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은 누구인가?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1/27 [12:17]
중국은 55개의 소수민족과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소수 민족은 자신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한민족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조선족의 인구는 소수민족 가운데 13번째로 많으며 주로 동북삼성에 거주하고 있다. 동북삼성은 두만강과 압록강의 접경 지대인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을 말한다. 길림성 내의 연변은 조선족 자치주이다. 

중국이 1955년 이곳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지정한 후 소수민족 특혜정책에 따라 모든 간판은 조선어와 중국어가 모두 표기되어야만 영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치주 내 간판은 한글이 우선이기 때문에 간판 위쪽과 오른쪽은 한글로 표기된다.

자치주가 계속하여 유지되기 위해서는 소수 민족이 30% 이상 살아야 한다. 하지만 연변에 살고 있던 조선족은 최근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떠나고, 한국행이 쉬워지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금 연변은 자치주를 유지하기에 위험 수위에 왔다. 이미 백두산 관할 행정권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중국 길림성 직속으로 넘어갔다.

더구나 중국은 ‘동북공정’을 내세워 동북삼성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한마디로 과거 만주지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으로, 중국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 역사라는 것이다.

나는 2011년 발해의 수도였던 ‘동경성’을 방문했다. 어릴 때 그곳에서 자란 조선족과 함께 갔다. 그는 깜짝 놀라며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고 한다. 그곳은 더 이상 고구려의 후손이 세운 발해가 아니었다. 새로 만든 입간판에는 발해는 중국 북방의 소수부족이 세운 국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경성은 옛 발해 궁터가 아니라 동북공정에 입각해 새롭게 단장된 중국 궁터이다. 
 
조선족의 이동
 
디아스포라 유태인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북이스라엘, BC 586년 바벨론에 의하여 남유다가 멸망하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발생했고, AD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나라 자체가 없어지면서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조선족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조선족의 이동 단계를 1910년 중심으로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제1단계(1910년 이전)는 19세기 후반에 한반도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간도라 부르고, 압록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서간도라 불렀다. 청나라 영내로의 조선인 유입은 1885년에는 만주로의 이주 금지가 철폐되어 더욱 증가하였다.

제2단계(1910-1931)는 나라 잃은 슬픔을 벗고 항일 운동을 하기 위하여 애국지사 중심의 망명 이주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시기였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도 이 시기에 고향인 홍성을 떠나 만주로 갔다. 그는 1918년 만주로 망명하면서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라는 시를 지었다.

제3단계(1932 -1945)는 일본은 1932년 ‘만주국’을 세우고 대대적으로 이주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한일합방 직후 새로운 토지정책을 추진하였다. 자작농들은 대부분 몰락하여 소작농과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거나 화전민 혹은 일제의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만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45년 한국이 독립은 했지만 다양한 이유로 귀국이 지연되다가, 중국에 둥지를 틀 수 밖에 없었던 ‘디아스포라 코리안’을 중국 정부에서는 ‘조선족’이라 부른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 한인사역(Korean Ministry) 및 수용소 담당관(Chaplain, Detention Cen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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