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하나님 말씀 가운데 자라나는 아이들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4/09 [12:48]
▲ 방글라데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찬양사역하는 시한장 선교팀   ©김재국
 
지난 1월 6일부터 17일까지 12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닫고, 생각하게 된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방글라데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 전체 인구의 83%가 이슬람, 16%가 힌두교로 99% 이상이 예수를 믿지 않는 나라이다. 

시드니한인장로교회(이하 시한장)에서 2002년부터 시작하여 올 해로 네 번째로 떠나는 단기선교이다. 이 번에도 우리가 후원하는 정경미, 이애련 선교사의 사역을 도와 부족마을의 우물 파는 일과 전도집회를 인도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 도울지역 유치원 졸업식     © 김재국

다카를 향하여 

경비를 아끼려고 한국을 거쳐서 가게 되었다. 10여 년 만에 한국을 가 본다는 현철 형제,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한국을 기대했지만, 깊은 겨울 칼바람이 맞아 주었다. 그 추위에 따뜻했던 것은 과거 시한장 출신 청년들의 환영이었다. 선교의 비전을 나누며 격려하는 좋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선교지에서 사용할 요?물품들을 구입하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항공사 직원의 친절로 비지니스석을 타게 된 우리는 호사만을 누릴 수가 없었다. 방콕에서 다카로 가야 할 방글라데시 비만 항공이 시스템 상에서 확인이 되지 않아 방콕공항에서 하루를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졸업식을 연기하고 기다릴 그들을 생각하며 태국 공항에 도착하여 확인을 하니, 다행히 예정대로 비행기가 뜬다고 하였다. 드디어 선교지에 갈 최종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다. 비행기 안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왜 비행기가 시스템 상에 뜨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우리가 타기로 했던 비만 항공사 비행기가 아니라 터키의 페카수스라는 항공기가 대신 다카로 떠나는 것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비행기 안에 타고 있던 인원 수가 7명이었다. 우리 팀 5명을 합해서 12명이 타게 된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방글라데시 항공기를 타지 말라?현지 선교사의 말이 100% 이해가 되는 스릴만점의 비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방글라데시 다카 국제 공항에 도착하였다. 8일 새벽 1시 30분이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춥지는 않다. 하지만 목을 꽉 잠기게 하는 매연과 늦은 밤에도 길거리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보니 1억이 넘는 인구의 방글라데시에 왔다는 것이 어느 정도 실감이 났다. 

짐을 찾기 위하여 세관을 거치는 동안 어린이 사역 선물로 가져온 가방이 문제가 되었다. 똑같은 가방이 몇 개가 나오자 말도 안 되는 관세를 붙이려 하였다. 가방 하나 슬쩍 찔러주고 빠져 나올 수 있지만 관세를 물고 나왔다. 마중 나온 정경미, 이애련 선교사가 우리를 공항근처 여관까지 인도해 주었다. 여관은 있을 것은 다 있었지만 그다지 누워서 자고 싶지 않은 침대와 왠지 씻으면 더 더러워 질 것 같은 샤워시설, 그런데 이러한 시설들조차 앞으로 다가올 나날들을 미리 알았다면 천국이라 여기며 감사하게 생각했을 텐데.. 


▲ 뜨리쁘라 부족마을을 가기 위해 어깨와 양손에 짐 보따리를 들고 개울을 건너는 선교팀원들.  © 김재국

첫 번째 사역지 도울지역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정경미 선교사가 사역하는 도울 지역을 방문했다. 숙소에서 사역지까지는 CNG라 불리는 세발 모토싸이클을 타고 이동하였다. 스릴만점의 드라이빙이였다. 뒷 좌석 옆에는 문이 없어 다카의 찌든 공기를 온 몸으로 맞으며 차선이 없는 도로에서는 원하는 대로 무한 속도로 주행이 가능했다. 

우리가 도착한 도울지역은 특별히 힌두교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었다. 마을 어귀부터 색색깔의 천으로 장식을 해 놓았고 우상들이 놓여져 있었다. 한 쪽에서는 노란 천을 둘러쓴 힌두교인들이 노래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공부방 학교가 힌두교 잔치가 벌어지는 마당 바로 옆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공부방 졸업생 아이들을 만났다. 호주로 치면 유치원 졸업생들이었다. 10여 명의 아이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근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아이들이 그 동안 배운 학업내용을 발표하는데 불과 5, 6세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1에서 100까지 영어로 그리고 방글라어로 전부 외울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선교사와 현지 교사들이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는지 알 수 있었다. 특별히 이러한 공부가 이루어진 장소가 바로 2006년 시한장 단기 팀들이 지어놓고 갔던 건물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졸업식을 마치고 그곳에서 정경미 선교사와 함께 사역하는 현지인 조셉, 쇼절, 로즈메리, 남탈 등 네 명의 사역자를 만났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이제는 그 곳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원하는 소중한 영혼들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복음전파에 힘쓰며 자신도 가난한 가운데 더 가난한 자들을 품기 위하여 기도하는 형제도 있었다. 

