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나의 목회지입니다!

34년간 최장수 NSW 상원의원 기독민주당 프레드 나일 총재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2/23 [14:06]
  ▲   © 크리스찬리뷰 3월호 표지

그는 시드니의 왕십리(Kings Cross)에서 태어났다. 시드니에는 한국의 '지역 이름'과 비슷한 곳이 있다. Banks Town은 은행동, Ashfield는 재동, Blacktown은 내가 자란 흑석동이다.
 
사실 왕십리의 한자어는 임금왕(王)이 아닌 갈왕(往)이다. 1394년 조선왕조가 천도를 위하여 지형을 찾고 있을 때 한 늙은이가 소를 타고 지나다가 채찍을 들어 소를 때리며 “이 소 미련하기는 꼭 무학 같구나.  바른 곳을 버리고 엉뚱한 곳을 보다니”라고 중얼거리며 갔다.
 
이에 길을 가던 무학대사는 깜짝 놀라 그 늙은이에게 예를 갖추어 물었다. 늙은이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십리를 더 가라(往十里)” 하므로 그 말을 쫓아 현재의 경복궁 자리에 궁궐터를 잡았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 시드니성시화대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프레드 나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의 Kings Cross는 시드니 중심에 위치한 우범지대이다. 스트립쇼 클럽, 도박장, 카지노, 사창가, 매춘, 마약의 거대한 밀매 등의 중심지이다. 프레드 나일(Fred Nile) 목사는 1934년 9월 15일 킹스 크로스의 택시 운전기사와 레스토랑 종업원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패의 중심도시'인 'Kings Cross'에 태어나, ‘왕의 십자가’(King’s Cross)를 지고 국회로 입성할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내 인생의 초점이 그렇게 맞추어 지리라고는 저 자신도 예측을 못했습니다. 택시 운전기사의 아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마도 예레미야 1장 5절 말씀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는 말씀이 내게도 적용된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Kings Cross가 신앙의 중심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왕의 왕이요, 주의 주로 섬기는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   1981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34년째 최장수 상원의원인 기독민주당 총재 프레드 나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첫 번째 선택 - 이사

나일 목사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삶의 방향을 바꾼 여러 번의 선택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첫 번째 선택은 가족이 리비스비(Revesby)로 이사한 것 때문에 일어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이사로 인해 많은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리비스비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를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는 교회에 관심이 없었고,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분은 아니었지만 아주 강한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나일 목사는 교회나 종교에 관하여 전혀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영화관을 갔고, 사교 댄스를 배우기 위해 매스콧 예술학교 댄스 클럽에도 가입을 했다. 종교란 그에게 따분하고 인생을 마음대로 즐기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리비스비 회중교회에서 예쁜 여학생들이 테니스를 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교회 테니스 클럽에 가입을 하게 된다.
 
테니스 회원들은 반드시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을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참석하게 된 주일 저녁예배에서 그는 일생일대의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교회 담임목사는 억센 농부 출신으로 결코 말을 돌리거나 부드럽게 표현하지 않았다.
 
▲ 본지와 인터뷰 중인 프레드 나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예수를 믿지 않으면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내려 다 심판할 것이라고 설교 때마다 엄포를 놓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도를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을 썼다. 매주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도 그는 참았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테니스를 치려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바틀 목사의 설교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이제 돌이켜 보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약속하신 대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나에게 책망하시기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큰 죄는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프레드는 어느 주일 저녁 설교 때 성령의 권고함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좋아요, 예수님. 당신을 믿겠습니다. 그래요, 나의 구주가 되셔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바틀 목사는 늘 해오던 대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라고 했다. 그날 밤 프레드는 손을 번쩍 들었고, 바틀 목사는 잃은 양을 찾은 것 같이 기뻐했다.
 
1951년 10월 어느 날 밤, 그 중대한 결정을 내린 후 프레드는 교회 청년회원으로 정식 등록을 했고 주일 성경공부반에 참석하고 성가대에도 가입했다. 특별히 '크리스찬 인데버'(Christian Endeavor)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  파라마타 타운홀에서 열린 기독민주당 전당대회 (2011.3.6)   © 크리스찬리뷰

두 번째 선택 - 결혼

프레드는 테니스를 잘 쳐서 테니스 지역 시합에 나갔다. 시합이 있을 때마다 여자 회원들이 응원하러 왔다. 아일랜드 출신의 '일레인 클리어리'는 테니스 클럽 1년 후배이다. 프레드보다 2살 아래였다. 그녀는 가까이 지내던 여자 친구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던 중 다른 여자들보다 그녀와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얼마 후 둘은 연인이 되어 예배를 드릴 때도 같이 앉았을 뿐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일레인 가족도 조부모를 제외하고는 교회를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자 헌신적인 기독교인이 되었다.
 
