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곡(悲曲)을 노래하는 프리마돈나의 눈물과 인생이야기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카세트로 노래 배워 줄리아드까지

글|김명동, 사진|권순형•박태연 | 입력 : 2014/12/01 [11:12]
▲  12월 커버 페이지  ©크리스찬리뷰

한•호 선교 125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 및 영상사진전에 세계 정상급 클래식 스타 이지연(52. 서울 상도교회) 교수가 특별 초청되어 감동의 무대를 선사했다.
 
지난 11월 1일과 3일, 멜본과 시드니에서 잇따라 열린 공연에서 이지연은 작곡가 말로트의 ‘주기도문’(The Lord's prayer)과 오페라 레하르의 ‘주디타’ 중 ‘너무나 뜨겁게 입맞춤하는 내 입술’, 베르디의 ‘운명의 힘’ 중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 등을 불러 청중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섬세한 테크닉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심금을 울렸는데 플라시도 도밍고가 그를 두고 “이지연은 몽세라 카바예를 연상시키는 탁월한 미성과 테크닉을 가졌다”고 극찬했던 것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이지연은 또 호주동포 세계적 오페라 가수 테너 김재우와 호주 오페라 가수 크리스토퍼 힐리어, 카트리나 워터스와 함께 ‘그리운 금강산’ ‘나의 태양’(O Sole Mio) 등을 불러 청중들에게 갈채를 받으며 많은 화제를 남겼다.
 
▲ 한•호 선교 125주년 기념 음악회(멜본 스카츠교회)에서 감동의 무대를 선사한 소프라노 이지연 교수.     ©크리스찬리뷰

검정고시-독학-숙대 수석 입학과 졸업-줄리아드

대중은 소프라노 이지연을 ‘프리마돈나’로 부른다. 세계 정상급 성악가들의 무대인 미국 오페라무대에서 15년 동안 활동했던 그에게 따라붙는 ‘프리마돈나’의 칭호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인데 대한 존경의 표시다.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리는 음악인의 출발점이 국제적인 음악콩쿠르라면 성악가 이지연의 수상 경력은 한참 나열해야 할 만큼 화려하다. 줄리아음대 재학 시절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국제 콩쿠르에서 뉴욕 지역과 동부 지역 1위를 한 것을 계기로 뉴욕 링컨센터 앨리스툴리홀 무대에 섰으며 아티스트 인터내셔널 주최 오디션에서의 1위 수상을 계기로 1996년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이때 보기 드물게 매진 사례를 기록했고 청중들로부터 많은 환호와 기립박수를 받아 미국 무대에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 호평을 받았다. 뉴저지 주 오페라 컴페티션에서 1위를 차지한 그를 가리켜 지휘자 알프레도 실리피니는 “벨칸토를 제대로 알고 노래하는 가수”라고 말했으며 미국의 대표적 오페라 전문지인 ‘오페라뉴스’는 “이지연의 나비부인은 깊은 이해와 저음부터 고음까지 균형 잡힌 소리와 연기력이 잘 조화돼 관중들의 영혼을 사로잡는다”고 소개했다.
 
이 밖에 미국 리치아 알바네세 주최 국제 콩쿠르 1위, 세르조 프란키 스칼라십 연속 4회 수상, 이탈리아 알타무라 카루소 국제 콩쿠르 금메달, 스페인의 알리칸테에서 ‘라트라비아타’에 출연하는 등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도 진출했다. 그동안 독창회만 100회가 넘을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 오페라의 경우 ‘나비부인’ ‘춘희’ ‘리골레토’ ‘라보엠’ ‘안드레아 셰니에’ ‘투란도트’ ‘오델로’ ‘돈조반니’ 등에서 주역가수로 활동했다.
 
