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만에 ‘시선’으로 돌아온 영화감독 이장호 장로

삶의 마지막 길 끝에서 주님을 만났죠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08/25 [10:23]
                                                 ▲   © 크리스찬리뷰 9월호 표지

그가 친구인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을 영화로 만들며 데뷔했을 때 충무로가 발칵 뒤집혔다.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문호ㆍ신성일)
  “술 한 잔 하실래요. 제 입술은 조그마한 술잔이에요.” (경아ㆍ안인숙)

지금 대사를 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하지만 40년 전에는 폭발력이 대단했다. 국도극장 한 곳에서 개봉 105일 만에 4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안간힘을 써봐야 관객 3만 명 동원이 고작’이던 시절에 그의 영화는 15배 이상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요즘으로 치면 ‘1000만 영화’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신문들은 ‘한국 영화계에 이변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며 그를 치켜세웠다. 1974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어제 내린 비’(1974년), ‘그래그래 오늘은 안녕’(1976년)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승승장구하다 1976년 대마초 사건으로 4년 5개월 동안을 손발이 묶인 채 보냈다. 그리고는 재기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을 발표했고 ‘어둠의 자식들’(1981년), ‘바보 선언’(1983년)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조금씩 식어갔고, 작품도 현실과 타협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 ‘어우동’(1985년),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 등을 만든 후 그의 영화인생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연이은 흥행 참패를 겪으며 나락으로 떨어졌던 이장호(69. 길교회) 감독이 돌아왔다. 1995년 ‘천재 선언’을 연출한 이후 19년 만의 복귀다.
 
▲ 19년 만에 '시선'으로 돌아온 이장호 감독. 그가 시무장로로 섬기고 있는 길교회 앞에서.     © 크리스찬리뷰

이 감독이 복귀작으로 선택한 영화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독교인을 그린 영화 ‘시선’이다. 그는 ‘바람 불어 좋은 날’ 개봉 즈음 한 목사를 만났고, 그 목사로부터 “좋은 영화를 계속 만들어 달라, 목회자가 할 일을 좋은 영화 한 편이 대신 한다”는 말을 듣고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이 감독은 4년 전 장로가 됐다.

한국영상자료원 선정 역대 한국영화 톱 10이 감독 작품 셋 포함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핀 5월 중순, 그와 세 차례 만났다. 한 번은 ‘길교회’가 위치한 청계산 입구, 한 번은 무교동 카페, 또 한 번은 이화여대 후문, ‘필름포럼’에서였다. 그는 자유로웠다. 푹 눌러쓴 모자 뒤로 빠져나온 머리칼, 신발끈이 풀린 워커화, 목엔 큼지막한 은빛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에겐 이 비슷한 십자가 목걸이만 집에 스무 개 남짓 있다고 했다.
 
- 꽁지머리시네요.
 
그는 “한 번 땋아볼 요량으로 머리를 기르고 있다”고 했다.
 
- 차라리 빨갛게 물을 들이시죠.
 
“그건 옛날에 해봤고요. 사실 모양내고 다니는 거 아버지가 좋아했어요. 제가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하하”
 
▲ 이장호 감독 특별전이 지난 4월 10일부터 나흘 동안 서울 CGV압구정 무비꼴라쥬에서 열렸다. 이번 특별전은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이장호 감독의 영화 세계를 조명하고 관객에게 이 감독의 작품을 다시 소개하기 위해 마련됐다. '별들의 고향', '바람불어 좋은 날', '바보 선언', 등 세 편은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한국영화 100선 중 10위 안에 든 명작이다.     © 이장호

그런데 즐거운 소식이 들렸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역대 한국영화 톱 10에 그의 작품 셋이 포함됐다. ‘별들의 고향’,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이다. 두 작품이라도 순위에 올린 감독이 없는 만큼 그가 한국영화에서 차지해온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현역 감독 대열에 다시 합류했으니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 싶었다. 그런데 웬걸, 그는 차분하기만 했다. 아니 참회의 분위기가 또렷했다.
 
- 축하합니다. 경사가 겹쳤습니다.
 
