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교회의 상징, 정우성 목사를 추억한다

그가 남긴 말 ‘첫째도 기도고 둘째도 기도’ 가슴에 맴돌아

글|김명동, 사진|권순형ㆍ윤기룡 | 입력 : 2014/04/29 [10:52]
▲ 조화 속에 묻힌 고 정우성 목사의 발인예배는 김지헌 목사의 사회로 진행됐다.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순복음교회 정우성 목사가 지난 3월 27일 오전 9시 30분 시드니 뱅스타운병원에서 소천했다. 향년 69세. 정 목사는 지난 3월 7일 운동신경원질환으로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오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1944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정우성 목사는 고려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현대건설주식회사에 입사후 홍금란 사모(2009년 9월 11일 향년 64세로 소천)와 결혼, 1남 3녀를 두었으며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순복음경복교회를 개척했다. 1979년 3월 시드니순복음교회 전도사로 부임해 같은 해 4월 목사안수를 받고 35년간 담임목사로 섬기며 시드니순복음교회를 대형교회로 키웠다. 
 
▲ 세계성령상을 수상한 정우성 목사(앞줄 오른쪽 2번째 홍금란 사모)     © 크리스찬리뷰

1979년 1월부터 시드니 노스 스트라스필드에 있는 St. Stephens Presbyterian Church에서 13가정이 모여 기도한 것을 모태로 출발한 시드니순복음교회는 호주와 뉴질랜드에 27개 지교회, 8개 지성전을 두고 있다.

정 목사가 기독교에 입문한 것은 고대 기독학생회를 통해서였다. 이곳에서 기독학생회장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예수님을 만났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홍금란 사모를 만나 서대문에 있던 순복음중앙교회(지금의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함께 신앙을 키워갔다. 홍금란 사모는 신앙적 배경이 없었던 정 목사의 든든한 신앙 후원자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목회사역, 부부생활, 가정생활 자체가 살아있는 가르침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 발인예배에 참석한 교계 인사들. 오른쪽부터 홍관표 원로목사, 성시화운동 대표본부장 진반섭 장로, 시교협 회장 최효진 목사.     © 크리스찬리뷰

정 목사는 2008년 세계성령상 수상과 함께 ‘자랑스런 고대기독인상’을 수상했다. 특히 세계성령오세아니아협의회 대표회장으로 디아스포라 세계선교에 힘써왔다. 세계성령한국기독교성령 100인에 선정됐고 제5회 홀리스피리츠맨 메달리온상을 수상했다.

이날 정우성 목사의 소천 소식이 알려지자 홍관표 목사(시드니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는 “고 정우성 목사님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다”며 “우선 기도의 사람으로 성령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사명을 잘 감당했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사명완수에 최선을 다한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었다. 사명이란 말은 한문자에 심부름(使)자에 목숨(命)자인데 하나님께서 시키신 심부름을 목숨을 다하여 감당한 충성된 종이었다”고 애도했다. 
 
▲ 투병으로 걷기도 힘든 상황에서 2014성시화대회에 참석한 정우성 목사(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그는 시드니성시화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르며 헌신했다.     © 크리스찬리뷰

홍 목사는 “그는 70세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아 간 것을 보면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그가 받은 사명을 끝까지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고 본다”며 “사도바울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의 육체에 채우는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70년의 생애를 온전히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생전에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지인들도 갑작스런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진반섭(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본부장) 장로는 “정우성 목사님은 정말 귀한 분이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시드니성시화운동을 8년 동안 지속할 수가 없었다”며 “저희가 계획을 세우고 말씀을 드리면 그저 묵묵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셨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해올 수가 있었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 발인예배에서 유가족들이 그의 삶을 기리며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 크리스찬리뷰

진 장로는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번 성시화대회 때도 투병으로 오실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오신 것은 시드니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여야 한다는 꿈과 소망을 우리들에게 메시지로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정말 귀한 분이시고 생애가 아름답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분이 바라시는 이일을 우리는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6명의 장로 운구위원들에 의해 교회 앞마당을 지나 장지로 향했다.     © 크리스찬리뷰

영원한 안식에 들다


시드니순복음교회에서 3월 31일 오전 10시에 드려진 발인예배는 그의 삶을 기리며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많은 사람들의 흐느낌 속에 조용히 거행되었다.