이러한 국제무대를 뒤로하고 2009년에 귀국한 그는 2011년 한국에서 첫 독창회를 가졌다. 이후 서울오페라단이 주최한 오페라 갈라콘서트와 대한민국 음악제, W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 KBS교향악단과 말러 8번 교향곡 협연,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피가로의 결혼’ 백작부인 역할 등으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 앵콜 무대에서 청중들로부터 큰 박수 갈채를 받은 성악가들. 오른쪽부터 소프라노 이지연, 테너 김재우, 메조소프라노 카트리나 워터스.     ©크리스찬리뷰
 
그에겐 남다르고 빛나는 이력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명여대 입학과 졸업 때 수석을 차지했으며 음대 진학의 필수로 여기는 개인 레슨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검정고시를 거친 뒤 어렵게 독학으로 줄리아드음대까지 진출했다. 또한 세 살 아이를 둔 엄마가 된 뒤 미국으로 떠나 어릴 적 꿈을 이뤄냈으니 인간승리라고 할 수 있다.
 
오페라는 사랑과 꿈을 노래하지만 프리마돈나는 대개 비곡을 부르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홀을 가득 채우며 울리는 넓은 음역과 맑은 고음의 음색으로 감성의 소리를 이끌어내는 이지연 소프라노의 노래는 객석을 매료한다는 평가가 따른다. 참으로 많은 삶의 변화와 고통 속에서도 결코 꿈을 잃지 않고 음악의 길을 혼자 외롭게 찾아다녔다. 믿는 것은 오르지 자신의 성악소질뿐이었던 그에게 꿈은 이루어졌다.

▲ 소프라노 이지연의 열창     ©크리스찬리뷰

 
대학갈 때까지 단 한 번도 레슨 받아 본적 없어
 
그를 만난 건 지난 11월 5일 잔뜩 찌푸린 날, 바쁜 일정을 쪼개고 쪼개서 어렵사리 만났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달리는 차안에서 시간에 쫓겨 가며 ‘멋없이’ 만났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열릴 여러 공연스케줄을 체크하고 있었다. 이번 시드니 음악회 및 영상사진전 얘기부터 꺼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나고요. 그리고 상도교회에서 호주 선교사님들의 활동을 설교를 통해 간간히 듣긴 했는데 이번에 이곳에 와서 영상사진을 통해 한국의 눈부신 발전과 그 배경에는 호주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120여 년 전, 그 당시만 해도 조선은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잖아요. 참 어려운 시기에 대단한 일들을 하셨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사를 드렸어요.”
 
그는 밝고 쾌활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까다롭고 도도한 세계적인 프리마돈나의 모습을 기대했던 예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그의 경쾌한 하이톤의 목소리와 특유의 웃음소리를 듣고 나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힘들다 해도 어두운 모습을 싫어합니다. 바쁘게 사는 것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하지요.”
 
▲ 이지연은 2011년에 한국에서 첫 독창회를 열고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이지연
 
외국에서의 활동에 대해 얘기하다가 플라시도 도밍고와의 인연을 잠시 떠올렸다. 그는 “줄리아드 마지막 학기 때 처음 만났는데 음악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많아 친해졌다”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코치 등 유명한 사람, 좋은 사람을 소개해준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또한 이지연에 대해 “음력이 풍부하고 밑에 깔려있는 내면의 소리를 잘 표현해낼 만큼 흠잡을 데가 없다. 벨칸토 창법을 잘 구사한다”는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 벨칸토라면 ‘아름다운 노래’라는 말로 18세기 이탈리아에서 비롯된 가창기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페라에서 가장 이상적인 창법인데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좋았어요. 어머니 목소리의 영향을 받은 것 같고요. 그런데 합창단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보니까 목소리를 예쁘게 내는데만 익숙해져 있는 거예요. 그것 가지고는 오페라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필요했고 미국에서 박태범 선생님을 만나면서 발성법을 공부하고 연습하면서 새로운 테크닉을 터득했어요.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죠. 박 선생님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테너 출신의 국제적인 음악인입니다.
 
그분은 벨칸토 발성법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고 그것에 많은 비밀이 있다고 보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했지만 이탈리아 발성의 특성을 가진 것을 장점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오페라 오디션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낸 것도 새로운 발성법을 익힌 그 무렵부터였습니다.
 
특히 오페라 ‘나비부인’은 모든 곡을 소화할 수 있어야하는 힘든 역입니다. 지금도 공부하고 있어요. 성악도 계속 배워야 됩니다.”
 
