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밀알 이민교 선교사 (상)

축구공 하나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12/29 [11:11]
▲ 북한농아축구팀과 호주농아축구팀의 친선경기를 주선한 호주 밀알선교단 단장 정영화 목사(왼쪽)와 북한농아축구팀 감독 이민교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월진월향!(越陣越香: 시간이 지날수록 맛과 향이 좋아진다!).
 
이민교 선교사(남북체육교류협회 장애인체육위원회 위원장, 북녘밀알 대표)를 한마디로 표현한 말 같기도 하다. 거의 3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또 다른 비전과 꿈으로 더욱 진한 맛과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3년 전까진 지독한 모슬렘 국가인 우즈베키스탄(1997~2004), 카자흐스탄(2005~현재)에서 농아축구팀 감독으로 아시안게임에 4회, 올림픽 그리고 월드컵에 출전하며 축구공 하나로도 선교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3년이 지난 오늘엔 축구공 하나가 국경을 넘어 남북이 하나 될 수 있다는 무한가능에 무한도전을 보는 멋과 향이다.
 
그가 이번에는 북한농아축구팀의 감독으로서 호주 선수들과의 친선경기(12월 13일, 토)를 위해 방호했다. 이 선교사 부부와 정영화 호주밀알 대표, 최진우 집사( 새순교회 북한선교위원장), 그리고 교민 2세로서 ABC PD로 일하는 정신애 씨와 함께 지난해 11월 25일 저녁, 열린문교회 선교관에서 만났다.


▲ 북한농아축구단 방호에 앞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이민교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38선, 허리가 마비된 38년의 조국

 
- 이 선교사님의 역동적인 사역 모습이 완전히 ‘동에 번쩍, 서에 번쩍’입니다. 우벡에서 카작으로 다시 북한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사역하기가 쉽지 않을 테인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2012년 8월. 런던장애인올림픽에 와일드카드(wild card)로 출전한 북한 장애인 선수 임주성의 손짓을 보았습니다. 솔직히 그때까지는 ‘통일’, ‘북한사역’이런 단어들과는 관계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임주성의 손짓을 통해 북한 농아축구팀 창단이 필요하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4개월 후, 12월에 그 음성에 순종하여 북한을 다녀온 것이 북한 장애인 사역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한반도’, ‘38선’, ‘남과 북’ 이런 표현들과 함께 대한민국이 저에게는 허리가 잘린 장애인 국가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 땅 한반도가 38선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갈리어 허리 신경이 마비된 장애인 국가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2012년 12월 3일, 평양의 해방산 호텔에서 주님은 요한복음 5장의 말씀과 함께 저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와 38선의 반쪽짜리 땅이 오버랩(overlap)되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 땅이 허리 신경의 마비로 인하여 위쪽(북한)과 아래쪽(남한)이 소통이 되지 않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농아인 국가임을 온몸으로 체휼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알레고리(Allegory)적 해석이겠지만, 출애굽한 백성이 가나안에 이르기 전 가데스바네아에 이른 백성들은 12명의 정탐꾼에서도 38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이 정탐꾼들의 극단적인 보고에 하나님은 극단적인 결과를 보여주셨지요.
 
그 땅에 철병거가 있어도 거인 같은 아낙 자손들이 있어도 이제껏 능력을 보여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 땅을 취할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믿음대로 가나안에 입성합니다. 나머지 10명의 정탐꾼은 하나님보다 철병거와 가나안 족속의 힘과 문화가 더 크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그들의 믿음 없음을 응징이라도 하듯 38년을 가데스바네아 광야에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 사람의 힘을 의지했던 10사람 때문에 38년의 광야생활이 된 것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 북한을 방문한 이민교 선교사(왼쪽 2번째)가 북한의 탁구 영웅 리분희 조선장애자체육협회 서기장을 만났다.            ©이민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통일은 하나님의 뜻인가? 우리가 바라는 단일국가의 형태로 위쪽(북한)과 아래쪽(남한)이 하나 되는 통일이 하나님의 뜻인가?’할 때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의심 없이 한민족의 통일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 전제 위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모두가 하나 되자고 외치지만 분단 조국의 통일의 꿈은 그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문제는 통일을 외치면 외칠수록 통일은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마치 별거, 혹은 이혼한 상태에 있는 부부가 다시 합쳐야만 한다는 당위만 가지고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둘이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데 무조건 합치려고만 하니 갈등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지요. 여기에 양가의 이웃식구들(미국 •중국•일본•러시아)마저 합세하니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그런 가운데서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대박’을 들고 나온 것이 통일의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 북한 농아축구팀과 파이팅을 외치는 이민교 선교사와 정영화 단장.     © 이민교

체제보다 민족애, 형제애의 회복

 
- 통일의 큰 그림도 그리고 계시군요?
 
