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삼모작 인생

(사)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사무총장 강승삼 목사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4/09 [12:19]
 
▲ 강승삼 목사는 어디에 있든지 일하면서 공부했고, 공부하면서 일했다. 학교생활, 교회생활, 가정생활까지 합하면 철저히 삼모작 인생을 살아왔다.   © 크리스찬리뷰
선교는 그 나라 기독교의 자존심이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나라 기독교의 역동성과 정신적 건강과 성숙도, 자원을 가늠할 수 있는 총체적 집합처라고 할 수 있다. 선교의 수준에 따라 그 기독교의 나라의 격(格)과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흔히 우리는 이야기 한다.
 
'21세기는 한국 주도의 세계 선교의 세기'세계 선교의 마지막 주자'오늘의 성서한국 내일의 세계선교' 등등 지극히 당연한 '선교'란 명제에 최상급의 구호를 갖다 붙인다. 
 
그렇다고 그게 구호로만 될 일인가? 구호로만 될 일이라면 한국 주도의 세계 선교는 벌써 지구를 몇 바퀴나 돌고도 남았을 터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선교를 위한 철저한 인프라 구축, 최고의 선교정책을 수립하며, 수십 개에 이르는 선교단체를 네트워킹하는 키를 쥐고 협력과 연합으로 세계선교를 완성하고자 하는 한국세계선교협의회(이하 KWMA) 사무총장 강승삼 목사를 만났다.
 
그를 만나면서 두 가지 인상을 갖게 되었다. 참 부지런한 삼모작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과 '생각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그는 79년도 목사안수 받은 직후부터 선교사로 서부 아프라카 나이제리아 북부 모슬렘 지역에서 11년반 동안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선교지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현지인 신학교를 세워서 신학교 사역과 교회 개척 사역을 했습니다. 주로 신학교 사역이었지요. 11년 반 동안 300여 명의 흑인 지도자를 길러냈습니다. 그러다가 91년도 예장 합동측 총회본부 안에 있는, 교단 선교단체 산하 선교사 2천 100명을 관리하는 GMS 선교부 디렉터로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97년도부터 총신대학교 선교대학원 교수로 부임하여 선교대학원장도 하고, 2006년 12월에 은퇴했습니다. 2001년 1월부터 KWMA 사무총장(대표 회장 박종순, 이사장 길자연 목사님)을 했는데, 교수직을 은퇴한 2007년부터 KWMA에서 풀타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하는 그의 지난 일들을 보아도 단 하루도 낭비되지 않게 꽉 찬 날들을 보낸 것 같다. 아니 꽉 찬 정도가 아니라, 지난 세월을 되돌려 놓고 보면 삼겹으로 차곡차곡 들어찬 것임을 알 수 있다. 

 
▲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사무총장 강승삼 목사     © 크리스찬리뷰
일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일하고 

그는 모태신앙으로 3대째 신앙을 이어오는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러니까 아들 손자까지 있으니 현재 5대째, 제 할머니부터 제 손자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5년 동안 살다가, 해방이 되어 부산으로 와서 정착했습니다. 어머니의 고향이 제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0년 군입대하면서 서울에서 살게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이력서 상에 한 줄로 기록될 만한 것들을 여러 문장으로 엮어놓은 것 같다. 그렇지만 이면의 내용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공군으로 인사행정직과 군종직으로 생활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교직과목을 이수하여 교사자격증을 받아 교사생활을 10년 했습니다. 선교지인 모슬렐 지역에 영어교사 생활 10년으로 비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거기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고 신학교 사역을 했지요. 아프리가 57개국은 영어권이 22개국, 불어권이 24개국, 아랍권 7개국, 포어 스페인어권이 있습니다.  

나이제리아에만 해도 456개 민족과 언어가 있습니다, 나이제이라 북부에 33개 민족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찢어지도록 가난한 생활도 공부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했고, 고등학교도 밤에, 대학도 밤에 야간만 다녔다. 