- 줄리아드 음대는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입니다. 줄리아드 음악교육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연주든 성악이든 기본 소양과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입학도 힘들지만 졸업도 쉽지 않아요. 줄리아드는 음악에서 세계적인 시각과 역사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이미 그곳을 거쳐나간 음악인들이 그대로 산 교본이 된다는 점에서 음악적 큰 스케일과 꿈을 키우게 됩니다.
 
입학해 영어가 부족했지만 1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이나 형식보다 활동성과 전문실기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재학 중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서 뉴욕지역과 동부지역에서 1위를 하는 등 학교 밖의 활동으로 교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줄리아드 음대는 초등학생 때부터의 꿈이었다”며 “독학으로 음악을 하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큰 오빠가 대구에 있는 경북대 사대부고에 다닐 때 하루는 ‘지연아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물어봤어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오빠는 줄리아드음대를 가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그 이후 줄리아드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반드시 줄리아드에 진학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멜본한인교회 새교육관 입당 감사 예배에서 찬양하는 이지연 집사     © 크리스찬리뷰

정말 독학이 가능했는지 물었다.
 
“대학에 갈 때까지 단 한 번도 레슨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이탈리아의 소프라노 레나타 태발다의 노래 테이프가 제 스승이었죠. 오로지 테이프를 열심히 들으면서 모방을 하려고 했던 게 전부였어요.”
 
레나타 태발디의 우아하고 고상하면서도 따뜻한 소리가 좋았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리아 칼라스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듯 강렬한 미력이 그를 일깨웠고, 몽세라 카바예의 고음 테크닉에 반해 그때부터 다양한 소리를 내기 위해 훈련했다. 이 세계적인 소프라노 세 명을 롤 모델로 둔 덕분에 소프라노 이지연의 레퍼토리는 더 풍성해졌다.
 
“레슨 받으려면 그게 다 돈이잖아요. 어릴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음악공부를 할 형편이 아니었죠.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체능, 특히 음악을 전공했다면 으레 부잣집에 태어나 우아하게 공부했겠거니 생각한다. 그러나 간혹 순탄치 않은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정상에 선 이들을 만날 때면 그 연주가 더 뭉클하고 감동적으로 들릴 때가 있다. 이지연의 울림도 그렇다.
 
▲ 독학으로 노래배워 줄리아드까지 진출한 소프라노 이지연을 대중들은 프리마돈나라고 부른다.     © 이지연

교복 입은 학생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는 어린 시절 대구에서 살았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에게 가야금을 선물 받아 일찍 국악에 눈을 떴다. 중학생 시절에는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다시피 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과시했다. 중학교 입학 당시 선화여중에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종교재단 학교보다 일반 중학교를 선택하도록 해 대구에 있는 신명여중에 들어갔다. 그러다 중2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서울로 집을 옮겼다. 고생은 이때부터였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 먹고사는 일을 해결해야 했다.
 
“일 주일 내내 밀가루 수제비를 먹기도 하며 초등학교를 네 곳이나 옮겨 다니고 한 해에 이사를 열 번 다닌 일도 있었죠. 아버지는 경찰 간부였고 국가유공자였지만 강직해서 신분을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공직에 계실 때는 선물이나 뇌물을 받는 부하를 용납하지 않아 가난하고 외롭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공직을 떠나면서 사업을 하셨는데 사기를 당하신 거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집안은 금방 엉망이 되었다. 그는 가야금을 계속하려면 레슨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야금을 그만두고 대신 레슨이 필요 없는 성악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무렵 라디오를 통해 성악을 자주 들었다. 라디오는 노래자랑 같은 곳에서 입상을 하고 받은 상품이었다. 또한 수소문 끝에 남산 근처의 한 음악원을 찾아가 성악을 배우겠다면서 레슨비가 없으니 대신 청소나 심부름 일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여기에서 만난 노래 선생의 주선으로 검정고시학원에 다녔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3개월 만에 중학교 과정을 통과했죠. 그런 후 서울예고에 진학하려고 면접시험을 봤습니다. 그런데 나의 학력을 보고 ‘우리 학교에서는 아직 검정고시로 입학한 학생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고교 진학을 포기했어요.”
▲ 빠듯한 일정 속에 캥거루는 꼭 보고 가야한다는 이지연 교수의 간청(?)으로 와이스만 페리에서 야생캥거루를 만났다.     © 크리스찬리뷰

