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시대적 소명

손봉호/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1/27 [12:12]
오늘날 세계 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시대를 가장 병들게 하고 이 시대가 가장 열렬히 섬기는 우상이다. 바로 물질만능주의, 곧 돈의 우상이다. 돈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상으로 등장했고 예수님도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재물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 하심으로 재물이 하나님 자리에 앉을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마 6:24).
 
1. 교회의 시대적 소명?
 
교회에게 과연 시대적 소명이 있으며 꼭 있어야 하는가?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사랑 안에서 교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성경이 시대적 소명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언급하고 있으며 가르치고 있는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시대의 초대교회는 스스로의 생존에 모든 힘을 다 쏟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대한 적대 세력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들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기독교인이 다수를 차지하거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특정한 시기와 지역을 제외하고는 교회가 시대적 소명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이스라엘과 교회가 그 시대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고 따라서 시대적 사명을 전혀 감당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그런 사명을 의식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핍박받는 소수였더라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했을 때 교회는 누룩이 되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와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오늘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보편적인 가치로 정착된 평등사상, 민주주의, 기본인권, 사회정의, 복지, 보편교육 등에는 기독교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만약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가치와 제도들이 오늘날 과연 그만큼 보편적인 것으로 정착되고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고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은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와 관계에서도 비슷하지 않았나 한다. 비록 교회가 분명하게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더라도 한국교회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비교적 잘 감당했으며 한국 역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할 수 있다.
 
2. 우상 제거가 시대적 소명
 
과거 한국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한 것은 주로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공헌이었다. 한국 사회에 없었거나 약했던 평등사상, 민주주의, 인권 사상을 도입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지금도 많은 지역에서 새로 시작하는 교회는 그런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는 격동기를 거쳐 이제는 어느 정도 정착 단계에 와 있다. 물론 아직도 새로운 것을 도입하고 시작해야 할 것들이 없지 않겠지만 이제는 그보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새로 시작하는 것과 고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바 창조의 교리와 십자가의 치유와 관계가 있다.

인류는 긴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나 많은 쓰레기와 찌꺼기를 생산해 놓아서 질식할 상황에 처해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가 감당해야 할 주 활동은 창조적(creative)인 것이 아니라 치유적 (curative)인 것이다. 인류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함으로 병든 세상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시대적 소명도 한국 사회에 무슨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우상이란 거짓 ‘절대’를 뜻한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정확하게 지적했듯 우상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8:4).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사람들이 ‘무엇’인 줄 착각하여 열심히 섬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섬길 수 있는 우상에는 탐심과 같은 개인의 우상(골 3:5), 금송아지와 같은 교회내적 우상, 그리고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섬기는 무수한 우상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우상들은 대부분 서로 연관되어 있다. 세상이 섬기는 우상을 교회와 교인들이 섬기는 것이 보통이고, 그것이 바로 타락한 교회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는 반드시 주위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탐심의 우상, 한국 교회가 섬기는 ‘우리 교회 우상’은 모두 한국 사회가 섬기는 물질의 우상에서 파생된 것이다. 세상이 금을 우상으로 섬기는데, 그리스도인은 은을 우상으로 섬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우상과 더불어 싸우는 종교다. 오직 한 분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을 대체하거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을 배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가 건강하고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면 교인들, 교회, 그리고 주위 세상이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우상을 거부하고 제거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고 교회가 타락하면 교회 안팎에 우상이 우글거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만이 절대이며 그의 말씀은 진리임을 믿는다면 모든 우상은 그 자체로 거짓일 뿐 아니라 우상숭배는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와 교인들에게만 부정적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사회에도 부정적이다. 그러므로 우상을 제거하는 것은 곧 세상에도 이익을 주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할 수 있는 공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진정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영적으로 민감한 눈으로 자신과 이 시대를 관찰하면 세상이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교회 자체가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 그것을 알 수 없게 된다. 누구도 우상인 줄 알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없다. 우상이 아닌 줄 알고 섬기기 때문에 우상이 되는 것이다.
 
3. 물질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
 
지금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과 고쳐야 할 병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극심한 이념적 대립, 남북화해와 통일, 후진상태의 정치, 아직도 심각한 부패, 빈부의 양극화, 복지향상과 복지 포플리즘, 사교육 문제 등 모두가 심각하고 중요하다.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시대적 소명이라 주장할 수 있다. 물론 한국 교회가 이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교회가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들이라고는 할 수 없다. 교회가 가장 당연히 책임져야 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차치하고 다른 문제들과 씨름한다면 이는 자원의 낭비일 뿐 아니라 책임회피가 될 것이다.

오늘날 세계 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시대를 가장 병들게 하고 이 시대가 가장 열렬히 섬기는 우상이다. 바로 물질만능주의, 곧 돈의 우상이다. 돈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상으로 등장했고 예수님도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재물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 하심으로 재물이 하나님 자리에 앉을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마 6:24).

