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는 축복이며 책임입니다

미주 장신대 김인수 명예총장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3/23 [10:38]
▲  4월호 표지   © 크리스찬리뷰


“교회사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고 영국의 역사신학자 존 폭스는 말했다. 교회사의 굽이굽이에 숨어있는 하나님 은혜의 손길을 추적하고, 신앙의 선진들이 흘린 핏물이 기록된 먹물을 탐험하며 평생을 바처 온 한국의 1세대 교회사학자 김인수 박사 역시 교회사를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2월 16~20일까지 알파크루시스대학교 인텐시브 강의차 방호한 그를 통해 교회사와 이민신학의 방향을 모색해 본다. 

 
▲ 4대째 장로교 가정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김인수 목사     © 크리스찬리뷰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멸망한다
 
- 어떻게 교회사를 평생학문으로 삼으셨습니까?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지요?
 
“솔직히 제가 공부할 그 당시 교회사는 공부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 공부한다면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하기 위해 성서신학을 공부하든지, 목회와 직결되는 실천신학 이를테면 예배학, 설교학, 상담학, 윤리학, 선교학을 많이 공부하는 추세였지요, 역사신학은 목회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목입니다.
 
직접 도움이 안되는 분야라고 생각하지요. 그런 것을 공부하여 광나루 장신대에서 17년 동안 이형기 교수와 둘이서 교회사를 가르쳤습니다. 18년 만에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교회사를 전공하고 귀국한 박경수를 비롯하여 지금은 교회사 교수가 4명이나 되었지요,
 
제가 교회사를 공부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안하는 것을 하자’는 마음에서였어요, 또 역사는 취미가 굉장히 많았기도 하고요,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멸망하게 된다”고 하셨듯이, 역사의 교훈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고 나서 부쩍 교회사를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2000년 교회 역사에 뼈대가 되는 것이 바로 역사신학입니다. 모든 신학의 중추, 척추, 골격, 근간이 역사신학인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고, 역사는 외우는 과목 골치 아픈 과목이란 선입견이 있습니다. 제가 기억력이 남들보다 나은 것도 한몫했습니다. 연대, 사람 이름, 역사의 사건의 개요를 외우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신학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를 전공하셨습니까?
 
“석사과정에서는 고대교회사, 박사과정에서는 한국교회사를 공부했습니다. 박사논문 테마는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최초의 목사인 길선주 목사와 1907년 대부흥운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언더우드와 길선주 목사가 한국 민족주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기독교가 한국 사회를 변혁시키는 일에 선교사는 어떤 역할을 했고, 한국 사람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비교분석하는 것이 박사 논문이었습니다.”
 
▲ 본지와 인터뷰 중인 김인수 목사     © 크리스찬리뷰

- 연구는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복음이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더군요. 4천 년 한민족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바꿔놓았습니다. 기독교 문화는 한마디로 인간을 인간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문화였습니다.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여자는 아들을 낳는 기계이지 사람이 아닌 것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아들을 못 낳으면 씨받이를 들여도 아무 소리 못했지요, 그저 아들 낳는 기계로 아들을 낳느냐 못 낳느냐에 따라 여자의 운명은 극대 극으로 갈라졌습니다.
 
또 노비, 백정, 기생, 남사당패.... 이런 천민계급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노비는 돈으로 사고 팔수 있는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여자나 천민이 사람으로 여기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는 성경말씀이 한국 땅에서 그대로 살아있는 말씀으로 재현되어 한국의 인권과 문화가 바뀌었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학교가 이화학당(1885)이고, 그 다음이 배재학당(1886)입니다. 왜 남학교보다 여학교가 먼저 세워졌느냐? 선교사들이 한국 여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여성을 일깨워야 이 나라가 발전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도 ‘소녀들에게 우선적으로 선교하자’고 명시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왜 소녀냐? 소녀가 항상 소녀가 아니다. 자라면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는다. 엄마가 철저한 신앙인이면 자녀들은 자동으로 철저한 신앙인이 된다. 소녀 한 명을 선교하면 거기에 딸려오는 수많은 아이들이 자동으로 교인이 된다’는 것을 보았던 것이지요.
 