공부방에서 강 건너에는 방글라데시 주변 7개 국에서 100만 명에 가까운 무슬림들이 모여 사흘간 집회를 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해마다 열리는데, 아직 한 달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여자는 함부로 그 장소에 출입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 선교사와 우리 자매들이 현지인 복장을 했지만, 우리를 이상히 보는 눈길이었다. 결국 한 사람이 우리를 불러 이곳에 여자를 데리고 오면 안 된다며 나가 달라고 했다. 그곳을 나오면서 이 장소가 언젠가는 알라의 이름이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장소가 되기를 우리 모두 속으로 기도하였다. 

▲ 짱마 부족의 아이들   © 김재국

두 번째 지역 사이다 밧 

아침에 일어나 QT를 마치고 다카에 있는 금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현지인 순복음교회를 방문했다. 언어만 다를 뿐이지 예배 형식이나 기도 스타일이 굉장히 익숙했다. 방글라데시 현지인보다는 외국인이 더 많았다. 예배 후 이애련 선교사가 사역하는 사이다밧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 곳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밖의 세상과 구분되어 있었다. 큰 철문 뒤에 형성된 동네가 보였다. 양철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간신히 바람만 피할 수 있는 집, 좁다란 골목길은 하수도가 없어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기고 거리의 오물들과 쓰레기, 때로는 인분들이 무릎 높이까지 차올라 둥둥 떠다니는 곳, 악취와 오물 사이의 미로처럼 얽힌 슬럼가 골목 사이 사이를 거쳐 좁은 문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 방안에는 지난 번 팀들이 그려놓은 아름다운 벽화와 팀원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도시 가운데 형성된 슬럼가로 최악의 빈곤 가운데 생활하는 절대 빈민층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구걸하여 먹고 살거나 쓰레기 수거나 가장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면서 최소의 임금으로 연명한다. 이곳에서 이애련 선교사는 아기들과 어린이들을 상대로 사역하고 있었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일을 하러 나간 후 홀로 남겨진 아이들을 돌보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사역을 한다.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고 보건시설이 부족하여 간단히 치료될 질병에도 쉽게 노출되어 고통을 받는다. 우리 팀은 어린이 사역을 하면서 가진 것들을 나누어 주고자 하였지만 최악의 환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하나님 말씀 가운데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팀은 더 많은 것을 받았다.


▲ 뜨리쁘라 부족마을에 설치해 준 펌프로 온 마을 사람들이 편리하게 물을 사용하고 있다.   © 김재국

  세 번째 지역 뜨라쁘라(치타공) 

정경미, 이애련 선교사 사역지인 다카를 떠나 우리의 예정된 사역지인 뜨리쁘라 부족마을을 가기 위해 준비하며, 방글라데시 문화를 더 이해하기 위해 국립 박물관을 관람했다. 한국과 비교하여 부족한 것이 많지만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를 알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방문했다. 

10일, 다카역에서 밤 기차를 타고 6시간에 걸친 여행 끝에 방글라데시 남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치타공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뜨리뿌라 부족마을로 우리를 인도할 방글라인 마크 형제를 만났다. 그의 인도로 좁은 봉고차를 타고 치타공에서도 한참 시골로 들어갔다. 어느덧 비포장도로로 들어선 우리는 덜컹거리는 봉고차에 올라오는 먼지로 인하여 창문도 열지 못했다. 차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길에서 내려 어깨와 양 손에 짐 보따리를 짊어지고 걸어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 앞에는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전원이 펼쳐졌다. 다카나 치타공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란 하늘이나 길 옆에 피어난 이름 모른 꽃들, 푸르게 우거진 숲들 그리고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 정말 그림 속에 있을 법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때 들려오는 선교사의 음성. 

"자 이제 저 강물을 건너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마을에 도착하기 위해서 건너야 할 최종 관문이었다. 어깨에 짊을 높이 매고 신발을 벗고 바지를 올리고 강을 건너갔다. 다행히 우기가 아니라 물이 깊지는 않았다. 강물을 건너자 바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마을을 향하여 우리 팀원들이 올라가는데 마을 아이들이 길 양 옆에 서서 우리를 향하여 꽃 잎을 뿌려주며 환영해 주었다. 짐을 풀고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구경을 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신기해서 쳐다보나 했지만 나중에 안 사실은 이 곳 사람들은 우리처럼 하루 세끼를 먹지 못한다고 하였다. 음식이 생기는 대로 있으면 먹고 없으면 보통 한 끼 정도 먹는 것이 일반적이라 했다. 그것도 모르고 속으로 "음식이 더럽다, 매일 카레만 먹는다"�며 불평을 했던 것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건물이 없어 추수가 끝난 논 위에 짚단을 깔고 천막을 치고 어린이를 위한 첫 사역을 하였다. 준비해 간 찬양과 율동, 시청각 자료 그리고 게임을 열심히 가르쳐 줬다. 태어나서 처음 접해보는 음악이나 시청각 자료들이 놀랍기도 하고 낯설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그다지 큰 호응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잘하는 아이들에게 사탕이 하나 둘씩 주어지자 어느덧 아이들은 전부가 손을 들고 몸을 흔들며 찬양과 율동을 따라 했고 나중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를 따라 다녔다. 