사실 합격한다 해도 집안 형편 때문에 다닐 처지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일 년을 더 독학으로 공부했다. 이때 그는 결핵을 앓아 고생을 많이 했다. 또 영등포와 해방촌 등지로 수 차례 이사를 다닐 정도로 힘든 시간을 이겨내야 했다. 당시는 대학에 복수 지원을 할 수 있었으나 원서 비용을 아끼려고 숙명여대 한 곳에만 원서를 내고 수석으로 입학하게 된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1학년 때부터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학비를 제 스스로 벌어야 했거든요. 때로는 장학금으로 충당하고, 그렇게 바쁘게 보냈습니다. 대학 4학년 2학기 때는 윤학원 선생님이 지휘하는 대우합창단에 들어가 솔리스트로 활동했는데 그제야 비로소 조금 여유가 생기더군요. 국립합창단보다 네 곱 더 대우가 좋았거든요.”
 
이때 동아일보 주최 동아콩쿠르 2위 입상과 조선일보 주최 신인음악회 출연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9년 대우합창단이 해체되고 결혼해 아이를 키우느라 잠시 주춤했던 음악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1993년 12월 세 살 된 아이를 두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줄리아드음대 교수의 레슨 없이는 쉽게 입학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에 빠졌다.
 
또 레슨을 받아도 1-2년은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무작정 응시해도 2회 이상 탈락하면 응시 자격마저 없어진다는 말에 더욱 그랬다. 포기하기는 억울한 일, 줄리아드음대 교수에게 일단 테스트나 받아보기로 했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너는 톱(Top)이다”라는 말을 듣고 자신을 다시 얻었다. 9월 학기를 앞두고 남녀 한 명씩 선발하는 1994년 5월 입학시험에 응시했고 과제로 준 10곡을 부르자 심사위원들로부터 만장일치의 박수를 받으며 당당히 합격했다.
 
- 3살 박이 아들을 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안가면 너무 늦어질 것 같더라고요. 저는 항상 세계 최고의 성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다행히 남편과 시어머님이 기꺼이 아기를 대신 돌보며 나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 디 앤트랜스에서 야생 펠리칸도 만났다.     © 크리스찬리뷰
 
그녀를 지탱하는 세 가지 힘, 노래, 가족, 신앙

이지연의 인생은 노래, 가족, 그리고 신앙이 지탱한다. 그가 부른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할 줄 아는 건 음악밖에 없어요. 그러고 보면 타고난 재능은 있는 것 같아요. 어려운 일을 많이 겪다보니까 목소리에 좀 더 감정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정말 많이 힘들었었거든요. 사실 전 음악이 없었으면 삶이 삭막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자라온 환경이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악을 하므로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결핵으로 몸이 굉장히 아팠는데 그때가 제일 힘들었었던 것 같아요. 몇 개월 동안 일어나지 못하니까 희망도 사그라지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어요. 그럴 때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경연대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런 후 자연치유가 됐죠. 음악이 나를 살렸어요. 음악은 내 삶의 원동력입니다.”
 
- 가정환경에 대한 원망을 해본 적은 없었나요?
 
“아뇨. 원망해 본 적이 없어요.”
 
- 가족과 함께 고생을 많이 하신 부모님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가난 속에서 음악을 한다고 철없이 설쳐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주시던 아버님은 화려한 무대에 오르는 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시고 1983년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대학 4학년 아무것도 보여드릴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어머님도 2009년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4남 2녀의 우리 가족에게 비극이 두 차례 찾아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 부부 두 분과 남동생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형제들 우애가 참 좋았는데요. 그 일로 저는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었어요. 삶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 이해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물론 저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충격이 컸어요. 대구 시공갤러리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한 큰오빠는 나의 장래를 누구보다 걱정하고 격려하던 분이셨거든요.”
▲ 달링하버에서 만난 이지연 교수     © 크리스찬리뷰

신앙은 그가 가장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다.
 
