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 주승중(2)

순교자의 후예, 그 영예와 명예, 그리고 멍에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10/27 [11:29]
▲ 주기철 목사의 손자 주승중 목사는 현재 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중이다.            ©크리스찬리뷰

사실 이런 고문으로 네 분의 목사님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꼴은 우리가 도저히 못보겠으니 그저 고개만 한 번 까딱하면 되는데 왜 이 고통을 우리에게 주고 너도 그렇게 고통당하느냐?’고 해서 그렇게 데리고 나가신 목사님도 계십니다.
 
그 중에 어느 목사님은 그렇게 나와서 이틀 뒤 새벽에 우리 집으로 오셨습니다. 와서는 어머니와 손을 붙잡고 두 시간 동안 기도를 하셨습니다. '고문을 못이기고 신사참배를 하고 나왔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하면서 얼마나 통회하면서 기도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어릴 때라 같이 기도하다가 너무 지루해서 중간에 눈을 뜨고 그 목사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방바닥으로 목사님의 눈물, 콧물이 흘러내리는데 그것이 어디까지 흘러갈 것인가 궁금해서 목사님 얼굴 한 번 쳐다봤다가, 흘러가는 눈물을 한 번 쳐다봤다가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렇게 일본경찰은 아버지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지만 아버지, 어머니, 심지어 할머니까지도 그 고통을 잘 이겨내셨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할머니는 그날 그곳에서 나오셔서 근 열흘 동안 거의 정신이 나가셨습니다. 집 앞에서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는 ‘우리 주 목사 살려주시오, 주 목사 살려주시오!’하셨습니다.”
 
부모의 고문현장을 본 주광조 소년은 비록 열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실어증'에 걸렸다.
 
“당시 현장에서는 정신없이 보고 나왔는데, 나온 다음에는 내게 육체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실어증에 걸린 것입니다.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려면 심하게 더듬었습니다. '어머니' 하려 해도 어'라는 말조차도 1분 정도 걸려야 겨우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4년 동안 그 고통을 겪다가 해방이 된 다음에 두세 달이 지나니까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주기철 목사 품안에 안긴 주광조 장로                 © 주승중

마지막 면회, 그리고 순교 
 
"1944년 2월에 어머니가 면회 가셨을 때 아버지께서 ‘요 다음 3월엔 막내 광조를 꼭 좀 데리고 오라. 그 놈이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시며 그렇게 보채시더라고 하셨습니다. 1944년 3월 31일, 굉장히 날이 으스스하고 추웠습니다. 아침 9시에 어머니와 함께 집을나섰는데, 하루 종일 굶고 그날 오후 4시에 아버지와 3년 만에 면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식으로 아버지와 얼굴을 맞대고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호화스러운 면회는 아니었습니다.
 
2월에 어머니께서 면회가셨을 때 아버지와 사전에 '3월 면회 때 광조를 면회실 밖에다 세워놓을테니 제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밖에 서 있는 광조 얼굴을 한 번 보세요'약속을 하셨답니다. 그날 저에게 어머니는 면회실에 들어가면서 '내가 들어가면서 문을 천천히 열테니까 문 안에 있는 너희 아버지 얼굴을 한 번 보아라' 하시며, 문을 천천히 여셨습니다.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7~8미터 앞에 푸른 죄수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며 웃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3초 정도나 뵈었을까요. 뵙자마자 어린 마음에 '내가 3년 동안 아버지께 큰 절을 못했는데 큰 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 방법은 없고 차려자세로 아버지를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여 큰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를 보고자 머리를 들었을 땐 이미 아버지의 모습은 없어지고 눈앞에 붉은 철문이 닫혀져 있었습니다. 내가 머리를 숙여 큰 절을 할 때 안에서 ‘뭐야, 밖에서, 문 닫아!’하는 간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 집에 아버지의 사진이 여러 장 있습니다. 양복 입고 찍은 것, 바지저고리 입고 찍은 것, 두루마리 입고 찍은 것, 외투 입고 찍은 것....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꿈에서도 뵙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날 불과 3~4초밖에 보지 못한 푸른 죄수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으신 채, 인자하게 나를 보고 웃고 계시던 그 모습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면회가 이루어진 20일 후에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셨습니다. 4월 20일이었다. 평양형무소 소장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주 목사님이 위독한데 빨리 와서 수속을 밟으면 퇴소를 시켜줄 테니 평양기독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 편지를 읽으시더니, '우리 다 같이 하루를 금식기도하자. 아버지께서 위독하신가 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고 주기철 목사 자택 앞에서 해방 후 평양 감옥에서 풀려난 12성도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그날 4월 20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다음날 4월 21일 어머니 혼자 아버지 면회를 가셨습니다. 오후 5시 가까워서야 면회가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면회 직전에 형무소소장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답니다. '면회한 다음 병보석시켜 줄테니 주 목사를 퇴소시켜 빨리 기독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좋겠소' 그러나 어머니는 '주 목사님과 의논해서 면회 끝난 다음에 결정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아버지와 면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간수의 등에 업혀 나오셨습니다. 한 간수가 업고 두 간수가 엉덩이를 받치고 나왔는데, 그런 주 목사님을 맞이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꼭,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남편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느끼셨겠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께 이렇게 첫마디를 꺼내셨습니다. 그 어머니의 말을 받았던 아버지는 거기에 화답하듯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렇소, 내 살아서 이 붉은 벽돌문 밖을 나갈 것을 기대하지 않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오. 내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당신한테 부탁하오. 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조선교회를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오.’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혔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눈물 섞인 음성으로 ‘마지막으로 부탁하실 말씀이 없으시느냐?’고 했더니, 아버지께서는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시더랍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돌아보시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셨다고 합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은데..’
 