"신학교(총신 신대원)만 주간으로 공부했습니다. 이때는 낮에 신대원 나가고, 밤에는 영어 교사를 했습니다. 교회 교육전도사 해야지,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해야지 그때가 제일 바빴던 것 같습니다" 

군대서 마친 대학생활, 그때 받은 교사 자격증으로 교사 생활에 자족하며 지낼 수 있었지만, 그는 도전하며 기회를 찾고, 틈새를 뚫고 들어갔다. 기어코 성취해 냈다. 군생활을 하면서 대학 생활한다는 게 말이 쉽지 그게 어디 흔한 일인가? 또 야간 직장생활하며 신학교 다니는 일이 쉬운 일인가? 하나같이 쉽지 않은 굽이굽이에 혼자만 흘리는 눈물이 '주의 병'에 가득 찰만한 애환이 숨어있을 듯한 생활이다. 
 

▲ 평생 선교를 위해 삼모작 인생을 살아 온 강승삼 목사     © 크리스찬리뷰
기회는 대기하고 있었다 

"공부하고 기다리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고 한 링컨의 말처럼, 그에게 공부한 것만큼 항상 기회는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선교사역을 하면서도 안식년 때인 84년도에 콜롬비아대에서 9개월만에 2년 코스 논문까지 다 마칠 정도였다. 

"과거 다른 곳에서 공부한 것까지 다 인정해줬습니다. 박사과정 입학해 놓고 아프리카 갔다가(선교지) 신학교 방학 때마다 가서 공부했습니다. 두 번째 안식년 때는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논문을 다 못써서 다시 필드로 갔습니다. 91년 2월에 총회본부에 들어와 GMS 디렉터를 하라고 하여, GMS 디렉터를 하면서 거기서 허락받고 논문 써서 95년도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처음엔 일하면서 논문을 못쓸 것같아 사표를 내고 논문을 쓰려는데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휴가 4개월 받아서 논문을 썼습니다. 그 전에 논문 자료 다 수집해놓은 덕분입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일하면서 공부했고, 공부하면서 일했다. 학교생활, 교회생활, 가정생활까지 합하면 철저히 삼모작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공부를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고 항상 이중이고, 복합적인 생활이었습니다. 항상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그런 생활이 55세가 되는 95년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가르치기는 오래 했지만 박사과정만 10년 했습니다. 85년도에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 95년도에 학위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나중에는 포기하려고 하니 꼭 화장실에 갔다가 안닦고 나온 것 같아서 사표내고 하려고 했지요. 그랬더니 총회 결성된 후 유급 휴가 4개월 받은 케이스는 처음으로 받아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GMS 선교 디렉터를 만 7년 하면서도 삼모작 인생을 살았다. 총신대 선교대학원에서 계속 강의를 한 것이다. 박사 학위를 받고나자 97년부터 정교수로 부임하고, 대학원장 하다 65세 되어 은퇴하게 되었다. 이때도 그에게는 예의 삼모작 인생은 예외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1년부터 KWMA 사무총장을 맡아서 3가지 일을 했다. 

그가 이런 생활을 한 데에는 보이지 않는 내조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공군 시절에 만난 부인 덕분이다. 

"64년 대구 군종실에서 근무할 때 성가대원으로 4년을 사귀다 교사생활 할 때 결혼했습니다. 공군 덕을 많이 봤지요.아프리카에서 전기와 수도도 없는 곳에서 타이프 라이터로 호롱불 켜놓고, 타이핑해서 교재를 만들면서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지금도 어깨가 결릴 정도로 아프다고 합니다. 그때 가르쳤던 자료들을 지금도 써먹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고생 많이 시켜서 미안하고 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랬던 부인이지만 처음엔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솔직히 선교지에, 그것도 아프리카 선교사로 나간다니 '나는 못간다'고 해요. 아내가 못가면 저도 못가는데... 목사까지는 용납한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선교에 대하여 도전받을 수 있는 책을 문지방에 던져놓고 가면 저녁에 들어오면 없어졌어요. 일 주일 후에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 반복되었는데, 나중에 '여보 내가 철야기도를 하려는데 아이 좀 봐주세요'그래요. 기도원에 가서 일 주일만에 눈물 콧물 범벅되어 나와서 응답받았다고 하더군요. 달밤에 둘이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게 부인은 선교의 소명을 받아 함께 떠날 수 있었지만 다음은 아이들이 문제였다. 아이 둘이 있었는데 아이들도 아프리카는 안간다고 하면서 할아버지랑 살겠다고 했다. 그래서 퇴근 때마다 10원짜리 '짱구'를 사왔다.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한국에 귀했던 바나나를, 한물간 바나나였지만 계속 사다주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계속 지켜보다 어느 날 말했다. 

