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이룬 선교공동체

창립 20주년, 철저히 교회와 더불어 사역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01/27 [11:40]
 
▲     © 크리스찬리뷰
 
‘예수전도단’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 중보기도, 영적전쟁, 내적치유, 화요예배, 가정사역, 임재의 예배. 철저하게 교회와 더불어 사역한 예수전도단은 파라처치(parachurch)로서 그동안 한국교회의 ‘예배’와 ‘치유’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나님만 높이고 찬양하는 예배, 친밀감을 지향하는 예배는 한국교회의 예배와 찬양 부분을 업그레이드했다. 또한 ‘숙박형 제자훈련’은 사람의 성품을 다듬고 마음을 치유하는 ‘내적치유’ 운동의 바탕이 됐다.

지난 1월 1일 창립 20주년을 맞은 시드니 318 예수전도단 베이스를 찾았다.


▲ 1999년 12월 매입한 25에이커의 규모의 시드니예수전도단 베이스. 예수전도단은 헌신된 간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영혼의 수원지
 
그곳을 향해 자동차 핸들을 돌리는 순간 마음이 가벼웠다. 비록 그곳이 거리가 먼 시드니 서북쪽 글레노리(Glenorie)에 자리 잡고 있지만 말이다. 기자의 기억에 새겨진 시드니 318 예수전도단에 대한 이미지는 ‘영혼의 수원지’다. 조금 더 덧붙인다면 ‘인생의 갈림길에서 부딪히는 온갖 문제들의 답을 찾기 위해 누구나 잠시 머물렀다 갈 수 있는 영적인 피난처’인 곳이다. 하여튼 기자는 방문할 때마다 특별한 체험을 겪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강의와 취재로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받은 인상이 지금껏 남아있는 것이다.

‘오늘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실까’ ‘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실 수가 있을까’ 등을 상상하는 동안 자동차는 어느 덧 예수전도단 베이스 앞에 멈추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음이 제법 ‘쿵쾅’거렸다.

예수전도단 베이스는 담벼락을 따로 세우지 않았다. 거대한 보이스카우트 야영장처럼 생긴 산자락에 나지막하게 깔고 앉아있다. 25에이커(3만여 평) 대지에 건평 400평 규모로 12개의 방과 10개의 화장실, 식당, 강의실, 그리고 사무실이 있는 공간이다.

1999년 12월 매입할 때에는 황량한 언덕에 달랑 작은 붉은 벽돌집 한 채였다. 그 후 공사를 시작하여 7년여 만에 완공했다. 공사기간이 길어진 것은 모두 자비량으로 헌신한 탓이다. 지금도 건축은 진행형이다. 여기저기 건축 자재들이 쌓여있다.

두리번거리며 건물 뒤로 가자 여기저기에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무엇이 좋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함박 벌어지는 입매며 그러니까 속세로 말하면 복권이 당첨된 사람의 얼굴처럼 밝았다. 사람을 향해 웃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기도가 있을까.

그런데 이곳에서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그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그 평등하고 느긋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기자를 감동시켰다.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서였다. 아마 어쩌면 초기 교회는 이런 분위기였는지도 모른다. 함께 앉아, 함께 자유롭게 나누는 그런 공동체.

1960년 로런 커닝햄 목사에 의해 창립된 국제 예수전도단(YWAM: Youth With A Mission)은 전 세계 180개국에 1천여 개의 지부를 두고 1만 8천여 명의 전임 간사들이 세계 선교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며 헌신하는 단체가 되었다. 한국 교회 속에 일찍부터 찬양과 예배 문화를 이끌어 왔으며, 예수제자훈련학교를 비롯하여 화요모임 등을 통해 기독인들을 선교에 연결시켜 왔다.

한국 예수전도단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던 오대원(David E. Ross) 목사에 의해 1973년 말에 설립되었다. 1980년, 예수전도단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로렌 커닝햄 목사와 연합하였고 이때부터 YWAM Korea로 활동하고 있다.

시드니 318 예수전도단은 1994년 1월 하태식 목사(55)와 정선 사모(57)에 의해 시작되었다. ‘시드니 318’이란 이름은 창세기 아브라함의 ‘318명의 군사’에서 따왔다.

