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벤자민 워필드/원광연 역 | 입력 : 2014/06/30 [12:21]
▲ 조나단 에드워즈    

다음의 글은 1912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벤자민 워필드 (Benjamin B. Warfield: 1851-1921)박사가, 미국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요 철학자요 목회자요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에 관하여 쓴 짧은 글로서 에드워즈에 관한 개괄적인 전기적 사실들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본문은 Benjamin B. Warfield, “Edwards and the New England Theology,” in Studies in Theology (1932, reprinted.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8) pp.515-538에 실린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편역자 주>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자(聖者)요 형이상학적인 철학자요, 부흥사요, 신학자로서  영국 식민지 하의 아메리카의 지성계에 진정 위대한 인물로 우뚝 서 있다.
 
현대 문명의 초입(初入)의 시기에 출생하고 자라고 생애를 보내는 동안 그는 인간 사고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주제 ‘하나님과 영혼’에 대해서 탐구하고 논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자기 목소리를 아주 훌륭하게 전한 인물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조르쥬 리용(Georges Lyon)은 에드워즈의 중요성에 대해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18세기의 인물들 가운데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큰 명성을 얻은 사람은 별로 없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야말로 아메리카가 낳은 최고의 형이상학자라고 평하며, 메킨토쉬(Mackintosh), 두갈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 로버트 홀(Robert Hall), 심지어 피히테(Fichte)까지도 그의 강력한 논리적 힘과 사고력을 열광적으로 칭송해오고 있다.
 
만일 이 사람이 철학과 과학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상당히 미개한 땅에 출생하지 않고 우리의 옛 세계(유럽을 뜻함. 역자주)에 출생해서 거기서 현대적 사고의 자극을 직접 접했더라면 과연 이 사람의 독창성이 어느 정도까지 높이 올라갔을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왔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는 숭고하면서도 생경스런 신학에 정력을 쏟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불멸의 사상 체계를 세운 라이프니츠(Leibniz)와 칸트(Kant)에 비견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랐을 것이다. 그의 신학은 우리의 이성을 놀라게 하며 우리의 마음에 거부감을 일으키며,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위대함은 그런 식으로 그저 추측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그는 절대 “말을 잘 못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밀튼(Milton)”이 아니라, 정말로 분명함과 정연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 스스로 아주 섬세한 형이상학자로 비쳐지긴 했지만, 우리가 그를 크게 칭송하는 것은 형이상학자로서가 아니다. 그가 형이상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은 주로 그의 존재론에 대한 사색 때문인데, 그것은 그의 아주 젊은 청년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자, 그는 그 문제를 뒤로 제쳐 두었음이 분명하다. 리용이 말하는 대로, 성숙한 나이에 이르러서 에드워즈는 그의 예리하고도 끈질긴 사고를 온통 신학에, 특히 죄와 구원의 문제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그는 순전히 신학으로서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강한 실천을 수반한 것으로 이해하고 접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상가였던 것만큼 행동가였으며, 놀라운 힘으로 일했고, 남은 모든 에너지를 일에 쏟아 부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주 관심사에 대해 거의 동의하지 않는 현대의 철학자 리용 같은 사람이 오히려 그를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하겠다. 우드브리지(F. J. E. Woodbridge)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분명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자기 시대의 사상을 표현하거나 그 사상을 전통적으로 내려온 정신과 일치시킨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사상을 일으키고 형성시킨 인물이다. 후에 드러나게 되지만, 뉴잉글랜드의 사상은 이미 그 색깔 없는 무미건조한 신학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 시대의 신학은 확고한 알미니안주의였다. 그것을 그가 칼빈주의로 바꾸어 놓았고... 그의 시대로는 도저히 그를 설명할 수가 없다.
 
에드워즈는 놀라운 철학적 성향을 지녔다. 그러나 신적인 것들에 대한 그의 감각과 취향은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드브리지의 결론처럼 - 그의 결론은 최소한 상대적으로는 정당하다 하겠다 - “우리는 그를 아메리카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아메리카의 가장 위대한 칼빈주의자로서 기억한다.”

