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우리 남매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음 음악신학교 총장 윤항기 목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3/10/28 [10:04]
▲  윤항기 목사   © 크리스찬리뷰

거지가 된 남매

동족상잔의 비극, 6.25는 많은 사람의 인생을 황폐케 했고, 인생의 운명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붙였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전쟁 앞에서는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서울대 음대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 1회 졸업생으로 일본유학까지 다녀와 오페라부터 악극, 연극까지 주도한 윤부길 씨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인은 천재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제자인 성경자(예명 고향선)로 일본 유학시절 ‘라미라 가극단’에서 활동했다.

이들 부부는 해방 후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악극단 ‘부길부길쇼’를 창단하여 대중의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대중문화를 주도한 엔터테이너들이었다. 한국 전쟁 발발하자 국가의 부름을 받은 이들 부부는 허장강, 김승호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을 모아서 국군위문단을 조직해 군부대를 다니며 헌신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최전방부터 부산의 유엔군 위문까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잠시나마 군인들의 심신을 달래주던 이들은 피곤도 극에 달했다. 휴전되기 1년 전, 부인이 강원도 묵호지역 공연도중 무대에서 30세의 꽃다운 나이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윤부길 씨 역시 그 충격을 받고 3년 뒤 42세에 부인의 뒤를 따라갔다. 문제는 그들 슬하에 남겨진 열 살 안팎의 윤항기, 운복희 남매였다. 그때 그 시절부터 윤항기 목사(예음교회 담임, 예음음악신학교 총장)는 담담히 밝혔다.

“그때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남매를 위해, 특별히 연단하신 일인지 모르지만 갑작스런 비보가 엄청나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전쟁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전쟁 전후로도 부모님은 지방 공연을 하다 보니 돈벌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당신들 스스로도 그토록 일찍 죽으리라고 상상도 못하셨기에, 자식들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습니다. 방 한 칸은커녕 단돈 10원도 우리를 위해 남겨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우리 남매는 고아가 됐습니다. 서러운 고아도 서럽지만 잠잘 곳이 없었으니 더 서러웠습니다.”

조실부모한 이들 남매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때 ‘그런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코스가 청계천이었다.

“지금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청계천’하면 아름다운 곳으로 변신했지만, 전쟁 전후에 정말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거류지였습니다. 다리 밑은 넝마주이, 거지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우리 남매도 결국은 오갈 데가 없으니 그곳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어린 남매는 춥고 배고픈 험난한 시련을 넘어야 했다. 추운 겨울 체감온도는 영하 30도를 넘었다. 한강물이 얼어붙을 때였다. 이때의 추위를 실감나게 말했다.

“6.25 당시 아군들이 후퇴하면서 한강 다리를 끊어놓고 갔지요, 1ㆍ4 후퇴 때 한강물 얼음 두께가 30센티였을 때 남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이 아무리 뛰어도, 심지어 차가 지나도, 탱크가 지나도 안 깨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강 얼음 두께가 자그마치 1미터가 될 정도로 추웠습니다. 그토록 추운겨울에 거지가 깡통 차고 다니면서 굶어 죽고 얼어 죽던 때였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청계천에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했습니다.”

오후 5시만 되면 캄캄해지는 겨울철. 불도 없이 거지들이 바람막이만 겨우 한 다리 밑에서 생활했다. 이들 남매도 예외는 아니었다. 길고 긴 겨울밤 눈물이 얼어붙을 때까지 남매는 끌어안고 밤새도록 울었다.

“잠들면 죽는다고 하니 잠을 못 잤어요. 새벽에 지쳐서 잠들면 매일 돌아가신 부모님이 꿈에 나타났습니다. 하루는 꽃밭에서 우리 남매를 오라고 손짓을 하셨습니다. ‘항기야 복희야!’하고 부르니, 우리는 ‘엄마!’하고 부르면서 손잡고 막 뛰어갔습니다. 엄마 발자국 앞까지 갔는데, 더 이상 발자국이 떨어지지 않아요. 깨어보면 꿈이었고, 그렇게 서러웠습니다.”