“10년간 예수전도단에서 훈련을 받고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1992년도에 선교한국이 열릴 때 저희 단체가 준비단체로 함께 하면서 예수전도단 내에서 결의가 있었어요. 한국적인 사역이 있어야 한다. 한국적인 선교사가 나와야 하고, 한국적인 선교가 있어야 한다고 결의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교사들이 선교단체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3-4년 정도 있다가 되돌아가는 상황 가운데 있었는데 각 선교단체를 통해 젊은이들이 그 당시 2만 명 정도가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훈련할 단체가 없었어요. 일부 단체가 있었으나 전문적인 곳이 없었던 때이므로 선교훈련 할 수 있는 곳을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실 때 호주와 연결이 되어 호주에서 준비하게 되었죠.”

하 목사는 해외에 한국인들을 위한 예수전도단 베이스를 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내 아내에게 표시했다. 아내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며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녀는 인천의 한 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지만 남편의 개척정신을 실천에 옮기는 일에 헌신키로 한 것이다.

이들 부부가 호주에서 사역을 시작하기로 하고 시드니에 도착한 것은 1994년 1월 1일. 이때부터 이들은 실험적인 삶을 살아왔다. 정 사모는 “그동안의 삶은 그야말로 모험과 기적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처음에는 라이드(Ryde)에서 화요찬양모임으로 출발했다. 시작할 당시 2명이었다. 그 후 시드니 서쪽 마운트 드러트(Mount Druitt)를 거쳐 사슴농장으로 이사를 했다. 결국 이때부터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유랑생활이 시작되었고 6년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지냈다.

“저희가 사역하면서 이사를 참 많이 했습니다. 딸아이는 여섯 번 초등학교를 옮겨가지고 졸업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사를 다니면서 힘들었던 것은 호주 상황으로 볼 때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 부모가 매여 있어야 되잖아요. 등하교를 시켜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걸어 다닐 수 있는데 아니면 학교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힘들었습니다. 부부가 거기에 매이지 않고 사역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호사다마라 했던가. 어렵게 사역을 꾸려가던 중, 정 사모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듣게 된다. 갑상선 암 진단을 받은 것.

“98년도였어요. 전혀 몰랐었는데 DTS를 했던 목사님 부부가 계셨는데 지나가시다가 보고는 암이래요. 간사님 병원에 가보세요. 그러더라고요. 목이 부었다고요.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며 수술해야 된다고 해서 수술을 했습니다. 물론 어려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육체로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을 막게 하시고 무릎 꿇게 하시고 오히려 유익한 그런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얕은 생각과는 다르신 분임을 나중에야 깨닫고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면서 기드온이 양털의 표적을 구한 것처럼 갈 길을 보여 달라고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더욱 바싹 매달렸다.

그때 하나님이 글레노리 땅을 보여주시며 그 땅을 허락하셨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부부의 믿음을 키우셨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이즈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안 되니까 그렇게 어려운 일들을 허락하시고 훈련을 통하여 자꾸 우리의 사이즈를 넓히셨어요.”

그래서 그 누군가 환난은 축복의 보증수표라고 했다. 그 환난을 이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축복을 마련하고 계시는 분이다.

▲ 시드니예수전도단 대표 하태식 목사와 사모 정선 간사.      © 크리스찬리뷰
 
모험과 기적의 삶
 
하 목사는 경제적 대책도 없이 이 땅을 믿음으로 50만 달러에 계약했다.

“그런데요. 그때는 누굴 만나든지 돈을 줬어요. 수표도 끊어주시고 만 불도 선뜻 주시고 천 불도 주시고 20불도 주시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기간에 하나님께서 15만 불을 채워주시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렇게 기도했거든요. 이 센터가 호주를 위한 거니까 호주에서 하나님이 돈을 주셔야 됩니다. 그렇게 기도했어요. 그렇게 해야 이 땅이 축복되고 이 땅이 다음 세대에게도 축복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서 은행 돈을 빌려 보태서 지불하고 99년 12월 18일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건축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2000년에 건축허가를 냈는데요. 허가를 내는 과정에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까다로운 호주 건축법과 주변에서 반대들을 하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이곳을 종교시설로 사용하려니까 이웃 주민들이 단체로 와서 어렵게 만들고, 투서했죠.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는 조용한 지역이기 때문에 조용히 인생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왔는데 젊은이들이 떠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 못한다는 겁니다.