한국의 선교전략은 롱텀 플랜, 즉 장기 선교계획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여성들이 그 암울한 상황에서 해방된 것이지요.
 
또 1908년, 제 1회 세브란스 의대 7명의 졸업생 중에 박서양이란 외과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박성춘이란 백정의 아들입니다. 그 당시 백정이 대학을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 아닙니까? 이처럼 기독교회가 천민을 해방시키고, 최고의 교육을 시킨 것은 백정의 아들도 왕자나 양반의 아들이나 추호도 차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본 것입니다. 이 백정의 아들을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한국 4천 년의 노비문화 백정문화, 여성관을 척결하고 차별문화를 철폐했습니다.”
 
- 이런 사실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20여년이나 기독교 역사관을 전수하신 것은 큰 보람이었겠습니다.
 
“그렇지요. 교회사를 공부하면 2천 년의 교회역사를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깁니다. 교회 리더들이 무엇을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역사의 교훈을 일깨워주고, 이런 경우에 이런 리더들이 잘못했고, 이런 리더는 희생하고 봉사했다고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가르칠 때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목회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사명을 일깨워주지요. 신학교수로서의 보람은 역사의식을 가진 목회자를 양성하여 목회하도록 하는데 일조를 한 것입니다.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이며, 이 시대에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은 무엇인가를 의식하면서 목회하는 소명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가장 큰 보람, 많은 목회자 제자들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교회사를 배운 제자들이 약 1만 명 정도됩니다. 1년에 500명으로 20여 년 했으니 말입니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제자가 없는 곳이 없더군요. 많은 목회자 제자를 두었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신학 교수가 돈은 못벌어도 많은 ‘목사 제자들’을 길렀다는 뿌듯한 보람이지요.”
 
▲ 복음이 한민족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바꾸어 놓았다고 강조하는 김인수 목사                  © 크리스찬리뷰

죽을 각오로 예배드린 부친의 신앙

- 그럼 교수가 되기까지 여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4대째 장로교 가정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서울 금천구 시흥동인데 당시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에서 43년, 그러니까 해방되기 이태 전에 출생했지요. 2살 때 해방을 맞았는데 한두 살 때의 기억이 없고 단지 유치부부터 교회생활을 한 것밖에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믿는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신앙으로 박해받은 것이나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디모데처럼 외조모부터 시작된 3대째 뿌리 깊은 신앙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의 신앙은 시흥교회에서 29세에 장로가 될 정도였습니다. 건축업을 하셨는데 일제 말엽 대동아 전쟁 때지금의 광명시와 시흥을 잇는 광명교 다리 공사를 하셨답니다.
 
토요일에 일본 감독에게 ‘내일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교회 가서 예배 드려야 하니 일을 못나오겠습니다’ 하니, 감독이 펄쩍 뛰며 ‘무슨 말이냐? 청년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어가는데, 너는 후방에서 한가롭게 교회 간다고 못나오겠다 해? 안나오면 가만 안두겠다’하더래요. 그래도 주일에 교회 갔다가 월요일에 나갔더니 감독이 대노하면서, ‘네가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한가한 짓을 하느냐? 이번은 처음이니 용서해주겠는데 다음에 또 그러면 남양군도에 보내겠다’ 하더래요, 남양군도는 비행장 건설하면서 무리하게 일하면서 풍토병, 사고로 죽어가는 무시무시한 곳이었지요.
 
그래도 그 다음 주도 그렇게 하니 월요일에 아예 면서기를 불러와 남양군도에 갈 서류를 준비해놓았더래요, 그러면서 ‘이번에 꼭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이번으로 그쳐! 다음 일요일도 안나오면 즉시 보내겠다’하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답니다.
 
당시 저희 집은 할머니와 부모님, 누나와 저 이렇게 다섯 식구였는데, 아버지가 남양군도 간다면 우리 네 식구는 굶어죽을 입장이었지요. 그래도 아버지는 ‘남양군도에 가서 죽는 한이 있어도, 가족들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세 번째 주일에 또 결단하고 교회 가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죽을 각오로 월요일에 나갔더니 일본 감독이 똑바로 쳐다보면서 “혼또노 그리찬!”(진짜 기독교인) 하면서 ‘다음 일요일부터 교회 가도 좋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하라’고 하더랍니다.
 