"애들아 엄마 아빠가 가려고 하는 아프리카에는 온집안이 바나나야,"  일 주일 후에 얘들끼리 의논해 결론을 말해 주었다. 

"엄마 아빠랑 같이 갈 수 있어"
  
▲ 강승삼 목사는 한국이 살 길은 선교민족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 크리스찬리뷰
이렇게 아프리카 선교 결단을 하고,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비행기 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바로 "아빠 바나나 나무 어디 있어"였다고 한다. 
 
그렇게 물었던 그 딸이 이제 41세인데, 캄보디아 선교사로 헌신하여 아이가 넷이라고 하였다. 그것도 아프리카에서 너무 외로워서, 그 처절한 외로움을 경험했기 때문이란다. 딸 내외는 선교사로, 캄보디아에서 프놈펜이 아닌 깜뽕참이란, 수도에서 3시간 떨어진 곳에서 사역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곳은 오지라 아이들을 멀리 데려다 놓을 수 없어 홈스쿨 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 함께 떠난 아들은 UC 샌디에고 의과대학교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데 아이가 셋이라고 하였다. 

"고등학교까지는 아프리카에서 다녔습니다. 한국에 대학을 시험쳤고 합격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애들을 100% 장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돈이 있었나요? 하나님께서 길러 주셨습니다. 요즘도 바나나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웃습니다. 허허. 사실 그동안 우리는 애들하고 같이 못살았습니다. 기숙사 학교에 있고 우리는 부시에 갔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소원이 애들과 같이 사는 것인데 그동안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다가 이번에 아들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교 초빙교수로 옵니다. 그래서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 살 수 있습니다." 
 


▲ 미국그레이스 신학대학원 호주 캠퍼스에 계절학기 강의를 위해 호주를 방문한 강승삼 목사(가운데)가 본지 송기태 편집국장(오른쪽)과 함께 ©크리스찬리뷰
 
핍박 속에 성장하는 교회 

그가 선교지에서 신학교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현지 교회가 신학교를 해달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선교지에 도착하니 이미 61년도에 카나다 선교사가 들어가 1년 6개월 동안 사역하다가 실패한 곳이다. 

 "왜 그런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어쨌든 현지 교회가 그곳에서 신학교를 시작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맨 처음 40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학생들이 200여명 됩니다. 처음에는 학위를 주는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디플로마 과정으로만 시작했다가 지금은 학위까지 줍니다. 에까 빌리리 신학교인데 지금은 교장이 1회 졸업생으로 현지인입니다. 교수들도 현지인들이고, 자급자족합니다.  

모슬렘과 기독교가 공존하는 곳이지만  마찰하는 국가입니다. 제가 있을 때인 81년도에 일 주일 동안 기독교회 152개를 불사르고 교회 지도자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현지 기독교 목회자들이 불탄 교회 돌멩이를 하나씩 들고 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모슬렘들이 그들에게 덤벼들까봐 옆에서 돌을 들고 서있었습니다. 기독교 목회자들이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면 어떤 모슬렘은 돌을 가만히 내려놓고 설교를 듣고, 어떤 모슬렘은 가만히 돌아갔습니다. 그 사건이 오히려 기독교가 부흥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90년도에도 있었다고 한다. 신학교 주변에 32개 교회를 불태우고, 아이 밴 여성의 배를 갈라 죽이고, 자동차를 덮쳐 기름을 뿌려 태워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사건들은 기사화되어 외부에 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은 북부 나이제리아 19개주가 사리야 법(코란으로 법을 집행하는 헌법 위의 법으로 코란을 인정하는 모슬렘 국가임을 천명)의 지배를 받습니다. 나이제리아 전체는 헌법이 위에 있지만, 19개 주는 똘똘 뭉쳐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대통령은 기독교 대통령이만, 여전히 기독교와 모슬렘 간에 가장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는 제일 격전지입니다. 그러나 나이제리아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2020년까지 해외 선교사 5만 명 파송하겠다고 야심찬 계획을 실행하는 나이제리아 교회입니다." 

