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함과 화평함으로 섬기겠습니다

20년 넘게 교육부에서 헌신, 지난 2월 장로 임직...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양희숙 장로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3/23 [11:49]
▲ 지난 3월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서 장로 임직 받은 양희숙 장로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지역의 모태교회인 시드니한인연합교회(담임목사 우병진)에서 또다시 여성 장로가 탄생했다.
 
시드니한인연합교회는 지난 2월 15일 양희숙(65) 권사를 여성 장로로 임직했다. 양 장로는 1981년 시드니에 도착해서 출석하기 시작한 시드니한인연합교회를 지금껏 섬기고 있다. 교육부에서만 20년 넘게 묵묵히 헌신해온 양 장로는 현재 4대가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 출석하는 보기 드문 기록을 보이기도 한다. 사실 양 장로의 주일학교 교사생활은 신앙 초년 때부터 계속돼 온 것으로 그녀는 30세에 집사 직분을 받을 정도로 성실하고 열심이었다.
 
남편 역시 이 교회 은퇴장로인 안한걸(70) 장로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로 알려진 송천교회에서 지휘하던 양 장로의 시아버님(고 안승렬 장로, 왼쪽)                              © 크리스찬리뷰

가르쳤던 제자들 찾아와 축가
 
그녀의 임직을 축하하는 박수는 컸다. 그리고 그 박수의 여운 속에, “교회를 위하고 성도를 섬기며 남은 삶을 믿음의 동역자인 남편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해 나가겠다”고 인사말을 했을 때 축하객들은 정말로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예순다섯 평생을 살면서 왜 갈증이 없었겠어요. 그런데 아프리카에 가서 불쌍한 아이들을 돌보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탈렌트 김혜자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그분이 인터뷰를 하면서 ‘인생 별거 아니에요, 인생 별거 아니에요’ 그 얘기를 몇 번이나 해요. 지금 이 나이가 돼보니까 정말 인생이 별거 아니구나,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고생고생하고 물질을 명예를 쫓아다니면서 정신없이 살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 허무함, 이런 갈증을 해결하실 분은 위에 계신 분이다. 이걸 제가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임직하고 나서 답례할 때에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이 말씀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리고 남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요. 남편은 인생의 동반자이잖아요. 믿음의 동역자고요.”
 
이날 양 장로의 임직은 두 가지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남겼다.
 
▲ 15년 전 청년부 학생들이었던 젊은이들이 양희숙 장로의 임직을 축하하며 찬양을 불렀다.     ©크리스찬리뷰

첫째는 15년 전 청년부 학생이었던 젊은이들이 지금은 비록 교회를 떠났지만 옛 정을 잊지 못해 이날 함께 모여 당시 지도교사였던 양희숙 장로의 임직을 축하하며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고 있네’의 찬양을 불러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화제를 남겼다.
 
둘째는 화환을 안 받기로 한 것이다. 양 장로는 주보광고를 통해 화환을 정중히 사절했다. 그리고 임직식 때 흔히 볼 수 있는 임직자들을 위한 축하금과 선물접수대 역시 없었다.
 
“장로 임직할 때 보면 명예로 생각하고 승진하는 걸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잖아요. 그래서 누가 장립한다고 가보면 화환이 너무 많이 들어오고 보기가 그렇더라고요. 저는 이번에 목사님한테 부탁을 드렸어요. 주보광고 나갈 때 화환이나 선물은 사양한다는 광고를 내달라고요. 그렇게 광고가 나갔죠. 그런데 광고를 못 보신 분들이 화환이나 선물을 준비해 오셨어요.
 
답례는 우산을 했습니다. 그 우산에도 제 이름은 안 넣었어요.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이름만 넣었는데 선교하는 차원으로 그렇게 한 거지요.
 
그런데 15년 전에 청년부장하고 있을 때 같이 있던 청년들, 지금은 다 결혼했죠. 어떻게 서로 연락을 했는지 와서 축복송을 했는데 큰 보람을 느꼈어요. 이번에 주어진 자리가 또 교육부네요.”
 