이날 발인 예배에는 김지헌(오클랜드순복음교회 담임) 목사의 사회로 이기관 장로의 기도, 연합성가대의 찬양과 생전 정우성 목사의 목회영상 시청 등으로 이어졌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문 대표로 참석한 이장균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선교국장)는 ‘계21:5-7’의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자녀 MVP’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 고 정우성 목사의 하관예배는 카슬브룩 공원묘지에 거행되어 2009년 9월 소천한 홍금란 사모 옆에 안장됐다.         © 크리스찬리뷰

이 목사는 “고 정우성 목사는 이 땅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시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가셨다. 1979년 고 정우성 목사가 받은 그 사명을 이제 우리가 이어 받아야 한다. 모세가 죄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간 것처럼 고인의 선교 열정을 이어받아 그 비전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고인은 복음, 교회, 성도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식지 않았다. 믿음의 유산으로 남겨준 복음 사역을 선교적 사명과 비전으로 하나님 나라의 MVP가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말씀을 전하는 동안 참석자들은 간혹 울먹이기도 하고,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도 보였다.

이어 이 목사는 조용기(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이영훈(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 목사의 조사를 대독했고, 최효진(시드니교역자협의회 회장) 목사, 진반섭(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본부장) 장로, 이정수(시드니순복음교회) 원로장로의 조사가 이어졌다. 오지은 집사의 조가에 이어 강영식 장로의 고인 약력보고 후 이장균 목사의 축도로 발인예배를 마쳤다. 6명의 장로 운구위원에 의해 출관이 되면서 영정사진을 선두로 성전에서 나와 좌우측으로 서있던 성도들의 환송을 받으며 교회 앞마당을 한 바퀴 돌아 장지인 카슬브룩 메모리얼 파크로 향했다.
 
▲ 2014 시드니성시화 행진에 휠체어를 타고 참가한 정우성 목사. 정 목사는 이 행진에 참가하고 18일 후에 소천했다.     © 크리스찬리뷰

예배에 참석한 수많은 추모인파는 고인의 존재, 성품, 신앙을 더 이상 볼 수 없고 배울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날 발인 예배가 진행된 시드니순복음교회 예배당은 자리가 비좁아 참석자들이 복도까지 줄지어 앉아야 했다. 생전 고인이 한인사회는 물론 교계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세계성령중앙협의회(대표회장 정인찬 목사)는 지난 3월 28일 용인 새에덴교회에서 세계성령오세아니아협의회 대표회장 정우성 목사 추모식을 개최했고,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는 지난 4월 18일 정우성 목사의 선교정신을 기리는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 2011년 3월 성시화 행진 도중 심장충격으로 쓰러져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심장수술을 받고 되살아난 정우성 목사.     © 크리스찬리뷰

69세로 소천한 ‘영원한 현역’


정우성 목사는 영원한 현역이었다. 그의 사전에 조로(早老)라는 낱말은 없었다. 정 목사는 지병을 오랫동안 앓아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천국가기 3주 전까지 교회에서 성도들을 살필 정도로 성도들에 대한 애정과 호주 복음화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지난 3월 7, 8, 9일에는 시드니에서 진행된 성시화운동에 대회장으로 참석해 시가행진까지 동참했을 정도로 호주 복음화에 앞장섰다. 정 목사는 3년 전 시드니 성시화운동 다문화행진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도 있었다. 이번에도 정 목사는 시드니에서 가장 큰 대로인 조지 스트리트에서 진행된 시가행진을 끝까지 마쳤다.
 
