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군 참전용사 마이클 브라이언(Michael F. Brien)

그는 집시(Gypsy)였다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12/01 [11:54]
▲ 이휘진 주시드니총영사로부터평화의 사도 메달과 증서를 전달받은 마이클 브라이언 씨.     ©크리스찬리뷰

마이클(Michael Francis Brien)은 집시(Gypsy)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9월에 시드니 시내 퍼시즌스 호텔에서 열렸던 ‘참전용사 보훈 행사’였다. 무려 180 여명이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이한 외모 때문이었다. 감색 양복을 입은 80살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왼쪽에 귀걸이를 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가슴에 여러 개의 훈장을 단 것으로 보면 분명 참전용사임이 분명하였다.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은 11월 1일 '타라무라 연합교회'에서 열린 ‘한•호 선교 125 주년 기념 음악회’에서였다. 부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젊은 여자와 함께 참석을 했다. 음악회가 끝나고 피로연 시간에 그를 만났다. 
 

▲ 갈스톤 화실에서 작업 중인 마이클과 그의 부인 로잔.     © 크리스찬리뷰

그는 특수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은 옆에 있는 여인이 대신하여 설명하여 주었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가 집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시(Gypsy)는 누구인가?
 
집시는 유럽을 중심으로 유랑 생활을 하는 민족이다.  원래 조상은 인도에 살았으나 지금은 세계 각지에 퍼져 있다. 서기 1000년경에 회교도들의 인도를 침공해서, 힌두교 학살이 자행되자 집단으로 페르시아에 피신했다가 유럽으로 흘러 들어온 민족이 오늘의 집시다.
 
집시(Gypsy)는 영어식 표현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착각하여 E-gyptian이라고 부르다가 E자를 빼고 Gypsy라고 불렀다. "호주에도 집시가 있습니까", "얼마 전 시드니에서 '로마니'를 만났는데 그가 약 2만 명 정도 있다고 한다“ 나는 '로마니'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
 

▲ 자화상(Glory항공모함을 타고 한국전 참전 당시의 모습)     © 크리스찬리뷰

이들은 자신들을 '로마니'(Romani) 또는 '로마'(Roma)라고 부른다. 이들의 언어로 '로마'란 ‘인간 또는 사람’이란 뜻이다. '로마'(Roma)는 집시 전체를 일컫는 상위개념임과 동시에 집시 중 한 그룹을 일컫는 개념이다. 집시의 공통언어는 '로마네스'(Romanes)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유사하다.
 
집시가 이집트가 아닌 인도 북부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집시는 오랫동안 소외와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역사가 기억해주지 않는 어두운 뒤안길에서 헤매고 있는 민족이다.
 
집시는 유럽 전역에 약 1천200만 명 정도가 퍼져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많이 거주하는 국가는 루마니아에 190만 명이 살고 헝가리와 불가리아에 각 75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유럽 노동시장이 개방되면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많은 집시들이 서유럽으로 움직이기를 시작했다. 
 
▲ 마이클의 10대 젊은 시절과 80대 초반 노병으로 변한 모습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 크리스찬리뷰

유럽에서 집시의 이미지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집시는 오랜 기간 유럽에서 소매치기와 도둑질, 사기, 유괴 등 온갖 범죄의 주범으로 지목돼 왔다. 유대인과 달리 일정한 거주지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닌 탓이 컸다. 정처 없이 유랑하는 그들은 유럽인들에겐 박해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나치는 2차 대전 당시 '홀로코스트'(Holocaust)의 대상으로 유대인뿐 아니라 집시도 지목했다.
 
최근 '에볼라' 문제가 발생하면서 유럽은 이들을 더 경계하고 있다. 영국에도 약 30만 명의 집시가 있는데 영국정부도 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답답해서 마이클에게 물어 보았다. "왜 집시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움직입니까?"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나도 몰라, 하지만 나 같이 정착하는 집시도 있다." 그렇다, 집시라고 모두 다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라, 정착하여 사는 집시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뿌리를 버리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마치 마이클이 자랑스럽게 집시라고 나에게 소개하는 것처럼.

▲ 아직도 녹슬지 않은 트럼펫 연주 소리. 마이클은 해군에서 기상나팔과 취침나팔을 불었다고 했다.     © 크리스찬리뷰
 
홀로코스트(Holocaust)
 
집시의 역사는 그야말로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무슬림의 박해를 피하여 고향인 인도의 푼잡을 떠나면서부터, 1차 대전 때는 터키에 의해서, 2차 대전 때에는 나치에 의하여 집단 학살을 당했다. 나치는 인종주의 정책을 펼쳐 아리안 족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인종적, 정치적, 문화적 청정을 요구하며 사회의 모든 요소에서의 정치적 지배를 실시했다.
 
