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 주승중 (1)

순교자의 후예, 그 영예와 명예, 그리고 멍에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09/29 [14:35]
▲ 조부인 고 주기철 목사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종과 일사 각오로 순교적 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주승중 목사.     © 크리스찬리뷰

대를 이은 순교자의 피


“나는 하나님의 밀이다. 그리스도의 것인 좋은 밀빵이 될 때까지 나는 야수들의 이빨에 으스러진다. 나의 정욕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래서 내 육신에는 열기가 남아있지 않다. 내 안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다. 그것이 내 안에 깊이 흐르면서 ‘아버지 앞으로 나아오라’고 말한다”라고 초대교회 순교자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고백했다.
 
제사를 잘 드렸다는 이유로, 설교를 잘 했다는 이유로, 전도를 했다는 이유로, 신앙의 정조를 지켰다는 이유로 돌에 맞을 수도 있고, 사자 굴에 던져질 수 있고, 불 속에 던져질 수 있고, 감옥에 던져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 아벨 이후로 이어진 순교열전(殉敎列傳)은 교회의 씨앗이며, 주초였고, 거울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조선교회를 위하여 ‘야수의 이빨’에 으스러져 교회를 위하여 ‘썩는 밀알’의 씨앗이 된 주기철 목사(1944년 4월 21일 밤 9시 평양감옥소에서 5년 4개월의 옥고 끝에 순교)와 그 열매(친손자)인 주승중 목사(주안장로교회 담임)를 만나면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나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들 즉, 저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의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성장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장남인 주영진 전도사님은 해방 후 평양 근교 긴제라는 곳에서 그 당시 벌써 500여 명 출석하는 긴제교회의 담임목회를 하셨답니다.
 
그 당시 교역자가 없는 평양산정현교회 저녁예배 설교를 하시다가, 1950년 6.25 전쟁이 터진 한 달 뒤인 7월에 공산당에 잡혀가셨습니다. 김일성 정권 반대한 죄목으로 숙청 당하셨는데, 산채로 매장 당하셨답니다.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의 대를 이어 순교하신 것이지요. 주 목사님이 해방 전에 1944년도에 순교하셨으니까, 약 6년 만에, 주 목사님의 장남이 또 이어서 순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집안에는 순교자가 두 분이 있습니다.”

 
▲ 주기철 목사    

과거와의 대화

 
우리는 여기서 한국교회가 든든히 서는데 순교의 피로써 주초를 놓은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화를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25여 년 전 필자가 ‘신앙논단-하나되게 하소서’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8.15기념 특집기념으로 2회에 걸쳐 교회사가들과 주기철 목사의 4남인 주광조 장로와의 대담을 엮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주광조 장로의 육성을 통하여 흘러나온 ‘주기철 목사 옥중 고난사’는 살아있는 증언이었다.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께서는 신사참배 문제로 감옥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나는 어머니께서 면회 가실 때는 악착같이 따라나서서 같이 경찰서로 가곤 했습니다. 사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면회를 하고난 다음 맛있는 음식을 아버지께 드리는데, 아버진 한참 잡수시다 어린 내가 옆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시곤 그걸 미쳐 못 드시고 남겨서 내게 주곤 하셨는데,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습니다.
 
면회 때마다 언제나 아버지는 어머니께 야단치셨습니다. ‘왜 옷에 솜을 이렇게 두툼하게 넣어와서 날 괴롭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서는 ‘다음에 옷을 차입할 때 옷에 솜을 많이 안 넣겠다’고 약속하면서 옷을 갈아입히셨습니다. 갈아입히시고 밖에 나오시기만 하면 어머니는 늘 한탄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옷에 솜도 안 넣으면..’
 
아버지께서는 고문실에서 한참 매를 맞고 피를 많이 흘리시는데, 그 피가 두터운 솜에 전부 스며들어가 그게 빨리 마르지를 않았습니다. 그게 자꾸 반복되다 보니 상처가 났다가 곪아서 고름이 터져 나오고 해서 피와 고름이 묻어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참 고문을 하다가 기절하면 찬물로 붓는데 그 찬물이 또 옷에 배어 옷은 피, 고름, 물로 늘 젖어 있었습니다.
 
겨울에 영하 25도를 밑도는 평양 날씨에 그 옷이 다 얼어 판처럼 뻣뻣해집니다. 하루에 두 번씩 간수가 먹을 음식을 창문으로 끼워주는데, 그걸 먹으러 가려면 언제나 기어서 가야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시멘트바닥에 상처가 스쳐서 아물어가던 상처가 또 터져서 피고름이 나곤해서 아버지는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제발 옷에 솜을 좀 넣지 말아 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밖에 나오셔서 날 붙잡고는 ‘솜을 안 넣으면 어쩌라는 말이냐? 그 추위에 며칠 안되어서 살이 다 얼어서 썩는데 그보다는 차라리 솜이 있어서 고통을 좀 당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하소연하셨습니다.”
 
진퇴양난의 고충이 읽어지는, 고난 받는 종의 부인의 애환이 읽혀진다. 주 목사의 옥중고난을 넘어 순교로 이어지기까지는 이런 오정모 사모의 헌신과 뒷받침이 결정적인 버팀목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7년 간 감옥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는 단 하루도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질 않았습니다. ‘남편이찬 방에서 자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더운 방에서 잘 수 있겠는가’해서 꼭 골방이나 마루방에 올라가 방석도 깔지 않은 채 거기서 늘 기도하면서 7년을 하루같이 지내셨습니다. 남편 못지않게 10여 차례나 경찰에 감금되어 온갖 수모를 다 당했습니다.
 