보니까 자동차가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5km나 간답니다. 그래서 저희가 환경영향 평가를 했어요. 100명이 와서 움직일 때 반경 5km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3주간 자동차가 왔다갔다 조사도 하고요. 또한 주변에 소음이 안가기 위해서 30km로 달려야 한다. 그래서 표지판이 30km로 되어있어요. 이 표지판을 우리가 세운 겁니다. 또 하나는 먼지가 많이 나니 포장을 해야 한다고 해서 포장도 했습니다.

이런 등등을 카운슬과 많이 대치하게 되었는데 결국은 종교, 교육, 주거시설 이 세 가지 용도로 허락을 받았어요.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호주를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호주의 겉모양만 알았을 거에요. 건축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했거든요.

사실 건축과정에서 동네사람들에게 손찌검까지 당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참게해 주시더라고요. 화가 나지 않게 하셨어요. 그런데요. 우리 빌더와 설계사가 이 광경을 보고 자기네들이 돕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후 지금까지 빌더와 설계사가 자원봉사를 하고 있어요. 한 푼도 안 받고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고용한 건데요. 그분들은 호주 설계사협회 회장님이시고 빌딩 오스트렐리아협회 책임자되시는 유명하신 분들인데 어려움을 겪고 나니까 하나님이 그분들을 붙여주셨어요. 하나님이 복을 주셨어요.”

시드니 318 베이스는 둘러싼 자연을 잘 보존하기 위해 친환경적인 시설들을 갖추었다. 빗물을 받아 리사이클로 사용할 수 있도록 빗물탱크를 설치하였고, 수돗물은 탱크에 저장하여 모터로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베이스에서 발생하는 오폐수는 100% 정화시설을 통해 처리되며 태양열판에서 생산되는 전력으로 사용되는 전기의 상당부분을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건물을 둘러싼 산자락이 산책로로 잘 정비되어있어 수목림을 걸으면서 묵상할 수 있고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기도바위도 있다.

“지금 300평의 성전을 4년째 짓고 있는데 전혀 조급하지 않고 주어지는 대로 진행하고 있어요. 빌더와 설계사는 이전의 건물을 지은 그분들이고요. 물론 이번에도 자원봉사지요. 비오고 문제가 있으면 그분들이 먼저 와서 살펴보고 그래요. 그분들을 보면 도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셔서 지금까지 온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벽돌 멏 개라도 사서 놓고 시멘트도 누가 사주고 그렇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모자라는 벽돌을 다 주셔서 이제 지붕을 올리고 공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성전건축을 보면 다윗이 원했으나 솔로몬이 하도록 했는데 그 자체가 영광이기에 건축자체로 기뻐하는 거죠. 개척자라는 것은 한 세대를 바라보며 씨를 뿌리고 다음 세대가 덕을 보게 되도록 하는 것이라 봅니다.”

시드니 318에서 시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예수제자훈련학교(DTS 12주 강의와 10주 선교여행), 선교영어마을학교(ESLM), 청소년 영어와 문화, 영성캠프(YEC), 총체적 선교학교 (SOFM 12주간), 사역자훈련학교(SOM 12주), 귀납적 성경연구학교(BCC, 12주), 예배, 중보기도, 영적전쟁학교(SOWIW 12주),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BEDTS) 그리고 왕의자녀들(KiING'S KIDS)과 화요찬양 등이다.

“저희 예수전도단의 가장 핵심적인 훈련코스인 DTS는 6개월간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전하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12주 풀타임으로 강의를 듣고 10주 선교여행을 떠나요. 직장인을 위한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도 진행되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각자 집에서 오가며 훈련을 합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킹스키즈, 청소년 캠프, DTS, 독수리학교 등은 다 간사들의 희생과 봉사로 진행이 됩니다. 그분들이 사역비를 내고 헌신하고 수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전도 되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나 상처들이 자연스럽게 치유가 됩니다. 그리고 저희가 시드니 318 열방대학으로 두 가지 학위가 나갑니다. 하와이 본부에 있는 열방대학 학위이고요. 또 하나는 아시아 신학교회연맹에서 수여하는 학사ㆍ석사학위입니다. 작년부터 인준이 되었어요.”
하 목사는 예수전도단의 정신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리는 것’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젊은이를 일으켜 그들이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 원칙이 첫 번째는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요. 선교사역은 목회자 안에서도 또다시 부르심이 있어요.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두 번째는 특별한 은사가 있어야 됩니다. 그 은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저희가 돕고 있는 거죠.”

