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장애를 축복으로 승화시킨 희망 천사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12/29 [10:06]
▲     ©크리스찬리뷰  1월호 표지
 
그녀가 왔다. 그녀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다. '선천성 1급 지체 장애인', '희망 천사'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등.
 
이희아, 그녀는 장애를 축복으로 승화시키고, '희망 천사'가 되어 '희망을 연주'하고 있다. 그녀가 시드니에 오게 된 것은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다. 얼마 전 호주밀알선교단이 북한 농아축구단을 초청하여 호주 농아축구단과 친선게임을 하기로 했다. 국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북한 농아축구단을 초청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다.
 
이 일이 성사되기까지 지난해 북한 농아축구단을 창단하고, 직접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민교 선교사의 숨은 노력이 컸다. 이 선교사는 우연하게 이희아 씨와 전강석씨가 함께 쓴 '희아와 농부아저씨의 통일이야기'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책 속에서 이희아 씨의 통일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호주 밀알선교단 단장인 정영화 목사와 의논하여 갑자기 초청하게 된 것이다.
 
이희아 씨는 오래 전부터 꿈꾸던 북한 장애우를 만나기 위하여 한걸음에 달려 왔다. 그녀는 2014년 11월 28일 어머니인 우갑선 씨와 함께 시드니를 찾았다. 도착하는 날부터 출국하는 12월 15일까지 시드니한인회, 교회, 올림픽 경기장 등 다양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간증과 연주로 은혜를 끼치고, 통일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 통일의 꽃,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가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통일의 비전에 대한 소박한 꿈을 전했다.     © 크리스찬리뷰

희망을 연주하는 희망 천사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호주 구세군 회관'이다. 그녀는 2014년 12월 4일 저녁 시드니주안교회 시티 집회에 초청을 받았다. 그녀는 무릎으로 걸어서 무대에 올랐다. 2년 전 이곳에서 만난 닉 부이치치’(Nick Vujicic)가 생각 났다.
 
닉은 양팔과 다리가 없는 선천성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닉은 태어날 때까지 장애가 있는 줄 몰랐다. 닉의 어머니는 사지없는 아이를 보고 오열을 하였다. 그런데 희아 씨의 경우는 달랐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는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불행을 염려하여 낙태를 권했지만, 어머니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임을 확신하고 아이를 낳았다.
 
어머니는 당시의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두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너무 기뻐서 그녀의 이름을 희아(喜芽)라고 지었습니다." '기쁨의 싹'이라는 뜻이다. 그녀의 두 손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어머니의 눈에는 아름다운 튤립과 같은 손이었다. 그녀는 지금 사람들이 우려했던 '불행한 삶'이 아닌,     '기쁨의 싹'이 되어 세상에 희망을 전달하여 주고 있다.

▲ 자신 약점을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강점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이희아 씨가 연주를 위해 무대 위로 걸어 나오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녀의 연주를 듣기 전까지 사실 나는 많은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10 손가락으로 연주해야 곡을 4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산술적으로만 생각해도 일반 연주자보다 2배 반의 속도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동시에 눌러야 하는 음도 있을 터인데!' 내 마음속의 의심은 그녀의 연주가 시작되면서 탄성으로 바뀌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칠 때, 손가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움직였다. 그녀는 혼신의 열정으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상의 선율'을 만들어 냈다. 그녀의 연주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는 음악이었다.
 
그녀는 이 곡을 치기 위하여 5년 반의 연습을 했다. 하루에 10시간씩 5년 반 동안 '즉흥환상곡'에 집중했던 것이다. 연주를 마쳤을 때 구세군회관은 환희와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그녀의 어머니인 우갑선 씨가 무대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장애를 가진 딸을 어떻게 구김살 없이 잘 키웠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내가 키운 것이 아니라 희아는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피아노는 희아가 연필을 쥘 수가 없어서 손가락에 힘을 키우기 위하여 가르쳤다고 한다.
 

이희아 씨의 간증을 들으며 두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무한감사'와 '절대긍정'이다. 그녀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부정도 긍정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손이 '이티'와 같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티'라고 놀리면, 그녀는 웃으며 "나는 '희아'니까, '희티'라고 불러 주세요"라고 한다.
 