▲ 윤항기 목사는 “노래하는 목사로 살아온 지난 20년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다. 나의 인생에서 노래와 신앙은 뗄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 크리스찬리뷰

움막 앞에서 종을 울리신 하나님

춥고 서러운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은 배고픈 것이었다. 깡통 차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빌어먹을 곳이 없었다.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면서 구걸해도 얻어먹을 것이 없어서 얻어먹지 못할 정도였다. 먹고 남은 찌꺼기 음식도 없었다. 버리는 음식이 없었다. 쓰레기통을 뒤져도 먹을 것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어린 남매의 삶은 얼음 위를 맨발로 달리는 것처럼 차디찼다.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고통인 ‘배고픈 고통’으로 처절하게 생활하던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그날 아침에도 엄마 아빠를 만나는 그런 꿈을 꾸고, 비몽사몽간에 갑자기 ‘천당 천당’ 하는 종소리가 들렸어요.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갔나? 이게 꿈인가, 생신가?’ 구별이 안갔어요. 조금 있다 바로 우리 움막 앞에 종소리가 크게 들려서 있는 힘을 다해 움막 거적을 걷고 나가 보았습니다. 사실은 우리 남매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며칠 동안 움막 안에 기절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침에 움막을 걷고 나가보면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시체가 지천에 깔려있던 때, 누구하나 불쌍하다고 거적때기 하나 덮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에서 죽어나갈 뻔한 그들에게 그 종소리는 복음이었고, ‘찾아오신 주님의 음성’이었다.

▲ 동생 윤복희 권사와 함께 한 윤항기 목사    

“우리도 그렇게 죽어갈 뻔했던 거지요.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는 비참한 그때, 바로 앞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렇게 우리 남매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북에서 피난온 목사님들이 바로 우리 남매의 움막 바로 앞에 천막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면서 이들 남매는 우선 허기를 메울 수 있었다. 천막교회로 전 세계 구호물자가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우유가루, 강냉이가루로 죽을 쑤어 주변의 거지들에게 나눠주었다.

“우리가 명색이 거지 아니었습니까? 항상 얻어먹을 깡통은 준비되어 있었지요, 내 깡통 복희 깡통, 이렇게 깡통 2개를 들고 일착으로 가서 옥수수 죽을 받아와서 정신을 잃고 죽어가는 복희 입에 떠먹였습니다. 며칠 동안 굶었던 복희가 두 깡통을 다 먹고 겨우 깨어나면서 ‘오빠, 나 배고파!’ 하더군요. 그렇게 먹고 살아났습니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 남매는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남매를 살리시려고, 그 긴 청계천에서 하필이면 우리 남매 움막 앞에 천막교회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들 남매는 그 교회에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노래를 잘한 것이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동기가 되기도 했다.

▲ 시드니순복음교회 한영혼 초청 대잔치에서 말씀을 전하며 찬양하는 윤항기 목사     © 크리스찬리뷰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노래가 잘 됐어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였지요. 천막교회 심부름하면서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 그 길고 추운 겨울을 천막교회서 먹여주고 재워주었습니다.”

교회를 통해 춥고 배고픈 데서 해방된 이들은 감사가 저로 나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굶어죽이지 않고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나라 따뜻한 곳으로 우리 부모님 가게 해주세요, 우리 남매 돈 많이 벌어서 우리처럼 못살고 가난한 사람들과 아이들 도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러면 우리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 하고 기도드리면, 꼭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이사야 43장 10절 말씀이었어요.

그 어린 시절부터 이 말씀이 뼛속 깊이 새겨져 나중에 ‘여러분’을 작사 작곡하는 우리 남매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 시드니순복음교회 한영혼 초청 대잔치에서 색소폰 연주하는 윤항기 목사                      © 크리스찬리뷰

처음 맛본 용서

이렇게 남매는 죽음의 터널을 헤쳐 나오며 예수님만 의지하기로 작심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성장과정에 우여곡절을 적지 않게 겪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죽으면 죽으리라 온전히 몸과 마음을 영혼을 다 바쳤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 살면서 하나님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과 하나님께 절반씩 양다리 걸치면 안된다는 것을 절감한 세월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세상의 더러운 것을 벗어던지라. 세상과 벗하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온전히 나에게 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오라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나는 너무도 당연한 이 말씀의 진리를 잊고 지냈습니다.”

천성적으로 음악의 피가 펄펄 끓어오르던 열일곱 살 되던 해, 그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김희갑 씨를 찾아갔다. 부친과도 절친한 사이였기에 무조건 음악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몇 살이냐?”

“열일곱입니다.”

 “음악은 좀 있다 배워도 늦지 않다. 학교는 마쳐야지.”