▲ 뱅스타운 병원에 입원한 정우성 목사를 성도들이 병문안 와서 쾌유를 빌며 기도하고 있다. 이 사진은 정 목사가 소천하기 사흘 전인 3월 24일, 모발폰으로 촬영했다.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순복음교회를 세우면서부터 매월 1, 2, 3일마다 금식기도를 해온 정우성 목사는 지난 3월에도 십일조 금식기도에 동참해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줬다. 교회 성도들이 정 목사의 건강을 걱정해 금식기도를 만류했지만 오히려 의연한 모습으로 교인들을 위로하고 다독였고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며 끝까지 금식기도를 이어갔다고 한다.

1991년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계기가 있었다. 500명의 성도가 신청한 영주권 서류를 이민국이 분실하는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정우성 목사는 50일간 특별기도회를 작정하여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했고 영주권 신청자 500명을 모아 서류를 다시 제출했다. 이민국은 분실 책임을 져야했기 때문에 신청자 전원이 동시에 영주권을 받았다.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비난할 때 정 목사가 금식하며 기도한 기적의 열매였다.
 
▲ 뱅스타운 병원에 입원한 정우성 목사가 말을 못하고 필사하고 있다. 내용은 ‘성시화대회는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곳으로 하라’는 것과 ‘김범석 목사가 (목회를)잘 하고 았다’ 것으로 마치 유언한 것 같은 느낌이다.     © 홍승주

시드니순복음교회 창립멤버로 35년간 정우성 목사와 동역한 강영식(84) 장로는 “목사님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중풍을 앓으신 적도 있어서 5- 6년 전부터 몸도 불편하셨고 지난해부터 말도 잘 못 알아들으셨는데도 항상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며 “돌아가시기 전 2주 동안 식사도 못하셨는데 소천하실 때는 성도들을 보고 웃으시며 편안하게 가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 정우성 목사의 후임으로 취임한 김범석 목사는 “정 목사님이 해 오셨던 목회철학을 잘 계승하겠다”고 다짐했다.     © 크리스찬리뷰

“1979년 1월 시드니에 순복음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 편지를 보냈어요. 교회를 세우는데 목회자가 필요하다고요. 당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여 목회자 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거든요. 그런 후 경복순복음교회 정우성 전도사를 보낸다는 연락이 온 거지요.”

강 장로는 “사소한 개인 사정에도 늘 세밀한 배려와 관심을 아끼지 않으셨고 청빈한 삶을 사셨다”며 정 목사를 추모했다.

정우성 목사를 측근에서 모셨던 홍승주(62) 장로는 “믿음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으셨다”며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그렇게 주위에서 금식을 한 달에 3일 동안 연속으로 하시는 것을 열흘에 한 번씩 세 번 하시면 같지 않느냐 그렇게 하시라고 권하고, 장로들이 대신하겠다고 해도 고수하셨다.”고 말했다.
 


“1997년 3월 주일날 저녁이었는데 정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어요. 그때 저는 아들레이드에서 혼자 시드니로 와서 하숙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후 시드니순복음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2003년도에 장로가 되었는데 그 당시 다른 장로님들과 나이 차이가 엄청났어요. 그래서 모임을 갖게 되면 목사님 수발은 자연히 제가 들게 됐어요. 제일 젊으니까요. 목사님도 부담 없이 시키시고 그렇게 해서 목사님을 측근에서 모시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목사님한테 입은 은혜가 많아요. 특별히 제가 영주권을 받기 전에 영주권 문제를 봐주러 다니셨는데 뜨거운 여름인데 양복을 입으셨는데 바지는 질질 끌리시고 막 뛰어다니시는데 제가 못 따라 가겠더라고요. 아, 진심으로 하시는구나, 그때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 시드니순복음교회 사무실에서 24년간 근무하며 정우성 목사를 모셨던 심병숙 권사. 심 권사는 “정 목사님은 정말 헌신적인 분이었다” 고 회고했다.     © 크리스찬리뷰

대심방 얘긴데 보통 스케줄을 밤 11시까지 지역 대 심방을 잡아 놓으신다고요. 그러면 심방을 가면 제 시간에 딱딱 끝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끝나는 집이 새벽 1시, 2시가 되는데 받는 사람도 즐겁게 기다리고 목사님도 새벽 2시까지 심방을 마치고 들어가시곤 하셨어요. 정우성 목사님이시니까 그런 일정으로 하셨지 다른 분은 어림도 없을 거에요.
 
