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활화산 ‘마틴 루터’(2)

원광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11/25 [14:39]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비주의도 영적인 평안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가지 미묘한 부분이 있기는 하나 신비주의의 가르침은 결국 자기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키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일은 겉모양으로 의를 행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또 하나의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는 루터를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수도원으로 보내어 거기서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학문에 몰두하는 동안 루터의 영적인 갈등이 해소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1509년 루터는 성경 연구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다시 에르푸르트로 돌아왔다.

부패한 모습들

때마침 수도원에서 로마에 문서를 보내야 할 일이 생겼고,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혹시 거룩한 수도 로마를 방문하게 하면 그의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1510년 그는 로마를 방문하였다. 로마를 처음 보자, 그는 감격에 젖어 땅에 엎드려 손을 높이 들고, “오 거룩한 로마여, 축복 있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사제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부패한 모습을 접하면서 이런 감격은 씻은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로마가 온갖 부정과 무서운 죄악과 방탕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한 번씩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성 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올랐으나, 오히려 환멸이 더 가중될 뿐이었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 그는 “이것이 진리인지를 과연 누가 안단 말인가?”라고 외쳤다.

여전히 영적인 괴로움 가운데 있는 루터를 위해 슈타우피츠는 신학박사 학위 공부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에는 중세 로마교회의 신학자 피터 롬바르트(Peter Lombard: 1095-1169)의 신학 연구가 학위 과정의 필수적인 요건이었고, 그리하여 루터는 그의 작품들을 읽고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연구 과정 중에 자연스레 어거스틴(혹은,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354-430)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고백록』, 『하나님의 도성』, 『참된 종교와 기독교 교의』 등을 읽으면서 다시 사도 바울에게로 나아가게 되었다.

루터는 어거스틴과 바울의 가르침이 롬바르트를 비롯한 중세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특히 인간의 의지(意志)와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르침이 서로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루터는 아직 중세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추종하는 상태에 있었다.

혁명적인 변화

1512년 그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1513년부터 1515년까지는 시편을, 1515년부터 1516년까지는 로마서를, 그 후 1518년까지는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를 각각 가르쳤다.

강의 준비를 위해 성경 본문을 접하는 동안, 성경의 가르침과 로마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모순이 점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그리스도, 죄, 구원 등에 대해서 성경 자체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 문제들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는 마치 나무의 뿌리와도 같다고 보았다. 뿌리가 나무의 핵심으로서 나무 전체를 관통하는 것처럼, 죄도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관통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신학적 원리들이 서서히 발견되기 시작하였고, 이것들이 대학 내에서 점점 영향을 미쳐가고 있었다.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동안 성경적인 바른 진리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더욱 넘쳐났다. 그는 성경과 씨름하였고, 특히 시편과 로마서 공부에 진력하였다. 특히 그에게 있어서 로마서는 성경을 깨닫는 열쇠였다. 로마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진정한 걸작이요 가장 순결한 복음이다... 율법, 복음, 형벌, 은혜, 믿음, 의, 그리스도, 하나님, 선행, 사랑, 소망, 십자가 등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을 이 서신서에서 가장 풍성하게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기독교의 복음적 가르침 전체를 이 서신서에서 간결하게 정리해주고, 또한 구약 성경 전체에 대한 서론을 제시하려 한 것 같다.”

이 어간에 그에게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소위 ‘탑 속의 체험’(Turmerlebnis)이라 불리는 영적인 각성이 바로 그것이다. 정확히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연대는 1512년부터 1519년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루터는 로마서와 씨름하는 중에 도무지 풀리지 않는 난제로 인해서 마음에 큰 번민이 있었다. 1장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의 “하나님의 의”가 보통 이해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그 완전한 의”라면, 인간은 그 “의”에 이르지 못하며 따라서 죄인으로 정죄되어 심판과 저주를 받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일 수 있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은 결코 ‘복음’, 곧, 기쁜 소식일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혐오하기까지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루터에게 은혜를 베푸사, 이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고 생각하게 하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시편의 말씀(31:1; 71:2)의 도움을 받아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곧, 롬 1:17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의’를 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완전한 의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고, 인간은 믿음으로 그 의를 받아 자기 것으로 누리게 되니, 이 어찌 “복음”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이해하니, 복음의 전체적인 윤곽이 뚜렷하게 깨달아졌다. 그는 이때에 깨달은 이 놀라운 신학적 원리를 계속 발전시켰고, 이는 루터의 신학 사상의 근간이 된 것은 물론, 종교개혁 신학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 훗날 그는 이때의 감격을 다음과 묘사하고 있다.