김희갑 씨의 간절한 설득에도 그는 거듭 읍소하여 겨우 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나도 음악 인생이 된다는 마음에 들떠 동생 복희한데 이 소식을 알리니 복희가 정색을 했어요. 사실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복희에게 부탁하신 것이 나를 절대 연예계에 발을 못붙이도록 신신당부를 하셨다고 해요. 사실 아버지께서는 저를 극장 출입도 못하게 하신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어쨌든 김희갑 선생님께 악기와 노래를 배웠습니다.”

특히 드럼을 두드리면서 울부짖듯 노래 부르고 나면 내면의 모든 응어리들이 화산을 분출하는 것처럼 뜨거운 것이 터져나오는 희열을 느꼈다. 그 순간의 황홀감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희갑 씨가 클럽무대에 서보라고 했다. 그날을 위해 그는 진 빈센트의 ‘비밥바룰라’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개다리춤을 미친 듯이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 토해냈다.

앞에 있던 미군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앙코르가 나왔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노래는 ‘비밥바롤라’밖에 없어 좀 전보다 더 열심히 개다리춤을 추며 ‘비밥바롤라’를 외쳤다. 미군들은 더 크게 박수를 쳐주었다. 얼떨결에 선 데뷔무대에서 받는 박수, 웃으며 즐기는 미군들을 보며 누군가에게 감동시킬 수 있고,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 것같은 희열감이 몰려왔다. 이로써 그에게 음악인생이 새롭게 열렸다.

▲ 1963년에 윤항기, 김홍탁, 옥성빈, 차도균, 차중락의 5명으로 구성된 키보이스는 성공한 그룹사운드의 원조이다. 초기에 미8군 무대를 통해 주로 활동하였고, 그로부터 2년 뒤, 작곡가 김영광씨에게 곡을 받아 첫 번째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정든배..."는 바로 이때 발표한 음반에 수록된 이들의 대표적인 인기곡이다. 사진은 당시 발매되었던 음반표지들이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그는 일찍 군입대를 했다. 육군은 어려서 못가고, 해공군은 학력에서 걸려 해병대 군악대에 지원했다. ‘억세게 센 군악대의 신병 시집살이’ 100일을 마치고 하루짜리 외박을 끊어 서울로 가 동생 복희를 만나 회포를 풀다가 그만 귀대시간을 놓쳤다.

한마디로 탈영병이 되었다. 몇 번이나 고참들이 찾아왔으나 그때마다 무서워 피하다 보니 나중에는 돌아가고 싶어도 못갈 형국이 되어버렸다. 오갈 데 없는 수배범이 되어 허랑방탕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5.16군사정변이 터져 검문은 더 강화되어 집에서 꼼짝할 수도 없었다. 집에 있어도 언제 잡으러올지 모르니 하루하루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복희가 ‘오빠 지금 탈영병들 자수기간이래, 이번에 자수하면 죄를 가볍게 해준대. 얼른 자수해’하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겨우 용기를 내어 포항으로 내려갔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하나님 살려주세요’하며 사단으로 갔습니다. 아, 죽기를 각오하니 어떤 체벌도 달게 받으리라고 했는데 놀랄 일이 벌어졌어요. 오히려 고참들이 따뜻하게 맞아주고, 동기들도 위로해주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군악대 대원들은 나 때문에 기합도 많이 받고 외박 외출이 금지됐다고 해요, 내가 탈영한 열 달 동안 신병도 오지 않았으니 계급은 상병이었지만 모두가 이등병처럼 지내야 했던 동기들도 죽을 맛이었겠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나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내 인생 처음 맛본 용서였습니다.”

▲ 70세가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윤항기 목사의 섹소폰 연주는 일품이다.        
 
음악  인생이 열리다

제대 후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기 위해 그룹을 만들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비치보이스’나 ‘다이아몬드’같은 제대로 된 록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의기투합해 모인 유희백, 차중광, 옥성빈 등 재능과 열정이 가득한 친구들과 ‘키보이스’를 만들었다.

“키보이스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몇 개나 달고 있는 그룹입니다. 한국 최초로 록음반을 낸 그룹이고, 최초로 방송출연을 한 그룹이며, 단독 야외공연도 키보이스였고, 최초의 ‘오빠부대’도 키보이스의 팬들이었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키보이스의 의미는 단순한 그룹의 탄생을 넘어서 새로운 음악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8군 오디션에서 최고등급인 더블에이(AA)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한 이들은 64년 7월에 ‘그녀 입술은 달콤해’라는 제목의 첫 앨범을 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록밴드 앨범이었다. ‘비틀스’가 전세계를 강타했던 것처럼 키보이스는 한국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든 배’, ‘해변으로 가요’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면서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자고나니 스타가 되었다는 옛말을 실감할 만큼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심지어 부산 공연초청을 받아 전세비행기로 내려가니,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일이라 흥분해서 어쩔 줄 몰랐는데, 공항에서는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입구에 ‘환영! 한국의 비틀스 부산이 오다!’라는 현수막을 비롯하여 악대와 환영인파가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그들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심까지 카퍼레이드까지 하는 인기를 누렸다.

