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영화감독의 멘토 길교회 김세재 목사

기독교의 본질에만 충실할 겁니다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08/25 [11:08]

▲ 토요일 노방전도 연주를 마치고 멘토인 길교회 담임 김세재 목사와 함께 한 이장호 장로.     © 크리스찬리뷰

스프리스 CEO에서 목사로 ‘제2의 인생’


김세재 목사(64)는 4년 전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 길교회를 개척했다. 장소는 청계산 등산로 입구. 현재 성도 수는 약 100명. 거의 생짜로 와서 제자교육을 통해 세례를 받고 세워진 성도들이다. 순조로운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김 목사는 교회 명칭으로 ‘길’을 선택했을 때부터 성도 수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질로 돌아가는 것만이 부흥임을 알려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금강제화 계열사인 ‘스프리스’ CEO를 거치며 남부러울 것 없던 시절,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내려놓고 신학을 하여 목회자가 되었다. 스포츠마케팅의 괴재로, 건전한 청소년문화사역의 선봉장으로 불렸던 그의 거취는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다. 김 목사의 앞에는 여러 선택 길이 있었지만 결국 개척을 택했다.


목회에 대한 부름 외면할 수 없어


개척 당시 길교회는 ‘길카페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해 주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카페로 운영되어 청계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쉼터로 사랑을 받아왔다.
 
“언젠가 휴일 날 이곳을 왔었는데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이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기다 교회를 짓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듣든지 안 듣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그리고 교회당을 늘 비어놓는 것보다 카페를 운영하여 이들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만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당을 짓고 카페교회로 시작을 했어요.”
 
김 목사는 교회를 방문한 기자에게 직접 내린 에스프레소 한 잔과 뜨거운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에스프레소와 뜨거운 물이 합쳐진 한잔의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에 맞게 커피의 진함을 조절하라고 배려한 길교회만의 ‘아메리카노’였다. 아메리카노의 맛과 향이 참 좋다는 말에 그는 “원두에서 최선의 향과 맛을 뽑아내기 위해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만들어진 커피”라며 “커피 판매원도 인정한 맛”이라고 귀띔했다.
 
길교회의 아메리카노는 한 잔에 2천 원이다. 시중 커피전문점보다 싸지만 맛은 월등이 좋다. 카페에서 봉사하는 성도뿐만 아니라 김 목사도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길교회는 커피를 판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새신자를 만나기 위해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고 또 산을 찾는 사람은 일행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뒤쫓아 가 모두 붙들어놓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교통도 불편해서 어린이들과 학생들도 접근하기가 힘들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이곳에서 전도하라고 명하셨으니까 저희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거두시는 것은 하나님이 어디서 어떻게 거두시든지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해 나가야죠.”

 
▲ 길교회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는 김세재 목사. 김 목사는 미국에서 부인과 함께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다.             © 크리스찬리뷰

- 만만치 않은 나이에 개척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주님이 가라할 때 주저 없이 떠나야죠. 주님의 시간표는 내 것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사실 저는 하나님이 선대해 주셔서 내 재능보다 더 훨씬 일을 잘할 수 있었습니다.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들어왔고요. CEO로 있을 때는 박수도 많이 받았죠. 그런데 일을 하면서 야간에 신학공부를 했었거든요. 이렇게 양다리를 걸쳐도 되겠는가,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한국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나까지 개척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질문했다. 그러나 목회를 하지 않으면 영혼이 견딜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 하나님의 콜링(calling. 부르심)이었군요.
 
“그래요. 콜링에는 주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내가 받은 것을 돌려 드려야하고 당연히 나눠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자비량으로 사역을 감당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는 평신도로 한성CBMC(한국기독실업인회)와 까치밥선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양로원과 지체장애자시설, 고아원 등 사회 어려운 곳으로 직접 찾아가 예배도 드리며 철저하게 말씀에 따라 살기를 결정했다.