저는 통일을 두 가지로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회 문화적 통일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 제도적 통일입니다. 전자는 형제애의 회복이고, 후자는 단일국가로의 통일입니다.
 
흔히 통일이라고 말할 때 후자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전자는 상호 존중과 공존을 목표로 한다면 후자는 통일국가의 설립을 목표로 합니다.
 
그동안 통일 논의가 하나의 통일국가의 설립을 목표로 진행되었기에 필연적으로 통일국가에서 어떤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되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냐 아니면 공산주의 체제냐의 체제 선택의 문제로 귀결되는 바람에 통일의 길은 더 요원해졌지요. 둘 중 하나가 굴복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런 점 때문에 남북한 모두 그 통일 방안에 과도기적 상황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도 그렇고, 남한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도 그렇습니다. 남한의 통일방안은 ‘남북연합’이라는 형태의 2체제 2정부 형태의 과도기적 단계를 상정합니다.

▲ 북한 농아 축구팀 이민교 감독     © 크리스찬리뷰
 
과도기적 상태를 거친 연후 1국가 1체제로 통일을 완성합니다. 문제는 내심으로는 그 최종의 체제가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이고,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라는 것을 감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태의 통일 논의는 항상 상대방의 흑심을 경계할 수밖에 없지요. 사회 문화적 통합을 채 이루기도 전부터 체제경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을 말할 때 후자의 의미인 하나의 통일국가 상을 상정하지 않기를 주문하고 싶습니다. 통일은 ‘형제애의 회복’으로 충분합니다. 오히려 이런 자세가 실제적으로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체제 소모전을 그치고 실질적인 실용통일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 통일이 ‘형제애의 회복’ 정도로 충분하다면 너무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성경에도 ‘한 민족의 형제애의 회복’의 통일은 증언하고 있지만, ‘한 국가 형태의 민족 통일’은 성경적 증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져, 남북 분단 시대가 209년간 계속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분열기간 동안 어느 왕이나 백성, 또는 예언자가 나타나 이스라엘의 통일을 외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기에 하나가 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전혀 없었고, 하나님도 통일의 노력을 막으셨습니다. 열 지파를 중심으로 북 이스라엘이 떨어져 나갔을 때, 남 유다 르호보암은 군사 18만을 일으켜 북 왕국을 치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스마야가 이들을 만류합니다. 형제 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분열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솔로몬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물론 이후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혀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작은 국지전이 있었지만 이는 통일 전쟁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문제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의미있게 볼 수도 있는 아합 가문과 유다 가문이 통혼을 하기도 합니다. 남 왕국과 북 왕국은 형제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는 것보다는 그들이 형제 관계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북 왕국이 망한 후 북 왕국의 지도층들은 앗수르의 식민정책에 의하여 다른 민족들이 사는 지역으로 강제 이주합니다.
 
남은 지도층의 일부는 남 유다 왕국으로 흡수되었고, 사마리아 지역에는 가난한 이스라엘 민중들만 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타지역에서 온 이민족이 정착하면서 혼합 민족이 됩니다. 남 유다도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고 그 지도층들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 시드니한인회가 주최한 북한농아축구단 환영만찬 행사가지난 12월 10일 한인회관에서 열려 교민들로 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 크리스찬리뷰
 
BC 538년에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공동체는 BC 515년에 성전을 건축하고, BC 445년에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하던 세력들이 성전 공동체에 함께 참여할 것을 요구하지만 귀환한 배타적 유대 공동체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유구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님의 중요 관심사는 제도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민족 간의 심리적 경계선을 허무는 형제애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통일의 비전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에스겔의 환상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지역에서 예언한 선지자로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남북 왕조를 하나로 만들 것을 약속하신다고 합니다.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겔 37:22)고 하는데, 이는 분명히 1민족 1체제의 통일 왕국을 내다보는 비전입니다.
 
