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 주승중(끝)

순교자의 후예, 그 영예와 명예, 그리고 멍에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12/01 [12:19]
▲ 하나님을 가장 가깝고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해 목사의 길을 선택했다는 주승중 목사.     © 크리스찬리뷰

미션계인 신일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고3 올라갈 때 음악을 굉장히하고 싶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장신대 기독교 교육과에 다니던 누나와 어디를 가다가 사모님 댁이라고 잠깐 인사하러 가자고 들렀습니다. 사모님이 절 보고 기도하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예언의 은사를 갖고 있는 분 같았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그분이 기도하면서 ‘네가 음악만으로는 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말에 충격받았습니다. 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목사가 가장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가깝게 섬길 수 있는 길이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다니던 수유제일교회 윤덕수 목사님께 의논하였더니 영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고 가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학부를 숭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장신 신대원에 입학했습니다.”
 
▲ 장신대에서 16년 동안 설교학을 강의한 주승중 목사     © 크리스찬리뷰

소중한 만남
 
20대 청년 시절, 그는 소중한 만남을 갖는다. 무엇보다 음악을 하고 싶었던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대학교 때 잊을 수없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숭실대 합창단을 지휘하시던 김정혜 선생님입니다. 숭실대 합창단과 영락교회 찬양대 지휘를 하시면서, 감신대에서 가르친 분입니다. 제가 합창단 들어가니, ‘네가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가꿔서 드려야 한다. 정성을 드려서 한다’면서 2년 반을 아무런 조건 없이 레슨을 해주셨습니다. 음악을 그렇게 그 선생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배웠는데, 발성적으로 설교하니 목이 안 쉬고, 지금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훈련시키고 준비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신대원 진학해서는 한국 교계에 설교학 1세대라 할 수 있는 정장복 교수와의 만남도 그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설교학 개론 2학기 때는 설교 실제훈련이 있습니다. 그 시간이 공포의 시간이었습니다. 호랑이 선생님 정장복 교수님께서 막 혼을 내시니까요. 제 순서에 따라 설교를 하고 나니 평가를 안 하시고 ‘자네 내 방으로 오게’하여 갔더니, ‘너 누구냐? 앞으로 뭐할 거냐?’해요.
 
‘제가 공부를 더하면 할아버지 생각해서 교회사를 공부하고 싶습니다’하니 막 호통을 치셔요. ‘그래서 되겠느냐, 내가 들어보니 너한테 설교의 은사가 있다. 설교학을 해라. 지금 우리나라에 공부한 사람이 없다, 이 분야가 황무지다. 큰 교회서 한다고 와서 설교학 가르치는데, 다 엉터리다. 네가 공부하고 와서 황무지를 일깨웠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황무지’라는 그 말씀에,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이 없다’는 그 말씀에 도전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이 전폭적으로 후원해 주셨습니다. 대학원(M. Th)도 그분 밑에서 했습니다. 졸업하고 5년이 지나서 유학 안나간다고 재촉하셨어요. 정 교수님이 추천서를 너무 잘 써주셔서 전액 장학금으로 등록금, 생활비에, 한 달에 용돈 100불까지 나오는 장학금이었습니다.
 
나중에 이걸 3개를 나눠서 3명에게 줄 만큰 큰 규모의 장학금을 받고 나갔습니다. 보스턴대학에서 박사과정 다니면서 설교목사를 했습니다. 코스워크 다 끝났는데 종합시험을 못보고, 목회에 합류되니 학위가 늦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정 교수님이 오셔서 막 야단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이러고 있느냐?’하셔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귀국한 그는 바로 장신대 강의를 맡아 시간 강사 1년 하고, 전임이 되었다. 그 이후 16년 동안 스승 정 교수가 일궈놓은 설교학에 북을 치고, 거름을 주며 한국교회 강단을 기름지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렇게 평범한(?) 교수생활을 하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전환이 일었다. 바로 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교회에서의 청빙이었다.
 
“주안교회는 전혀 생각이 없었습니다. 2012년에 제자인 부목사 중 한 분이 전화를 해서 ‘집회 좀 해주세요, 성도들이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니 목사님 오셔서 위로 좀 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나중에 집회 끝난 다음 청빙위원회 11명의 장로님들이 도장을 찍어서 학교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부터 고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지 교회 상황은 어떤지….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16년 있었으니 학교에서 은퇴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리 안가고 싶어도 가야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고민과 갈등으로 기도하다 마침내 청빙을 수락하여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 이후 예배의 감격과 살아있는 설교를 위하여 몸부림치면서, 그동안 갈고 닦고 다듬은 학문을 현장에 끊임없이 접합시키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의 이력은 ‘신앙 명문가에 출생하여, 좋은 스승 만나 좋은 교육받고, 활짝 열린 비단길을 걷고 있는 목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순교자의 후예’라는 영예와 명예 저변에 처절한 아픔과 어둠의 동굴을 건너야 하는 멍에가 있었다.
 
순교자의 멍에
 
“시편 37편 25-26절이 저희 집안의 유산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숙부님이 저에게 해주신 내용입니다. 해방되어도 저희 집안은 어두웠습니다. 숙부님 위의 형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제일 큰 아버지는 숨어서 다니고, 둘째 큰아버지는 바닷가 염전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해방 후 1년 반 만에 할머니(주기철 목사 사모)께서 유방암에 걸려 돌아가실 때였습니다.
 
