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12/23 [12:34]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없이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용서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용서 없이 우리는 구원도 영생도 얻을 수가 없다. 그렇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용서로부터 시작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들을 용서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용서해주신 우리의 죄는 본질적인 죄다. 흔히 원죄라고 하는, 근본적인 죄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본질적인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용서하셨다.

따라서 주님의기도에 담겨 있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는 기도는 본질적인 죄악에 대한 회개가 아니다. 이 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날마다 짓게 되는 일상의 죄들이다. 하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이기심과 욕망 때문에 날마다 짓게 되는 죄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타락하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방치하거나 죄를 짓고서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죄를 짓게 만드는 우리의 옛 성품과 옛 습관들을 날마다 버리도록 힘써야 한다. 그래야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는 기도는 매우 중요라다.
 
우리가 우리에게
 
그런데 이 기도에 전제가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전제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심상치가 않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 대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전에, 우리가 우리를 서로 용서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같이 부연하여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만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할 수 있다는 조건부 용서가 된다. 결과론적으로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에 조건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요구하는 권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에게 조건을 내거셨던가? 아니다. 무조건 달리시고 무조건 용서하셨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무슨 조건을 달거나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용서다.

만일 내 안에 아직도 타인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남아 있다면, 그 역시 죄다. 하나님께 죄를 사해달라고 용서를 구하면서도, 내 안에 있는 타인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온전히 용서받을 수가 있겠는가? 여전히 죄가 있는데, 여전히 미움과 분노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참다운 용서를 누릴 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마음 속으로는 누군가를 지독히도 미워하고 틈만 나면 입을 열어 헐뜯으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면, 찝찝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주는 참 평화를 누릴 수가 있을까? 없다.
 
하나님의 용서
 
일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다. 주인은 이 종에게 몸과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팔아 당장 갚으라고 명령을 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고,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다. 그래서 한 달란트는 자그마치 20년치 품삯에 해당되는 큰 돈이다. 그런데 이 종은 1만 달란트의 빚, 즉 6천만 데나리온의 빚을 졌다. 장장 20만 년 동안 죽어라고 일을 해서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아야 겨우 갚을 수 있는 돈이다. 한마디로 평생을 수십 번 살아도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빚이다.

그러니 자기 몸을 팔고 아내와 자식을 팔고, 모든 소유를 판다해도 그 빚을 갚을 수가 있을까? 없다.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종이 주인 앞에 엎드려 빌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서 주인은 그 빚을 조건도 없이 탕감해 주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가 이와 같다. 우리가 평생을 수십 수백 번을 살아도 갚을 수가 없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주셨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생을 고스란히 감당하시며 우리의 죄를 조건 없이 탕감해주셨다.
 
우리의 용서
 
그런데 일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은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자기에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닥달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 막 일 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나온 직후였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고작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위협을 했던 것이다.

동료는 엎드려 그에게 간청을 했다.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그러나 그 종은 동료의 간청을 무시하고 옥에 가두어버렸다. 이 종이 과연, 주인으로부터 참다운 용서를 받은 자이겠는가?

이 과정을 옆에서 본 사람들이 주인에게 모든 일을 고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이같이 말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마 18:32-34).

성경에서 빚은 죄와 동의어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은 서로가 서로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일만 달란트의 죄를 탕감받은 자들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동료가 내게 아무리 잘못해봐야 백 데나리온에 불과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탕감받은 죄에 비하면 세발의 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동료를 용서치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우리 모두는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만큼, 우리도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동시에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서도 용서를 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없이 용서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조건없이 용서해야 한다. 용서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용서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받은 자만이 용서할 수가 있다. 우리 모두는 씻을 수 없는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들이요 또한 지금도 용서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은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여러번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용서했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유대인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바울은 자기에게 등을 돌린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며 모두 용서했다. 그들은 성경이 보증하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가 남을 용서할 때, 그것이야 말로 용서받은 자의 삶이요,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자.〠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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