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죽었는데

김종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03/23 [11:47]

‘늙은 마부 한 사람이 외아들의 죽음으로 몹시 괴로웠으나, 가난한 그는 돈을 벌어야 하기에 장례식을 마치고 바로 마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손님을 태울 때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말하고자 하나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차를 몰고 눈 덮인 거리를 다니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들을 찾았지만 아무도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결국 누구에게도 속을 털어놓지 못한 그는 마구간에 주저앉아 말(馬)에게 자신의 슬픔을 쏟아놓는다. 말은 콧김을 그의 손에 내뿜으며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는 그렇게 외로움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톤 체호프의 소설 <우수>에 나오는 마부 이오나의 이야기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을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실존적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누군가를 찾아가지만 아무도 자기 영혼에 귀기울여주는 자가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가 울부짖는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시10:1,109:1) 시편의 하나님은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의 말을 잘 듣도록 두 개의 귀를 주신 것이다.
 
카운슬러 대니얼 고틀리브의 이야기는 상담학 강의에 빠지지 않는 일화이다. 그는 느닷없는 교통사고로 척추를 심하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병상에 누운 그는 죽고만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어 다시 살기로 마음을 다짐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하반신 마비를 생각하니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날 밤에도 저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 한 분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에게 ‘카운슬러이시냐’고 묻더군요. 고개를 끄덕이니 ‘누구나 살면서 자살 충동을 느낄 수 있냐’고 했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습니다.
 
간호사는 제 침대 머리맡으로 의자를 당겨 앉더니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한참 동안 그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분이 자리를 뜬 뒤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다리를 못 쓰게 됐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준다면 나도 살아갈 의미가 있겠구나.’ 그건 확신에 찬 생각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도움을 받았다지만, 실은 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는 일 년간 재활치료를 받고 다시 카운슬링을 시작하였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상도 받았고, 신문에 고정 칼럼도 연재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그는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면서 자신의 내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고 한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며 이렇게 말한다.
 
"인터뷰 방식에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 안에 고요함이 새롭게 찾아들면서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내면의 소음이 잦아들면 온 마음으로 내담자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상처와 두려움과 갈망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내담자의 마음은 바로 그때 열립니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도 찾아듭니다."
 
이는 공감(empathy)을 매우 잘 설명하고 있다. 공감이란 ‘속으로 들어가서 느끼다'는 그리스어 'empatheia'에서 유래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인 구름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주는 ‘구원의 다리’인 것처럼 공감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치유의 다리’인 셈이다. 〠

김종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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