▲ 임직예배에서 선서하고 안수기도 받은 후 임직패를 받는 양희숙 장로     © 크리스찬리뷰

양 장로는 양 볼에 홍조를 띄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다워보였다. 기쁘고도 부끄러운 듯한 그 모습은 흡사 소녀의 얼굴이었다.
 
시드니한인연합교회는 1974년 9월 8일 레드펀 회중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72명이 모여 창립예배를 드렸으며 시드니지역의 어머니교회로 불린다.
 
모태신앙으로 30세에 집사 직분
 
양 장로는 모태신앙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으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황경신(91) 권사는 밤낮없이 무릎을 꿇고 기도와 찬송으로 사신 분들이다. 그 기도 속에 자녀를 위한 기도가 어찌 없었겠는가. 믿음은 너무 자연스럽게 양 장로의 모든 생활을 인도했던 것이다.
 
“우리 집안의 행복은 바로 믿음의 뿌리인 외할머니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굴곡 없이 신앙생활을 해왔어요. 사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거든요. 아버지가 군인이셨어요. 장성 출신(육군 준장)이셨는데 저하고는 거의 떨어져 지내야만 했지요.”
 
그런 생활 속에서 양 장로는 외롭고 과묵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서울 회현동 일신감리교회에 출석한 이후 초등부, 중.고등부 교사를 거쳐 청년부교사로 호주에 올 때까지 봉사했다. 이교회에서 집사 임명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 30세였다.
▲ 믿음의 동역자인 남편 안한걸 장로와 함께     © 크리스찬리뷰

양 장로는 교회 친구의 주선으로 안 장로를 만나 1972년 결혼에 골인했다. 당시 카투사였던 남편을 보는 순간 자신만만함과 화끈한 성격에 반했다고 한다. 시댁은 모든 것이 윤택했고 뿌리 깊은 기독교 신앙 집안이었다.
 
“원래 시댁의 고향도 이북이세요. 시아버님(고 안승렬 장로)은 송천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시고 시어머님(고 이옥연 권사)은 성가대원이셨어요. 남한으로 넘어오신 후에는 시아버님이 의사이셨거든요. 서산에서 병원도 하시고 교회 건축도 하실 정도로 신앙심이 깊으셨어요. 현재 시아주버니 시동생들도 모두 목사, 장로님들이세요.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로님 댁 며느리 되는 게 기도제목이었거든요.”
 
양 장로는 장로 집안으로 시집오게 된 것은 큰 횡재가 아니냐며 시어른의 믿음을 자랑한다.
 
소래교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교회이다.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이라 불리던 곳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당시 솔내교회, 혹은 송천교회로 불렸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시기는 1883년 5월 16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복음을 들고 인천항으로 들어오기 한 해 전으로, 최초의 교회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자생적으로 세워졌음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1977년 남편은 낯선 땅에서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겠다는 꿈을 갖고 호주로 훌쩍 떠났다. 이미 슬하에 아들딸을 둔 32세의 가장이었다.
 
안한걸 장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사실은 제가 그 당시 영주권이 없는 불법체류자 신분이었거든요.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매일매일이 힘들었죠. 쫓겨날까 겁도 났고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믿어봐야겠다며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신앙은 저를 겸손하게 하고 낮추게 하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81년 사면령이 났어요. 그래서 가족들을 초청하게 된 거지요.”
 
안 장로는 “신앙은 가장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고 말했다.
 
▲ 시드니지역의 모태교회인 시드니한인연합교회는 지난해 9월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 크리스찬리뷰

남편과 4년 만의 재회
 
양 장로가 설렘과 두려움으로 호주로 건너온 것은 81년도, 꽃다운 30세였다. 남편과 4년 만의 만남, 그러나 재회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다음부터는 예정된 고생의 시작이었다.
 