▲ 생전에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목회활동을 펼쳤던 정우성 목사의 이모저모.     ©크리스찬리뷰

홍 장로는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성시화운동에 대한 열정이 계셨다”고 밝혔다. “2014년 성시화대회를 끝내고 보고를 하러 병원으로 찾아가 금년에는 새순교회에서 성시화를 잘 끝냈습니다, 앞으로는 성시화대회가 대관료 등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내년에는 순복음교회에서 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말은 못하시니까 글로 써주셨어요.

성시화는 시드니순복음교회에서 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곳으로 의논하여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 시드니순복음교회 창립 초기 성도들이 정 목사가 떠난 후 한 달여 만에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사무실을 찾았다.      © 크리스찬리뷰

지금은 좀 어수선하지만 김범석 목사님이 잘하고 계시고 또 시드니순복음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니까 정우성 목사님의 믿음의 유산을 이어받아서 열심히 잘 해나가리라 믿습니다.”

김범석(44) 목사는 “목사님의 공백을 크게 느낀다”며 “그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깨달아진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목사님의 은혜를 너무 많이 입었다”면서 “사위인데 목사님을 한 번이라도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목사님이셨다.”고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김 목사는 “그분은 예수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전력하셨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온순하고 겸허하고 순종적인 분이셨다. 내가 피하고 싶었던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부족한 나를 기다려주시고 이끌어 주셨다”고 추모했다.
 
▲ 시드니순복음교회를 35년간 섬긴 고 정우성 목사.     © 크리스찬리뷰

“한결 같이 하신 일은 기도사역이셨습니다. 지난 35년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세계, 가족,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루도 기도를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일은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입니다. 집회 인도 차 미국에 오셨는데 아이들을 안고 활짝 웃으시면서 좋아하시던 모습입니다. 그 인자하신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의 사역이 바빠 아쉬움은 있었지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이번에 한 번 더 기회를 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말세에 생생한 메시지를 신앙인들에게 들려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마음을 준비시키시고 기도하게 하신 다음 아주 적절한 때 부르셔서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 땅 사역을 모두 끝내고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목사님이 해 오셨던 목회철학을 잘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고 정우성 목사 추모특집을 위해 자리를 함께한 성도들. 오른쪽부터 유효숙 권사, 변영도 장로, 양은숙 권사, 강영식 장로, 이기관 장로, 김범석 목사, 김유용 장로, 이영신 권사, 심병숙 권사, 김명동 목사(본지 편집인)     ©크리스찬리뷰

한 달 후에 찾은 시드니순복음교회


한 달이 지났다. 아직도 정우성 목사를 둘러싼 이야기가 한창이다. 성도들은 그가 섰던 강대상을 올려다보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살아생전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 눈물을 흘린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24년간 정우성 목사를 곁에서 모신 심병숙(63) 권사는 “그동안 눈뜨면 항상 목사님과 함께 있었다”며 “정말 헌신적인 분이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출근하시는데 제대로 걸으시지도 못하고 사무실에 앉아 계시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잊혀지지 않는다”고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저는 1987년 5월에 이 교회에 오게 됐습니다. 저희가 한국에 있을 때는 교회를 안 다녔기 때문에 조용기 목사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제 언니 집에서 조용기 목사님을 식사대접 하게 됐는데 그때 안수기도 받으라고 그래요. 안수기도가 뭐냐, 머리만 대면된다고 끌어 잡아서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그게 굉장한 축복이었더라고요.