미국 식당에서 킹크랩을 먹을 때 집게 다리가 자기 손과 비슷하다며, 자기 조상이라고 하여 그곳을 웃음바다를 만든 적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강점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 시드니한인회가 주최한 북한농아축구단 초청환영 만찬에서 북한 선수들을 위해 이희아 씨와 비올리스트 신종호 교수가 '반갑습니다''조국찬가'를 연주했다. 왼쪽부터 기타 정소리(교민) 듀엣 리영조(조선농아축구단 임원), 이미소(교민), 이희아, 신종호 교수.     © 크리스찬리뷰
 
통일을 연주하는 통일 전도사
 
두 번째 만남은 그녀가 머물고 있는 노스 라이드(North Ryde)에 있는 메리오트(Marriott) 호텔이다. 12월 8일 화요일 저녁 6시이다. 10분 전에 도착을 하여 기다리니 어머니와 함께 로비로 나왔다. 그녀는 무릎이 다리의 역할을 한다. 먼 곳은 가지 못하지만 웬만한 거리는 혼자 걸을 수 있다. 원래 무릎 아래의 다리가 있었으나 성장이 되지 않아 절단했다. 의족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피아노의 페달을 정확하게 밟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피아노를 칠 때 페달을 밟을 수 있는 특수장치를 가지고 다닌다. 그녀의 키는 103cm이다.


희아 씨의 가슴에는 통일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다. 통일에 대한 꿈은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아버지 이운봉씨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무장공비 소탕작전 때 투입되어,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아버지는 남파공작원 때문에 불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남북한이 함께 사는 길은 통일이라고 희아 씨에게 가르쳤다. 희아 씨 자신도 역사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가 5살 때 동서독이 통일 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 통일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무너진 장벽 위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통일되었다고 기쁨에 겨워 두 손을 번쩍 드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 후 세월이 흘러서 우리나라가 세계유일의 분단 국가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나라도 언젠가 독일과 같이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후 이희아 씨가 엄마와 함께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여 어머니 우병선 씨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크리스찬리뷰
 
그녀의 이런 꿈을 구체화시킨 사건이 있었다. 1996년 일본의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해외 공연을 갔다. 그녀는 '조선학교'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축구 선수 정대세 씨 어머니도 만났다. 조선학교는 일본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조선인을 키우는 학교이다. 여기서 조선이라고 하는 것은 남북한이 갈라지기 전인 1945년 전의 우리나라를 말한다. 일본으로부터 정식 학교로 인정 받지 못하여,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힘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보고 희아씨는 많은 감동을 받았다. 같은 민족이 서로에게 총 뿌리를 겨누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김구 할아버지다. 그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힘쓰고 애썼던  분이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세 가지 소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라고 대답할 것이다.
 
희아 씨의 꿈은 무엇입니까? "통일입니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말로만 아니라 진짜 저는 북한 사람에게 시집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김구 할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중근 의사, 유관순 누나 등을 언급하였다.
 
"그분들이 이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것은 두 나라가 아닌 한 나라를 위해서이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하늘에서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얼마나 통탄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북한농아축구선수단 환영 만찬에서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를 소개하는 북한농아축구단 감독 이민교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희아와 농부아저씨의 통일이야기

그녀는 2014년 9월에 책을 발간했다. '희아와 농부아저씨의 통일 이야기', 경통협(경남통일농업협력회) 공동대표인 전강석 씨와 홍보대사인 이희아 씨가 함께 쓴 글이다.
 
정광석 씨는 지금 평양의 장교리에 콩우유 공장을 만들어 북한 아이들에게 콩과 우유를 공급하고 있다. 그는 원래 북한에 학교를 세우려고 했다. 막상 그곳의 아이들을 만나보니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깡말라 있었고, 키도 작고, 얼굴에 온통 마른 버짐이 난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학교가 아니라 먹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콩우유 공장을 세워서 아이들을 먹이게 된 것이다. 희아 씨는 농부아저씨에게 페달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자전거가 움직이려면 페달을 밟아야 하고, 피아노가 음을 잘 내려면 페달을 밟아야 하는 것처럼, 희아 씨는 경통협의 활동이 활발해 질 수 있는 페달이 되겠다고 했다.