기독교회는 이런 핍박 속에서 계속 선교해왔고, 성장해왔다. 이것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핍박받으면서도 계속 선교하는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지만, 너무 자유스럽게 신학이 진보적으로 가는 나라의 교회는 미래가 민족의 미래가 밝지 못한 것이 교회사의 증언이다. 여기서 강 목사는 주목할 만한 말을 들려주었다. 

"영국이 300년 동안 존 녹스 중심으로 거룩한 민족, 홀리니스(holiness) 운동을 하고, 200년 동안 토마스 차머 중심으로 라이쳐스(righteous), 즉 의로운 민족운동을 할 그때 산업업혁명 일어나고, 옥스퍼드 등 일류학교가 세워지고 최고 일등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초반에 학교에서 성경도 안가르치고, 기도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슬렘이 들어오고 모스코를 세울 때 지도자들이 함께 테이프 끊고, 오일 달러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영국의 앵글리칸 교회 700개가 팔려 400개는 모스코가 되고, 300개 술집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 건물이 말입니다. 런던시민 17%가 모슬렘이고, 영국 전체 시민 가운데 7-8%가 모슬렘입니다. 심지어 작년에는 영국 의회에서 일부다처제 가정에 혜택을 주었습니다. 일부다처제를 허락한다는 내용입니다. 

영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모슬렘 달러가 유입되니 맥을 못춥니다. 영국교회가 동성애를 인정합니다. 영국의 정치적, 국제적 영향이 점점 좁아집니다. 500년 동안 청교도 정신으로 거룩한 민족운동, 의로운 민족운동을 할 때, 노예제도가 없어졌으며, 그때는 세계에서 제일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15위 안에도 못들어갑니다"
 
선교지 현장경험과 더불어 선교행정, 선교신학 등을 인생 삼모작으로 경험하며 세계와 역사를 보는 안목을 키워온 그는 정년 퇴임이 없다. 지금도 선교회와 선교사들의 네트워킹을 위하여 불철주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강 목사는 우리 민족이 살 길, 우리가 세계 교회사에 공헌할 길을 역설했다. 

"2006년도에 '타겟 2030운동'을 결의했습니다. 2030년까지 선교사 10만 파송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모든 교단과 선교단체들이 그렇게 하자고 합의했습니다. 미주 디아스포라에게도 10%를 감당하라고 했습니다. 호주도 뉴질랜드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21세기 마지막 때에 한민족을 선교민족으로 감당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선교민족이 되어야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민족이 됩니다." 

한국은 이미 2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제2위의 선교사 파송국이 되었다. 한국이 살길은 선교민족이 되는 길밖에 없다. 선교에 앞서서 거룩한 운동, 성시화 운동이 확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교민족이 되는 운동을 계속 확산시켜야 한다는 게 강 목사의 지론이었다. 

경제적인 여건이야 하나님이 주실 것이지만, 우리는 순종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하여 나가야 한다고 거듭 역설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선교민족이 되게 하여 주소서, 2030년까지 10만 선교사를 파송하게 하소서!' 

이것이 평생 선교를 위해 삼모작 인생을 살아온 그의 변함없는 기도제목이라고 하며 여운처럼 한 마디를 첨가했다. 
 
"그때가 되면 우리나라가 선교 1등 국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거룩한 욕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심입니다. 우리 민족을 향한 비전이며, 제가 선교운동을 하는 비전입니다."  
 
 
글/송기태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