해가 질 무렵 가져온 축구공으로 동네 청년들과 시합을 가졌다. 역시 논두렁 위에서 하는 시합이라 공이 제대로 튈리가 없다. 하지만 어찌나 맨발로 잘 뛰어 다니던지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축구공 하나로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자들. 정확히 말하자면 가난이 가져오는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발견하는 모습이었다. 

저녁이 되어 일하고 돌아온 어른들을 상대로 사역을 하였다. 이곳은 하루를 일해야 그 다음날 먹을 수 있기에 낮에는 시간이 없다고 한다. 하루의 고단한 노동으로 피곤할 텐데도 외부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부족언어를 하는 마크 형제가 영어 설교를 통역했다. 가장 근본적인 복음이 선포되었다. 많은 자들이 주님 앞에 나와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을 고백했고 기도 받기 원했다. 

우리 팀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고 기도해 주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문화가 서로 다르고 생긴 것이 달랐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눈 같은 형제, 자매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뜨리뿌라 부족 사역의 첫 날이 지나가고 우리는 너무나 피곤했던 나머지 콘크리트 바닥에서도 단 잠을 이룰 수 있었다. 

11일, 아침에 일어나 하나 둘씩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이 있었지만 넓은 곳이 개인적으로 끌렸다. 방글라데시는 휴지 대신 왼손을 사용하여 물로 씻는다. 그렇기에 왼손으로 식사를 하지 않고, 왼손으로 악수를 하는 것은 굉장히 큰 실례다. 이번 사역 중 하나로 설치해 준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마을 전체가 사용하게 되었다. 옆 마을에도 펌프가 필요하다 하여 우리교회 모세 선교회의 헌금으로 펌프를 팠다. 옆 마을이라 했지만 산 넘고 강을 건너 1시간을 가야 하는 길이었다. 감사하게도 더 맑은 물이 나오는 펌프를 설치 해 주었다. 

오전과 오후에 각각 어린이 사역이 있었다. 반복적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찬양과 율동도 열심히 따라 하지만 몇몇 아이는 어린 아이가 더 작은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힘겹게 따라 하는 모습은 가슴이 아팠다. 부모들 전부가 일을 해야 가족이 먹고 살 수 있기에 돌이 안된 아이를 조금 더 큰 아이들에게 맡겨 놓고 어른들은 농장으로 나간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오후에는 한 번도 씻은 적이 없는 것 같은 꼬질꼬질한 아이들을 이끌고 강으로 내려가 집단 목욕을 시키고, 그리고 청년들과 축구 2차전 시합을 하고, 둘째 날 저녁 집회를 가졌다. 어제보다 더 많은 어른들이 참석하여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앞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겠다며 다짐하는 마을 사람들 하나 둘씩 앞으로 나와 영접기도를 하였다. 집회가 끝나고 영화를 보여주었다. 이들 중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12일,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어제 예수님을 영접한 형제, 자매들에게 세례를 주기로 했다. 하나 둘씩 자신의 믿음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고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Face Painting을 해주고 뜨리뿌라 부족의 모든 사역을 정리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부족마을의 상황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며 이 곳이 땅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의료사역     © 김재국

네 번째 지역 랑가마틱 

다시 봉고차에 올라탔다. 다음 사역지까지는 5시간 정도 걸려 랑가마틱이란 지역에 사는 짝마 부족을 방문하는 것이다. 짝마 부족은 방글라데시의 소수 민족 가운데 가장 큰 부족이라 하였다. 방글라데시 자치구 안에서는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랑가마틱이라는 지역으로 인도와 국경이 가까운 곳이었다. 가는 도중 2차례나 검문을 받아야 했고 총을 들고 보초를 서는 군인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이미 교회가 세워진 이 곳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준비한 꽃다발과 음식으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랑가마틱 교회는 조그만 집에서 30여 명이 모여 주위 무슬림들의 눈치 속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교회가 생긴 지 얼마 안되었고 교인들 전부 믿음이 더욱 자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곳에서도 말씀을 전하고 준비한 드라마를 하였다. 