“명예와 인기에 대해 둔해졌습니다. 전에는 민감했었는데요. 그동안 돈벌이로, 한마디로 돈독이 올랐었던 거죠. 인기를 얻기 위해 현실과 타협도 했고 바람도 피우고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 등 자신이 만든 에로영화를 의식한 듯 “부끄럽다”고 말했다.
 
- 영화는 그 시대상의 반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골 청년 셋의 고단한 서울살이를 다룬 ‘바람 불어 좋은 날’은 70년대 한국사회의 초상화처럼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실 ‘별들의 고향’ 이후 대마초 사건으로 4년간 활동이 정지 됐었죠. 집도 팔고, 자동차도 팔고, 천호동 월셋집으로 밀려났습니다. 밑바닥 현실을 알게 됐죠. 그러면서 한국영화에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까, 그게 터닝 포인트가 됐습니다. 70년대 군사정권에서 다루지 못했던 빈곤과 부정부패를 주목하게 됐죠. 한국영화의 사라진 리얼리즘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 제19회 대종상(1980년) 시상식의 주인공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대근, 그 옆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정윤희, 가장 오른쪽이 감독상을 수상한 이장호 감독이다. 이대근의 어깨너머로 신인상을 수상한 안성기의 모습도 보인다.     © 이장호

그때 이어령 선생께서 ‘재래식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악취를 못 느끼는데 이장호가 신선한 공기를 쐬서 아주 큰 걸 발견했다’고 말해줬어요. 그렇게 나온 작품이 ‘바람 불어 좋은 날’이죠. 그때부터 젊은 영화인들이 내 조감독으로 모여들었고, 배창호, 장선우, 선우완, 박광수 등 제 조감독 출신들이 감독으로 데뷔하면서 현실을 텍스트로 한 한국영화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 영화감독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바보선언’도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힙니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정책을 야유한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요.”
 
“정부의 검열 정책에 염증을 느끼던 때였습니다. 영화를 그만둬야겠다, 한번 망쳐봐야겠다고 작정했죠. 처음 생각한 제목이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였습니다. 뜻밖에 대학가에서 입소문이 났어요. 영화 성공의 절반은 전두환 정권 덕분입니다. 시대에 대한 저항을 내가 이용한 측면도 있고요.”
 
- 아버님도 50년대에 영화검열관을 지내셨다고 하던데요.
 
“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영화에 익숙한 환경이었습니다.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이승만 정부에서 틀지 못했던 채플린도 볼 수 있었죠. 아버님이 개방적인 분이라 내가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도 적극 밀어주셨습니다. 내 영화의 아버지인 신상옥 감독에게 소개도 해주시고요.”
 
▲ 19년 만에 신작으로 돌아온 이장호 감독의 20번째 작품 ‘시선。ッ 이 지난 4월 3일 롯데시네마 언론시사회를 개최하며 베일을 벗었다.     © 이장호

신작 ‘시선’은 개봉 이후 비교적 저조한 성적이다.
 
- 영화가 너무 종교적 색채가 짙어서일까요?
 
그는 “지금 내 영화 흥행 걱정을 할 때가 아니지 않으냐”며 “세월호 때문에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시선’은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4월 16일 개봉됐다. 이 감독이 1995년 마지막으로 개봉했던 ‘천재선언’도 당시 비슷한 시기 일어난 대형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로 관객들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 시선 역시 그렇게 될까 안타깝습니다.
 
이 감독은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내게 이제 영화는 일종의 사역입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 중에 강우석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 있어요. 두 사람 모두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그런데 둘 다 영화를 본 뒤 큰 감동을 받았다고 그래요. 그리고 이 영화를 자기들이 배급하겠다고 나섰어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감동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고 자부합니다.
 
난 이 영화가 개봉과 동시에 크게 히트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단기간에 성공을 거두진 못하더라도 10년, 20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찾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전두환 닮은꼴 배우 박용식 씨(67)가 지난 2013년 8월 2일 오전 패혈증 증세로 별세했다. 그는 특유의 외모로 인해 방송 출연 금지를 당했고 그로 인해 생활고를 겪으며 방앗간 기술을 배워야 했다고 회고했다.     © 이장호

촬영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 체험

“스스로 데뷔작이라 생각하고 찍었어요. 제가 영화를 만들 때랑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었더군요. 동시 녹음부터 디지털 기기까지 기술적인 문제가 가장 컸죠. 게다가 스태프들 중 제 영화를 본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캄보디아의 어느 한인 식당에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보고 오히려 스태프들이 신기해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자식과도 같은 어린 친구들에게 배우면서 촬영했다. 그래서 이번 영화 ‘시선’은 그의 데뷔작과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 한때 거장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영화를 다시 찍고 싶다는 열정이 더 컸다.
 