예수님의 경고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재물을 사랑하는 잘못과 관계된 것이란 주장도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바울사도가 경고하였다면 (딤전 6:10) 초대교회가 투쟁하던 시대에도 돈은 심각한 우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역사상 어느 다른 시대에도 돈이 오늘날에서만큼 모든 가치를 주도하고 모든 가치의 표준으로 등극하지는 않았다. 돈은 오늘날 생물학적 생존을 보장해주고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를 넘어 정치적 권력, 사회적 명예, 학문적 성취, 예술적 창조, 운동경기의 승리, 심지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까지 도와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가문, 명예, 존경, 사랑, 인기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돈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졌다. 돈은 흔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라 하지만, 앞으로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한다고 믿기 때문에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돈 그 자체를 얻는 것이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돈은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거뜬히 등극했다. 오늘날의 돈만큼 전 세계가 숭배하고 믿는 우상은 역사상 존재해 본 일이 없다.

특히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돈을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8년 4월 8일 일본청소년연구소가 한국, 일본, 미국, 중국의 고교생 1000-1500명씩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한 결과 한국학생의 50.4%는 “부자가 되는 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응답했는데 일본 학생은 33%, 중국 학생은 27%, 미국 학생은 22.1%가 그렇게 응답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선 어떤 수단을 써도 괜찮다”는 것에도 한국 학생 23.3%가 동의해서 미국 21.2%, 일본 13.4%, 중국 5.6%보다 높았다.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다”는 것에도 한국 학생은 54.3%나 동의했는데, 미국, 일본, 중국은 30%대였다 한다.

이런 배금사상이 정말 한국인을 행복하게 하는가? 영국의 레가툼 연구소 (Legatum Institute)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생활만족도 (Average Life Satisfaction)는 조사대상 110개국 가운데 104위로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불만은 돈을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돈은 공유불가능 (zero-sum)한 하급가치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그렇지 않아도 경쟁심이 유달리 강한 한국인을 더 경쟁적이 되게 하고 질투와 갈등을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다.

사랑, 지혜, 지식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다른 사람이 그 때문에 적게 가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질투와 경쟁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런 공유 가능한 가치는 고급 가치라 할 수 있는 반면에 돈, 권력, 명성 같이 공유 불가능한 가치들은 하급가치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가치들은 사람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질투심과 갈등을 조장하며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돈에 대한 욕망을 부채질하고 정당화하는 제도가 자본주의다. 18세기 네덜란드인 만더비어(B. Mandeville)가 쓴 ‘벌의 우화’란 책의 부제가 ‘사적인 악이 공적인 이익’(Private Vices, Public Benefits)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자체로는 분명히 악이지만 그 악이 결과적으로 공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면 결과적으로 사회가 윤택해지고 발전함으로 공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논리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도 주장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윤택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를 택한 사회는 가난해지고 만 것이다. 성경도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열심히 일할 것을 독려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그런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희년제도를 둔 것,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유무상통한 것,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예수님의 비유 등 자본주의와 상치되는 가르침도 많이 있다. 성경이 허락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유재산은 자본주의가 이해하듯이 우리 마음대로 처분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이용해야 할 책임의 영역이다.

즉 권리로서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할 정치기 재산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사유재산과 성경이 인정하는 청지기 재산은 구별해야 한다.

과거 마르크스주의가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자본주의가 그 견제를 받았고, 그 때문에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치우칠 수 없었으며 누진과세, 독과점 금지 등의 제도를 도입하여 그 약점들을 보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진 오늘날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할 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재 받지 않는 모든 세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타락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지금 타락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최근 온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경제활동을 돕기 위하여 봉사해야 할 금융기관들이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으로 변신하여 돈으로 돈을 버는 상황으로 변질되고, 거기에 도덕성까지 타락해서 오늘날 전 세계가 신음하는 경제위기를 유발한 것이다. 성경의 원칙은 모든 소득은 노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성경이 이자를 금한 것은 그것을 보여준다. 노동을 통하지 않는 소득은 문자 그대로 불로소득 (不勞所得)이고, 과거 농경사회와 달리 산업사회에서는 불로소득은 대부분 도둑질이다. 재물에 대한 욕망을 지금처럼 방임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결국 전 인류에게 큰 불행을 가져오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서버리면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다 한다.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 경제가 어디까지 계속 자랄 것인가? 그런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원료는 어디서 구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사용할 에너지는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날로 심각해지는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미 우리는 과소비와 과생산을 통하여 우리 후손들이 사용해야 할 자원을 도둑질하고 있으며 심각하게 오염된 자연을 유산으로 남기고 있다. 이런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환경오염에 의한 인류의 종말은 불가피하고 촉진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교회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신이 되어 있는 돈의 우상을 대항하여 교회가 수행하는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돈의 우상을 제거하여 자본주의의 회포와 타락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 특히 오늘의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대적 소명이다. 이에 성공하지 못하면 교회의 영적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들의 삶도 심각한 위기에 당도할 것이다.
 