“이장호 장로님도 이곳에서 만났어요. 그래서 늦게 교회를 시작했지만 성경공부를 함께했던 그분들이 동참을 해주셔서 재정적인 것 걱정하지 않고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어서 좋은 교역자에게 교회를 대물림하자는 계획도 세워놓았고요.”
 
그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약속됐으나 참 복음에 대한 고민은 그를 순탄하고 평범한 길로 가는 것을 막았다. 김 목사는 <멘토, 길을 묻다>를 통해 이장호 감독이 자신을 멘토로 꼽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온전한 멘토는 예수님이시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에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의 믿음을 배운다면 가능한 일”이라며 감사와 책임감을 표현했다.
 
특히 “매주 토요일 교회 앞마당에서 열렸던 ‘사랑의 참새 방앗간’ 전도 집회 때마다 땡볕 아래에서나,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한 시간 이상씩 색소폰을 불며 전도에 열심이던 이장호 감독의 모습에 늘 감사와 감동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 길교회 앞에서 노방전도하며 색소폰 연주하는 이장호 장로.     © 크리스찬리뷰

목회 외길 함께 가는 부부


김 목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칭송하는 진정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뤄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말씀 중심의 사역에 집중할 것이라고 했다. 말씀이야말로 본질 중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어지는 줄기다. 그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 속에 말씀에 생명을 걸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말씀을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최소 일 년 안에 성경 일독을 할 수 있도록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성경을 돌아가며 읽습니다. 그리고 못 나오신 분들을 위하여 설교내용, 성경통독 범위와 중요한 구절 그리고 거기에 대한 큐티 등을 써서 카페게시판에 붙여놓아 준비할 수 있도록 합니다.”

길교회엔 한 분기 보통 10명의 새신자가 세례를 받는다. 높은 세례율을 보이는 것은 교회의 치밀한 교육의 영향이 크다. 길교회에 처음 나오면 새가족 교육반에서 6주를 공부한 후 등록을 한다. 6주 동안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뼈대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뼈대가 없으면 은혜를 받아도 신앙적 정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찬식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 위해 매주 성찬식을 드립니다. 거기서 많은 은혜를 받아요. 때로는 치유를 느끼기도 하고 회복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근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 절기에 대한 인식입니다. 현대교회들이 자꾸 잊혀져가는 것이 절기이거든요. 절기에 대한 의미도 상당히 강조하는 편입니다.”
 
▲ 길교회 본당에서 만난 김세재 목사와 약사이며 동역자인 부인 이운진 목사.     © 크리스찬리뷰

김 목사의 목회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 또한 기도다. 무엇이든 기도로 철저히 무장할 것을 강조하고 본인이 앞장서 이를 실천한다. 나라를 위한 기도 역시 길교회가 펼치는 중요한 사역의 하나다.

“나라를 위해서 금요기도회와 새벽기도회 때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요. 누가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원주민인 우리밖에 없지 않습니까. 돌이켜보면 6. 25전쟁 이후 남북한 대치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누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거든요. 초기 한국교회 성도들의 핏값입니다.
 
초기 한국교회 성도들은 모이기만 하면 천막을 치고 사경회를 하고 부흥회를 열며 함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기도의 무리들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후세에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생각해보면 참담합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만 본다 할지라도 정말 믿는 사람들이 ‘나의 죄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이 없이는 해결되기가 어려워요. 대형교회들은 지금 세습이다 뭐다 서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 과연 하나님은 언제까지 참으실 것인가.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이 시대에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느헤미야의 금식기도가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젊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잖아요. 술 문화, 섹스, 이념문제 등 이런 것들을 타파하지 않고는 이 나라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길교회는 김 목사의 목회방향에 따라 장애인이나 불우노인들, 소외된 이웃들을 돕는 나눔의 사역도 지속적으로 펴고 있다.
 
