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의 친구, 맥켄지가의 사람들
한ㆍ호 선교 125주년 기념 특집기획
 
글|김환기, 사진|권순형ㆍ박태연
▲ 맥켄지 선교사 가족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 실라(4녀), 부인 메리 켈리, 헨렌(장녀), 캐서린(차녀), 루시(삼녀)     ©크리스찬리뷰
 
2014년 9월 5일 새벽 5시. 군복을 입고 시드니 공항으로 향했다. 오전 11시에 멜본 딥딘교회에서 열리는 루시 레인(Lucy Lane)의 장례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시드니 공항은 국내선과 국제선이 분리되어 있다. 국내선 비행장은 T2와 T3로 나뉘어져, 콴타스는 T3 터미날을 사용하고 그 외 비행기는 T2 터미날을 사용한다. 붙일 짐이 없다면 발권기계에서 탑승권을 받고 검사대를 통과하면 탑승 게이트로 바로 들어 갈 수 있다. 시드니에서 멜본까지는 1천km 정도 거리로, 비행기로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탑승은 출발 20분 전부터 시작했다.

▲ 1952년 9월 17일 개원한 일신부인병원은 1982년 11월 10일 현재의 이름인 일신기독병원으로 개명했다.               © 크리스찬리뷰

아니, 어찌 이런 일이!

기장이 가장 긴장하는 시간은 이륙할 때와 착륙할 때라고 한다. 특별히 이륙할 때는 순간 최고의 속도를 내고 최대한의 양력을 받아 하늘로 부상한다. 기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형 항공기의 평균 이륙속도는 약 300km 정도라고 한다. 비행기는 굉음과 함께 힘찬 날개 짓을 하며 하늘로 부상했다. 비행기가 수평을 이루자 승무원들은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제공해 주다니 감동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오늘의 일정에 대하여 생각하는 순간, 앞쪽에서 어린 아이를 안은 부인이 황급하게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자 내 옆에 비어있는 좌석으로 피했다. 그 순간 갑자기 아이가 토하면서 입 안의 토사물이 나를 향하여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피할 길도 없었다.
 
군복의 왼쪽 전체가 토사물로 엉망이 되었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내 옆에 앉았던 아이도 아니고  앞 좌석에 앉았던 아이인데 왜 하필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토를 하는 거야!’
 
당황한 부인은 Sorry를 연발하면서 화장실로 사라졌다. 승무원은 물수건과 함께 '안티박테리아' 티슈를 주면서 연신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물수건으로 열심히 닦았지만 여기저기 뭍은 얼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금 후 나이든 남자 승무원이 정중하게 사과하며 세탁비를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일부러 한 것도 아니니 괜찮다"며 사양했다. 조금 있으니 티켓 두 장을 가지고 다시 왔다. 국내선 ‘콴타스 비즈니스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 한국전쟁 중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한 헬렌 맥켄지(한국명 매혜란)     © 크리스찬리뷰
  
멜본공항에는 멜본중앙교회를 섬기는 엄정길 목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 목사는 타스마니아에서 사역하다가 8년 전 멜본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2013년부터는 '시드니신학대학 한국신학부'(SCD) 멜본 캠퍼스 담당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시간을 내어 나를 도와 주기로 했다. 
▲ 언니 헬렌과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한 동생 케서린 맥켄지(한국명 매혜영)     © 크리스찬리뷰

일신부인병원 (Il Shin Women's Hospital)
 
엄 목사의 고향은 부산이다. 엄 목사는 호주오기 전에도 호주 선교사들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별히 두 딸은 루시의 언니들이 설립한 일신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다. 일신기독병원은 노블 맥켄지 목사와 메리 맥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헬렌과 둘째 캐서린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두 사람은 다 부산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평양 외국인학교와 멜본의 호주장로교여학교에서 공부한 후 헬렌은 멜본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를 하고 캐서린은 간호학을 전공하였다. 공부를 마친 두 사람은 1940년 선교사로 한국으로 가려고 했으니 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헬렌과 캐서린은 중국 그리스도교회의 초청으로 1946년에 중국 남서부의 운남성에 파송되는 네 명의 선교사 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1950년 중국에서 나와 호주로 돌아왔고, 짧은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한국 선교사로 지원했다. 전쟁 중인 한국에서 입국허가를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 멜본에서 개최한(2012년 9월) 맥켄지선교대회에 참석한 이사장 최승일 목사, 루시, 실라, 바바라 마틴 선교사(한국명 민보은)     ©크리스찬리뷰

드디어 1952년 2월 12일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 다시 감격적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녀들은 전쟁 피난민으로 가득 찬 황폐화된 부산으로 갔다. 당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조산원과 간호사,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녀들은 일할 만한 건물을 찾을 수가 없어서 유치원 건물을 빌렸다. 그들이 어릴 때 다녔던 바로 부신진교회 유치원이었다.
 