“한마디로 그렇게 환호하는 인파를 보며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등장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열어주던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이것이 스타라는 것이구나. 이것이 인기라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키보이스의 영광은 길지 않았다. 평생 함께 할 것 같았던 멤버들이 하나둘 솔로로 독립해 나가면서 와해된 것이다.

“제가 활동할 때 60년대 한국 대중음악이란 게 번안가요가 많았습니다. 선배들이 일본가요를 많이 들여왔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대중가요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제가 음악을 하게 된 것은 50년대 중반부터 미8군에서 음악을 했고, 키보이스가 미8군에서 시작됐지만, 대중 앞으로 나올 기회가 있어 지금의 팝음악을 처음 시도한 것입니다. 키보이스는 비틀즈의 붐을 타고 수준 있는 대학생들이 열광하고, 팬들이 많았습니다. 대중의 우상이 된 하이클래스의 레벨이었습니다.”

키보이스를 그만둔 그는 동남아와 베트남으로 음악공연을 떠났다. 열광적인 그의 음악팬이었던 숙명여대생인 정경신과 가정을 이루어 딸 하나까지 둔 그는 베트남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느껴 그곳으로 가면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러나 사이공(호치민)에서 공연을 마친 일행은 비처럼 쏟아지는 폭탄과 포탄 앞에 망연자실했다. 그들의 안전을 염려한 적십자 대원이 적십자 단복 대신 신부복과 수녀복을 내주었다.

“정말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번쩍이는 옷을 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게 직업인 우리가 신부와 수녀가 되다니요.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못되었습니다. 나는 신부복을 입고 여자단원들은 수녀복을 입고 정글에 들어섰습니다. 베트콩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차를 세울 때마다 눈에서 파란 빛이 번뜩이는 것이 나는 죽었구나 싶어 온몸에 소름이 짝 끼쳤습니다.

믿을 것이라곤 신부복과 어렸을 때 믿다가 가물가물하게 사라진 하나님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베트콩이 어느 사람이냐고 물어요. 그러면 ‘난 일본인 신부다. 그리고 우리는 적십자 단원이다. 통과시켜 달라’고 말했어요. 당시 한국군은 베트콩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므로 한국이라고 밝히면 어쩐지 죽을 것 같았어요. 그들이 내려보는 시선 앞에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죽음의 사선을 하룻밤에 대여섯 번 넘고 겨우 살아났습니다.”

빡빡하게 짜인 베트남 일정을 소화해가던 어느 날 공항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조심스레 지켜보던 한 단원이 말했다.

“형님, 이제 정신 드세요? 여긴 병원이고요, 형님 몸이 말이 아니래요.”

사이공으로 나와 정밀진단을 받아보니 폐결핵이었다. 의사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폐결핵은 요즘의 암과 같은 병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이제 좀 살만한데 폐결핵이라니. 먹고 살겠다고 이 먼 타국까지 와서 고생고생 하다가 몹쓸 병만 걸렸구나!’

갑자기 아내와 아이들이 미칠 듯이 보고 싶었다. 돈도 인기도 필요 없었다. 모든 만류를 물리치고 베트남을 떠났다.

“이것으로 베트남과의 인연을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그곳에서 배운 새로운 음악은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 빛과 그림자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베트남에서 빛과 그림자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 여러분은 윤복희가 남진과의 결별로 죽음을 생각할 만큼 고통스럽게 지낼 때 윤항기가 동생을 위로하려고 작곡한 노래로 오빠의 여동생에 대한 사랑이 짙게 묻어나 있다. 사진은 윤항기 음악인생 50년 기념 콘서트-윤항기ㆍ윤복희의 여러분’ 공연 기자회견 장면.    

인기 정상에서 쓰러지다

한국에서 몸을 추스르고 병이 낫자 그는 당시 최고의 인기 DJ 이종환 씨를 찾아갔다.