“작은 교회지만 해마다 두 번씩 서울역에 가서 5백여 명 되는 사람들과 같이 밥도 먹고 찬양도 드리고 예배도 드리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요. 우리 주위에, 우리 교회 안에 어려운 분들을 돕고요, 또 연로하신 분들 천국 가는 그날까지 어려움 없이 살아가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힘껏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자녀들도 효도할 수 있도록 또 믿음의 대를 이어줄 수 있는 부모로서의 역할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십자가의 정신이니까요.”
 
김 목사가 선 굵고 강한 목회를 지향하는 이면에는 아내 이운진 목사의 세밀하고 헌신적인 내조가 있다. 아내 이운진 목사는 김 목사보다 먼저 신학을 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현재 약학박사로 대학교수 겸 약국을 열어 불우이웃돕기를 일상화하고 있는 이 목사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친절, 다양한 사회경험을 토대로 오늘까지 든든한 목회 동역자가 되어주고 있다.

 
▲ 청계산 입구에 있는 길교회는 매 주 토요일 오전, 교회 앞에서 등산객들에게 음료수와 복음을 전하는 쉼터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학업. 스포츠. 성악 등 다방면의 수재


그는 중3 때 처음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어머니는 암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때였다. 꿈 많던 청소년 시절이었지만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고민과 많은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눈물의 기도 덕분에 병상에 있던 어머니도 세례를 받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전 가족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사실 그는 모든 운동을 소화해 낼 수 있었던 스포츠맨이었다. 경남고교 시절 투수를 했고 교내 마라톤 대회에선 도맡아서 일등을 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던 끝에 그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응시, 당당히 합격했다. 경남고등학교 투수가 서울공대 합격이라는 믿기 힘든 성과를 만들어 낸 것은 그의 성실성과 신앙의 힘이었다.
 
어려서는 MBC 합창단에 뽑힐 만큼 성악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대학에선 럭비, 풋볼 선수를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스포츠 의류, 신발용품 분야에 몸을 담은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스포츠용품을 생산하는 국제상사에 취업했다. 이후 일본 파견 근무와 미국 유학 등 순탄한 길을 걸어온 그는 금강그룹이 스포츠사업에 뛰어들면서 전격 스카우트됐다. 

불교적인 성향이 강한 기업이어서 많은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닦은 실력을 발판으로 1996년 (주)스프리스를 설립, 독립경영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직원들을 신앙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섰고 청소년을 위한 건전한 놀이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 스프리스 CEO에서 목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김세재 목사     © 크리스찬리뷰

물론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제품들을 수입에 의존했던 스프리스는 설립된지 1년 만에 불어 닥친 IMF 한파로 인해 최대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수입용품의 가격은 늘어난 환율로 인해 두 배로 급등해서 도저히 수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또 수입용품을 찾는 고객도 발길을 뚝 끊었다. 이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밖에 없었다. 그 결과 위기의 돌파구로 직접 제품을 만들어 생산하기로 결심하게 됐고, 결국 이 결정은 성공을 거뒀다.
 
그는 스프리스가 대부분 청소년을 대상으로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만큼 청소년들과 유대관계를 맺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추진한 것이 회원모집이었고 스프리스 회원만 5만 명에 이르게 됐다.
 
그는 회원들을 중심으로 탈북난민운동에 동참했고 ‘스프리스 사랑 나누기’행사를 통해 ‘한 켤레 나눠주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사랑의 농구화를 한 켤레 더 드립니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신발 한 켤레를 구입하면 한 켤레를 더 줘 친구들과 나눠 신을 수 있게 한 것. 기업의 이윤을 소비자에게 되돌려 주기 위한 배려 때문이었다.


▲ 해오름의 집을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펼친 후 장애아동들과 함께     © 크리스찬리뷰

복음 실은 ‘청소년 문화센터’ 부푼 꿈


김 목사는 외모나 말씨 모든 것이 차분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오랜 말씀읽기와 묵상이 준 또 다른 결과로 이해됐다.