일신부인병원은 이렇게 1952년 9월 17일에 개원하게 되었다. 6.25 전후로 의료시설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일신부인병원은 임신한 여성의 안식처이며 피난처였다. 
 
▲ 루시와 실라. 루시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아버지(맥켄지 선교사)가 금강산에서 가져온 것인데 자신이 사용하고 있다고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2012년 7월)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 구세군 교인 중 1958년 3월 21일 새벽 4시에 일신병원에서 첫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다. 그분은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전후에 의료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일신부인병원은 산모들에게 구세주와 같았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일신병원에 감사 이외에는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헬렌과 캐서린은 의사와 간호사로 일신부인병원에서 20년 동안 헌신적으로 헌신하다 1972년, 병원을 여의사 김영선 씨에게 원장 자리를 물려 주고 호주로 귀국했다. 이후 병원은 국내 굴지 산부인과 병원으로 자리를 잡아 1982년 11월 일신기독병원으로 승격했으며, 지금은 시설 확장으로 320병상의 종합병원이 되었다.

▲ 루시의 고등학교 졸업사진(평양)     © 크리스찬리뷰
 
루시의 장례예배
(Memorial Service for Lucy Georgia Lane)


지난 8월 21일 세상을 떠난 루시의 장례예배는 9월 5일 오전 11시 딥딘(Deepden) 교회에서 열렸다.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2010년 10월 2일 창원 공원 묘지에 건립된 '경남 선교 120주년 기념관' 개관예배 때 만났던 분들이다. 당시에 루시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안타깝게 입국 중 인천공항에서 넘어져 참석하지 못하고 줄곧 병원에서 지내다 호주로 돌아갔다. 당시 루시의 나이는 93세였다.
 
그 후 4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이제 루시는 이 땅의 모든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세상의 영결예배가 아닌, 믿음의 천국환송예배이기에 분위기는 어둡지 않았다. 입구에서 나누어 준 순서지의 전면에 루시가 환하게 웃는 사진이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하였다.

▲ 루시 여사의 장례식에서 말씀을 전하는 양성대 목사, 루시의 환갑 때 찍은 4자매들(오른쪽부터 헨렌, 실라, 루시, 케서린), 루시의 장례식을 마친 후 실라와 함께 한 김환기 사관과 엄정길 목사(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크리스찬리뷰


순서지 속에는 결혼사진, 뒷면에는 60살 회갑 때 4자매가 함께 한복을 입고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있었다. 이제 혼자 남은 막내인 실라는 강대상 제일 가까운 곳에 휠체어를 타고 예배를 드렸다. 실라의 몸 상태가 헬렌보다 좋지 않아 사람들은 그녀가 먼저 하나님 곁으로 갈 줄 알았다고 한다.
 
장례예배의 사회는 레오타 목사, 설교는 양성대 목사, 기도는 남기영 목사가 담당했다. 11시가 되자 레오타 목사는 유가족을 대신하여 참석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한 후 예배의 문을 열었다.
 
루시의 큰딸인 마가렛 레이는 어머니에 대한 회고를 했다.
 
"어머니는 1918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초ㆍ중ㆍ고등학교는 미국인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미국식 영어를 배웠을 뿐 아니라 미국 지리, 역사, 문화 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가기 위해 호주장로교여학교(PLC)로 전학을 했는데, 미국식 영어를 사용해서 영어시험에 낙제한 적도 있었습니다."
 
전하는 마가렛뿐 아니라 듣는 회중도 함께 웃었다.

 
▲ 호주선교부 진주지부와 배돈병원(오른쪽 산밑)     © 크리스찬리뷰
 
"어머니는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 때 군에 지원을 하여 간호 장교로 복무도 했습니다. 육군보다는 공군의 옷이 더 멋있는 것 같아 공군 간호장교가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유머 있는 아름다운 추억은 회중석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였다.  
 
딥딘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양 목사는 ‘기독인의 희망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루시는 딥딘교회의 교인이었다. 양 목사는 그녀를 누구보다 가까이 돌본 사람이다. 양 목사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저는 루시 레인께서 갑자기 몸이 쇠약해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한국 나이로 97세의 노인이기에 언제 돌아가실 줄 모르는 나이였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건강하게 지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네 살 아래인 동생 실라가 몸이 약하기에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루시가 동생까지 돌보고 형제 중에 제일 나중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실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몸에 힘이 없어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가약 일 주일 정도 따님 댁에 가서 몸을 회복한 후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그만 딸의 집에서 넘어져 엉덩이의 뼈가 부러지면서 갑자기 몸이 약해지게 된 것입니다."