“학교에서 정년퇴직하고 영화를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저는 한 번도 제작에서 손을 떼려 한 적이 없었어요. 상황이 어려웠을 뿐이지요.”
 
마침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해외 영화제 수상 경험이 있는 감독들을 지원해주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이 감독은 시나리오를 내고 심사위원 최고 점수를 받아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종교색이 강한 소재라서 선정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문제보다 내면을 다룬 영화적 메시지가 심사위원들에게 신뢰를 줬던 것 같아요.”
 
▲ 캄보디아 올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완성한 영화 <시선>은 폭염 속에서 구현해 낸 생생한 피랍의 현장을 묘사했다. 사진은 캄보디아 촬영 현장에서 출연진과 현지 어린이들과 함께.     © 이장호

영화는 대부분 캄보디아의 밀림에서 촬영했다. 지뢰밭, 처음 보는 독충, 우기철 벼락 등 환경이 열악한 것을 떠나 목숨이 위험할 지경이었다.
 
“팔뚝만한 지네도 많았고요. 지뢰밭에서 촬영할 때는 현지 군인들이 협조해주지 않아서 힘들었요. 또 피뢰침도 없는 들판에서 촬영을 하다가 벼락이 내릴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한국의 벼락은 정말 로맨틱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곳 우기철에 내리치는 벼락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여기저기서 번쩍거려요. 게다가 각종 촬영 장비 때문에 벼락 맞기 십상이었지요. 먹구름만 몰려오면 무조건 도망가야 했죠. 우리 스태프들이 정말 많이 고생했습니다.”
 
촬영은 무사히 마쳤지만 불행히 소중한 한 사람을 잃었다. 유비저 바이러스로 패혈증이 발병해 사망한 중견배우 박용식이었다. 그는 이장호 감독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신앙인으로 함께 봉사활동을 해오며 평소 절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마지막 촬영 때 괴로워하면서 식사를 못하더라고요. 적도 부근에만 있는 희귀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일단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시름 놓은 상태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망소식을 들었죠.”
 
                                                   ▲ '시선' 포스터     © 이장호

어이가 없어 한동안 말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를 영화에 끌어들인 것은 감독인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가족의 원망, 모두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조문을 갔는데, 박용식 씨 부인이 절 보더니 울음을 터뜨리시더라고요. ‘아, 올게 왔구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서 있었지요. 시간이 지나고 부인이 저에게 오더니 ‘마지막으로 좋은 작품을 찍게 해줘서 고맙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저를 울리시더라고요.”
 
개런티가 적어 출연을 망설였던 그를 설득한 것이 아내였다고 한다. 이 감독은 그의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와서 영상을 편집했다. 그런데 화면 속의 그가 던지는 즉흥대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유언처럼 그는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 속에서 박용식 씨를 포함한 선교사들이 버스를 타고 밀림으로 가는 장면이 있어요. 현지인이 ‘과거 이 지역은 굉장히 위험했다’라고 하는 대사가 있었죠. 그때 박용식씨가 즉흥으로 ‘그럼 지금 순교하면 바로 천국이겠네.’라고 하더라고요. 좋은 사람이니 편안한 곳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감독은 늘 함께했던 사람이라 한때는 ‘이제 내 차례’인가 못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단다. 제작사는 그를 추모하며 영화 엔딩 크레디트 맨 마지막에 “배우 고 박용식 선생님의 영혼에 바칩니다”라는 자막을 넣었다.
 