▲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는 ‘희아와 농부 아저씨의 통일 이야기。ッ 책자를 지난 해 9월 발간했다.     © 이희아
 
경통협은 통일 딸기도 재배를 한다. 모종을 북한에서 들여와 남한에서 생산하는 딸기이다. 경상남도는 날씨가 따뜻하여 딸기 모종을 만들기에 기후가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모종을 북한에서 가지고와서 남한에서 재배를 하기에 '통일 딸기'라는 말을 붙였다.
 
2010년 통일 딸기 사업은 잠시 중단되었어요. 남과 북의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3년이 지난 2014년, 통일 딸기는 다시금 남한과 북한을 잇는 열매로 자라나기 시작했어요. 희아 씨도 '통일딸기'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통일딸기'라는 시까지 썼다.
 
<통일 딸기>
                                                                 

“뜨거운 남녘에 사는 딸기 모종이 서늘한 북녘으로 시집을 가네요. 딸기 모종이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호기심 많은 표정으로 북에서 만나게 될 신랑 흙을 생각하며 두근두근 뛰는 가슴 안고 시집갈 가마 박스 안에 오르네요. 콧노래를 부르며 가마 차는 북으로 달려요. 어느덧 도착한 북에서 만난 신랑 농촌 흙이 어서 오라 반겨요. 앳된 남녘 모종은 발그레한 표정으로 북의 신랑 흙 품속으로 안기네요.
 
북에서의 잊지 못할 달콤한 신혼 밤에 서로를 감싸 안으며 둘은 마냥 기뻐하네요. 우리가 만나서 아름답게 서로를 이해하고 가꾸면 복덩이 아기 모종이 많이 태어나지요. 시집간 신부는 튼튼한 아기 모종 안고 업고 남녘 친정으로 금의환향하네요. 드디어 우리 민족 설날 되어 통일 딸기 열렸네요. 빨갛게 어여쁜 통일 딸기 세상에서 가장 맛나요. 한반도에 맺은 통일 딸기 평화 통일 비추네요. 새해 맞은 경남 모종 또다시 북녘의 낭군을 그리워하네요. 올해는 청마 타고 하루속히 낭군 품으로 돌아가고파요. 마침내 딸기 부부 재회하고 하나 되어 농촌 통일 이루네요.”

▲ 이희아 씨 모친 우갑선 씨가 시티 주안교회 목요찬양집회에서 간증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북한 대 호주 농아 친선 축구 경기
 
세 번째 만남은 시드니 올림픽 경기장이었다. '북한 대 호주' 농아 친선축구 경기가 12월 13일 토요일 밤 8시에 열렸다. 호주 농아 축구단은 35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북한농아축구단'은 2013년에 창단되었다. 호주밀알장애인선교단의 이사장인 서영준 목사의 개회사에 이어서, 호주 농아 축구협회 회장인 '레이몬드 유난'의 환영사가 있었다.
 
"이 게임이 있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 주신 모든 단체들과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역사적인 축구 게임이 이루어 질 수 있게 되어서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양쪽 팀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라며, 잘하는 팀이 이기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북한 농아축구단 정현 단장은 "초청하여 주신 것에 감사하고, 호주와 북한의 장애인 교류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전체적인 진행은 영어와 한국어 뿐 아니라 두 명의 수화통역사가 농아들을 위하여 수고를 했다.

▲ 시드니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에슬레틱센터에서 열린 북한 대 호주 농아축구대회에서 열렬히 음원하는 이희아 씨. 그녀는 하프타임에 서영준 이사     ©크리스찬리뷰
 
이날 호주 농아들도 다수 참석했다. 바로 내 뒤에 앉아 있었던 사람에게 인사하니 그는 나에게 수화로 대답했다. 양국 국가 연주가 있은 후 곧 바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게임을 관전했지만, 역시나 경기 수준은 창단 연수만큼 현저한 실력 차이가 있었다. 결과는 4대 1이었다. 북한은 그나마 페널티 킥으로 얻은 한 골 덕분에 겨우 영패를 면했다.
 