“힘들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그때마다 기도하고 소원하던 것이 다 이루어지게 해주셨어요. 그동안 시험을 얼마나 많이 봤습니까.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의 기도는 단순하다. 오늘 미운 사람을 용서하고, 오늘 건강함을 감사하고, 내일도 건강할 수 있음을 허락받고, 배고프고 상처받은 아이들을 구해달라는 소원을 덧붙인다.
 
“신앙은 저를 겸손하게 하고 낮추게 하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해요. 그러면서 ‘아, 내게는 노래를 통해서 뭔가를 나눠줘야 하는 사명이 있는 거구나’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좋은 음악이 있으면 장르에 관계없이 제 능력이 닿는 한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 귀국 전날 달링하버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강신성 장로가 베푼 만찬에 참석한후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왼쪽부터 본지 편집인 김명동 목사, 이지연 교수, 강신성 장로, 테너 김재우 집사)     © 크리스찬리뷰
 
낮은 무대로  
 
대중가요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연신 방글방글 웃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던 그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그는 이제 화려하고 큰 무대가 아닌, 낮은 곳에서 대중과 가까이 마주하며 음악이 주는 기쁨을 공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사실 몇 개월 전, 콘서트에서 오페라도 하고 가곡도 부르고 대중가요도 불렀어요.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생각을 바꿨어요. 아, 성악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 대중가요도 좀 넣고 성가곡도 넣고 해서 다양하게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요.”
 
지난 4월 25일 서울 사직공원 인근에 위치한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소프라노 이지연 콘서트가 열렸다. 그는 직접 선곡한 가곡, 오페라 아리아 등 12곡을 부르면서 ‘님은 먼 곳에’ ‘봄날은 간다’ ‘한계령’ ‘칠갑산’ 등 평소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듣기 힘든 대중가요까지 불러 관객들과 가깝게 호흡했다.
 
“워낙 유명하고 좋은 곡이죠. 많은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이미자 씨 노래가 왜 그렇게 서글프고 싫었는지, 그런데 지금은 좋아해요. 우리 노래를 더 많이 불러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대중가요와 우리 가곡을 많이 알리다 보면 나중엔 서양의 클래식음악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을 테죠.”
 
예전에는 무대 환경이나 조건을 깐깐하게 따지고 예민하게 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는 어디든 상황이 된다면 달려가 노래할 마음뿐이다.
 
“저를 좋아하는 분들이 계신 곳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가서 소통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활동해서 한국 분들과 자주 뵙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라도 알아가고 싶어요. 저는 노래하고 박수 받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11월 7일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는 ‘2014 한중 창조도시 문화대전’에 출연한다. 11월 11일에는 세종체임버홀에서 ‘우리노래 펼침이’에 참가하고, 12월에 있을 서울대학교 암병원 ‘음악풍경’에 출연하는 등 크고 작은 공연스케줄로 가장 바쁜 음악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꿈에 대해서 “좋은 소리를 갖고 있는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경희대에서 연주 전공 학생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내가 잘나서 혼자서 이루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도 베풀어야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아이들 중에서 재능이 있는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지금 찾고 있어요. 정말 저는 간절했었거든요. 어떤 사람은 소년원에서 찾기도 하던데 저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어 그는 “지나고 보니 배고파보지 않고 눈물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며 “떨림과 울림의 노래는 그런 역경을 겪어오지 않은 세대에서는 나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지연은 그 말끝에 한마디를 보탰다.
 
“호주에서도 독창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불러주세요.”
 
▲ 한•호 선교 125주년 기념음악회를 마친 후 무대인사하는 출연자들. 오른쪽부터 소프라노 이지연, 테너 김재우, 피아노 반주 퓌비 브릭스, 메조소프라노 카트리나 워터스.     © 크리스찬리뷰
 
에필로그
 
이지연의 노래를 들으면 왜 가슴이 짜릿해지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가. 그녀의 가슴에 무엇이 흐르고 있어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는가.
 
그가 선물로 준 CD를 들었다. 그런데 정말 그 목소리에 빛이 서려있었는지 가슴 한 구석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기 비움의 고백에 영혼 깊은 쉼이 느껴졌다. 〠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사진/박태연|크리스찬리뷰 사진기자 (멜본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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