궁금해서 물었다.
“부부도 말이에요. 좋아 죽겠다고 만나 살면서 미워 죽겠는 때가 있는데, 그래도 부부는 직장도 가고 시장도 가고 좀 떨어져 있는데 훈련 받으시는 분들은 그러니까 하나님 한 분만 보고 와서 우연히 만난 거 아닙니까? 게다가 어디도 못가고 6개월 동안 한 집에 살잖아요. 그것도 개성이 다르고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모여 살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라도 있나요?”

“그러니까 기적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표현은 하지는 않지만 상처가 많아요. 기성 세대들은 살다가 어떤 문제가 있어 상처가 있지만 특별히 젊은 세대들은 거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에요. 부모를 미워합니다. 그 젊은이들이 부모를 용서하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용서하고 덮어주고 내일의 가능성, 내 안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가정, 교회라는 영역에서 내 부르심은 어디인가 거기 가서 살도록 하는 건데 그게 6개월이 지나야 돼요.

사실 처음에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24시간 먹고 자는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겠습니까. 한 사람이 기분 나쁘면 다 기분 나빠하고 그러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또 언제 그랬냐고 금방 풀어지고 이것이 공동체이거든요. 하나님이 이것을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하룻밤도 편안히 잘 수가 없죠. 그런데요. 토요일은 외출을 시키고요. 주일날은 자기가 정한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DTS 훈련생들의 공동체생활은 필수다. 서로 싫어도 하고 좋아도 하고 못마땅해 하기도 하고, 서로 두둔해 주기도 하면서 한 식구가 되는 과정을 겪는다. 서로 따뜻이 돌보고 위해주며 살아가는 참 식구가 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로가 자기를 깨뜨리고 부서지는 경험을 쌓아야 하고, 또 서로의 상처를 싸매고 어루만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일을 도와주는 이들이 바로 간사들이다.

▲ 시드니 318 예수전도단 베이스 입구 전경     © 크리스찬리뷰

생활비 내며 자원 봉사하는 간사들
 
318베이스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삶을 전적으로 드린 10명의 간사들이 있다. 그들에게 이곳은 훈련장의 의미가 크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그들은 유일한 사명감으로 매순간이 즐겁다.

예수전도단의 모든 간사들은 방값, 식비 등 생활비를 내면서 자비량으로 섬기고 있다. 여기에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밥도 해야 되고 설거지도 해야 한다.

하 목사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내주는 후원금으로 생활하고 사역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필요한 시설과 경비와 일용한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예수전도단의 커다란 특징이다.

사역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들은 뜨거울 수밖에 없는 믿음생활, 그야말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다.

“힘들지요. 자기 힘으로가 아니라 다른 무엇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도 믿음으로 살아가야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 목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 살면, 주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고 말했다.”

“다들 모이세요.”

하 목사의 호출이 떨어지자 간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인터뷰 때문이다. 목사도 있고 신학생도 있고 대학생도 있고 선교사도 있다. 처음엔 인터뷰를 거절했었는데 용기를 낸 것이다.

스스로 생활비를 내가며 사생활이 없는 이곳에서 각자 맡은 일에 시달리면서도 서로 돕고 위로하고 사랑과 인내로써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있다면 분명 그들이 바라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만을 위하기보다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게끔 하는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들의 말을 듣자.

▲ 이다혜 간사      ©크리스찬리뷰

▲이다혜 간사 (23)

저의 고향은 경기도 하남이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시를 준비할 때 길을 가다가 전도를 받았어요. 끈질긴 연락과 권유로 인해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교회 전도사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때에는 성경공부와 묵상으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살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중에 학교에 대한 가치관과 교회에 대한 가치관에 혼돈이 오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어지기 시작할 때 학교 동아리를 통해 DTS를 처음으로 알게 됐어요.

그런 후 대학생 컨퍼런스에 갔어요. 거기에서 DTS를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콜링을 하기에 일어섰는데 너무 지원자가 많아 마감이 된 거에요. 올해는 아닌가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해외 DTS 전단지를 주는 거에요. 그날 저녁 기도를 하는데 세계에 대한 기도를 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DTS를 가라는 마음을 주셔서 서원을 했어요.