▲ 한국 최초의 정신과 의사로 알려진 찰스 맥라렌 선교사(왼쪽 2번째)와 배돈병원 의료진들.     © 크리스찬리뷰


설교 중 양 목사는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겸비한 그녀를 한국선교의 '살아있는 보고'(Living Archives)라고 강조했다.
 
"루시는 10대 시절까지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1920, 30년대의 선교사들의 활동들을 직접 보고, 돕곤하여서, 해방 전인 1930년대까지 선교사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기억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하여 통영에서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선교사의 활동에 대한 책을 보고나서 통영에 연구소를 세우고, 선교사들의 활동을 연구하던 젊은 분이었습니다. 루시는 신애미 선교사(Amy Skinner)를 기억하는 옛 사람들은 이분을 성인으로,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호주로 돌아와 루시에게 신애미 선교사를 기억하느냐 물으니, ‘아, 안티 애미’ 하면서 그분은 정말로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 원성희 선교사(Prof. Dorothy Underwood)     © 크리스찬리뷰
  
마지막으로 양 목사는 "루시가 가졌던 믿음, 곧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이 믿음이 유족들의 믿음이 되고,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하며 희망의 말로 설교를 마무리했다.

▲ 한국에서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한국땅에 묻힌 선교사들의 갓난 자녀들이 있다. 맥켄지 선교사의 아들 제임스도 이곳에 묻혀 있는데 사진은 지난 2010년 10월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선교사와 가족들과 호주한인 교계 인사들이 이들이 묻혀 있는 부산진교회 묘역을 찾았다.     © 크리스찬리뷰
 
패이튼 기념 연합교회
(Paton Memorial Uniting Church)

 
딥딘교회는 ‘페이튼 기념연합교회’이다. 양 목사가 딥딘교회(Deepdene)를 섬기게 된 것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양 목사는 다민족 선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딥딘교회의 시무 장로 한 분이 양 목사를 찾아와 "저희 교회는 이제까지 한국을 선교하여 온 교회입니다. 이제는 양 목사님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호주를 선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청빙을 했다.
 
그후 양 목사는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딥딘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다. 딥딘교회는 직간접적으로 한국 선교에 많은 공헌을 했다. 내년이면 100년이 된다. 딥딘교회에는 최초 호주 선교사인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가족과 '맥켄지 선교사' 가족이 다녔다.

▲ 맥켄지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루시가 살아 생전에 양 목사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딥딘교회는 맥켄지 가족만이 아닌, 데이비스 가족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 달라" 사람들이 맥켄지 가족은 기억하나, 딥딘에 있었던 헨리 데이비스 가족은 잘 모르고 있다. 호주 최초 한국 선교사인 ‘헨리 데이비스’의 조카 딸인 ‘마아가렛 데이비스’와 ‘진 데이비스’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봉사한 후에 멜본으로 돌아와 딥딘 교회를 다니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멕켄지 선교사는 한국 사역을 마치고 1938년에 멜본으로 돌아와 가족 전부가 딥딘교회에 출석하였다. 딥딘 교회의 교인이었던 ‘헬렌과 캐더린’이 1952년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딥딘교회는 그녀들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로 물질로 후원을 했다.

▲ 1935년 맥켄지 선교사의 한국사역 25주년을 기념하여 한센환자들이 세운 맥켄지기념문                                            © 크리스찬리뷰
 
뿐만 아니라 딥딘교회는 한국 선교를 기획한 ‘프랭크 페이튼’(Frank Paton) 목사가 목회한 곳이다. 페이튼 목사는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협의회에 참석한 후 선교 현지 가운데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때에 한국 신도들의 열성과 헌신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패튼 목사는 호주에 돌아가 이를 보고했고, 그 다음 4년 동안 호주의 작은 교회에서 17명의 남녀 선교사가 지원하여 한국에 나가기도 했다.
 
지금은 없지만 진주에 경남 최초의 서양식 근대 병원인 ‘배돈병원’의 '배돈’은 '페이튼’에서 나온 말로 영어 명칭은 ‘페이튼 기념병원’(Paton Memorial Hospital)이었다. 프랭크 페이튼 목사는 다방면으로 한국 선교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다. 

