생의 소망은 통일된 북한에 가서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고, 교회를 재건하는 일입니다. 영락교회는 앞으로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지하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할 선교훈련센타를 주요 도시마다 세울 것입니다. 북한교회 재건의 주축은 북한교회 지도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희는 그들이 부족한 교회경험을 보완해 주는 훈련을 시켜서 온전하게 교회가 재건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희는 통일사역자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영락교회가 통일 후에 북한에 가서 일인 일봉사자를 모집했을 때에 1천2백 명이 신청을 했습니다. 이들을 훈련시킨 교재를 개발하기 위하여 장신대에 교재개발신청을 해서 교수들이 연구 중에 있습니다. 이제 9월이 되면 영락교회 은퇴 시무 장로님들과 목회자 100명이 최초로 훈련을 받을 계획입니다.

그러나 이런 큰 사역도 중요하지만, 가장 큰 경험과 감동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회심시키는 전도입니다. 아울러 소그룹을 통해서 교인들의 회심과 헌신을 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전도와 소그룹을 통해서 성도들의 냉랭해졌던 신앙에 열정이 다시 회복되어지고 재헌신하는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 목사는 빌립보서 4장 4~7절 말씀(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을 늘 묵상하며, 찬송가는 ‘예수 사랑하심을(새찬송가 563장)을 꼽았고, 추천하고 싶은 도서로는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존 번연의 <천로역정> 등 고전을 꼽았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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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8/30 [17:15]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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