나치의 정책은 사람들을 세 종류의 적으로 나누었다. 먼저 혈통으로 인해 인종적인 적으로 간주된 '유대인과 집시', 정치적 적으로 '공산주의, 진보주의자' 그리고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 마이클의 해군 복무 기록 카드     © 크리스찬리뷰

나치는 3단계에 거쳐 작전을 수행했다. 첫째 차별과 강제 이주정책, 둘째 배제와 축출을 통하여 '게토'(Ghetto)를 설치하였고, 마지막은 '홀로코스트' 수용소를 만들어 이들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는 holos(전체)와 kaustos(타다)에서 유래되었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유태인뿐 아니라 집시들도 50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으나 알려지지 않았다.
 
집시의 집단 학살이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1986년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엘리 위젤이 86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수상 소감에서 집시에 대해 언급해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 "나는 나치 수용소에서 숨져간 수많은 집시 친구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들을 위해 나는 아무 대변도 해주지 못했다. 뒤늦은 일이지만 이제부터는 그들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약속한다."
 
이때부터 나치 수용소에서 집단 학살을 당한 집시들의 억울한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집시들은 유럽인의 미운 오리새끼로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다.

▲ 글로리 함대의 한국전 배치도     © 크리스찬리뷰
 
비제의 카르멘(Carmen)
 
집시하면 우리는 ‘비제의 카르멘’(Carmen)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카르멘은 소설, 오페라, 영화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이다. 스페인 남부 세비야의 ‘집시 카르멘’과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마는 하사관 ‘돈 호세’의 사랑을 그린 비극적인 작품이다. 오페라에서 ‘돈 호세’를 유혹하는 ‘카르멘’의 정열적인 ‘플라맹고’는 관객의 마음을 훔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플라맹고’는 원래 축제의 음악이 아닌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슬픔과 한이 서린 몸부림이다. 1492년 스페인 군대에 ‘무어 왕조’가 무너지고 유대인과 회교도 그리고 집시들은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받게 된다. 이들은 산속으로 숨어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둘러 앉아 집시의 춤과 노래를 통하여 하루의 피곤함을 풀었다. 바로 이때 사용했던 음악이 ‘플라맹고’였다. 
 
▲ 착륙 실수로 바다에 빠지기 직전글로리 함대의 전투기     © 크리스찬리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에 대한 핍박도 완화되고 집시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도 점차 생겨났다. 조금씩 음악적 교류가 이루어졌고 집시의 음악을 수용하고 해석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플라맹고’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프란시스 마이클 브라이언
 
마이클의 어머니는 영국 집시였고, 아버지는 스페인 집시였다. 어릴 때 아버지가 스페인 내전으로 돌아가시자, 엄마는 영국 군인이었던 양아버지와 재혼을 했다. 양아버지는 그에게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의 영국 '패스포드'와 '복무 카드'에 '프란시스'라고 되어 있으나, 양아버지가 지어 준 것이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집시가 아닌 양아버지는 집시로 살고 싶었던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장학생으로 공부할 기회가 있었으나, 양아버지의 반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자원해서 해군에 입대하게 된다.
 
▲ 한국전 참전에 앞서 시드니에서 시가행진을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그는 1933년생이다. 그의 '복무 카드'를 보면 1949년 5월 31일 처음으로 ST. Vincent 호에 승선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해군에 들어 간 것은 16세이다. 그는 50년 5월 2일부터 Triumph 항공모함으로 배를 바꾸어 탔다. 그는 Triumph를 타고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에 합류했다. 그때 그의 나이 17살이다. 그는 상륙작전 당시 18세가 되지 않아 정식으로 보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해군은 주로 육군이 성공적으로 상륙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배에서 함포 지원 사격을 한다. 상륙 작전이 펼쳐지면서 자신은 해군 중에서도 특수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상륙하다 부상을 당했다며 소매를 걷어 붙이는 것이다. 왼쪽 팔에는 아직도 한국 전쟁 때 다친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12월 12일까지 Triumph 배를 타다, 1951년 1월 1일 몰타에서 Glory 항공모함으로 갈아타고 다시 한국전에 참전을 했다. 글로리 항공모함에서는 나팔수 역할도 했다. 그는 당시에 사용하던 트럼펫을 가지고 있다. 트럼펫에는 1951년 Glory 항공모함이라고 새겨져 있다. 한번 불어 달라고 부탁하자, 주저 없이 "뚜 뚜 뚜뚜뚜 뚜뚜뚜뚜..." 부는 것이 아닌가!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게 지났건만 그의 실력은 하나도 녹슬지 않았다.