그런 후 썸머힐에서 교회 앞으로 이사를 했는데 하루는 교회 한 집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임신을 했는데 입덧 때문에 교회 사무실 근무를 못하는데 저보고 사무실에서 근무할 수 있느냐고요. 그전에 목사님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십일조에 대해서 배우고 그때부터 십일조를 할 수 있게 직장을 달라고 매일 기도하고 있었거든요. 작정기도였어요. 연락을 받고 하나님이 저에게 십일조를 할 수 있는 직장을 주었으니까 예수님 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이렇게 세월이 흘렀네요.”

 
▲ 이정수 장로(왼쪽), 홍승주 장로     © 크리스찬리뷰

심 권사는 “우리 목사님(고 정우성 목사)의 수고와 땀으로 많은 가족(성도)들이 이리저리 셋방살이 하지 않도록 큰집(교회)을 사놓고 가셔서 내 집에서 편안하게 예배생활 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특히 내 집(시드니순복음교회)에서 이번에 ‘부활절연합성회’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심도 하나님의 은혜다. 또 기도원도 사놓고 가셔서 시드니 교민들이 언제나 기도하고 싶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빌려줄 수 있다는 것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새신자반에는 활짝 웃는 정 목사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무엘을 업고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의 그의 미소가 기자를 내려다본다. 이 사진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1991년 1월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주최 제13회 한인친선배구대회가 끝난 직후 정우성 목사를 만났다. 시드니순복음교회가 37개 팀이 출전한 이 배구대회에서 남자 YB우승, 여자부 A팀 준우승, 여자부 B팀 3위, 감독상, 최우수상, 공격상, 수비상, 응원상 등을 휩쓸었다.

- 이번 배구대회 우승을 축하합니다. 상을 모두 휩쓸어 오셨더군요.
“사실 교회가 창립된 지 12년째인데 12년 만의 우승입니다. 시합에 나갈 때마다 열심히 하긴 했는데 등수 안에 못 들었어요. 그때 나는 항상 우리 팀이 짐으로써 상대팀을 기쁘게 해준다고 격려했어요. 또 지고 오면 이번에도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었군요, 하고 늘 그렇게 이야기 했거든요.”

- 넥타이 차림으로 아이를 업고 열심히 응원을 하셨는데요.
“아, 네. 그 아이요? 제 아들 사무엘입니다. 심방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안 떨어지려고 해서 아이를 데리고 심방을 갔는데 지루했던 모양입니다. 피곤했던지 업어달라고 보채 길래 업고 응원을 한 거에요.”

- 심방을 하신 후 이곳으로 곧장 오신 겁니까?
“그래요.”

- 운동을 좋아하시나 봐요.
“바닷가에서 자라난 덕에 수영을 좋아하지만 목회에 충실해야죠.”

고인이 떠난 후 담임목사실은 한 번도 문을 열은 적이 없다고 한다. 둘러보고 싶다고 부탁을 하자, 심병숙 권사가 열쇠를 가지고 왔다. 고인과 각별했던 애정이 복받쳐서인지 연신 눈물을 닦아내면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안은 고인의 숨결로 가득 차 있었다. ‘성령충만’이라고 쓴 액자가 먼저 눈에 띄었고 기도하는 모습의 그림이 책상 전면으로 걸려 있다. 책상 위로 성경, 모발폰, 뜯지 않은 우편물, 종이컵 두 개가 놓여있고 새 가족 등록카드, 교적부, 성경공부 교재, 한 영혼초청 대잔치 참석자 명단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새 신자들에게 꽤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 보였다. 곳곳에 있는 유품들이 고인의 동반자의 모습으로 제 위치를 지키고 있었고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아우성친다.