이 말씀이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이 살아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7년 동안 차디찬 감방에서 아버지께서 그토록 마시고 하셨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당신의 마지막 길을 가시면서 바랬던 그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이 최후의 면회를 입회했던 형무소장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면회 장면에 너무나 감동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느냐'는 형무소장을 향해서, '안모시고 가겠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십니다'라는 말로 어머니는 거절하셨습니다.
 
이 면회가 이루어진 5시간 뒤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해방되기 1년 4개월 전에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은 48세에 7년의 옥고 끝에 순교하셨습니다.”
 
산정현교회 제직들이 형무소 나무로 된 사과상자를 임시로 관으로 만들어 시신을 안치했다. 놀랍게도 발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열세 살 난 나는 아버지의 발목을 붙잡고 울고 있었고, 할머니는 가슴을 붙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방에 꽉 들어차서 입관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탈지면에 알코올을 묻혀서 얼굴부터 온몸을 씻기시며 수의로 갈아입히셨습니다.
 
나는 그때 발목을 붙잡고 있다가 갑자기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발이 보고 싶어서 푸른 수의를 걷어올렸더니 발톱이 전부 뭉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내 뒤에 서있는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내 아버지의 온전치 못한 발을 보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그래서 푸른 수의로 싸서 아버님의 발을 꽉 움켜잡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위에서부터 몸을 다 씻기시고 발까지 내려와서는 나더러 손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더러 '아버지 발이 이상해서 뒤에 사람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되겠어요'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실어증에 걸려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은 안나오고 펄쩍펄쩍 뛰고 있으니 어머니는 내용도 모르시고 보다 못해 화난 듯이 내 손을 확 치셨습니다. 옷이 벗겨지면서 어머니도 아버지의 그 발을 보고는 내 얼굴을 보셨습니다. 어린 내 심정을 금방 이해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더러 옷을 가져와 덮으라고 하시더니 뒤에있는 성도들이 보지 못하도록 위로 약간 쳐들은 채 붙잡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발을 다 씻기고 흰 버선을 신기셨습니다. 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한 가슴을 붙잡고 울고계셨는데, 어머니께서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뒤에 있는 성도들과 그저 흐느끼며 우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수의를 다 입히고 입관하려고 아버지를 들어 올리려하니까 할머니는 아버지를 관에 넣지못하게 꽉 붙잡고는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뒤에 있던 여자 성도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만 합창으로 대성통곡 했습니다. 그 조용하던 방이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머니는 한 손에 알코올병을 들고 , 한 손에 솜을 든 채로 할머니와 뒤에서 울고 있는 여자 성도들을 번갈아 보시더니 아주 조용히, 그러나 엄숙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에요.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 목사님이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그리고 당연히 가야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 죽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닌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부창부수의 부부였다. 주기철 목사, 그는 예수님처럼, 그 당시에는 한갓 불명예스러운 죄수로서 이 세상을 하직한 것같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 교회사나 우리 민족사에서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신앙의 전통을 단절 없이 이어준 다리였으며, 민족의 십자가를 진 순교자였다.

 
▲ 5년 옥고 끝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 운구 앞에 선 산정현교회 성도들     ©주승중

현재와의 대화

 
이제 그의 열매인 혈육이요, 백 년 신앙과 성역의 대를 이어가는 주승중 목사(주기철 목사 셋째 아들인 주영해 장로의 막내)를 통하여 현재와의 대화를 해보자.
 
"대를 이어 주 목사님 네 아들 중 셋째인 저희 부친을 통해 목사 9명이 배출되어 영적인 계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할아버님이 큰 아버지(주영진)를 루터라 부르셨습니다 그분 역시 불의의 세력에 끝가지 항거하다가 순교하셨습니다. 둘째 큰아버지(주영만)는 어거스틴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일제 때 중고등학교 다시면서 제일 상처 많은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늘 감옥가고, 엄마는 금식 하시고".
 
어거스틴처럼 한때 교회를 떠났다가 늦게 돌아오셨습니다. 셋째인 저희 아버지보고 사무엘이라고 부르셨답니다. 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갈 때 한 시대에서 한 시대를 잇는 중요한 선지자 아닙니까? 놀랍게도 사무엘을 통해서 영적인 계보를 이어가셨습니다.
 
숙부님(주광조)은 다윗이라 하셨습니다. 제일 창대케 되신 분입니다. 숙부님은 60대 되던 해에 정신이 번쩍 들어 은퇴하셔서 보수도 안 받으시고 극동방송에 봉사하셨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주기철 기념사업회'에서 장학금을 주는데, 실제로는 숙부님이 장학금을 내놓으시는 것이지요. 장신대 신대원 3명 총신대 3명 고신대 1명, 1년에 나가는 돈이 6천만 원인데, 숙부님 장학금을 통해 100여 명이 배출되었습니다.”
 
마치 유다가 죽음 직전 열두 아들을 두고 축복과 유언한 것처럼, 주 목사는 아들 4형제를 그렇게 부름으로써 그들의 인생을 어느 정도 예언한 것 같기도 하다.
 
“1968년 할아버지께서 순국선열로 인정받으셨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에 만들어줘 그곳으로 안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0살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참석했습니다. 그때, '나도 할아버지처럼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결심이 반드시 목사의 길이 아닐지라도, 할아버지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큰 바위 얼굴' 같았던 할아버지의 간접적인 영향 속에 성장한 승중 소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전환점을 맞는다.
 
"더 이상 주 목사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마침 그때 네비게이토 활동하던 누나를 따라 고등학교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 만나고 4시간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저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감사하여 주님 만나고 그때 어떻게 사는 게 좋은지 고민 많이 했습니다."〠  <계속>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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