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소금과 빛의 삶을 산 '산증인'

먼저 주님을 만나러 간 장의은 (Ian Alexander Wright) 신부를 생각하며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12/02 [18:02]
한국을 사랑한 사람, 장의은 신부 

필자가 호주장로회 Abbotsford-Five Dock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이안(Ian, 한국명 장의은 )신부가 부인과 어린 아들 알렉스를 데리고 예배에 참석하여 그와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그것이 1981년 늦은 해였다. 그는 평신도로서 매우 소박하고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1953년 6월 15일 시드니에서 태어나 시드니대학교 농대를 졸업하고 화이자 제약회사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 금년 1월 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의은 신부.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으로, 설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써 본을 보였다.     ©크리스찬리뷰

그는 몇 년 후,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세계여행을 떠났다. 배낭여행을 하면서 이스라엘 기브츠 공동체생활에 참여하기도 했다. 영국 방문 중 토리(대천덕) 신부를 만나 한국에 있는 '예수원'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그의 권유에 따라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을 호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방문하였다. 거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1980년에 자원선교사로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였고 예수원 생활 중 그곳에서 훈련받고 있던 한국인 아내 주쥬엘 자매를 만나 1981년 결혼을 했다.

대천덕 신부는 그에게 장의은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고 첫 아들 알렉스를 낳아 그 해에 호주로 돌아왔다. 그는 Abbotsford & Five Dock 호주 장로교회에서 평신도로서 한국인 교인들을 섬기다가 1985년에 성공회와 호주 정부의 지원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 받아 2년 6개월 동안 예수원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파송 기간이 끝난 1987년 10월, 호주로 돌아와 캔버라에 있는 성공회 신학대학인 St. Mark's Theological Centre (1988)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신학 과정을 마친 후, 캔버라-골번 교구에서 성공회 사제로서 서품(안수)을 받았다. 부제 (부목사)로 목회하면서 시드니대학 신학 석사 과정을 하였다. 캔버라-골번 교구에서 18년 동안 목회를 하였고, 교단에서 자연환경 보호위원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자연 보호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낚시와 정원 가꾸는 취미생활 즐겨

그는 대천덕 신부가 소천한 그 다음 해인 2004년, 일 년간의 안식년을 하면서 예수원 공동체 생활에 다시 참여하였다. 2005년도에 호주로 돌아와 소천하기까지 캔버라에 있는 Holy Cross 성공회에서 목회를 했다. 마지막 4년간의 암 투병을 하면서도 시드니에서 매 년 열리는 대양주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 참석하여 이민교회 목회자들과의 교제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2009년 1월 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다. 이안 신부의 1주기 추모예배는 이옌 신부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강원도 예수원에서 할 계획이다.

그는 생전에 많은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답고 정교한 솜씨를 묵상하였고, 취미생활로는 낚시와 정원 가꾸는 것이었다. 특히 낚시를 즐기면서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갖기도 하였고 정원을 가꾸면서 흙의 냄새를 맡기도 했다. 목회 중에도 교인들을 자기만 알고 있는 낚시터로 데리고 가서 친교하며 주님과 가까이 하는 훈련을 시켰다.

그가 화초와 채소 가꾸는 것은 전문가의 수준에 도달하여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특별히 목단과 작약 꽃을 매우 사랑했다. 비록 이옌 신부는 하나님 곁으로 갔지만 그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정원에는 정성껏 가꾸었던 작약과 목단 꽃들이 이곳 저곳에 만발하고 있다. 그는 취미생활조차도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며 그 일들을 즐겼다. 신학교 마지막 학년에는 캔버라병원에서 실습(Clinical Pastoral Education Program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이렇게 환자를 관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돌보는 훌륭한 목사는 이 교구에서는 매우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선배 신부가 감탄을 하기도 했다.

2003 캔버라 산불재해가 있었을 때 그는 아들들과 함께 불똥이 앞마당에 떨어지고 있는 교인 집의 불을 끄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고 화재 피해자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도와 그 지역사회에 안정을 되찾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캔버라에서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아 그가 사망하자 캔버라 타임즈에서는 이 사실을 그의 사진과 함께 보도 할 정도였다.

 
▲     © 크리스찬리뷰

친절하고 따뜻하고 자상한 신부

그는 젊었을 때부터 소박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도 소박한 사람으로 살았다. 그의 부드럽고 자상한 품성은 어느 교회로 보냄을 받든지 가는 곳마다 사제의 권위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임하여 관계를 형성하면서 목자와 양의 관계로 키워갔다. 그러므로 어느 교회든지 그는 교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면서 목회를 했다. 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 있었던 모세와 같은 사람이었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나 밖에서는 인정을 받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는 가정에서도 인정받는 아버지요, 남편이었다. 그는 두 아들에게 훌륭한 아버지로서의 본을 보였고, 그의 아내에게는 너무나도 자상하고, 배려가 깊은 남편이었다. 그는 누구를 대하든지 선입관을 갖고 대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친구로서 대하는 순수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호주교회만 돌본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서도 종종 한국말로 설교하여 한국교회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본 사람은 그의 따스한 성품을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으로, 설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써 본을 보여 전해주는 목회자요, 친구요, 아버지요, 남편이었다.

캔버라 교구는 말할 것 없고 교회 밖의 사회에서도 그의 떠남을 다 아쉬워하고 있다. 그는 정말 소금과 빛의 삶을 산 '산증인'생활을 한 목회자요, 신앙인이었다. 참으로 본 받을만한 목자의 가슴을 가진 신부였다. 


하나님의 사랑, 실제 삶 통해 본을 보여 

1월 1일부터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12월 29일에 아내에게 나는 지금 하나님곁으로 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아들과 아내와 일대일 시간을 가졌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금까지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병상에 누운 채로 직접 영성체를 집전하여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는 1월 1일부터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이안 신부는 하나님곁에 가기 직전까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사제로서의 의무를 다하였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유로 일찍 데리고 가신지는 알 수 없지만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에게 더 큰 어려움을 면케 하시기 위해 먼저 데리고 가셨을까?

2010년 1월 4일 한국 `예수원'에서 있을 추모예배를 기억하면서 살아 생전 그의 삶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추모의 글을 적어 본다. 유가족으로는 부인 주쥬엘(Jewel) 사모와 아들 알렉스(27) 그리고 벤(26)이 캔버라에 살고 있다.

 

글/김선일
퍼스임마누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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