만약 이 비전이 남북 분열기에 보여주신 환상이라면 통일의 비전이겠지만, 북 왕국이 망한지 약 150년 후의 비전이란 점에서 통일보다는 회복에 의미가 있습니다. 분열이 민족의 역량을 분산시키고 열방 가운데 부끄러운 모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시 회복될 나라는 갈라지지 않은 다윗시대와 같은 강성 대국을 이룰 것이라는 환상이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관심은 체제의 하나됨보다 우선하여 형제애의 회복에 있습니다. 그리고 체제의 통일이 주어진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상호 간의 불신을 해소하고 형제애적 차원에서 돕는 일입니다. 형제애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통일론은 단일국가 상을 상정하는 통일론이 가지고 있는 저항과 관념성을 피하고 통일에 실제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통일론입니다. 이렇게 형제애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통일에 가장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 참 이상론적이고,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 동서독의 통일 과정이 좋은 예입니다. 1972 체결된 Basic Treaty (German: Grund- lagenvertrag)를 통해 동서 교류의 토대를 놓습니다. 그 토대 위에 1976년도에는 동서독의 우편물 교환 관련 협약(Abkommen über Post-und Fernmeldewesen)을 체결하지요. 그 바탕 위에 다양한 동서교류를 실현합니다. 서독은 동방정책을 추진했지만 ‘통일’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브란트 수상은 1민족 2국가 체제를 받아들였다.
 
통일은 먼 장래에 이루어질 일이며, 일단은 동독 국민의 인간의 존엄성과 내면생활의 문제에만 집중했습니다. 서독은 1972년부터 1989년 통일이 될 때까지 약 62조 6,700억 원의 현금과 물자로 지원했습니다.
 
민간 부분에서는 44조 8,800억원이 지원되었습니다. 1987년 한 해 동안 150만 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했으며, 동독으로 7,500만 통의 편지와 2,400만 건의 소포가, 서독으로는 9,500만 통의 편지와 900만 건의 소포가 전달되었습니다. 이미 70% 이상의 동독 주민들이 서독 TV를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서독의 동방정책은 ‘형제애의 회복’에 중심을 둔 인도주의, 인권회복, 관계정상화 정책이었습니다. 형제애가 회복된 후의 통일은 쉬운 길이 되었습니다.

▲ : 지난 12월 13일 시드니올림픽공원 에슬레틱센터에서 북한 대 호주 농아축구경기가 열려 호주팀이 4:1로 승리했다. 북한은 후반 6분 만에 11번 김효일 선수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1점을 얻었다.     © 크리스찬리뷰
 
이데올로기의 초극

 
- 독일과 달리 한국의 경우 넘어야 할 벽이 한둘이 아닌데요.
 
먼저 한국 교회는 형제애의 회복에 관심을 두기보다 남북 이념 논쟁에 오히려 더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목회자들이 북한 정권과 북한 동포를 구분합니다. 북한 동포는 도와야 하지만 북한 정권은 박멸해야 할 사탄의 무리들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현 북한 체제를 국민과 정부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은 허상입니다. 북한은 안으로는 주체사상과 밖으로는 반미 의식으로 공고하게 하나로 뭉친 집단입니다. 설사 북한 동포와 정권을 구분할지라도 정권에 의해서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데 이를 각각 취급한다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 인식입니다. 북한에 대한 이런 인식으로는 통일은 오로지 흡수통일이나 전쟁에 의한 통일밖에 없다고 생각하지요.
 
또 북한 정권을 ‘변하지 않는 사탄의 무리’로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북한도 변하고 있습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라는 공식 기독교 단체가 있고, 스스로 북한 내에 12,000명의 신자와 2개의 공식 교회, 520개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북한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오픈도어즈'는, 비록 신뢰성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북한 내에 540개의 지하교회가 있고, 약 50만의 교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용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가 있지만 현상적으로 북한의 종교에 대한 태도가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과격한 유물론적 비판에서 한발 물러나 종교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탄압이 여전하지만 북한을 사탄의 정권으로 규정하면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도 바뀌고 정권도 바뀌고 이념도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한국교회는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태도를 유연하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북한의 조선 그리스도인 연맹 소속의 목사들이 참여한 세계교회 34개국 출신의 교회지도자들이 스위스의 제네바 인근에 모여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진전시킬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 <다음호 계속>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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