그런 후 미국 쪽으로 알아보고 가기로 됐는데 재정문제로 못가는 상황이 됐어요. 그 다음날 출발하면 시작 전에 도착할 수 있는데요. 그런데 그날 저녁 갑자기 교회 언니가 헌금을 해주셔서 바로 DTS를 가게 됐고, 이 훈련을 통해서 한 번도 내가 존귀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너는 참 존귀하다.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너는 내 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해주셨어요.

DTS를 받는 6개월 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DTS를 끝내고 복학하기 전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알아본 곳이 시드니에요. 영어학교에 지원을 하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취소가 됐어요. 그때 시드니 예수전도단에서 청소년 영어캠프가 있는데 와서 자원봉사하지 않겠느냐고 콜링을 했어요.

하나님이 예정하신 길이라 생각했던게 여행사 쪽에서 자리가 있으니 빨리 돈을 넣으라 하고 바자도 신청한지 3시간 만에 나오고 너무 착착 진행이 되니까 어리벙벙한 거에요.

그렇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됐는데 이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기뻤어요. 보람도 있었고요. 일하고 예배하고 헌신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우고 있는 것들이 즐겁고요
저는 앞으로 큰 그림으로는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 성경공부 하는 방법도 많이 배워서 사람들과 많이 대화하고 싶어요. 상담도 하면서요.

▲ 정수미 간사      ©크리스찬리뷰

▲정수미 간사 (23)

저의 고향은 경기도 일산이고요. 기독교 집안으로 어머니가 목회를 하셨는데 초등학교 때 엄마가 저를 목회자로 서원을 하셨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목회를 하려니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너무 강압적인 거에요.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엄마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하면서 그때부터 많이 방황한 것 같아요. 목회보다는 그냥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싶은데 엄마는 포커스를 목회 쪽으로만 맞추니까 그게 싫었어요. 그러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세상 쪽으로 빠지게 됐어요.

그때 엄마가 목회자들 중에 따님 한 분이 호주에 가서 DTS를 받고 왔는데 은혜 많이 받고 변화가 됐더라 말씀하시면서 은근히 가기를 원하셨어요. 전 처음에는 싫었어요. 그런데 엄마는 자꾸 가라해서 일단은 간다고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가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커서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처음에 왔을 때는 많이 힘들었는데 3주 지나니까 내가 변화되면서 회개의 기도가 나왔어요. 그러면서 엄마에 대한 기도가 나오고요. 하나님이 이곳으로 불러주신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됐어요.

앞으로 공부를 계속할 거고요. 그 후에 신학을 하고 싶어요. 청소년 사역에 대한 꿈이 있는데 제가 어렸을 때 느꼈던 감정들, 엄마에 대한 미움, 그리고 방황했던 경험들을 살려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 이명수 간사      © 크리스찬리뷰

▲이명수 간사 (42)

저의 고향은 인천이고요. 어머니가 전도를 받아 처음으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은혜 받으시고 저를 목사로 서원하셨어요. 저는 그게 싫었어요. 그런데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제가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고 서원대로 하겠다는 기도를 하고 돌아왔어요. 신앙생활 열심히 했어요.

그런 후 신학교에 갔습니다. 졸업을 하고 단독목회를 했는데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가족 중에 처음에는 아들이 아프더니 딸이 아프고 이로 인하여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아내와 헤어졌어요. 집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갔고요. 다른 일을 하려고 생각을 했어요. 신학을 지도했던 목사님에게 얘기했더니 목회자가 다른 일을 하면 되겠느냐 우리 교회에 와서 일을 하라고 하셔서 부목사로 섬겼어요.

목사님은 자주 강단을 비우셨고 제가 이일저일을 도맡아 하면서 탈진을 했어요. 몸이 너무 지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마음도 너무 외롭고 해서 사임을 했어요. 그리고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럴 때 주위에서 예수전도단에서 하는 DTS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 거기가면 치유도 있고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좋다. 그런 얘기를 한 거에요.

혼자 살다보니까 불만이 내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 감추고 교회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고 늘 웃어야 되는 모습 속에서 이런저런 것들이 쌓여 스트레스가 되어 탈진이 온 것 같아요. 물론 열심히 일을 했지만 내 마음 속에 기쁨이 없었어요. 그때 스웨덴에서 하는 DTS를 추천을 한 거죠.