그는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나름대로의 소신을 피력했다.

“개 교회 이기주의가 너무 팽배해 있어요. 어른들이 본을 보이지 못하고 교육을 제대로 못하고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지 못해서 개교회주의만, 개 교회 발전만 키웠습니다.
 
세월호 사건만 보더라도 협력해서 나라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는 큰 교회가 없어요. 왜요? 자기들 문제 때문에 정신이 없거든요. 애초 잘못 심어놨기 때문에 문제가 터져 자기들끼리 싸우고 그 뒤처리하느라 아예 밖에까지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사실 작은 교회가 큰 교회 비판하기 쉬운 건데 작았을 때 가졌던 그 순진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원로제도라는 걸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후계자를 놓고 또 자기 아들을 앉히고 하는 이런 문제들을 보고 누가 박수를 치겠습니까.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김 목사는 특히 대형교회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결국은 성도들이 먼저 회개하고 작은 교회들이 먼저 기도를 시작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 또 어느 목사님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라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늘 푸른 청년의 마음을 갖고 있는 목회자다. 사회와 청년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책임을 항상 강조하기 때문이다. 젊은 청소년들을 위한 크리스천 문화센터를 만드는 일이 꿈이라고 언급한 것도 바로 이런 연유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만 이야기하다 이 땅을 떠나고 싶습니다. 절대 욕심 부리지 않을 겁니다.”

 
▲ 유명 스포츠용품점에서 평소 갖고 싶었던 것을 고르는 해오름의 집 장애아동들.     © 크리스찬리뷰

에필로그


길교회 성도들이 경기도 용인시 성복동 소재 장애아동 생활시설인 ‘해오름의 집’을 방문하여 봉사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매분기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희망 투어’이다.
 
2008년 9월에 설립되어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재활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해오름의 집’에는 현재 30여 명의 장애아동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간혹 TV를 통해 장애아동들의 모습을 접하게 되지만 일상생활에서 그들을 만나기란 흔치 않을 일. 그들은 어떤 모습일까. 말이 통할까.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을 보이지 않을까.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우리가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부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간단하게 예배를 드리고 서로 짝을 짓는데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인사를 했다. 열두 살인 유희수라는 여자아이였다. 어눌한 말투였지만 악수를 건네며 해맑게 웃었다.
 
모두 자기 짝과 손잡고 분당으로 가서 점심으로 갈비탕을 먹었다. 고기를 잘게 썰어주고 식사를 하는 동안 말도 걸어주고 물티슈로 뒤처리를 해줬다. 점심식사 후 손을 잡고 유명스포츠용품점으로 가서 평소 자기들이 가지고 싶었던 것들을 고를 수 있도록 도와줬다.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운동화, 티셔츠, 가방, 신발 등을 마음대로 골랐다. 곁에 다가와 조용히 손을 잡는 아이들, 감사의 표시로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쇼핑백을 맡겨두고 모두 공원을 산책했다. 일반인들은 취미처럼 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겐 행복을 만들어주는 시간이다. 희수를 꼭 끌어안았다. 참으로 이상한 감동이 가슴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마음과 기도의 마음은 모든 것을 초월해 하나가 되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이산가족 만나는 사람처럼 눈물이 흘렀다. 

 
이내 길교회와 김세재 목사를 위한 감사의 기도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알아내 이 구석까지 사랑의 손길을 뻗쳤을까. 작은 교회인데, 큰 교회도 생색만 내기 쉬운 엄청난 이런 일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감당해 올 수 있었을까, 이런 사실이 기자를 감동시켰다.
 
우리가 받았던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갚음으로 다 같이 잘사는 세상,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 길교회의 사명이기에 기자는 이 고귀한 일에 참여하게 되어 참으로 기뻤다.

‘해오름의 집’을 다녀온 후 지금까지도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가 아른거린다. 다음에도 길교회 성도들과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아보자고 계획을 세워본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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