그 다음부터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셨답니다. 엄청난 믿음의 시험대였는데, 그 시험을 통과하신 것이지요. 해방 이후에 건축업을 하셔도 세상일을 안 하시고, 예배당, 학교, 선교사 사택... 등 복음과 관계된 일들만 골라하셨습니다. 은퇴 후 미국에서 사시다 작년에 만 94세로 소천하셨습니다. 무병장수 하셨지요. 병원에 입원한지 한 달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사실 이런 아버지께서 신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교육 받지 못하고 건축업을 하신 것입니다. 5남매 중 아들로서 제가 맏이인데, 아버지는 첫 태생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구약을 인용하시면서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내가 목사가 될 꿈을 접었기 때문에 네가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 젊은시절의 김인수 목사     © 김인수

사실 저는 목사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용은 잘 모르지만 왠지 목사가 가난하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되어 돈 많이 벌어 어려운 목사님 돕겠다는 마음으로 의대를 가려하다가 결국 의대 꿈을 접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장신대에서 신학을 하고, 군목으로 3년 군생활을 마쳤습니다.
 
74년 5월에 제대하고 9월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미국 연합장로교 소속인 아이오와 드북신학교에서 석사(STM)를 마치고 시카고에서 목회도 몇 년 했습니다. 그러다 장신대에 교수로 부임하여 몇 년 가르치다 다시 버지니아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에서 역사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장신은 82년에 가서 2007년에 은퇴했습니다.
 
학교 처음 부임했을 때가 성금요일(고난일)인데 학생들이 먹고 마시고 장난치며 놀고 있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수회의 때, 이날 점심시간만큼은 금식하자고 제의했습니다. 학생식당과 교수식당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몇몇 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했다고 항의가 빗발쳤어요.
 
그랬지만 ‘성금요일의 점심금식’은 아름다운 전통으로 수십 년 이어왔습니다. 은퇴 후 학교에 설교하러 가서 ‘그때 그 ‘이상한 일을 만든 이상한 사람인 장본인이 이 사람입니다’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사 교수로서 모교 <장신 백년사>를 집필한 것도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 은퇴 이후에도 계속 신학교육에 힘쓰지 않으셨습니까?
 
“예, 26년 교수 생활을 하고 2007년 미주 장신대 총장으로 가서 4년 동안 일했습니다. 지금은 총장은 젊은 후학들에게 물려주고 강의만 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주장신은 건물만 사놓고 전혀 손을 못대고 있었습니다. 건축허가를 완공하여 신학교로 완전히 변모시켰습니다. 그 전에는 동신교회 교육관에서 임시로 수업할 정도로 열약했습니다. 우리 학교가 자체 건물을 소유하면서 양질의 교육 제공하는 신학교로 변모했습니다.
 
특히 교수진을 세대교체했습니다. 이전에는 죄송한 표현지만 ‘노인들이’ 옛날부터 가르쳐 왔기 때문에, 주로 디민(D. Min) 학위로 가르치고 있더라구요. 신약, 구약, 설교학, 상담학 등 여러 분야에 제대로 된 학위(Ph. D)를 가진 젊은 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분들 때문에 진로가 막혀 있더라구요, 아무래도 안되겠다 해서 젊은 교수들로 싹 바꾸었습니다.
 
사실 그 노인들이 신학교 선배들이라 엄청나게 욕먹었습니다. 노인들이 은퇴하여 그걸로 즐겁게 지낼 용돈도 생겼는데 없어지니 크게 분노할 것은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길이고, 돈 내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설득했습니다. 이제는 연로한 목회자들이 하던 때와는 강의의 차원을 달리하는 젊은 교수진들로 구성되니 다른 신학교에서 전학올 정도로 학교 질을 높아졌습니다. 이전까지는 학생 수가 한 번도 2백 명을 넘지 못했는데, 제가 가서 2백 명이 넘어서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섰습니다.
 
한 번 임기가 끝나고 한 번 더 하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만 70세가 넘었기에 후학들에게 양보했습니다. 강의만 하고 실무는 젊은 사람들에게 넘겼습니다. 
 