심병숙 권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사님이 종이컵에다 커피를 타오라고 하시면 종이컵이라 뜨거우니까 컵 한 개를 더 포개서 갖다드려요. 그러면 목사님은 아깝다고 컵 한 개를 꼭 빼셔서 이렇게 보관하세요.”
마음이 우우 흔들렸다.

 
▲ 정우성 목사의 추모 특집 취재를 마치면서 고인이 남긴 유품들을 바라보며 정 목사의 목회사역을 회상하는 본지 편집인 김명동 목사.     © 크리스찬리뷰

정우성 목사님, 그립습니다


시드니순복음교회 성도들은 항상 성도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사랑해 주었던 정우성 목사를 그리워했다.

이기관 장로(68) : 81년도에 펀치볼에서 정 목사님을 처음 만났는데 젊고 미남이셨어요. 목사님이 저를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취직자리를 구해주셨고 UTS 유니온에서 11년을 근무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여기에 오셨던 분들은 영어가 부족하고 혼자 있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목사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목사님에게 전화를 드리면 바로 달려오시곤 했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에 있는 식구들에게 연락을 자주 해주셨어요. 여의도에서 선교대회가 있어 한국을 가실 때는 꼭 우리 가정을 둘러보시고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해주셨습니다. 또 안부를 가지고 오셔서 전해주시고요.

목사님은 우리 교민 체육계에도 영향을 끼치셨지요. 1995년도에 엔젤스라는 어린이 야구팀을 우리 교회에서 창단했는데 성인 팀은 지금도 유지하고 있고요. 교민사회에서 운동경기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참석하셔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시곤 했습니다. 천국에서도 우리 교회를 내려다보시고 많은 응원을 하실 것 같아요.

김유용 원로장로(87) : 1983년 3월 7일 버우드공원에서 정 목사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공원에 앉아있었는데 보니까 키도 훤칠하시고 아주 건장하신 분이 다가오시더니‘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시기에 따라 인사를 했어요. 그리고는 곧장 목사님 집에 갔는데 사모님이 계시더라고요.

우리는 점심을 먹었는데 목사님은 점심을 먹지 않으셨나봐요. 점심상이 나왔는데 반찬을 보니까 조그마한 조기 두 마리에다 달랑 김치 하나였어요. 그 상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가게 됐는데 목사님이 가끔 성도들을 소집해요. 그리곤 산으로 가든가 바다로 데리고 가서 기도를 하고 돌아오곤 했어요. 저는 소집을 할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았는데 기도하다 보니까 나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자라고 성령세례도 받았어요.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시간만 있으면 목사님을 찾아갔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지금 김범석 목사가 잘하고 있어요, 잘하고 있어요’ 그런 말씀을 되풀이 하셨어요. 그것이 나에게는 목사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변영도 원로장로(73) : 강영식 장로님이 건네준 조용기 목사님 테이프를 듣고 1997년 10월 첫 주부터 순복음교회에 다니게 됐습니다. 우리 딸이 하나 있었는데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어요. 목사님이 입학시켜 주셨는데 그 딸이 지금은 의사가 됐습니다. 그만큼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교회 기도원을 샀는데 양쪽으로 소를 길렀어요. 왜 그랬냐 하면 풀이 계속 자라니까 깎아야 되잖아요. 소를 길러서 풀을 뜯는 거에요. 얼마나 넓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이 철조망을 제거하고 소들을 다 처분하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거룩한 땅인데 소똥을 싼다는 거지요. 그래서 다 걷어내고 소도 처분했어요. 그곳에서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났지요. 저희들도 그곳에서 성령받고 변화돼서 믿음생활하며 지금까지 온 겁니다.

목사님이 병원에 계실 때는 제가 가면 마음이 편하신지 ‘가라’ 소리 안하시고 주무시기도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뵐 때는 웃어도 주시고 행복해 하셨어요.