▲ 갈스톤에 있는화실을 겸한 마이클(왼쪽)의 자택은 온통 그림으로 뒤덮혀있다. 본지 김환기 편집위원이 작품 설명을 들으며 그의 부인 로잔(오른쪽     ©크리스찬리뷰
 
마이클은 화가
 
마이클의 집 입구는 화실로 꾸며져 있다. 화실이라면 멋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집이 너무 지저분해서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가 집시라는 것을 안다면 모든 것이 이해된다. 그는 갈스톤(Galston)의 나무가 많은 곳에서 세를 살고 있다. 방 하나에 거실이 있고, 거실 옆에 부엌 그리고 입구는 화실이다. 거실에는 이곳저곳에 그가 그린 많은 작품들이 걸려 있고, 심지어 바닥에 놓여 포개져 있기도 했다. 그는 시드니 대학에서 전시회를 두 번이나 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정말 심오하다.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그림도 있었고, ‘천사들의 동산’이라며 천사들이 함께 놀고 있는 그림도 있다. 심지어 일반의 고정관념을 깨고 ‘검은 천사’도 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그린 작품을 하나 보여 준다.
 
▲ 마이클은 함정(배)도 즐겨 그린다.     © 크리스찬리뷰

제목은 ‘Bishop returned back to the church’이다. 그림 윗부분에는 십자가 달리신 그리스도, 중간에는 검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천사가 있었다. 그 밑에는 교회가 있었고 유령과 같은 하얀색의 물체가 강대상을 향해 가고 있는 그림이다. 교회를 담임하던 주교가 죽은 후 다시 돌아와 교회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마이클의 작품세계는 집시의 정신세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집시들은 범신적, 주술적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어, '죽은 영'이나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신앙을 믿고 있다.
 
거실에 걸려 있는 배 그림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가 타고 한국전전에 참전한 Glory 항공모함이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할 때 마이클의 모습은 흥분 그 자체 이었다. 특별히 북한군과 백병전을 하던 이야기는 마치 무협지를 읽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상식적으로 해군은 함포로 지원 사격을 하고 상륙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작품명 ‘Bishop returned back to the church     © 크리스찬리뷰

미 해군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구세군 사관을 알고 있다. 그분의 딸과 사위는 친한 친구이다. 성탄 때 미네소타에 있는 그분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앨범을 보여 주면서 한국전에 참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 해군은 원산 앞바다에서 함포로 지원사격을 했으나 상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보통, 남자들은 군대이야기를 할 때는 굉장히 과장되게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여자는 군대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여자들이 듣기 싫은 3번째는 남자들의 축구 이야기고, 2번째는 군대 이야기이고,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 작품명 ‘Harbour’     © 크리스찬리뷰
 
마이클은 크리스찬
 
마이클은 크리스찬이다. 정규적으로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크리스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임을 믿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는 정교회 크리스찬이다. 마이클의 어머니는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 아버지는 카톨릭이 국교인 스페인 출신이지만 모두가 '동방정교회' 교인이다.
 
시와 정교회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추측하여 보았다. 신티(Sinti)는 집시의 한 그룹으로서 11세기 이후 그리스 동쪽 해안에서 거주하였다가 15세기 초 비잔틴 제국이 터키 민족에 의해 몰락하자 발칸반도, 헝가리, 이탈리아를 거쳐서 중서부유럽에까지 도주 혹은 이주해온 민족이다.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던 지역은 정교회를 믿었다. 집시는 북인도에서 출발하여 비잔틴 제국을 걸쳐 이동하면서 ‘정교회를 믿게 된 것은 아닐까’ 유추해 보았다.
 
▲ 크리스찬인 마이클은 천사와 교회를 즐겨 그린다.     © 크리스찬리뷰

인터뷰가 마칠 때쯤 마이클은 오래 전 5불 주고 산 성경을 보여 주었다. 성경은 아주 크고 무거웠으며 그 안에는 삽화까지 있었다. 놀랍게도 마이클은 안경을 끼지 않고 아주 작은 글씨까지 읽는 것이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대신 눈이 발달된 것 같다. 그는 정규적으로 성경을 읽는다. 

▲ 마이클의 책상엔 기도 제목이 적혀 있었다.     © 크리스찬리뷰

마이클은 영국에서 참전용사 지원금을 받고 있고, 호주에서는 연금을 받고 있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주에 200불의 숲속 집에서 파트너인 로잔과 함께 살고 있다. 마이클은 호주 시민이면서도 호주여권이 없다. 1969년 호주에 온 이후로 한 번도 해외에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그가 보여준 영국 여권도 이미 유효기간이 지나 있었다.  

▲ 정교회 크리스찬인 마이클은 매일 성경을 즐겨 읽는다. 그가 읽고 있는 대형 성경책은 오래 전 브리즈번에서 $5에 샀다고 했다.     © 크리스찬리뷰

80세가 넘어 먼 곳을 가기가 힘들지만, 집시의 자유로운 영혼은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헤어지기 전 마이클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여 주었다. 미완성된 배 그림이었다. 작품이 완성되면 마이클은 이 배를 타고 또 다른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나는 마이클과 로잔의 남은 여행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고 숲속의 집에서 나왔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 구세군 한인사역(Korean Ministry) 및 수용소 담당관(Chaplian, Detention Centre)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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