미국 신학대학 협의회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명실공이 미국 신학계에서 인정받는 신학교로 업그레이드 하는 데 기여한 것이 업적이자 큰 보람입니다.”
 
▲ 김인수 목사의 Ph.D. 학위 취득(역사신학) 기념사진     © 김인수

이민신학의 정립이 시급하다
 
- 디아스포라 한인신학교에 일하시면서 느끼신 일들도 많을 터인데요.
 
“이민신학교가 존재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미국에 얼마든지 좋은 신학교도 있는데,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으면 되지 합니다. 또 미국에 놀고 있는 목회자도 많고, 그분들도 사역할 곳이 없는데 신학교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지요. 미국에 해마다 1만 5천여 명의 한인 이민자들이 들어옵니다. 대부분 LA 지역에 정착합니다.
 
문제는 ‘1세 목회를 누가 할 것인가?’입니다. 한국에서 온 목사들은 한국에서는 충실한 목회자이지만 이민 목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이민자 중에서 1세 목회자를 길러야 하는데서 이민신학교의 존재 의의가 있습니다.
 
문제점도 있지요, 무엇보다 신학교 지원자들의 한국처럼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생각보다 비자 연장의 수단으로 학교에 등록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요, 목회에 대한 소명감도 없는 이런 사람들과 같이 수업하니 정작 소명받은 사람들에게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칩니다.
 
▲ 지난해 시드니영락교회 창립 33주년 기념사경회 강사로 초청받아 호주를 방문, 한국 교회사를 열강하는 김인수 목사     ©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대체적으로 신학교의 재정이 열악하여 풀타임 교수들을 많이 못하고 강사진 위주로 교수진을 배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가 강사의 사정에 따라 강의를 오픈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사에 따라 과목이 왔다가 갔다 하니 이민신학교의 아주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가 풀타임 교수 확보입니다.
 
신학교를 후원해야 할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것도 이민신학교의 발전에 한계를 가져오게 하지요, 미국 전역에 한인교회가 4천여 개인데 75%인 3천 개 정도가 100명 미만의 교회로 목회자의 사례비조차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합니다. 이런 형편에 있는 교회들이 신학교를 후원하기는 더더욱 어렵지요.
 
서울의 신학교들은 대형교회들이 건물을 하나씩 지어줄 정도이고 상당한 교회들이 장학금을 후원하는데, 이민 신학교들은 그게 안됩니다. 한 달에 몇천 불, 일 년에 몇만 불 보조하는 것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 이제 이민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전 세계에 100만 가까운 한인 디아스포라가 흩어져 있고, 이민의 역사도 짧지 않고, 그렇게 많은 신학교들이 있는데 ‘이민신학’은 걸음마 수준이지요.
 
“이민신학교는 당연히 이민신학을 정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첫째 문제는 이민신학을 전공 학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프린스톤신학교에 계시던 이상현 박사가 이민 1세로서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셨는데 후학들이 그것을 크게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계속 연구할 수 있는 후계자를 양성해야 하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신학자가 없습니다.
 
또 학문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민신학 레퍼런스가 빈약합니다. 미국 이민 100년이라지만 사실 70-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민이 시작되었지요. 그러니까 30-40년이란 짧은 시간에 이민신학을 정립하기엔 연구한 학자도 참고자료도 없는 실정입니다.”
 
- 성경은 이민신학에 대하여 많은 것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 땅에 가서 거기서 농사짓고 정착하여 살 생각을 하라고 하여 박해를 받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민족이 조국을 떠나 포로로 떠나 거기서 결혼하고, 농사짓고 정착하여 살으라고 하느냐 하면서 매를 때리고, 고문하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의 삶은 이민자의 삶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어느 곳에 정착하고 항구적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지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이민자로 나그네로 보내셨습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내 험악한 삶, 나그네의 삶’이라고 한 것은 이민자의 삶을 말한 것입니다. 나그네의 영원한 본향은 하늘에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모국을 떠나 호주나 미국에서 산다할지라도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면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두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도 어떻습니까? 430년 남의 땅 살이 가나안 땅도 남의 땅 그곳에 살던 7족속을 몰아내고 살지 않습니까? 그곳도 영원한 땅이 되지 못하지요. 다시 포로로 잡혀갔다 고레스왕의 화해정책으로 귀환했다가 주전 63년 로마의 속국 70년에 예루살렘 멸망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로마 정부가 유대인들은 모아놓으면 자꾸 뭉쳐서 독립운동이나 하니 70년에 모든 유대인이 전 세계로 흩어버리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2차 대전 이후 유엔 결의에 의해 1948년 독립국가가 됩니다. 한국 정부와 같은 해에 말입니다. 비로소 그때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출발하는데, 인구는 기껏 당시 400만 명이었습니다.
 