가끔 프레드는 농담으로 그녀는 순수하고 순결하게 생긴 사랑스러운 수녀와 같다고 했다.  1952년 프레드는 인생의 두 번째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일레인과의 결혼이다. 그 후 3년이 지나고 1955년 9월 프레드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 마침내 약혼을 하게 된다. 그때 프레드의 나이는 21살, 일레인은 19살이었다. 3년 후인 1958년에 결혼을 하게 된다.
 
후일에 그녀도 기독민주당의 상원의원으로 당선이 되어 나일 목사의 정치 동역자가 되기도 했다.
 
1992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NSW 국회에 방문 했을 때이다. 나일 목사 부부와 인사를 하면서 "정치 생활을 하며 의견을 달리했던 적은 없었나요"라고 물었다.  

일레인 여사는 재치 있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적이 없지요. 우리는 모든 것을 같이 해왔습니다. 앉는 것도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것도 같이, 음식도 같이 먹고, 잠까지 같이 자는 것은 우리 부부뿐이랍니다."  
▲     © 크리스찬리뷰

세 번째 선택 - 헌신
 
나일 목사는 그녀를 잠언 18장 22절에 비유하였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일레인은 사랑스럽고, 훌륭하며, 봉사적인 아내였다. 또한 상냥하고, 자애로우며, 헌신적인 어머니이며 할머니였다."
약혼한 그날 프레드는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드리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약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레인과 프레드는 브리즈번에서 열린  '크리스찬 인데버' 전국 대회에 다른 300명의 NSW 주 대표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그 대회의 주제는 '이 결정적인 시간에' 였다.
 
아침마다 성경공부와 그룹 토의가 있었고,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브리즈번과 주변 농촌지역을 돌아 보았다. 저녁에는 타운홀에 모두가 함께 모여 뜨거운 집회를 열었다. 초청 강사는 시드니에서 온 '존 리들리' 목사였다. 그는 부흥사로 '아서 스테이스'(Arthur Stace)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아서 스테이스는 시드니의 거리에 'Eternity(영원)'라는 단어를 쓰고 다닌 사람으로 유명하다. 존 리들리 목사는 그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다.
 
집회 중 프레드는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때가 나에게 결정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남은 인생을 결정하게 될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너무 강하게 느끼게 되었고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는 너희 인생을 그 어떤 조건이나 제한 없이 마치 백지 수표처럼 나를 위해 내어 놓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솔직히 말씀드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위해 죽기를 원하신다면 나를 정말 힘들게 외로운 선교지로 보내세요. 그러면 온전히 당신을 위해 죽게 되겠지요."
 
당시를 되돌아보면서 그의 기도가 후일에 정말 희한한 곳으로 인도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프레드는 사이먼 바틀 목사의 자문을 받은 후 '멜버른 바이블 인스티튜트'(MBI)에 입학 원서를 냈다. MBI는 신학과정이 2년으로 기숙사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근거한 유수한 신학교로 교육 수준이 높았고 규율도 엄했다.
 
프레드는 1956년 멜버른으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쳤다. MBI를 졸업할 때까지도 하나님께서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인도를 받지 못하여서 공부를 더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시드니로 돌아와 시드니 대학의 세인트 앤드류 홀에 있었던 '연합 신학 학부'(United Faculty of Theology)에서 5년간의 공부를 더하게 되었다. 2년간은 신학대학교 캠퍼스 내에서 지내면서 공부만 하게 되었고, 나머지 3년은 캠퍼스 밖에서 살면서 신학생 전도사로 일과 공부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는 시드니 남쪽 허스트빌 근처에 있던 백슬리 교회의 담임 전도사로 초빙을 받았다. 백슬리 교회는 복음주의가 강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관대하고 마음씨 좋은 교인들이 있었고, 여러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있었다.
 
1963년 11월 졸업시험을 마치자 여러 교회에서 청빙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몸담고 있는 백슬리 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여 1964년 1월 3일 그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     © 크리스찬리뷰

네 번째 선택 - 교회 밖으로
 
프레드는 백슬리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하리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오랫 동안 '크리스천 인데버'(Christian Endeavor)에 관련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1964년 수천 명의 대표들이 모인 시드니  '세계 크리스찬 인데버'(Christian Endeavor) 컨벤션의 준비 작업에 관여하여 일을 했다.
 