“큰 애가 초등학교 1학년, 둘째가 유치원 다닐 때였으니까 앞이 캄캄했어요. 당당했던 남편도 긴 한숨을 내쉬시더라고요.”
 
남편과 마주하게 된 현실은 역시나 암담했다. 그녀는 마음 놓고 슬퍼할 새도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홈 청소를 시작한 것이다. 양 장로는 유복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남편이 이런 허드렛일을 한다는데 가슴이 아팠다.
 
“사실 남편은 그런 생활을 안 해보셨기 때문에 힘들어 하셨어요. 저는 어른들 하고 같이 생활하면서 어려운 일도 많이 겪어보고 해서 원망이나 불평 없이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홈 청소를 10년 하니까 몸이 망가지더라고요. 병원에 가니까 의사선생님이 몸에 이상이 있다며 청소를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후 남편이 청소 컨트랙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고용해 일하게 됐죠.”
 
이들 부부의 사랑은 모진 가난보다 강했다. 신앙심이 돈독한 양 장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짜증을 내거나 화난 표정을 보이지 않았고, 알뜰하게 살림을 늘려가며 늘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소원했던 그런 남편을 만났기에 조금도 불만이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생활을 위해서 지치도록 일하는 이들 부부에게 육신의 괴로움에 비할 수 없는 뼈아픈 마음의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교회 안에서의 다툼과 분열이었다. 서로 의지하고 단합하던 식구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주장하며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안한걸, 양희숙 장로 부부는 체리부룩 자택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습관이 되었다.     © 크리스찬리뷰

어느 날 양 장로도 열심히 섬기던 시드니한인연합교회를 떠나게 되는데 사연은 이렇다.
 
 “한국에서 막 왔는데 목사님이 저를 교육부에 앉혀놨어요. 그게 부담이 됐지만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교회 분란이 일어났어요. 결국 분열이 되어 교회를 떠나신 분들이 교회를 개척하셨는데 당시 장로님이 한인회 총무 일을 보고 계셨거든요. 개척예배를 드리는데 한인회 총무 자격으로 아무 생각 없이 참석을 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름을 부르며 소개하는데 어떡합니까. 어정쩡하게 일어났죠.
 
그 다음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 나갔더니 목사를 반대하고 그쪽에 휩쓸렸다고 모두들 냉랭한 거에요. 그럴 때 저쪽에서는 자꾸 연락이 오고 이쪽에서는 상대를 안 해주니까 참 힘들었어요. 할 수없이 힘들게 교회를 나와 개척교회로 갔지만 적응을 못했어요. 그러다가 한동안 교회를 쉬게 되었죠.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여기를 갈까 저기로 갈까 방황하다가 가족들이 모여 상의를 했습니다.”
 
이런 애통함을 모르고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쑤군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 장로는 가족회의를 거쳐 급기야 시드니한인연합교회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말씀의 힘은 위대했다. 그녀는 성경을 읽으며 자신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행복과 야망을 추구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인생의 정답을 안 그녀의 삶이 달라졌다. 삶에 대한 인식이 바뀌니 행복은 저절로 따라왔다. 시련 속에서의 말씀 묵상은 그렇게 양 장로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그녀는 믿음의 동역자인 남편 안 장로의 세심한 배려와 기도의 뒷받침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다시는 그 걸쩍지근한 생각일랑 버리고 주님과 염염해지는 사일랑 있을 리가 없다.
 
▲ 영희숙 장로 임직식을 마친 후 가족사진.     © 크리스찬리뷰

교회, 시련 이기고 회복의 역사 이뤄지길

양 장로는 믿는 자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녀로 키우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빠듯한 형편으로 인해 남매 모두 과외 한 번 받아보지 못했으나 신앙교육은 철저했다. 믿음이야말로 그가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귀하고 유일한 유산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감사한 게 별 보고 나가고 별 보고 들어왔지만 아들딸들이 모두 자기 갈 길을 다 잘 가줘서 그게 감사하죠. 정말 제대로 돌보지를 못했거든요. 한 번도 과외도 받지 못했어요. 그런대도 지금은 다 자리를 잡고 잘들 있어요.”
 