▲ 소설 '고래사냥','별들의 고향' 등 잇단 히트작을 내놓았던 문학계의 큰 별 최인호(68) 작가가 2013년 9월 25일 오후 7시 2분 별세했다. 향년 68세.     © 이장호

기독교영화전용관 ‘필름포럼’에서 ‘시선’ 감상

‘필름포럼’에서 ‘시선’을 감상했다. 이화여대 후문, 서울시 서대문구 대신동에 위치한 ‘필름포럼’은 92석의 1관과 52석의 2관을 갖춘 아담한 극장이다. 이전까지는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영화마니아들 사이에 유명한 극장이었으나, 2년 전 이곳을 매입한 (사)서울기독교영화제가 리모델링을 거쳐 기독교영화전용관으로 탈바꿈해 문을 열었다.
 
‘시선’은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독교인들을 내세워 인간의 나약함을 강조한다. 영화의 배경은 가상의 국가인 이스마르다. 선교활동을 하러 외국에 온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통역과 가이드를 하는 선교사 조요한(오광록)은 목사 구민영(남동하)을 비롯한 드림교회 신도 8명을 데리고 이스마르 엠립 지역으로 향한다.
 
이들을 태우고 가던 버스는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고장이 나고, 숲속에 고립돼 있던 이들은 현지 반군에게 피랍돼 인질이 된다. 반군은 한국인들을 인질로 잡아 돈과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장군의 석방을 요구한다. 또 이슬람교를 믿는 반군은 신도들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도가 될 것을 요구한다.
 
‘시선’의 매력은 입체적인 인물 묘사에 있다. 동남아 오지까지 찾아가 선교를 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이들은 순교를 할 것인지, 배교를 할 것인지를 두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숨기고 있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 길교회를 찾은원로 영화배우 최은희 씨와 이장호 감독(왼쪽).     © 이장호

특히 교회에서는 ‘장로님’ 사회에서는 ‘회장님’으로 불리는 유승학(고 박용식)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태도가 180도로 변한다. “순교는 곧 천국으로 가는 고속도로”라던 그는 반군에 납치돼 막상 죽음이 다가오자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소리 내서 기도하지 말라고 화를 낸다. 선교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악덕 가이드’ 못지않게 많은 수수료를 챙기던 세속적인 선교사 요한의 변화 역시 흥미롭다. 연기 경력 32년 만에 주연을 맡게 된 오광록이 선보이는 ‘혼신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인물 묘사뿐 아니라 관객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힘, 각 캐릭터들의 맛을 살려내는 부분에서는 이 감독의 연출 감각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많다. 특히 기독교 신자와 비신자의 공감차가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됐다.
 
그래서 비신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 감독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의 결말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침묵’은 고문당하는 성도들을 살리기 위해 겉으로는 배교하지만 속으로는 기독교신앙을 보전하는 선교사의 이야기다. 하지만 ‘시선’은 겉과 속이 다른 선택에 머물지 않고, 순교와 배교 둘 다 연출한다. 조요한과 구민영이 각기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영화는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지 않는다. 순교는 말할 것도 없고, 성도들을 살리는 배교에도 거룩함이 담겨있다며 마무리한다. 이 감독도 “순교만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에서만 알 수 있는 거룩한 배교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작노트를 통해 “인간의 시각으로 만든 영화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런 의미를 담아 ‘신의 시선’(視線)에서 제목을 따왔다.
 
▲ 매 주 토요일 오전, 청계산 입구에 있는 길교회 앞에서 색소폰으로 찬송가를 연주하며 등산객들에게 노방전도하는 이장호 장로.     © 크리스찬리뷰

이 감독은 영화 ‘시선’을 만들기까지 그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시선이 제작되기까지 험난한 과정 속에서 힘이 된 특별한 사람이 있었다고 밝혔다.
 
청계산 자락에 위치한 길교회의 김세재 담임목사다. 이 감독은 “김 목사님은 지난 3년 동안 새벽마다 함께한 성경공부와 토론을 통해 영화제작의 영감과 동기를 부여한 주인공”이라며 “행정소송과 배우 박용식 집사님의 소천 등 순탄치 않았던 제작 과정 가운데서도 ‘시선’이 성공적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길, 온 교우들과 함께 기도로 후원하신 분”이라고 토로했다.