이날도 하프타임 시간에 이희아 씨는 베토벤의 '환희'를 치며 '희망을 연주'하였다. 게임을 마친 후 호주에 살고 있는 조선족에게 관전 소감을 물어 보았다.
 
"눈물이 납네다. 먼 나라에 와서 게임을 잘 해 주었으면 좋았는데.... 연습도 잘 하지 못했을 것이고, 먹지 못해서 그런지 체력이 약해서 자꾸 넘어지는 것을 보니 눈물이 납네다."
 
▲ 북한 주장 박현철과 호주 주장 제이미 플레나간이 경기에 앞서 선물을 교환했다.     © 크리스찬리뷰

토요일 밤 8시에 있는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5천석 규모의 관중석은 절반 이상이나 가득찼다. 북과 꽹과리 등을 동원한 호주 교민들의 응원은 월드컵 4강 신화 때를 연상케 하였다. 하지만 정작 경기 중인 선수들은 우레와 같은 응원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불현듯 베토벤 생각이 났다. 베토벤은 그의 교향곡 제 9번, '합창'을 발표할 때는 이미 귀머거리였다. 지휘자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치명적 결점이다. 하지만 베토벤은 지휘봉을 들었다. 연주가 끝나자 청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청중을 등뒤로 하고 있던 그는 듣지를 못했다. 한 성악가가 베토벤의 손을 잡고 청중으로 향하게 하자, 그제서야 열광하는 청중들을 알아보고 인사하였다.
 
▲ 북한 대 호주 농아축구경기에서 북한은 4:1로 패했으나 후반 6분 만에 11번 김효일 선수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1점을 얻었다. 북한 선수들이 김효일 선수를 둘러 싸고 축하의 세레머니를 펼쳤다.     © 크리스찬리뷰

게임이 끝나고 북한 선수 팀은 관중석을 돌면서 인사를 했다. 주한 호주대사를 역임했던 '맥 윌리엄스'(Mack Williams)씨가 게임이 성사되기까지 수고한 여러 사람에게 감사패를 수여했고, 각 팀의 수훈선수 1 명씩을 선정하여 시상했다.
 
▲ 우수선수로 선발된 북한팀의 김용진 선수가 전 주한 호주대사를 역임한 맥 윌리엄스 씨로부터 트로피을 받았다.     ©크리스찬리뷰
 
이번 북한농아 축구단 호주 방문은 2008년 1월 캔버라의 북한대사관이 철수한 후 호주 정부가 북한 여권 소지자에게 처음으로 비자를 발급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마지막까지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이 있었으나, 전격적으로 북한 선수단 21명의 방문을 허용함으로 향후 북한과 호주의 스포츠 및 문화 교류 등의 관계 개선에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 열정적으로 피아노 연주하는 이희아 씨.     © 크리스찬리뷰
 
나가면서
 
올해는 분단 7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목놓아 외쳤건만 아직도 대한민국은 허리가 단절된 장애 국가이다. 이희아 씨는 '분단 70년'이 '통일 원년'이 되는 꿈을 꾸고 있다. "제겐 오랜 꿈이 있어요.  DMZ, 남한과 북한 사이에 있는 비무장 지대에서 연주회를 가지는 거예요. 그곳엔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없어요."
 
그녀는 올해 베를린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을 연주할 예정이다.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에서 온, 한국인의 '통일의 열정'을 세계인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몇 년 전 만났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맹인이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마지막 유작은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를 쓴 강영우 박사이다.
 
▲ 무릎이 발인 이희아씨의 키는 103cm에 불과하다. 그녀는 무릎 밑에 다리가 있었으나 성장하지 않아 절단했다.     © 크리스찬리뷰

사지가 없어서 모든 행동에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 '한계 없는 인생'(Life without Limits)을 쓴 닉부이치 (Nick Vujicic)이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장애를 축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이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편집위원(영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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