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는 누구인가?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4/29 [10:25]


1992년에 히로시마에 갔다. 그곳은 1945년 8월 6일 원폭이 떨어진 곳이다. ‘리틀보이’(Little Boy)라고 불리는 ‘원자폭탄’이 떨어져 20만 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다시는 인류 역사에 이런 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하에 그곳에 ‘평화기념공원’을 조성했고 그안에 ‘평화 기념관’을 만들었다. 

기념관 안에는 원폭이 떨어졌을 당시 멈췄던 8시 15분을 가르치는 큰 벽시계가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의 ‘한국인 위령비’을 찾았다. 원폭 희생자의 10%가 한국인이었다. ‘한국인 위령비’는 평화 공원 내에 있지 않았다. 일본은 여러 가지 이유로 위령비가 평화공원 내부에 세워지는 것을 반대했다. 민단 주관으로 추진된 ‘한국인 위령비’가 조총련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들이 희생 당한 사람이 ‘한국인’ 뿐 아니라 ‘조선인’도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970년에 위령비가 건립되었지만, 평화 공원내에 세워지지는 못했다. 결국 1999년 2월에 합의가 이루어져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되어 공원 내로 이전할 수 있었다. 과연 ‘한국인’은 누구이며, ‘조선인’은 누구인가?
 
한국인과 조선인
 
한인이 일본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910년 이후였다. 일본은 대부분 산업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금지했으나, 한일강제병합으로 한인은 일본의 ‘신민’이 되게 되어 이 규제가 풀렸다. 더구나 1920년 일제의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많은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중국과 일본 등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국 본토를 침략하면서, 일본은 본토에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본은 ‘한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 취급 요강’을 발표하면서 한인들을 강제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으로 강제 연행한 인원이 10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대부분 탄광, 철광, 군수공장, 토목 사업 등의 분야에 동원이 되었다. 강제로 연행된 한인 노동자들은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노동력을 수탈당했다. 해방 직후 1945년 당시 재일 한인이 210만 명 정도가 있었다.

국내의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으로 귀국은 늦어지고, 이미 일본에 뿌리를 내린 많은 한인들은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더구나 일본은 귀국 희망자들이 고국으로 갖고 갈 수 있는 금액을 1천 엔으로 제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1947년 5월 2일 ‘외국인 등록령’을 공포했다.

일제시대에 한인의 국적은 모두 일본이었지만, 해방이후 1947년 일본에 거주하는 ‘한인’에게는 모두 ‘조선’ 국적이 부여되였다. 당시 한반도에는 공식적인 국가가 건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재일한인의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하였다.

일본은 ‘조선’ 국적을 가진 한인에게 ‘한국’국적으로 바꾸라고 요청했다. 이때부터 재일 동포 국적란에는 ‘조선’과 ‘한국’ 두 가지가 생기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한국을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로 인정하면서, 한국 국적을 선택한 한인에게만 ‘협정영주권’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에는 ‘조선’ 국적을 가진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정대세란 축구 선수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 2세였고, 어머니는 ‘조선 국적’의 재일동포 2세이다.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국적을 이어받아 ‘한국 국적’을 가지고 ‘조선학교’ 를 다녔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북한은 나를 지켜보고 키워준 나라, 일본은 내가 태어난 나라, 한국은 나의 국적”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 한인사역(Korean Ministry) 및 수용소 담당관(Chaplain, Detention Cen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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