친구 최인호를 추억하다

이장호 감독에게는 특별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별들의 고향’ 작가 최인호다. 그를 따라 절에 들어가 글을 써보기도 하고, 막무가내로 시나리오를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으름장에 가까운 부탁을 하곤 했다. 그래도 군말 없이 배시시 웃어주는 친구였다. 늘 한발 앞서가는 친구여서 따라다니기에 바빴는데 저세상도 먼저 가버렸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고 젊은 시절을 함께했죠. 모든 걸 공유하던 사이였고 끊임없이 서로에게 창작에 대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인호가 1963년 고2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는데 이미 중학교 때 연애소설을 쓸 정도로 성숙함이 남달랐습니다.”
 
이 감독이 연출부에 들어가 충무로에서 일하고 있던 시절, 최 작가는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별들의 고향’이라는 신문 연재소설을 쓰고 히트 작가가 돼 있었다. 이 감독은 친구라는 이유로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졸랐다.
 
“저는 그야말로 연출부 막내 시절이었거든요. 인호를 거의 반강제로 여관에 들어앉혔죠. 근데 여관비조차 없어서 직장을 다니고 있던 인호 애인(훗날 부인)에게 대신 내달라고 했을 정도였어요(웃음). 그러니 얼마나 민폐였겠어요. 아마 인호에게 저는 지긋지긋한 친구였을 거예요.”
 
게다가 ‘별들의 고향’이 인기를 끌면서 당내 최고의 감독들이 그의 소설을 탐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인호 작가는 큰 판권료를 제시하는 사람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오랜 친구인 이 감독에게 소설판권을 건넸다. 공존의 히트를 친 영화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 감독의 화려한 데뷔작이 됐다.
 
“한번은 같이 술을 마시며 ‘별들의 고향’이 재미있다고 엄청 칭찬해줬어요. 그런데 인호가 ‘야, 그거 네가 아이디어 준 거잖아’라고 하더라고요. 과거에 둘이 청주에 있는 화장사라는 절로 글을 쓰러 들어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제가 ‘도시가 죽인 여자’라는 제목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고 인호에게 말했거든요. 그러나 스토리텔링이 약한 저는 그걸 다 완성하지 못하고 서울로 와버렸는데 인호가 그 내용을 모티브로 잡아서 ‘별들의 고향’을 썼다고 하더라고요. 아,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서 저에게 ‘별들의 고향’을 준 것 같던데요? 하하.”
 
그는 최인호를 평생 은인이라고 했다. 그가 없었다면 3류 딴따라에 그쳤을 것이라고도 했다.
 
“알코올 중독자로 살지는 않았을까, 그가 조숙하고 영리했다면 나는 감각적이고 철부지였죠. 인호의 유고집 ‘눈물’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도 최인호와 같은 죽음을 맞게 해달라고요.”
 
▲ 색소폰 연주하며 노방전도하는 이장호 장로.     © 크리스찬리뷰

내 인생의 배우 셋

이장호 감독은 원래 배우 지망생이었다. 대학(홍익대 건축미술학) 시절 신상옥 감독과 처음만난 자리에서 “연출을 하겠다”고 말한 게 그의 오늘을 결정짓게 됐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를 떠받쳐온 기둥은 배우들이다.

그는 스타를 기용하기보다 신인 배우들을 키워온 조련사였다. 아역배우 출신 안인숙을 ‘별들의 고향’에서 파격 발탁한 게 대표적 사례다. 지금은 ‘국민배우’로 불리는 안성기도 ‘바람불어 좋은 날’ 출연 당시 신인급이었다. 문화부 장관, 국립극장장을 지낸 김명곤도 ‘바보선언’ 전까지는 주로 연극판에서 활동했다.
 
이 감독은 ‘내 인생의 배우’로 이보희, 박원숙, 김명곤 등을 꼽았다.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 등 에로틱 영화로 유명한 이보희에게 예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보희의 본명은 조영숙. 쉽고도 귀한, 섹시한 느낌이 좋아 ‘이보희’로 정했다고 한다. 그는 “이솝우화같은 얘기지만 이보희가 나이 먹으면 거기에 맞춰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가 시집을 가서 다행이다”라며 웃었다.
 