에드워즈의 준비기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가 아주 부패해 있던 시절인 1703년 10월 5일에 출생하였다. 청교도 이주민들이 신세계(新世界)에 전해 준 신앙적 열정은 3, 4 세대를 지나면서 식어지고 변질되었다. 1678년에 이미 인크리즈 메이더(Increase Mather: 1639-1723)는 이렇게 탄식했었다:
 
“자라나는 세대는 모두 회심하지 않은 멸망해 가는 불쌍한 세대다. 주께서 성령을 부어주시지 않으면 이들은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다”
 
이 시대에는 기독교 세계 전반에 걸쳐서 이런 영향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영적인 삶을 침체에 빠뜨리고 있었는데, 뉴잉글랜드에서도 그런 현상이 없을 리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척박한 땅에서 살아야 하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그런 현상이 더 가중되었다. 어디서든 생각이나 삶이나 할 것 없이 전부 바닥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다. 영적인 상태만이 아니라 도덕성까지도 쇠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들은 과거부터 유산으로 내려온 그 높은 이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음이 변화되었다는 증거가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생활만 건전하면 교회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던 터였다. 부모가 세례를 받기만 했으면 자녀들을 세례 받게 하라고 권했고 - 소위, “중도 언약”(Half-Way Covenant: 1662년 뉴잉글랜드의 회중 교회 총회에서 통과한 언약으로, 신앙의 도리를 이해하고 동의하며 생활에 흠이 없는 사람이면 회심의 체험과 믿음에 대한 고백이 없더라도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규정하였다. 역자주)에 따라서 - 그들 스스로도 자동적으로 성찬에 참여하였다. 성찬을 “사람을 회심시키는 규례”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가정은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갖가지 악에 물들지 않도록 그를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영적, 지적 생활을 크게 자극시키고 격려해 주었다. 그는 여섯 살에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열세 살이 되어서는 당시 대학의 교과 과정의 일부였던 “세 가지 학문적 언어” -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 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만 열세 살이 채 되기도 전인 1716년 9월, 그는 “커넥티컷 대학교”(Collegiate School of Connecticut: 예일 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2학년에 재학하는 동안 그는 존 로크(John Locke)의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인간 오성에 관한 논고)]에 심취하였고, 학과 공부보다도 오히려 그것을 공부하는 데서 더 큰 만족과 즐거움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그것이 주는 즐거움은) 극심하게 인색한 구두쇠가 갓 발견한 보석 상자에서 금이나 은을 한 주먹 꺼내 쥐었을 때에 느끼는 만족감과 기쁨보다 더 했다”고 한다.
 
그는 1720년 열일곱 살이 채 못 되어 우등으로 예일 칼리지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위해서 1722년 여름까지 2년 더 대학에 머물러 있었다(그 당시의 관례가 그랬었다).
 
1722년 여름 그는 설교할 자격을 ‘인허’받았고, 1722년 8월부터 1723년 4월까지 뉴욕시(市)의 한 작은 장로교회의 강단을 지켰다. 집으로 돌아온 후 1724년 6월 그는 예일 칼리지의 강사(tutor)로 지명되었고, 그로부터 2년 동안 (1726년 9월까지) 그 대학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뛰어난 능력으로 그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그가 강사직을 사임한 것은 당시 메사추세츠 주의 노스헴프턴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그의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Soloman Stoddard: 1643-1729)의 부목사 및 후계 목사로 청빙을 받은 때문이었다. 그는 1727년 2월 15일 목사 안수를 받아 노스헴프턴 교회에 취임하였다.
 
에드워즈의 준비기는 노스헴프턴 교회에 취임함으로써 종결된다. 그의 준비는 그 깊이에 있어서나 그 폭에 있어서나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학구적인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고 출생하여, 에드워즈는 거의 유아기 때부터 손에 펜을 잡고 살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기에게 무슨 독창적인 생각이 일어나면 항상 그 결과까지 추적하여 종이에 적어 놓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 행한 그의 관찰과 사색의 결과들이 아직도 많이 보존되어 있어서 그가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숙(早熟)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에드워즈가 그의 영적인 형이상학의 문제들을 사색한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기록들에 남아 있는 것들인데, 그가 우리의 철학사에 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인정받는 것은 주로 이 기록들의 강점 때문이다. 그의 사상의 전 체계는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쓴 ‘존재에 대해서’(of Being)라는 작은 글에서 이미 그 요체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 어린 시절의 사색들에 나타나 있는 의견들을 그가 나중에 철회했다고 믿을 이유는 전연 없다. 오히려 반대로, 그 어린 시절의 의견들이 그의 속에서 여전히 번뜩이고 있었다는 암시들이 이따금씩 - 심지어 그의 최후의 저술에서까지도 -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일 칼리지의 강사 시절 이후부터는 한 번도 외형상으로 그런 문제를 논의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주제들에 대한 그의 사색은 분명히 그의 성장기에, 곧 적극적인 목회 사역의 임무들과 좀 더 시급한 문제들에 둘러싸이게 되기 이전 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이 어린 시절, 버클리(Berkeley)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이 분명했고, 또한 빛과 색깔에 대한 뉴튼(Isaac Newton)의 설명과, 지각(sense)을 관념의 근원으로 보는 로크의 논지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무슨 제안이나 도움을 받은 일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관념론(Idealism)의 완전한 체계를 스스로 완성시켰다.
 