유효숙 권사(67) : 목사님과 양은숙 권사님이 조용기 목사님 테이프를 갖고 심방을 오셨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간암으로 고생하고 계셨을 때 순복음교회에 가면 병도 고칠 수 있다니까 데려다 달라고 하셔서 1979년 10월 첫 주부터 순복음교회에 다니게 되었어요. 그런 후 그해 12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교회에서 장례식을 첫 번째로 치룬 1호가 됐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심방을 가시면 우리 딸을 안고 다니셨어요. 그래서인지 우리 딸이 목사님과 정이 너무 들었어요.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누가 일하는 직장으로 메시지를 보냈는지 전화를 해서 막 우는 거에요. 목사님께 결혼주례를 부탁하겠다고 했거든요. 우리 딸 달래느라 혼났어요. 지금도 목사님만 생각하면 저보다 더 울어요.

이영신 은퇴권사(82) : 저는 83년도 교민배구대회장에서 목사님을 처음 만났어요. 그런 후 대심방 때는 꼭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다녔어요. 목사님한테 정이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목사님이 부흥회 인도하러 한국에 나가시기라도 하면 우리 목사님 언제 오시나 하고 엄마와 떨어져 있는 심정으로 기다렸어요.

근면 성실하시고 모든 것이 결백하시고 깨끗하시고 참 우리 목사님 같으신 분 이 시대에 찾기 힘들어요. 우리가 너무 귀한 종을 놓치고 나니까 지금도 마음이 너무 허전해요. ‘권사님, 교회 부흥을 위해서 산기도 갑시다’ 이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들립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먼 리버풀까지 새벽마다 차를 타고 오세요. 교회 부흥이 그냥 된 게 아닙니다. 목사님의 희생과 섬김이 있었어요.

돌아가시기 전날 병원에 갔어요. 되돌아보는데 눈짓으로 잘 가라고 그러시는데 죽을 때까지 그 모습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양은숙 은퇴권사(83) : 조용기 목사님 결혼하시기 전부터 서대문순복음교회를 다녔어요. 호주로 온 후 남편인 강 장로님과 조용기 목사님 테이프를 돌리며 전도를 했지요. 그 당시에는 한국에서 오는 직항 비행기가 없었던 때였는데 비행기 도착시간에 맞춰 비행장까지 가서 한국 사람들을 픽업해오고 밥해주고 방도 얻어주고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어요.

그러면서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979년 1월입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정우성 전도사님이 오셨어요.

정 목사님은 투병 속에서도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 열정의 자취가 한인교회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정수 원로장로(71) : 79년 1월에 교회가 세워지고 정 목사님이 3월에 부임하셨습니다. 목사님과 같이 시작을 하고 지금까지 35년간 모시고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목사님, 참 마음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교인들 때문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많은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이단시 해가지고요.

시드니에 처음 교회가 시작됐을 때 수요예배, 새벽기도, 금요철야 예배가 없었어요. 그런데 순복음 신앙은 뜨겁잖아요. 주변 교회에서 광신도라고 하고, 교회도 핍박 많이 받았어요. 목사라고 부르지도 않고 저분이 언제 어디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느냐 하고요. 그러다가 목사님의 입지가 바로서기는 교회가 부흥되니까 이런저런 얘기가 없어지더라고요.


에필로그


정우성 목사의 삶은 곧 한인교회의 역사였다. 정 목사가 한인교회 전반에 미친 영향과 선교적 공헌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있다. 시드니순복음교회라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이기에 앞서 한인교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는 반드시 정 목사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숨어있었다.

언젠가 정 목사에게 “교회성장의 비결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하나 망설임 없이 “첫째도 기도고 둘째도 기도다. 기도해야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사람이 상상하지 못한 이런 역사를 성령님께서 이루신다.”고 강렬하게 말했다. 그 말은 교회성장에 대한 내 인식을 화들짝 깨어나게 했다.

그는 세상에 없고 그가 남긴 말은 살아서 우리 가슴속에 맴돈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사진/윤기룡|크리스찬리뷰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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