“나는 이제 완전히 거듭났고, 활짝 열린 문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성경 전체의 전혀 다른 얼굴이 여기서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그렇게도 혐오하였으나 이제는 거꾸로 그만큼 그 단어가 사랑스러워졌고, 그 단어를 높이 기리게 되었다. 내게는 바울의 그 본문이야말로 진정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아니 개신교의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나, 유럽 전체의 역사가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95개조 반박문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어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당국과의 토론을 제기한 것이다. 그의 교회에 속한 교인들조차 도미니칸 수사인 요한 테첼(Johann Tetzel)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면죄부를 사는 것을 보고서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그렇게 항거한 것이었다.

로마 교회는, 교회가 많은 덕(德)을 쌓아놓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온갖 죄들을 보상할 수 있다는 식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수장인 교황에게 속죄의 권한이 있고, 그의 휘하의 각급 대리자들(주교, 신부 등)에게 그 권한이 위임되며, 따라서 일반 교인들은 그들에게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이것이 더욱 악하게 변질되어, 교회의 재정 충당을 위하여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를 판매하기에 이른 것이다.

테첼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면, 당사자의 죄는 물론 이미 죽어 연옥에 있는 자들까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는 “동전이 돈궤에서 뎅그렁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煉獄)에서 솟아 나옵니다”라고 외치며 다녔다.루터는 95개 조문에서 면죄부의 부당성은 물론 로마 교회의 구원론 전체의 그릇됨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셨다.

제32조: 면죄부를 가졌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가르친 자들과 함께 영벌을 받을 것이다.

제37조: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었든지 살았든지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축복에 참여하며, 이 일은 면죄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다.

제45조: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면죄부를 사는데 돈을 쓰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침 받아야 한다.

제62조: 교회의 참된 보배는 영광되고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복음이다.

제95조: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십자가, 십자가”라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선지자들을 멀리하라.

루터의 95개 조문은 당시 발명된 인쇄술 덕분에 유럽 전역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문제의 심각성을 안 로마교회 당국은 카예탄 추기경(Cardinal Cajetan)을 보내어, 루터에게 모든 것을 철회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의 논쟁에서 자신의 견해를 더욱 선명하게 제시하였고, 이때에 스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Martin Bucer:1491-1551)의 지지를 받았다.

1519년 7월 루터는 라이프찌히에서 로마 교회를 대표한 유능한 요한 엑(Johann Eck)과 논쟁하였고, 여기서 그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한 가지 원리를 천명하였다. 성경이 모든 신앙적 판단의 최종적인 기준이며, 교회의 권위도 성경의 권위에 굴복한다는 것이었다.

담대한 외침

1520년이 되자 루터의 개혁의 열풍이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귀족들에게 주는 호소’, ‘교회의 바벨론 유배 상태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세 편의 논고를 통해서 교황을 비롯한 로마교회의 신학적 사회적 횡포를 규탄하였고, 이것이 독일의 민족적인 정서를 자극하였던 것이다.

그해에 로마 교황은 “엑수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 주여 일어나소서!)라는 교서(敎書)를 내려 루터를 출교시켰는데, 12월 루터는 대중이 보는 앞에서 그 교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1521년 그는 보름스 회의(the Diet of Worms)에 소환되었다. 황제를 비롯한 각급의 교회 당국자들 앞에 소환된 루터는 그의 모든 저술들과 가르침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4시간의 여유를 줄 것을 요청한 루터는 다시 회의석상에 나아가 담대히 외쳤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달리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찰스 5세 황제에게 그는, “성경이 내 모든 책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주니 내 양심이 성경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내가 그릇되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으면, 나는 철회할 수가 없나이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의 편에 선 것이었다. 황제는 칙령을 발표하여, 21일 후부터 아무도 루터를 보호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며, 그를 체포하여 당국에 넘길 것을 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황제가 그를 염려하여 보낸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바트부르크 성(Wartburg Castle)에 은신하고 이후로 융커 게오르그(Junker Georg)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내게 된다. 루터는 바트부르크 성을 그의 ‘밧모섬’이라 부르며, 그동안 독일어 성경 번역에 전념하게 된다.

10개월 동안의 번역 작업 끝에 1522년 독일어 신약 성경(Das Neue Testament Deutsche)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구약 성경 번역 작업을 계속하여 1534년 독일어 구약 성경을 완성하게 된다. 루터는 독일어 성경 번역을 통해서 독일어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원광연|시드니영락교회 EM목사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