어머니의 기도로 자란 자녀들은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고 승리의 삶을 각자 나름대로 살고 있다. “악한자의 집은 망해갔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잠언 14장 1절)는 말씀대로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출가한 남매가 있다. 딸 수진(42)은 변호사로 남편 이성원(42) 사이에 대원(15), 진원(9)을 두고 있다. 아들 명식(41)은 금융업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아내 양혜주(38) 사이에 정우(6), 현우(2)를 두고 있다.
 
세월은 다시 돌아가는 것일까? 양 장로는 “남편과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남의 얘기를 들어주며 대화하길 좋아하는 안한걸 장로의 성격도 한몫 했다. 이들 부부가 서재로 가서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은 일상습관이 되었다. 큐티도 하고 함께 가족들 얘기뿐 아니라 교회 얘기가 오가는 것도 바로 그 시간이다.
 
이들 부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전철을 타고 교외로 나가기도 한다. 그곳에서 지난날을 추억하며 사랑을 나누고 인생을 얘기한다. 그럴 때면 연애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남녀의 만남이란 연애시절 신혼시절을 지나면 권태기라는 고비를 맞게 되고, 이를 잘 극복한다 해도 예전의 애틋함과 열정을 다시 찾기는 어려운 것이 보통인데 이들의 말에선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얘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안한걸 장로는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효자사위이다. 그는 장모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며 오히려 자신을 괜찮은 남편으로 존경해주는 아내가 있어 더욱 행복하다며 아내에게 감사했다.
 
양희숙 장로는 30년 넘게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서 헌신했다. 그동안 은혜의 체험은 너무 많아 다 말할 수가 없다. 다급할 때마다 주님의 음성을 자주 듣게 된다는 말만 피력한다. 큰 그릇은 주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것이겠지만 거기에 담길 수 있도록 힘써야지 아니면 그릇은 더 늘지 않고 거기서 멎고 말 것이다.
 
양 장로는 요즘 두 개의 희망에 쌓여있다. 두 개의 희망이란 ‘주일학교 회복’과 ‘교회의 부흥’이다.
 
“교회가 어려운 때 불러주셨습니다. 겸손하게 성숙된 모습으로 쓰임받길 원합니다. 그리고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사역자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양 장로는 ‘장로’라는 자리가 영광이기도 하지만, 큰 책임을 동반하고 있다며 “역경이 있더라도 낮은 자세로 우리 교회와 교육부가 살아날 수 있도록 매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항상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이웃 간에 온유하고 화평한 자로 세워지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시드니한인연합교회가 시련을 이기고 회복의 역사가 이뤄지게 해달라고 계속 그런 기도를 하고 있고, 시드니한인연합교회를 연단시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으로 놀랍게 회복시키실 그분의 섭리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짤막한 말이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갖게 한다.
 
에필로그
 
양희숙 장로는 외모나 말씨 모든 것이 차분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오랜 말씀읽기와 묵상이 준 또 다른 결과로 이해됐다.
 
양 장로는 특히 시드니한인연합교회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실제로 시드니한인연합교회는 시드니지역의 어머니교회로 40여 년 넘게 한인사회와 맥을 같이 해왔다. 교민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신앙공동체로서 믿음을 통해 생활의 터전을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친교와 정보교환의 장으로서 그리고 2세를 위한 한글학교로서 도움을 주는 복지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왔다. 양 장로가 떠나는 기자에게 기도를 부탁한 이유다.
 
그리고 사실 양 장로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싫어해 삼갔지만 직분보다도 실제로 이들 부부의 많은 간증들과 전도의 열매를 듣노라면 절로 은혜가 충만해진다. 〠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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