스웨덴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일 년 동안 DTS를 받고 중보기도학교를 했어요. 훈련을 받는 동안 그 안에서 내가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느꼈어요. 내가 늘 돌봐야 하는 사람들, 끌어가야 될 위치에서 부담감 없이 얘기를 하고 너무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게 되고 마음이 치유가 되더라고요.

그런 후 귀국을 했는데 간사에 대해 한 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시드니에서 간사를 모집한다고 해서 오게 되었고요, 두 번의 DTS를 섬겼었는데 교회와 다른, 여기에서는 속에 있던 것까지 다 꺼내놓으면서 상담을 하고 그래서 깨지고 변화되고 치유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그들의 어떤 아픔을 보게 하고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곳에서 더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딸이 지금 이곳에 영어공부를 하려고 와있어요. 4년 만에 부녀상봉을 했는데 공부가 끝나면 또다시 헤어져야죠.
 
이들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마음 한구석이 찡하면서 갑자기 눈자위가 붉어지더니 무슨 이상한 요술 스프레이를 뿌려 놓은 것처럼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그것도 뜨겁고 힘차게 펑펑 나오는 것이다. 기자가 설사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라고 친들,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울면서도 들었다.

그런데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한 간사가 크리넥스 통을 가져다주면서 “휴지로 눈물을 좀 닦으십시오”했다. 내 영혼에도 아픈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울길래, 뭐 울 것까지야, 생각했었는데 나는 더한 것 같다.
 

▲ 강영란 간사      © 크리스찬리뷰

▲강영란(49)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요. 친구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24살 때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는데 떠날 때 친구가 믿음이 없는 내가 걱정스러웠던지 미국에 가면 꼭 교회 다니라고 부탁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미국에서 은행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은행을 그만두고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그리고 아프리카로 선교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가난하고 소외된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선교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어요. 이때 하나님께 선교사로 내 삶을 드리기로 고백했습니다. 그런 후 OM이라는 선교단체에서 단기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을 하고 돌아왔는데 기쁨이 없는 거에요. 기도를 할 때 선교사로 떠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음의 기도가 나왔어요. 그럴 때 찾은 곳이 예수전도단이었어요.

하와이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DTS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음성, 환상 등을 체험하게 되었고 은사도 발견하게 됐어요. 그 후 중국 북한 쪽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영적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막으시면서 하나님은 저를 한국을 보내셔서 빈민선교, 탈북자 사역, 교도소 사역 쪽으로 인도하셨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아픔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 아픔이 저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울부짖으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61: 1-2 말씀으로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저에게 보너스로 여기 오게 하시더라고요.

하나님은 이곳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주셨습니다. 내 생각과 마음을 바꿔주신 거죠. 앞으로 내적치료에 대한 마음이 있습니다. 소외되고 가난하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결혼은 사역을 위해 안했습니다.
 

▲ 문인호 간사      © 크리스찬리뷰

▲문인호(35)

저의 고향은 수원이고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목회자로 서원을 했어요. 저는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게 있었어요. 8년 전에 결혼을 하고 호주로 와서 영어공부를 일 년 했습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공부를 하면서 교회를 섬겼어요. 그리고 학생비자가 끝날 무렵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캐나다로 가서 이민교회에서 찬양팀과 청년부 사역을 하면서 청년부가 부흥되는 경험을 하면서 감사했어요.

그렇게 10년 동안 이민교회에서 사역하는 중에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교회들이 갈라지는 아픔이 있었고 저희도 그런 사역자처럼 위선적인 모습을 발견하면서 이건 아니다, 과감하게 모든 것을 타파하자, 하나님 없이 일만하는 종교인이 될 것 같더라고요. 위기 의식을 느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안식하며 쉬면서 영적으로 충전을 하자면서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제주열방제자교회를 섬기게 됐는데 목사님이 DTS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시더라고요. 전 싫었어요.

그런데 자꾸 권유하니까 학교만 한 번 방문해 보자며 학교를 찾았는데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하나님이 뭔가 사인을 주시는구나. 그런데 가진 게 없었어요. 미국에서 오면서 다 정리하니까 150만원인가 그 정도 밖에 없었어요. 열방대학에 다니려면 딸이 하나 있으니까 천만 원이 드는 거에요. 자신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기적적으로 갈 수 있었는데 여러분들이 후원해 주셨어요.