그때 숙부님과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께서 수술하시고 장례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 어떻게 사느냐?’ 어린 숙부님은 정말 앞이 캄캄하셨던 거지요. 14살 때까지 초등학교도 못 다녔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김일성이 사람을 보냈더랍니다. 그 사람들이 와서 어머니 앞에서 뭘 펼치더래요.  현찰 다발과 집문서, 땅문서 등 지주들에게 몰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표창장까지 가져왔다고 해요. ‘주기철 선생께서 항일운동하다가 옥사하셨기에 장군님이 내리는 하사품입니다’하더랍니다. 그런데 숙부님이 그걸 보니 너무너무 기쁘더라고, ‘저 돈만 가지면...’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할머니가 한마디로 반대하시더랍니다. 
 
‘주기철 목사는 정치운동 하신 분이 아니오. 이런 것을 가지고 가시오.’ 다 죽어가시던 분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일어나서 그런 것들을 집어던지고, 가라고 하며 막 밀치더랍니다. ‘공짜로 주는데 왜 안받시오. 이거 원 참….’하면서 떠나더랍니다.
 
그러니 숙부님이 너무 속이 상했답니다. ‘당신은 곧 죽는데 나는 어떻게 살라고.’ 섭섭해서 입이 나와 있는데, ‘광조야 들어와라, 섭섭하냐?’
 
‘예’
 
‘네게 줄 유산이 이것(성경책)이다’ 숙부님은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성경책과 말씀을 갖고 월남하셨습니다. 어머님을 통해서 주신 시편의 유산의 말씀으로 아이들에게도 가르칩니다. 이게 우리의 유산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해방이 되어도 순교자의 세 아들은 꽁꽁 얼어붙은 정국에서 해빙되지 않았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할아버지께서 1944년도에 순교하시고, 1945년 해방 후 1년 만에 할머니마저 소천하시니, 그 아들 4형제는 고아원으로, 통박스 공장으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드님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를 못했습니다.
 
저희 아버지 경우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데도 무려 7개 학교를 옮겨 다닌 끝에 겨우 사설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학교에서 아침조회 때, 동방요배 안한다고, 순악질 목사 자식들이라고 퇴학당했습니다. 할머니께서도 절을 하지 말라고, 자녀들을 결국 학교에서 자퇴시키셨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퇴학당한 끝에 17살에 겨우 사설학원같은 곳을 졸업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부산 애린원에서 생활하셨습니다. 낮에는 통나무로 박스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손 목사님의 순교한 두 아들, 동인 동신과 같이 자라셨습니다. 동희 권사님은 ‘용해 오빠’하고 따랐습니다. 그렇게 통공장에서 일하다가 폐병에 걸려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노숙자처럼 쓰러진 것을 누군가 발견해서 부산시립병원 응급실에 실어놓은 바람에 시립병원에서 간호사로 있던 사람이 어머니를 만난 것입니다. 한 젊은 청년이 얼굴이 하얗게 폐병으로 병원에 실려 왔는데, 그렇게 불쌍해 보여 다른 사람보다 관심이 가서 돌보아주다 사랑이 싹터 두 분이 결혼하신 것입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아버지를 일으키셨습니다.

▲ 동산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후 인근 공원을 산책하며 웃으며 담소하는 주승중 목사와 황기덕 목사(오른쪽)     ©크리스찬리뷰
 
근본적인 질문

 
여기서 그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가족사를 대하면서 실존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그런데 저는 이런 이야기를 삼촌들로부터 들으면 들을수록 굉장히 갈등이 생겼습니다. 특히 제 아버지 생각을 하면, 솔직히 젊은 시절에는 할아버님 주 목사님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순교자의 남겨진 가족은, 도대체 뭔가요? 할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순교의 면류관’을 쓰셨지만, ‘결국 가족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요?’ 라는 이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받고 그는 갈등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제가 이 질문에 해결 받은 것은 제가 철이 들고,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후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은 제가 결혼한 후에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느 날엔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제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보니, 그제야 비로소 할아버지의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저의 아이들을 보면서 할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과도 같은 설교-‘다섯 가지 종목의 나의 기도’(마 5:11-12, 롬 8:18, 롬 31-39)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읽다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다섯 대지-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합니다-, 그분은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 흘리며 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결연한 모습으로 하나님 아닌 우상 앞에 절대로 절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주님의 제단 앞에 바칠 것을 비장한 모습으로 설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설교를 들은 2천여 명의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대지의 내용은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주님께 맡시긴 분이었습니다.”
 
순교자의 영예
 
인생의 안개처럼 드리웠던 갈등이 사라지자 말할 수 없는 영예가 보였다. 그토록 흠모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가문의 가훈도 할아버지의 유훈-일사각오-였다. 항상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다. 가장 학자인 그가 좋아하는 아끼는 책도 ‘할아버님 이야기를 담은 전기, 할아버지 설교집’이 되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전기들이 일사각오를 더욱 갖게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할아버지 전기를 다시 읽고, 설교를 다시 읽고, 저를 다시 다집니다. 가정의 찬송도 평소 할아버지가 애송하던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이는 주기철 목사 일대기의 영화제목이기도 하다)입니다.”
 
해마다 1월 1일이면 온 가족 직계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몇십 년 전통이 되었다. 한 집에 항상 다 모여 예배 드리면 반드시 이 찬송을 부른다고 한다.
 
“지금은 저희기 모이면 일종의 부흥회처럼 합니다. 목사가 많으니(9명) 은사도 많습니다. 가운데 의자 놓고 다 둘러서 기도제목 듣고 축복기도 합니다.”
 
그와 인터뷰를 마치면서 문득 “예언자와 순교자는 비웃는 군중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한 것을 본다”는 벤자민 칼도조의 말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날 위해서 죽어달라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이 떠올랐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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