그의 관념론은 그저 현상론(Phenomenalism)의 경계선에 위태하게 서 있는 것이었으므로, 만일 살아계신 하나님을 강렬하게 깨닫지 못했더라면 그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선포하기를, “가장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실체(實體: reality)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우주는 “하나님의 마음 속 이외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우주가 “육체에만” 해당되는지 아니면 유한한 영(靈)에도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입장이 오락가락했던 것 같으나, 결국 더 포괄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영혼의 필요를 소홀히 할 만큼 그런 사색에 심취했던 것은 아니었다. 성장기 전체를 통틀어서, 그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아주 어린 소년 시절부터 깊은 신앙적 감화를 받았었고, 이 준비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신앙적 본질을 배양하는 일에 지극한 열심을 기울였다.
 
그 스스로 우리에게, “나의 구원을 찾는 일을 내 인생의 주요 임무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나서 그의 내적인 긴장과 걱정을 완화시켜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대해서 반감을 일으켰었다: “그것은 내게 아주 끔찍스러운 교리인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졌다. 그리고 점점, 그 자신도 추적할 수 없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바로 이 교리가 그에게 당연한 것으로 다가오게 되고, 오히려 그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교리가 된 것이다.
 
“그 교리가 엄청나게 즐겁고 밝고 감미로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굉장히 자주 경험해왔다. 이 절대적인 주권을 나는 진정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여 올리기를 사모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디모데전서 1:17의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말씀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다른 것과는 전연 다른, 느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에게 영원히 삼켜버리기를” 사모하였다. 그 때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한 이해가 날로 늘어났고,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이 자라났다.
 
물론 침체의 상태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 그의 성장은 꾸준히 지속되었고 거룩하게 자신을 구별하는 일도 점점 완전해져 갔다. 1727년 초 바로 이 경건한 젊은이는,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가슴에 안고서 그의 화려한 학문적인 생활과 철학적 사색을 완전히 뒤로 제쳐두고, 노스헴프턴의 목회자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목회자 에드워즈

에드워즈는 1727년 2월 15일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의 부목사로 안수를 받게 되고, 2년 후 외조부가 사망하자 그 교구의 담임 목사직을 계승하게 된다. 노스헴프턴은 상대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그 지방의 절반가량이 시골이었는데, 노스헴프턴은 그 한 가운데 있는 마을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은 그 인근 지역에서는 일종의 작은 수도(首都)와도 같았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화와 정력과 독립 정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마을에는 교회가 하나 밖에 없었는데, 아마 보스턴(Boston) 외곽 지역에서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였을 것이다. 그 교회는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지 못했고, 가끔씩 파당으로 나뉘어 분쟁이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의 강력한 설교 사역 아래서 여러 번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었다. 이런 각성의 역사는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동안에도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교회가 부흥의 역사로 유명해졌고, 부흥으로 인해서 교회의 회원 수도 증가했다. 한 때 그 교회의 회원 수는 620명이었는데, 이는 그 마을의 성인(成人) 전체의 숫자에 가까운 것이었다. 스토다드는 교회의 성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완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이었고, 18세기 초부터 노스헴프턴 교회는 회심의 고백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성찬에 참여하도록 개방하는 일을 시행해오고 있던 터였다.
 
에드워즈도 처음에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묵인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한동안 그것을 고쳐 보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그것이 그 자신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교회의 구성원은 혼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더구나 부흥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들이 신앙적 감화를 받아 교회에 들어와 회원 수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중요한 교회를 목회하고 보살피는 일에 에드워즈는 전심으로 자신을 바쳤다. 끊임없이 집집마다 방문하는 일은 그의 일상적인 일과가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인들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거나 목회를 소홀히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 것은 에드워즈 자신의 특별한 은사와 소질에 대하여 스스로 내린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질병이 있다거나 특별한 필요로 요청할 경우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교인들의 집을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신 그는 자유로이 자기 집을 찾아오도록 교인들을 권유했고 교인들이 찾아오면 전혀 주저함이 없이 그들의 개인적인 요구 사항들을 들어주는 데 시간과 정력을 드렸다. 그는 목회하는 동안 줄곧 신학도로 남아 있었고, 하루에 보통 열세 시간을 연구에 소비했다. 이런 신학적 연구를 목회 사역과 별도로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목회 사역에 종속시켜서 행한 것이다.〠 <계속>

원광연|크리스찬리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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