딥딘교회 정문 앞에 서 있는 입갑판을 보면 ‘페이튼 기념 연합교회’(Paton Memorial Uniting Church Deepdene)라고 써 있다. 또한 1941년 2월 22년에 건립된 교회 건물 머릿돌에는 ‘페이튼 기념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블 맥켄지 목사'에 의하여 건축됨" (Frank Paton Memorial Church to the Goly of God / This Stone was laid by the right Rev. J. Noble Mackenzie Moderator, General Assembly of Victoria) 이라고 새겨져 있다.
 
딥딘교회는 '호주 최초의 선교사'인 데이비스 가족의 ‘개척 정신’, '한센인의 친구'인 맥켄지 가족의 ‘희생 정신’ 그리고 ‘한국 선교의 기획자’인 프랭크 페이튼 목사의 ‘선교 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유서 깊은 교회이다. 한국선교의 산실과 같은 교회에 한국인이 담임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로 자랑스러웠다.

▲ 맥켄지한센선교회 호주대회를 앞두고 맥켄지 선교사 묘지에 헌화하고 기도하는 최승일 목사(오른쪽)                        © 크리스찬리뷰

한•호 선교 125주년 기념 음악회

올해는 한호 선교 125주년이 되는 해이다. 120주년 때에는 다양한 행사를 통하여 한호 간의 우의를 다지는 해가 되었다. 특별히 본지 권순형 발행인은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 책자를 발간하여 잊혀져 가는 선교사를 다시 한번 재 조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었다.
 
이제 선교 125주년을 맞이하여 11월 1일에는 멜본에서, 11월 3일에는 시드니에서 '한•호 선교 125주년 기념음악회 및 영상 사진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음악회에는 오페라 가수 테너 김재우 외 호주 최정상 오페라 가수들이 출연한다. 또한 미국에서 최고의 프리마돈나라고 극찬을 받은 소프라노 이지연 교수가 상도교회(담임목사 최승일) 후원으로 특별 출연한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사람은 소프라노 원성희 선교사(Prof. Dorothy Underwood)이다.  연세가 82세나 된 그녀가 이번 음악회에 찬조 출연을 한다.
 
원성희 선교사의 본명은 'Dorothy Watson'이다. 그녀는 1933년 1월 15일에 호주 질롱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60년에 호주 선교사로 와서 부산에서 학생을 전도하였다. 그녀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와 함께 일하면서 학습을 지도하고 학생운동을 도왔다.  

또한 부산 장신대에서 주로 교회음악을 가르쳤고, 부산의 많은 학교와 대학에서 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68년부터 도로시는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교회음악을 가르쳤다. 1974년부터는 이화여대에서 전임으로 음악을 가르쳤다.
 
1977년 도로시는 미국연합장로교회의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젤러와 함께 이 땅을 밟은 언더우드의 손자이다. 결혼 후 도로시의 성은 남편의 성을 따라 Underwood로 바꾸고, 한국 이름도 ‘원성희’로 바꾸었다. 남편이 2004년 소천 하자 그녀도 44년의 사역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왔다.
 
그녀는 한국 선교에 있어서 호주와 미국의 가교 역할을 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작년 팔순 때에는 새문안 교회를 담임하는 이영수 목사가 직접 멜본까지 와서 축하해 주기도 했다.

▲ 맥켄지 선교사 묘비     © 크리스찬리뷰
 
초기 한국 선교지 분할정책
 
한국 개신교는 의사였던 알렌 박사에 의하여 시작된다. 중국에서 의료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한국에 입국한다. 같은 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우정국을 세우고 낙성식을 하는 날 개화파가 수구파를 제거 하기 위한 정변을 일으켰다.
 
이날 수구파의 우두머리인 민영익이 칼에 찔려 죽게 되었을 때 알렌이 고쳐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 냥을 사례하였고, 이 돈으로 알렌은 ‘광혜원’을 설립하자 고종은 ‘제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오늘날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인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지난 달 ‘한국이민사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알렌 박사는 고종의 주치의로서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개신교가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고, 한국 최초의 이민도 실질적으로 알렌 박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후 1885년 4월 5일 미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에서 파송한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 땅을 밟게 된다. 선교사들은 선교지가 확장되면서 선교직역을 나누어 관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같은 곳에 여러 교파가 함께 선교함으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1892년 6월 11일 서울에서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모여 지역 분할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이 협정은 인구 5천 이상의 대도시는 공동 점유하되 그 이하의 도시와 지방들은 그때 당시로 선교회의 지휘를 받는 교회가 설립되어 있는 상태에 따라,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선교지역분할의 대원칙으로 삼았다. 그 외에 미개척 지역은 새로 오는 선교회로 하여금 개척하게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그 이후로 1893년 공의회에서는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남장로회는 한반도 서남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맡게 되었다. 1898년에는 북장로회와 캐나다장로회 간에 협정이 이루어져 캐나다 장로회는 북장로회로부터 함남의 원산 지역을 양도받았다. 캐나다장로회는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함경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1909년에는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그때까지 부산에서 활약하고 있던 북장로회가 그곳을 호주장로회에 양도하고 떠났다. 이렇게 하여 호주 장로회는 부산을 근거로 하여 경남 지역을 선교지역으로 삼게 되었다. 지역분할은 일제의 탄압으로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당하는 4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사라졌지만, 지금도 특정 지역에 특정 교단이 많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한센인의 친구,  맥켄지 선교사
 