DTS훈련을 마친 후 미국으로 다시 가려고 했는데 길이 막히더라고요. 낙심이 되었죠.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교회 여기저기에서 사역자로 와달라는 제안이 왔어요. 그런데 그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그러자 했으면 한국에서 어느 교회에서 사역을 했을 거에요. 그런데 아내가 간사로 위탁을 해보자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아내 말이 맞는 것 같았어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교회사역을 하고 싶었지만 좁은 길을 가보자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훈련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해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하시고 열방에 대한 소망, 용서하는 마음도 갖게 해주셨습니다.
 

▲ 남정화 간사      © 크리스찬리뷰

▲남정화(33. 문인호 간사 아내)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 좋은 오빠들이 예수전도단에서 하는 화요예배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한 번 나가게 됐어요. 문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정말 파도가 저를 덮치더라고요. 그 안에 꽉차있던 은혜가 문을 열자마자 나에게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너무 강했어요. 그때부터 매주 참석을 했어요.

거기에서 DTS를 알게 되고 내 인생 전체를 봤을 때 6개월 정도 하나님한테 드리지 못할까. 6개월 동안 완전히 하나님에게만 맞춰지니까 너무 행복할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교회 목사님이 DTS를 하신 분이셨어요. 항상 청년부를 양육하실 때에 예수전도단 스타일로 하셨어요. 그리고 로렌 커닝햄 목사님이 쓴 책을 많이 권유해 주셨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어요. 성경을 읽다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인데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저도 모르게 정말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냥 동서남북을 바라봤어요. 갑자기 태어나서 처음으로 환상을 봤어요. 세계지도가 펼쳐지더라고요. 이게 뭐지. 작은 건물이 보였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있었어요. 소외되고 가난하고 복음이 필요한 여러 나라들이 보이는데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장면이 바뀌면서 남편이 서 있더라고요. 하나님이 교제하기를 원하시는구나. 남편은 같은 교회 청년부였는데 3년 정도 교제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이 시간을 통과하면 반드시 얻어지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나엘 간사      © 크리스찬리뷰

▲김나엘(33)

창원에서 자랐고요. 모태신앙입니다. 피아노를 전공했어요. 엄마는 딸을 교양있게 잘 키우고 싶은 욕심이 계셨고 또 순탄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대학생 시절 인생의 회의를 느꼈습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교회에서 경배와 찬양팀에 있으면서 봉사도 많이 했지만 항상 불만이었어요. 예수를 왜 믿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지?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우울증에 빠졌어요. 그때 삶을 포기하려고 했어요. 죽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너의 생명은 나의 것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깜짝 놀라 두려움으로 집으로 갔어요.

도착해 보니 가족들이 모여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더라고요. 어디 있었느냐 걱정했다면서 위로해주셨어요.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 마음을 여는 진지한 대화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그때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이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서 성경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에 대해 묵상을 시작했어요.

그 후 예수전도단 찬양팀에서 반주자로 섬기게 됐는데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까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결정하고 이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DTS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주 열방대학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훈련을 하는 동안 정말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해 경험하고 예수전도단에서 헌신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목사님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어요. 남편은 하나님이 학자로 부르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신랑에게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 교회와 문화와 선교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유학생활 중 아이를 가지게 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신학공부를 시작했는데 3년 반 만에 조기졸업을 했어요. 6개월의 시간을 벌었으니까 그 시간에 남편은 DTS를 마치고 호주로 왔습니다.

남편과 저는 이곳에서 간사로 섬기면서 남편은 신학공부를 병행할 겁니다.
 

▲ 예수전도단에서 특강하는 고 강영우 박사     © 크리스찬리뷰
 
스스로 가난을 자초한 사람들, 그들의 눈빛은 너무나도 맑고 신비스러웠다. 저것이 평화라는 것일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자는 인간이 어디까지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말씀묵상과 기도 모임   © 크리스찬리뷰

전 세계에 318 베이스 설립이 꿈
 
하태식 목사와 정선 사모는 예수전도단 모임에서 만나 결혼했다. 이들의 행복한 가정생활의 비결은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나의 믿음이다. 정 사모는 지금까지 공동체 생활을 하며 겪은 일들이 고생스럽기보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들이었다며 하나님은 항상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다고 말했다.