이 감독은 김명곤을 높게 평가했다. “연기력보다 정신적 자세가 좋았다. 서양 사람의 연기는 동양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탈춤 마당극에서 닦은 기량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간파했다. 그게 내게 먹힌 것 같다”고 말했다. 김명곤은 ‘어우동’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명자 아끼꼬, 쏘냐’에 잇따라 출연했다.
 
드라마에서 억센 캐릭터로 자주 나오는 박원숙도 이 감독과 인연이 깊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과부 춤’ 등에서 강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이 감독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배우였다. 집념의 연기를 보여줬다”고 평했다.

일부러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는 언젠가부터 열렬한 신앙인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의 험난했던 인생 전부는 누군가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이 됐다. 이런 면에서 ‘시선’은 그의 지난날들에 대한 반성과 참회, 회개를 담은 자전적 고백 영화로도 볼 수 있다. 그는 “이 영화 캐릭터들의 곳곳에 내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살기 위해 배교를 한 뒤 다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순교자가 되는 요한, 강직한 성품으로 순교보다 더 숭고한 길을 택하는 목사 구민영만 영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권사 아내에게 수시로 폭언하는 장로도 있고, 부인은 집에 두고 애인과 함께 선교에 나선 집사도 있다. 그는 “그 모든 게 내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려놓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 변신이 급작스럽습니다.
 
“오래 됐습니다. 96년 두 번째 결혼에서 늦둥이를 보면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여자와 술로 얼룩진 ‘영화판’의 타락을 청산했죠. 성경공부에 몰두하게 되었고 비로소 슬럼프도 축복이란 깨달음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도 교회를 다녔지만 신앙과 일상이 분리된 이중생활을 했죠. 내 죄를 잘 몰랐습니다. 4년 전 장로가 됐고, 서울 청계산 입구에 조그만 개척교회도 일궜습니다.”
 
- 목사님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요? 하하. 오래전에 소설가 김승옥이 ‘교회를 가봐라’고 권했을 때 ‘이 형 날 샜구나’라고 했던 저였습니다. 지적 허영심이 컸던 거지요.”
 
그를 버티게 해준 건 신앙의 힘이었다. 한때 점집에서 사 온 부적을 스크린 뒤에 몰래 붙이기도 했던 그가 신앙에 모든 것을 맡기고 버텼던 것. 빈민운동가였던 고 허병섭 목사가 “좋은 영화는 목회자의 역할이나 같다”고 한 말에 감명받았다.
 
이장호 감독은 지난 5월 27일 연세대 강당에서 열린 제11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개막식에서 영화인 공로상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 감독은 “하나님 앞에 죄송하다. 특별히 한 게 없는데 공로상을 주시는 것을 보니 20년 미리 당겨서 가불한 느낌”이라면서 “앞으로 20년 동안 착실한 열매를 맺으라는 뜻으로 알겠다”며 소감을 전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 감독은 매주 토요일이면 서울 청계산 앞 등산길에서 색소폰으로 찬송가 연주를 하며 재능기부를 한다.
 
- 기독교 영화를 계속 할 건가요?
 
 “그렇습니다. 일부로 좁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자기 복만 비는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자신을 낮춘 하나님을 따라가는 겁니다. 그게 지금껏 관객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장호 감독이 부학장으로 있는 한국방송예술진흥교육원 사무실에서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이 말 끝에 그는 의미 있는 한마디를 보탰다.
 
“‘시선’은 이장호가 앞으로도 영화를 계속 만들겠다는 선전포고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이기심이 가득 찬 세상에서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어요. 이타심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니까요.”
 
그는 차기작으로 96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이 우리 원양어선 선원들에 의해 구조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96.5’를 준비 중이다. 또 최인호의 유고집인 ‘눈물’과 한국에서 선교하다 별세한 위대한 서서평(Elisabeth J. Shepping 1880- 1934) 선교사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 계획이다.
 
“베트남 ‘보트피플’ 이야기는 방송 다큐로 나간 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했어요. 선원들과 베트남 난민들의 교감을 잔잔하게 펼쳐낼 겁니다. 또 최인호에게 영화로 편지를 쓰려고 해요. ‘눈물’이 ‘사랑하는 벗이여’로 시작하거든요. 인호가 대중을 상대로 제게 편지를 썼듯 저도 대중을 위한 영화로 답신을 보내야죠.”〠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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