“이 선배께서 자신의 프로그램의 타이틀곡을 만들어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선배와 70년대 별이 ‘빛나는 밤에’(이하 ‘별밤’)를 같이 시작했습니다. TV가 대중화되기 이전 ‘별밤’은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이었습니다. ‘곡명을 별이 빛나는 밤에’로 하여 한번 들어나 보라고 기타를 치며 불렀을 뿐이데 선배는 곡이 좋다며 당장 녹음하자고 덤볐습니다. 그리고 이 곡명으로 방송 타이틀로 했습니다. 별밤을 너무 좋아해서 히트시켜준 분이 이종환 선배입니다.”

이종환 씨는 아예 공연까지 열어주었다. 이종환 씨의 인맥으로 인기 스타들의 섭외가 결정되었다. 시민회관에서 ‘윤항기 리사이틀’이 열리던 날 그를 주인공으로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어니언스 등 당시 가장 잘 나가는 통기타 가수들이 대거 출연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이후 ‘별밤’은 방송과 음악다방에서 쉴새없이 흘러나왔고, 통기타 장발의 대학생들은 너도나도 이 노래를 불렀다.

‘별밤’의 성공에 탄력을 받은 그는 다시 베트남에서 함께 하던 친구들과 그룹사운드 ‘키보이스’를 만들었다. 데뷔음반 ‘고고춤을 춥시다’가 날개돋친 듯 잘 팔렸다. 분위기가 극에 달하면 넥타이를 머리에 매고 양복바지를 한쪽만 걷어붙이고 무대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샤우트 창법으로 노래를 내지르는 그만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대중이 열광하는 인기의 짜릿함에 날마다 그는 취해갔다.

연예계 기자들의 설득 속에 솔로로 진출했다. 솔로 데뷔앨범 ‘무지개빛’도 성황이었다. 대학축제마다 불려가 ‘별밤’을 불렀다. 2집 앨범 ‘나는 어떡하라고’는 공전의 히트를 했다. 방송마다 공연마다 불렀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 ‘외로운 해바라기’는 한국 가요제에서 ‘베스트 10’에 뽑혔다.

그러나 그는 눈부신 조명의 화려한 ‘출구 없는 미로’로 빠져들고 있었다. 75년 ‘나는 어떡하라고’가 빅히트를 하고, 같은 이름으로 영화까지 나와 ‘항기 복희 남매’가 주연으로 출연할 정도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해 연말 가요대상 수상자로 결정되기도 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MBC방송 연말 시상식에서 노해부르다 피를 토하며 실신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폐결핵 말기라고 했습니다. 30대 중반, 이제 가난에서 벗어나 가수상도 받고 돈도 벌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베트남에서 발견된 폐결핵 말기라고 하니 모든 게 원망스러웠습니다. 당시는 전성기라 언론에 노출될까봐 아내가 주사 놓는 방법을 배워 매일 항생제를 놔주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는 뱀이란 뱀은 다 먹었습니다. 검은 개 흰 개 누런 개도 다 먹었습니다. 약이 독해서 고단백 음식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 윤항기 목사의 아들 준호(오른쪽)와 CC M 보컬 ‘더 튜브’멤버들이 윤항기 목사(왼쪽 2번째)와 찬양하고 있다.           

‘여러분,’ 인생이 바뀐 증거

그렇게 일종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윤항기를 살려낸 정경신 사모와는 빈부 격차를 뛰어넘은 극적인 사랑이었다. 이들 부부가 처음 만난 것은 미군 부대 공연이었다. 당시 그는 키보이스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얻던 시절 그의 열광팬이었던 아내 정경신 사모는 부유한 집의 딸로 대학생이었다.

