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의 진정성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했는가?

정기옥/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03/23 [11:41]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했는가? 
 
하버드 대학의 왕립 법학 교수였던 그린리프 박사(Dr. Si mon Greenleaf)는 역사 속에 살았던 인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법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법률 책 중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증인법에 관한 논문’이라는 책을 썼다.
 
부활, 커다란 사기?
 
그는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의 커다란 사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단번에 모두를 위해 부활이 신화임을 만천하에 폭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부활의 증거와 증인들을 전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점검한 그는 처음의 의도와는 정확하게 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한 책을 썼는데 그게 바로 “재판소에서 집행된 증인법에 의거한 네 전도자에 대한 증언 심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며 적고 있다.
 
“사도들이 그들이 말하는 진리를 확증함에 있어서 그토록 변함없이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후 그는 기독교 변증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변증론을 ‘법정 변증학’이라고 한다.  네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과 부활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평가함에 있어서 변호사가 상대방 증인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법률 반대 심문 방법을 고대 문서인 성경의 이야기에 적용해서 기사들의 진정성을 확립한 것이다.
 
그린리프 박사는 법적 증거에 의거한 판결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전 역사의 사건 중에서 최고 확실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인 증거들에 의해 확신을 얻고 깨닫게 된 후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생애를 헌신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그린리프 박사 한 사람만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수천, 수만, 아니 셀 수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그들의 인생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헌신했다.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 그렇게 급진적으로 바뀌게 한 것일까? 이들은 어떤 증거들을 얻었기에 그런 극적인 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 것일까?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사실적 증거들을 발견했기에 이성과 합리성으로 그것들을 무시하며 넘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며 섬기는 존재들이 되었을까?
 
절망과 극도의 혼돈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예수는 한 사람의 범죄자로 수치와 불명예에 온전히 노출된 채 십자가에서 저주 아래 죽었다. 그의 제자들은 이 믿을 수 없는 경악할 사건에 망연자실하며 지난 삼 년의 기간을 되돌아 보았다.
 
이 사람에게 우리가 소망을 걸었었단 말인가? 우리가 이 사람을 믿고 우리의 일생을 의탁했었다는 말인가? 어떤 생각들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어떤 상념들이 스쳐가고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는 병자들을 말 한 마디로 치유하지 않았던가? 물위를 마른 땅처럼 걷고 죽은 자를 살려 내지 않았던가? 폭풍을 잠재우는 모습을 목격했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런 그의 최후가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그날 밤 열한 명의 제자들은 그렇게 처참한 패배의식과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그들 자신도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처럼 저렇게 초라하고 무력한 최후를 위해 매를 맞고 모욕과 고난을 당하며 죄인으로 정죄되어 불명예 가운데 죽어가야 하는가!
 
마가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 14:50) 라고 단순하고 명료하게 그들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 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베드로는 그날 밤 그 운명의 자리에 마치 군중의 한 사람처럼 자신을 숨긴 채 동참하고 있었지만 그는 절망 가운데 극도의 혼돈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와 함께 했던 제자였음을 부인하되 심지어 세 번째는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막 14:71) 라고 말하며 가슴 아프게 예수를 버렸다. 마침내 예수는 모든 사람들뿐 아니라 삼 년간 희로애락의 삶을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도조차 버림받은 후 철저히 혼자가 되어 십자가에서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자취를 감추었던 소수의 무리들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지 약 두 달 후,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것이다.
 
부활의 증인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담대하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가 살아나셨다!” “예수가 부활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고 있는 베드로의 외침은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가...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22-24, 32) 그들은 담대하게 스스로 부활의 증인으로 자처하며 가히 폭발적인 사실을 외쳤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다!
 
무엇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숨죽이고 있던 그들을 이토록 맹렬하고 담대한 사자들로 변화시킨 것일까? 공회 앞에 심문을 받고 위협 가운데 풀려 나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행 4:20) 고 포효하듯 일갈한다.
 
이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위협과 채찍, 감옥과 고문,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이들을 침묵시킬 수 없었던 바로 그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엄청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열두 명의 보통 사람들이 용맹한 사자들이 되어 목숨을 걸고 증언하도록 만든 설명이 불가능한 변화와 역동적 능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런 극적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벧후 1:16) 목격자로서의 증언이다. 그들은 그들의 증언의 확실성에 대해 죽음을 담보로 그들의 피로 봉인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 부활의 증인으로 참혹하지만 영광스러운 죽음의 문인 순교의 길을 걷는다. 거짓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거짓인 줄 알면서도 그 거짓을 위해 그런 삶을 살고 그런 죽음을 죽을 수 있는가?
 
한두 사람도 아닌 열두 명의 제자가 모두 같은 방법으로 속임을 당해 사실이 아닌 거짓을 위해 한 번뿐인 생애를 헌신하고 하나뿐인 유일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만약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그것이 거짓임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 아니었던가!  이 모든 것이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명명백백하게 증거한다.
 
그들이 거짓을 지키고 전파하기 위해 죽음을 감수해야 했다면 그것이야 말로 거짓이다. 그들을 가두고 위협하며, 채찍질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해도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가두고 은폐하며 숨길 수는 없었다. 예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목격한 그들의 확신은 부정할 수도, 은폐할 수도 없다.
 
이렇게 예수 부활은 증거가 넘치도록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정기옥|안디옥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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