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질문 하나!

강승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9/29 [12:58]
삶을 살다보면 매너리즘의 늪에 빠질 때가 있다. 이유없이 바쁘게 살다가 아침에 한가로운 바닷가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넋이 나가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고 있지?’ 하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성실하고 열정이 뛰어난 사람은 이런 질문들을 무시하고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루어간다. 심지어 자신을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사울은 자신의 가문과 전통을 중요시 여기고,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의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자신이 정한 성공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던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려졌다.
 
이 놀라운 만남 속에서 우리는 사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질문 하나를 발견한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예수님의 질문에 사울은 모른척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여, 누구시니이까?” 라는 질문은 ‘사울’의 인생을 ‘사도 바울’로 바꾸어 버렸다. 사울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듣는 순간,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고 따랐던 구약의 율법과 전통적인 가치관을 포기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며 희망을 갖게 된다. 복음을 전해도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오랫동안 기도하며 전도 해도 여전히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를 배척하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서 증인으로 서 있었던 박해자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의 사도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신앙의 문제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때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지치고 힘들 때  “예수님이 누구인가?” 질문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존 오트버그 목사는 ‘예수님은 B.C.와 A.D.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원수를 이웃으로 삼아 용서를 실천한 사람이었고, 인간은 누구나 위선자임을 일깨워 준 철학자였고, 열두 명으로 세상을 영원히 바꿔 놓았으며, 약속대로 죽음을 이기고 제자들에게 돌아온 그리스도였다.
 
그래서일까? 예수님을 만나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욕구가 생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이고, 내가 누리는 행복한 마음을 비신자들과 나누고 싶어진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베풀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연약함과 낮은 자존감 때문에 수치스러워하던 사람이 담대하게 자신감 넘치는 미소 지으며 섬기게 된다. 예수님을 인생의 구세주로 주인으로 영접하면 이렇게 자연스러운 변화가 생긴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새로운 욕망이 더해진다.
 
또한 예수님을 알게 되면 나의 성공보다 이웃의 성공에 더 관심이 생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소중히 여기게 된다.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철없는 양떼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동역자로 느껴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사역자로 교우들을 여기게 된다. 그래서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더 귀한 말씀으로 가르치며,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고 싶은 열심이 생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삶과 인격이 변화되고 성숙되고 헌신된다.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는 재물을 버렸다. 어거스틴은 방탕한 삶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했다. 존 뉴턴은 노예무역을 버렸다.
 
자기 신념이 강한 사람에게도 주님은 찾아오신다. 이때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 질문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모르면 누구나 번영신학을 따르게 되고, 세속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고, 전통주의 신학에 묶여 성인군자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예수님을 기도응답해 주는 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젊을 때는 정의와 열정이 있어서 바른 목회,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가는 마음으로 사역하지만, 나이가 들면 자신의 한계가 보이게 되어 절충형 목회자, 타협형 성도가 되어간다. 이때 예수님과 관계를 살펴야 한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갈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데 마음에 부담이 드는가?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주님~! 누구십니까?”〠

강승찬|시드니새생명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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