“그때 키보이스가 인기가 많았지만 젊은 친구들 위주였고 어른들은 잘 몰랐습니다. 처가에서 그저 저를 딴따라로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비록 서로 첫눈에 반했지만 처가의 지독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교제 후 1년 정도 지났을 때 아내는 머리도 싹둑 잘렸고 급기야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우리 둘은 아이를 낳은 뒤 겨우 부모님께 인정을 받았고 만난지 4년 만에, 첫 아이가 3살이 됐을 때 겨우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별밤’ ‘장밋빛 스카프’ ‘친구야’ 등의 원작자로 최초의 싱어 라이터이자 가수 윤항기! 오직 대중의 인기와 사랑만 먹어야 생존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병상에서 ‘새롭고 산 소망의 길’을 만났다. 미로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병상에 있을 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를 위해 당시 막 시작한 연예인교회 멤버들이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예배를 드려주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하용조 당시 전도사님과 곽규석 선배님을 비롯해 구봉서 장로님 등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분들이 예배드릴 때 ‘나같은 죄인 살리신~’하고 찬송을 부르실 때마다, 똑같은 찬송을 베트남에서 사선을 넘을 때 방공호에서 흘러나오던 것을 들을 때와 오버랩되면서 마음을 후벼팠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어릴 적, 굶어죽기 일보 직전에 청계천 움막 앞까지 찾아와 만나주셨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다. 한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고 세상에 빠져 탕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우리 남매에게 좋은 일뿐만 아니라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은 복희도 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세상이 싫고 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인기가 있고, 아무리 돈을 벌고, 권력을 가져도 남는 것은 허무뿐이더군요, 재벌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대통령을 지낸 분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투신자살까지 하겠습니까? 어려서 부모 잃고 불쌍하게 자랐고, 또 엄청난 아픔을 겪고 있는 복희를 보며 너무 마음이 안쓰러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으로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쓴 노래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전에 히트곡을 많이 썼지만, 그때 동생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 이 노래였습니다. 79년 2월 국제가요제 대한민국 대표로 와달라고 하더군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국제가요제에 참가하고, 영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니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상처받은 남매의 상처를 치료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그랑프리 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79년도이니, 34년됐군요, 생방송으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고, 국민들이 엄청 울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많이 사그라졌지만, 작년인가 ‘나는 가수다’ 프로에 임재범 씨가 바로 그 ‘여러분’ 때문에 유명해지고 새로운 감동을 주었지요.”
 
새 길을 찾다

미로에서 탈출한 그는 미로에 들기 전의 그가 아니었다. 인생의 진로를 완전히 수정했다. 인기가 정상에 올랐을 때, 86 아시안 게임 당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90년 목사 안수받고 귀국하여 예음음악신학교와 예음교회를 설립하여 오늘까지 이끌고 있다.

“내 삶의 정체성은 예전에 살아온 길과 변화된 길에 대해서 너무나 다른 정체성은 갖고 있습니다. 예전의 윤항기는 이 세상에 오래 전에 묻어버렸고, 이제는 오직 주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정체성입니다. ‘나’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거듭나기 전에는 윤항기가 ‘나’였다. ‘내’가 있었고, ‘내’가 먼저였어야 했고, ‘내’가 으뜸이고 최고로 인정받는 작곡가 가수 연주가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철저히 주님의 ‘종’입니다.

한국의 의술로는 치료 불가능하다는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그는 병상에서 ‘이제 다시 한 번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신다면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하나님나라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는 서원을 철저히 지켰다. 이후 그는 칠순 나이에도 건강하게 세계를 다니며 복음 전하며 은혜 나누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오늘 이 날까지 여러 은인들이 있지만, 특히 음악인생을 찬양인생으로 안내해 주고, 교회음악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구두회 박사(전 숙대 음대학장)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음악을 통해 계속하여 활동범위가 넓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일반방송에도 출연할 때가 있지만, 무엇보다 기독교 CTS 방송에서 ‘내 영혼의 찬양을’을 8년 동안 진행해 오면서 전 세계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위로한다고 했다.

인기가수에서 목회자가 된 그는 ‘목회자’란 한마디로 ‘생명의 양식’이라고 표현했다.

“목회를 말 그대로, 목회자로서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얼마만큼 영혼을 귀하게 보아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가르치고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큰 일이기에 목회자는 성도의 양식처”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음악활동도 목회활동도 사람들의 마음을 쓰다듬고, 다독여 주는 일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평생 음악으로 살아온 그에게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라며,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는 말씀에서 찬양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음악인생으로 그 많은 노래와 찬송을 불러온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으로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314장)을 꼽았다. 바로 그의 삶의 고백이자.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신앙고백이기도 하다는 말이 인상깊었다.

그는 “노래하는 목사로 살아온 지난 20년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며 정말 행복합니다. 얼마나 좋은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 오늘도 노래합니다. 이제 내 인생에서 노래와 신앙은 뗄려야 뗄 수 없는 것들입니다”라고도 했다.

더욱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4녀 1남의 외아들 윤준호 군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찬양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세상 음악 안하고 하나님 음악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서 아빠와 고모 배경으로 출세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결단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 예음신학교에 입학하여 처음부터 7년간 공부했습니다. CCM 가수로 남자 셋과 팀사역(더 튜브)을 하며 음반도 내놓고 있습니다. 수많은 청소년에게 다가가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화와 음악을 전하려는 문화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대를 이어 찬양으로 쓰임 받는 ‘왕년의 인기인’의 고백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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