하 목사의 말을 듣자.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마을에 교회가 들어왔는데 저희 아버지께서 방앗간을 내주시면서 교회를 시작하도록 하셔서 교회에 출석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6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실패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어요. 그때 대학교 때 해야 될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죠. 

그 시기에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내가 주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구나, 라고 결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에 썬다싱 전집이 있었는데 그 책들을 방학동안에 보면서 내 인생을 썬다싱처럼 인도, 부탄, 네팔을 다니며 선교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선교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됐지요.

그런 후 제대를 하고 종로를 지나가다가 전도하는 팀을 만났어요. 그 팀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 팀이 예수전도단이었어요. 가보니까 오대원 목사님도 거기 계시는 거에요. 훈련이 너무 좋아 변화가 됐고 간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 즐거운 식사 시간      ©Sydney YM

자녀들의 근황을 물었다.

“저희 딸이 8살, 아들이 4살 때 이곳에 왔거든요. 애들이 킹스키즈 훈련을 계속 받았어요. 휴가도 한 번 가지 않고 늘 훈련에 참석했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하고 초콜릿도 팔며 모금을 해서 가는 거에요. 한 번은 온 가족이 다 같이 가기도 했고요. 자녀들을 위하여 아침식사는 늘 함께 먹었죠. 언어를 위해서 꼭 한국말로 성경을 잃고 묵상하도록 했고 지금은 양쪽 말을 다 잘합니다. 그렇게 애들이 빗나가지 않고 잘 따라주고 이해해줘서 지금까지 사역하는 겁니다. 그리고 애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다 DTS 훈련을 받았어요.

지금 딸(보라. 28)은 대학을 졸업하고 예수전도단 간사로 섬기고 있고요. 아들(다니엘. 24)은 호주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사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 훈련이 끝나면 중위로 임관을 합니다.”

▲ 공동체생활을 통해 훈련받고 수료식에서 환호하는 학생들     © Sydney YM

이들의 비전은 318 베이스가 호주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세워지는 것이다. 정 사모는 “예수님의 군대를 양성할 사람들을 기도하면서 찾고 있다”며 “예수님의 군대가 어떤 사람들일까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 예수전도단이 펼쳐져 있지만 각각 다른 색깔로 훈련하고 파송하고 새로운 영향력들로 새롭게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318개의 베이스 세워질까요?”
정 사모는 호탕하게 웃었으며 우리도 따라 웃었다.

하 목사는 “무 교회 지역 교회 세우기에도 동참하면 좋겠다.”며 “북녘의 우리 동포를 향한 마음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희는 지금 전 세계 무 교회 지역에 교회 세우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칠순 잔치로 교회를 세우겠다, 결혼기념으로, 우리 가족이, 이럴 때 저희가 그 사람 이름으로 교회 세우는 일을 해왔습니다. 만 불, 2만 불 정도면 교회를 세울 수 있고요.

그리고 저희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부터 북한 선수단을 돕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북한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NGO 서빙프렌즈와도 함께 북한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동포들도 북한을 방문하는 등 함께 사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해외동포들이 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 끝에 하 목사는 한 마디를 보탰다.

▲ 300평 규모의 성전(아래층)과 숙소(1층) 건축 현장. 자금란으로 인해 4년째 짓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호주에서 318 예수전도단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불러주시고 선택해 주시고 힘을 주시고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또한 지금까지 함께 간사로 동역해 주신 풀타임 간사들과 독수리 간사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와 물질로 동역해 주신 호주한인교회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중보기도로 동역해 주신 귀한 사역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글레노리 시드니318예수전도단 베이스 내에 있는 기도바위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진 간사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김나엘 간사, 이다혜 간사, 정선 간사, 하태식 목사, 정수미 간사, 이명수 간사, 남정화 간사, 문인호 간사, 강영란 간사 (왼쪽부터 )      © 크리스찬리뷰
 
에필로그
 
주의 종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이번에도 기자는 한 뼘이나 자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있는 가지가지 꽃들이 모두 제각기 아름답듯이 기자는 뜻밖에도 그런 다채로운 공동체 세계의 한 모퉁이를 엿보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문득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팔레스타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응답을 주셨다고 했다.
 “얘야, 내가 그래서 너를 만든 거란다.”

이제 육십이 넘은 이 늙은 소년은 성령님이 주신 새로운 에너지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섰다.

“하나님, 저를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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