1909년 미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의 선교지 협정으로 '부산, 경남 지방'이 호주장로회 소속이 되면서, 미 북장로회가 운영하던 부산 '한센인 보호소'도 호주장로회가 관할하게 되었는데, 1910년 2월 한국에 들어온 맥켄지 선교사가 이를 담당하게 되었다.
 
맥켄지 선교사는 1912년 5월, 한센인 보호소를 부산 용호동에 자리 잡아, '상애원’이라 칭하고 상애원 원장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맥켄지 선교사는 1910년부터 1938년까지 28년간 한센인을 돌보았다. 맥켄지는 1956년 7월 2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멜본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한국 한센인의 친구'(Friend of Korean Lepers)라고 새겨져 있다.
  
맥켄지로 하여금 선교사의 길을 가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프랭크 페이튼'의 아버지 '존 페이튼'이었다. 존 페이튼은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선교사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는 1858년 스코틀랜드의 개혁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의 파송을 받아 바누아트(뉴 헤브리디즈)로 가서 일한 개척 선교사였다. 페이튼이 바누아트(뉴 헤브리디즈) 선교모금을 위하여 맥켄지가 다니는 글라스고 대학 강당에서 강연할 때 맥켄지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때가 1894년 1월 14일 주일 오후였다.
 
이날 페이튼과의 만남을 통해 맥켄지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결단하고, 선교지는 식인 습관과 무지와 폐습에 빠져 있는 바누아트(뉴 헤브리디즈)로 가기로 결정했다. 맥켄지는 선교지로 가기 전인 1894년 7월 3일 결혼하였다.
  
맥켄지 부부는 1895년 바누아트(뉴 헤브리디즈)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그의 임지인 산토(Santo)로 향했다. 두 사람은 14년 동안 원주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그러다 1908년 열병으로 아내를 잃고 자신도 고갈된 상태에서 1909년 휴식을 위해 호주로 돌아왔다. 몸도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맥켄지는 다시 1910년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 후 28년 동안 맥켄지는 '한센인의 친구'가 되어 소외되고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돌보다, 1938년 호주로 돌아가 자신의 영적 멘토였던 '존 페이튼'의 아들 '프랭크 페이튼'이 시무했던 딥딘교회에 둥지를 틀었다.
 
'존 페이튼'이 있었기에 오늘날 '맥켄지'가 있었다면, '맥켄지'가 있었기에 '손양원 목사'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손양원 목사의 첫 사역지가 부산 감만동 한센인 교회였다. 당시 감만동교회는 교인 6백여 명 대부분이 한센인들이었다. 그곳에서 맥켄지 선교사를 가깝게 지켜보면서, 손 목사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을 것이다.
 
다시 시드니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 연세 많으신 선교사들과 그의 후손들을 만나며 ‘희생 없이 선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빛교회를 섬기는 이상엽 집사의 북한 사랑을 보며 ‘선교가 선교’되게 하는 것은 겸손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기도 순서를 맡았던 남기영 목사로부터 한인교회 설립에 얽힌 뒷 이야기도 들었다. 호주 최초의 한인 교회는 시드니가 아닌 '멜본한인교회’이다.
 
멜본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토사물 뒤집어 쓰고 받은 '콴타스 비지니스 라운지’ 티켓을 사용하는 것이다. 저녁 8시 출발인데 공항에는 6시 30분 경에 도착했다. 콴타스 라운지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직원에게 당당하게 티켓을 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 먹을 게 정말 많네" 아침은 비행기 안에서 사과와 요쿠르트, 점심은 교회에서 샌드위치! 이때를 위함인 줄 누가 알았던가! 일단 뷔페로 허기를 달랜 후 원두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정신 차려서 귤도 까먹고. 그 많은 음식을 뒤로 하고 라운지를 나올 때, 얼마나 아쉬웠던지...! 〠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인, 호주 구세군 사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사진/박태연|크리스찬리뷰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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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9/29 [12:19]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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