4. 세계내적 금욕
 
돈의 우상을 제거하고 자본주의를 견제, 수정하려면 교회부터 돈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북반구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실제적으로 돈의 우상을 섬기고 있다. 돈 때문에 거짓말하고, 총회장 등 기독교 단체의 장이 되기 위하여 돈을 쓰고, 목사가 교회의 돈 수십억 원을 횡령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보다는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비판하는데도 불구하고 대교회에서 목회자 세습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물질주의의 심각성을 비판하고 경고하는 설교가 강단에서 거의 사라졌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기도, 봉사, 헌금이 물질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수단으로 이해하는 설교자와 교인이 한 둘이 아니다. 교회가 돈의 우상을 섬기는데 어떻게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시대적 소명을 조금이라도 감당하려면 가난해져야 한다.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고는 물질주의를 비판할 수 없으며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없다. 예수님도, 바울사도도, 위대한 믿음의 용장들도 모두 가난했다. 예배당은 검소하고 교인들의 생활방식도 단순해져야 한다. 돈이 있다면 선교와 구제를 위하여 써버려야 한다. 지금도 수십 억의 인구가 하루에 2천 원 이하로 생활하고 있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과소비하고 사치하게 사는 것은 죄악이다.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자본주의는 개신교의 절제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 (Max Weber)의 주장이다. 그에 의하여 초대 칼빈주의자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번 돈을 가능한 한 쓰지 않고 저축했기 때문에 자본이 축척되고 거기서 자본주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옳은지는 논란거리지만 적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개신교는 처음부터 근면과 절제를 매우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베버는 초기 개신교회가 세계내적 금욕 (innerweltliche Askese)을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수도사들이나 승려들이 속세를 떠라 수도원이나 절에서 수행하는 금욕과 달리 개신교인들은 속세에 살면서 사치를 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절제했다는 것이다. 그런 전통은 지금도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 북유럽 개신교인들의 삶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이나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에서 음식 맛이 유난히 없는 것도 맛있게 먹는 탐식(gluttony)을 죄악시하는 전통 때문이다. 흔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라 주장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절제하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경제는 비교적 건전하지만 사치하고 과소비하는 이태리나 스페인의 경제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그러나 북유럽국가들도 점점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있고 그들을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던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나고 있다. 독일도, 네덜란드도 사치와 쾌락에 서서히 탐닉되고 있다. 전 세계가 쾌락의 자본주의란 말을 타고 쾌락의 미끼만 바라보고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의 경고는 말의 귀를 스쳐 지나가는 동쪽바람 (馬耳東風)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오늘의 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하고 돈을 미워할 만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세속화되어 있고 타락한 교회가 과연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수정하여 자연과 인류의 생존이 가능하도록 할 의지와 안목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치가 아닐까?〠
 
손봉호 박사|2014 시드니성시화대회 주강사. 윤리학자이며 사회운동가. 철학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과 동덕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에 나눔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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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드니성시화대회 -주 강사:손봉호 박사

2014년도 시드니성시화대회가 3월 7일부터 9일까지 리버사이드 여자고등학교 강당(Revirside Girls High School), 벨모아 공원, 마틴 플레이스 등지에서 열린다. 특별히 금년 대회에는 리드머침례교회 음악선교팀(Redeemer Baptist Music Ministry)과 한인연합성가대가  마틴 플레이스에서 다민족 남녀노소가 찬양으로 함께 어우러져 하나 되는 찬양 페스티벌을 펼친다.

금번 성시화대회는 손봉호 박사를 강사로 초청, 3월 7일(금)부터 8일(토)까지 양일간 전도집회 형식으로 러버사이드 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말씀잔치를 펼치게 된다.

손봉호 박사는 대한민국의 윤리학자이며 사회운동가로,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서 수학하였으며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과 동덕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에 나눔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있다.

<시드니성시화대회>
 •일시 : 2014년 3월 7일(금)~8일(토) 오후 7:00
 •장소 : Riverside Girls High School 강당
           (Huntley's Point Road, Gladesville)

<다문화행진 및 찬양 페스티벌>
 •행진 : 2014년 3월 9일(주일) 오후 4:00
    Belmore Park(집합)-Hay St-Pitt St.-George St-
    Martin Place
 •찬양 페스티벌 : 2014년 3월 9일(주일) 오후 5:00
                       Martin Place 특설무대
 •문의 : 0432 765 722(김환기 사관, 행진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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