주변에 12억의 무슬림이 끊임없이 그들은 몰아내기 위해 4차에 이르는 아랍전쟁을 일으켰지요. 여전히 팔레스타인이 테러를 당하고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당하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200-300만 명의 유대인들이 러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리멤버 쥬위시 인 러시아’ 이 말은 시카고 유대인 타운에 붙어있는 말입니다. 외국에서 고통당하는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김인수 목사 가족사진     © 김인수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소명과 사명
 
- 우리 한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강점과 장점들이 많지 않습니까?
 
“한국 이민자들도 어디에서 살든 ‘이 땅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살도록 허락하신 땅’이라는 소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외국에 정착하고 살게 된 것은 단순히 세속적인 목적보다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참 고무적이고 희망적인 것은 한국 사람이 가는 곳은 전 세계 어디서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또 한인교회들은 반드시 새벽기도를 하고 교회를 통해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호주나 미국 시민권으로 영어를 거침없이 말하는 1.5, 2세들이 전 세계 어느 곳이나 선교사로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참 좋은 조건들 이민자의 가정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에서 이민자들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민족을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하신 것은 마치 17세기 초 영국의 청교도들의 미국 이주와 흡사한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청교도들은 영국 왕실이 영국 교회를 강압했기 때문에 국가가 강압하는 종교가 아닌 자기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미국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청교도의 후예들이 수많은 선교사들로 전 세계에 파송되었는데 한국도 130여 전 그 혜택의 수혜국입니다.
 
결국 영국이란 조국을 떠나 황무지인 미 대륙에서 삶을 정착하고 미국의 대각성운도을 통해 영적으로 거듭난 스튜던트 바렌티어 무브먼트(SVM) 무디의 각성운동을 통하여 대학생, 신학생 선교단체에서 많은 선교사를 전 세계로 파송했지요.
 
언더우드, 아펜젤러, 해론 선교사들도 그들 중에 속한 분들이지요, 그분들이 한국으로 건너가 한국 복음화에 앞장섰습니다. 이들이 SVM도 이민자들의 후예들입니다.
 
비록 1, 2세 이민자들은 어려움과 고통이지만 그 후예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소명을 가지고 동족뿐만 아니라 이민족에 기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이민신학의 강조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세들은 언어의 장벽, 자녀 교육의 무거운 짐이 어깨에 매여있지만 2,3세들은 미국 호주 등의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언어의 장벽이 없이 서양사회에 진입할 수 있고 시민권을 갖고 있어 선교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재정과 기도로 후원한다면 한인 디아스포라 이민자의 후손들이 세계복음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자격과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데에 초점을 맞추어 이민신학교는 일꾼 양성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영적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 김인수 목사     ©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이민교회가 사는 길은 결국 믿지 않는 동족선교에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묘하게 해외선교에는 엄청난 돈을 씁니다. 중국,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는 엄청나게 투자합니다. 세계지도 걸어놓고 표시하고 기도하고 엄청난 예산으로 선교하는데 정작 우리 동족 선교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예산도 투자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내지선교와 외지선교가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예산. 기도 관심도 똑같이 외국 영혼만큼이나 동족 영혼의 구원에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살아야 해외선교도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교회들이 점점 쇠약하고 하향곡선인데 그러면 해외선교도 중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네 교회가 사는 길은 전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전도의 대상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상은 부지기수입니다. 내 집 근처에도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까? 이민교회가 사는 길은 동족선교의 길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김 박사님의 고견이 한인 디아스포라 신학에 큰 밑거름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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