짝마 부족의 개종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선교사들의 활동이나 직접적인 복음전파 가운데 세워진 교회가 아니고 부족 자체에서 진리를 찾다가 기독교라는 종교가 눈에 들어 왔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강력한 불교 영향력 안에 있던 부족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참 진리됨을 깨달았다고 한다. 

결국 교회가 자체적으로 생겨나게 되었고 말씀에 갈급함이 대단했다. 집단 개종을 목격하는 감동을 맛 보았다. 아직도 짝마 부족 가운데 6천여 명이 세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산 속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들을 한 군데 모아 놓고 세례 교육을 시키고 숙소를 제공하기까지는 비용 및 할 일이 너무 많기에 현재는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린다 하였다. 

짝마 교회를 나와 우리가 지낼 숙소로 이동하였다. 수피아 호텔이라 하였다. 랑가마틱 지역이 방글라데시의 관광구역이라하여 호텔이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편히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하며 방에 들어 갔는데, 환경은 우리가 상상하는 호텔은 아니었다. 샤워를 하기 위해 뜨거운 물을 틀었지만 잠깐 나오다 찬물로 변하였다. 팀원들의 건강상태가 많이 나빠졌다. 

13일, 아침에 호텔에서 나와 짝마교회 지도자되는 분의 집에서 아침 기도회와 말씀을 나누고 식사를 대접받았다. 오전에는 짱마 부족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지역 박물관과 불교 사원, 짝마 부족 왕이 산다는 왕궁을 방문하였고 점심에 또 다시 짝마교회 지도자 댁에서 식사를 제공해 주셨다. 처음에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또리까리 (카레) 였지만 하루에 3번, 7일을 계속 먹으니 김치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귀한 손님이 왔다 하여 돼지고기 카레를 준비해 주었는데 가장 좋은 부위(?)인 비계를 자꾸 권하는 바람에 마지막에는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 후 오후에는 랑가마틱 호수에 가 보았다. 댐을 건설하여 물을 받아 저장함으로 형성된 댐 호수인데 전기를 생산하고 관광산업을 이루고 있었다. 

▲ 흰두족장   © 김재국

다시 치타공을 거쳐 다카로 

랑가마틱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치타공 역으로 돌아오는 봉고차에 올라탔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체구에 맞추어 차를 만들었는지 너무나 비좁고 꼬불 꼬불 산길을 타는 바람에 10년이 넘은 베테랑 선교사조차 멀미를 하고 우리 팀원들은 말할 것도 없이 괴로워했다. 다행히 큰 불상사 없이 치타공에 도착한 우리는 치타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메뉴 중에 특이한 것은 한국음식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다. 

방글라데시 주방장이 한국 음식을 배웠다고 하였다. 김치찌개가 그립던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김치찌개를 시켰고 여기 저기서 된장찌개, 자장면, 짬뽕을 시켰다. 참 놀라웠다. 방글라데시 치타공에서 현지인들에 의하여 한국음식이 팔린다는 것이 놀라웠고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이토록 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놀라웠다. 감사히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카로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14일, 다카역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니면 밤새도록 매연이 내려앉아 그런지 뿌연 안개 속에서 짐을 내리고 다카에 있는 선교사 댁으로 이동하였다. 아침을 김치국으로 얼큰하게 해장하자 모두들 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한국인의 피는 속일 수 없나 보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호스텔을 운영하는 이구 사모를 찾아 뵈었다. 방글라데시의 부모들도 자녀를 공부시키려는 열정은 대단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공부를 시킬 수 없어 도시로 보내야 하는데, 비용이 문제였다.  호스텔은 학교 기숙사와 같은 것으로 현지 아이들이 함께 숙식을 하며 지내면서 학교 공부를 도와 주고 또 무엇보다도 기독교 교육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므로 선교사들이 호스텔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 곳에서 밝은 모습으로 몸과 마음과 지성이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 땅에 이러한 교육 시설이 많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오후에는 이구 사모의 남편되는 이철수 목사가 가르치는 CCTB(Christian College of Theology in Bangladesh)를 방문하였다. 방글라데시에 찾아 보기 힘든 신학교였다. 학교 시설도 괜찮았고 교수진들도 외국인으로 구성된 초교파적 신학교였다. 그런데 학생 수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듯이 진지하게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보면서 어떤 자세로 선교지에 가야 하는지 많은 생각과 감동이 있었다. 그 곳에 있는 교수들과 학교의 미래를 위하여 방글라데시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모든 사역일정을 마치게 되었다. 

끝으로 기도를 부탁드린다. 뜨리뿌라 부족 학교에 두 교사를 세워 주도록, 그리고 세례 받기를 기다리는 짱마 부족 6천 명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후원이 필요하다. 이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박성만 집사에게 연락 바란다.



김재국 
시드니한인장로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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