주 목사님과 문 닫힌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끝없이, 쉴새없이 하는 기도, 그리고 남편 옥바라지 하는 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남편의 투쟁과 승리가 곧 그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승리가 어머니에게는 ‘남편의 순교’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여성에게 그토록 강인한 믿음, 그리고 7년을 하루같이 싸워서 일본 제국을 이기게 했던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 해방 후 평양감옥에서 풀려난 12성도들이 고 주기철 목사 댁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우리는 그저 쉽게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힘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바로 산정현교회 당회와 제직과 성도들의 뒷받침과 보살핌이었습니다. 주 목사님이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에서 파면처분 당한 뒤에 조만식 장로님께서 우리 집에 계속 사례비를 갖다주시자 일본 경찰은 그것을 강력히 막았습니다.
 
그때 조 장로님은 ‘우리 조선 사람들은 옛날부터 의리와 윤리가 있는데 어찌 스승이 제자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단 말이요. 이것은 정치와 도덕, 사상, 이 모든 것을 떠나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이렇게 말씀하시며 완강히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로 교회는 폐쇄되고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이때 온 가족이 더 큰 은혜의 체험을 한다.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 집에는 쌀이 다 떨어졌습니다.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우리 집에 쌀이 떨어진 것을 눈치챘습니다. 교인들은 그날 밤부터 통행금지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집 담장 너머로 주머니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 개 어떤 때는 하루에 서너 개씩 던져졌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방에 들어와 열어 보면 수수, 보리, 콩, 조, 팥같은 곡식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쌀이 들어있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아주 생일잔치하는 날이었습니다.
 
들어온 수수를 가지고 어머니는 수수죽을 쑤어서 우리 앞에 놓으면서 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꼭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다가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면서 만나를 받아먹었는데, 바로 너희들 앞에 있는 죽 그릇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떨어뜨려 주신 만나다’ 7년 동안 예배당에 집회는 없고, 목사님은 쇠사슬에 얽혀 감옥에 들어가 계시고, 예배드릴 제단은 문이 닫혀 들어갈 수도 없었고 성도들은 뿔뿔이 흔적없이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속에 타고 있던 믿음의 횃불은 사시사철 불타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산정현교회 제직과 성도들의 우리 가족에 대한 보살핌은 어머니로 하여금 일본이라는 그 엄청난 힘의 세력과 싸워 이기게 한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 목사님을 순교의 길로 인도한 밑바탕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 초량교회 제3대 목사로 시무했던 주기철 목사가 생전에 사용했던 강대상이 동교회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고문의 충격과 실어증

 
“한 번은 일본경찰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호출명령이 와서 경찰서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나는 3층의 고등계 형사실로 가는 줄 알았더니 올라가지 않고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지하는 평양경찰서에서 제일 무서운 고문실이었다. 거기는 천장이 트여 있어서 지하 어느 곳에서든 고문하는 소리가 다 들려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 죽어가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데, 자신이 육체적인 고문을 당하지 않고 그 소리만 들어도 벌써 정신적으로 반죽음이 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지하로 내려가다가 왼쪽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갔습니다. 거기 시멘트 바닥에 그냥 앉으라고 해서 앉았더니, 맞은편 방에 아버지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곧 아버지를 엄지손가락을 뒤로 해서 공중에 매달아놓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른바 ‘그네뛰기 고문’을 했습니다. 발길로 차면 공중에 매달린 채 그네가 되어왔다갔다 하는 것입니다.
 
벽에는 검도연습용 칼(죽도)이 일렬로 꽂혀 있었습니다. 일본 형사들이 그 칼을 뽑아 검도 연습하듯 아버지를 내리쳤습니다. ‘얏!’하고 기합을 넣어 때리면, 아버지는 그네가 되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고 또 저쪽에서 때리고 그랬습니다. 내가 정확히 세지는 못했지만 스무 번 세기 전에 아버지는 공중에 매달린 채 기절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기절하기 전에, 내 옆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먼저 고문을 보시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습니다. 어머니는 고문이 시작되자 손에 깍지를 끼고는 ‘오, 주님!’하면서 기도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기절을 하니 풀어놓고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더니 책상 위에 아버지 목을 뒤로 떨어지게 뉘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오 형사가 밖으로 나가 노란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고 대접에다 고춧가루를 잔뜩 담아와 풀더니 코와 입에 그걸 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몇 번 저항하시더니 기운이 떨어졌는지 그 다음엔 그냥 꼴깍꼴깍 받아마시더군요. 한 5~6분 지나니 배가 농구공 두 개만큼 부풀어 오르면서 기절했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형사 둘이서 배 위에 조그만 의자 두 개를 얹어놓고 그 위에 올라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짓눌렀습니다. 그러자 뒤로 처져있는 아버지 입과 코와 귀에서 붉은 물인지 핏물인지 모르게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또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는 책상 위에 앉혔습니다. 형사 네 사람이 우리방으로 건너와서 이번에는 어머니를 고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몹시 가냘프고 약한 분인데, 발길로 한 번 차면 2∼3미터씩 데굴데굴 구르곤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고문하기 시작하자 이번엔 아버지께서 깍지를 끼고 엎드려 기도만 하셨습니다. 가족이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고문을 함으로써 그 정신적인 고통으로 주 목사님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일본 경찰의 잔인한 술책이었습니다. 〠 <계속>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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