라쉬카터즈 스타디움을 빌려 저녁에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1964년 크리스천 인데버 전국 감독이었던 노먼 펠이씨는 '라이튼 포즈 크루세이드'에서 일하기 위해 사임하면서, 놀랍게도 프레드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프레드는 이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그 직책을 받아들였다. 그 당시 '크리스찬 인데버'(Christian Endeavour) 운동은 3천 개의 소그룹과 회원이 5만 명으로 카톨릭 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단이 참여하고 있었다.
 
'크리스찬 인데버'(Christian Endeavour) 감독이 되면서 그는 백슬리 교회를 사임해야만 했다. 그곳에서의 사역은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위해 또 다른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1967년 2월 어느 날, 아머데일의 성공회 주교 클라이브 컬에게서 상의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컬 주교는 1968년 시드니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위원장으로 있었다. 컬 주교는 "전도 대회 이사회는 당신을 1968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전임 준비 책임자로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를 수락하시면 전도대회의 준비, 인원 동원, 광고, 상담, 대회 후의 신앙 지도 등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됩니다. 상담 요원들을 훈련시킬 전문가들은 미국에서 올 예정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그의 십대 시절의 영웅이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굳게 믿고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는 '크리스찬 인데버'(Christian Endeavor)를 사임하였지만 '명예 감독 회장'으로 추대 받았다. 하나님은 전도대회를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축복하셨다. 아홉 번의 집회에 41만 7천 명이, 주일에 열렸던 마지막 집회에만 10만 이상이 참석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도 22,420명이나 되었다. 그 중 80% 이상이 25세 이하였다.
 
▲ 마디그라 반대 집회에 지지자들과 함께 한 프레드 나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1968년 5월 전도 대회 이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모두 마무리되자 하나님은 또 다른 길로 그를 인도하셨다. 회중교단 전도국에서 국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리며, 1968년 6월 17일 버우드에 있는 회중교회에서 취임예배를 드렸다.
 
그가 맡았던 사역 중 하나는 각 교회를 방문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공간’이라고 불리던 옥외 전도대회를 갖는 것이었다.  버우드 회중교회 뜰에서 브로드 체인지와 같은 청년 음악 밴드를 초청하거나 영화를 이용한 옥외 전도 대회를 수차례 개최하여 대규모 기독교인 축제도 열었다. 심지어는 시드니 중심가에 있는 피트 스트리트 회중교회 계단에서 전도 대회를 열기도 했다.
 
1970년 1월 그는 뜻하지 않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감리교, 장로교, 회중교의 지도자들이 함께한  자리에 초청을 받았다. 그들이 함께 모인 이유는 초교파적으로 1970-1971년 2년 동안 NSW 주 내의 주요 도시를 새롭게 하려는 선교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담당자인 워커 목사는 환영 인사를 한 후 나일 목사를 왜 초청했는지 설명했다.
 
"목사님께서 NSW주 전도대회 총책임을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중 교단이 동의를 해준다면 감리교단 전도국에서 일하면서 감리교단에서 사례비를 받고 글레이즈빌 목사 사택에서 사시면 됩니다."
 
일레인과 함께 기도한 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레드의 주역할은 전도대회가 열릴 지역을 사전에 방문하여 대회 조직을 만들고 목사들에게 설명을 하고 언론 기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 선교 대회는 1970년 11월 파라마타에서 시작하여 1971년 9월 시드니 전도대회로 끝났다.
 
그 외 60회의 지역 전도대회도 있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젊은이들이 민감하게 반응을 하였다. 하나님의 섭리로 '예수 혁명'이 호주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 시드니성시화대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프레드 나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다섯  번째 선택 - 빛의 축제
 
1970년대 초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이름은 '빛의 축제'(Festival of Light)였는데 우리 사회를 수렁 속에서 끌어 들어가는 흑암의 세력과 대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독교인들이 영감을 받고 용기를 얻어 실천하게 된 운동이다.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아들로서 어둡고 사악하며 가치가 없는 쾌락을 물리치고, 그것들을 비판하고 정체를 알려야 한다고 했다. 첫 집회는 1971년 9월 25일 트라팔가 스퀘어에서 열렸다. 청중들의 반응은 대단했고, 어둠의 영국을 빛의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익명의 크리스찬이 수면으로 부상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호 계속>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 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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