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나의 목회지입니다!...34년간 최장수 NSW 상원의원

기독민주당 프레드 나일 총재 (하)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3/23 [12:26]
▲ 34년째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기독민주당 총재 프레드 나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빛의 물결은 바다 건너 호주 땅에 상륙하게 되었다.  1973년 5월 아들레이드, 멜버른, 시드니에 '빛의 축제' 위원회가 구성되고 호주 '빛의 축제'가 탄생되었다. 빛의 축제 위원회는 나일 목사에게 NSW주 명예 주총재의 직임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1974년 1월 1일부터 전임으로 '빛의 축제'에서 일을 해달라는 부탁 편지를 받았다. 참으로 힘든 자리고, 두려운 도전이었다.
 
그 자리는 많은 논란과 갈등, 비판과 조롱을 감수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때 나일 목사는 자신에게 물었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과연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한 가지 환상을 보여 주었다.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커다란 통 앞에 서 있는데, 하나님은 쪽지를 하나씩 뽑아 거기에 이름이 적힌 사람에게 ‘네가 하겠느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통은 비었고, 하나님은 실망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통 밑에 프레드 자신의 이름이 있었고, 하나님은 ‘이제 프레드 너밖에 없는 것 같구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을 하게 된다.
 
▲ 인터뷰를 마친 후 김환기 사관(오른쪽)과 프레드 나일 목사가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     © 크리스찬리뷰

첫 번째 시드니 빛의 축제는 1974년 4월 7일 시드니의 중심부인 '하이드 팍'이었다. 4월 1일부터 7일까지 빛의 축제의 주간을 가졌다. 4월 6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도메인 공원에서 청소년 음악 페스티벌이 열렸다.
 
30 여 명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나타나 방해하려 했으나 집회는 성공리에 마쳤다. 당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젊은이로부터 노인들까지 호주를 바르고 깨끗한 나라로 만들고자 하이드팍으로 모여들었다. 하이드팍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는 부모들 또 젊은이들의 대표였다.
 
그들은 빙산, 아니 더 정확히 말해 화산의 일부분이었다. 집회의 주목적은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는 포르노 문화로부터 가정생활과 윤리관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빛의 축제 자문 위원회의 의장이며 교통부장관이었던 밀튼 모리스의 환영사에서 빛의 축제의 목적을 잘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오늘 모인 것은 텔레비전, 영화, 신문 등에서 밀려오는 폭력, 섹스 그리고 포르노물의 홍수에 대한 우리의 반대 의사를 강하게 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막 시작된 우리의 전투는 힘들고 오래 걸릴 것입니다. 추악한 외설 문화가 우리 사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악의 세력은 크고 강합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항해 싸우는 우리는 그만한 인력과 열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긴 전투를 시작한 것뿐입니다. 혹시 우리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이 전투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하이드팍'의 집회가 끝난 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구세군 악대의 뒤로 줄을 서서 엘리자베스 스트리트로 행진하였다. 현수막을 높이 날리며 시드니 중심가를 지나 도메인 공원을 향하여 빛의 행진을 했다.
 
▲ 2008년 5월, 북한 개성공단을 방문한 프레드 나일 목사 부부.     © 크리스찬리뷰


여섯 번째 선택 - 국회로 

1981년은 나일 목사에게 기적의 해였다. NSW주의 최대 득표로 상원의원으로 당선이 되어 국회에 진출하게 된다. 빛의 축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가족활동운동'(Family Action Movement)을 통해서 정계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나중에 '호주부름당(Call to Australia Party)'으로 당명을 바꾸고, 지금은 ‘기독민주당’(Christian Democratic Party)이 되었다.
 
나일 목사가 정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73년이었다. NSW 빛의 축제의 총재로 일하면서 정치계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중요한 도덕적, 사회적 문제점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표들을 주 정부, 연방 정부 주 수상, 연방 수상, 검찰총장 등에게 보냈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오히려 도발적으로 공격을 하기도 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이때부터 빛의 축제 지도자들은 기독교 후보들을 당선시켜야 하는 필요성과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974년 '빛의 축제'와 분리하여 '가정활동운동'을 창단하였다. 1977년 '가정활동운동'은 이름을 '호주부름당'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관심 있는 기독교인들이 더 많이 참여하게 되고, 호주부름당의 기반을 넓힐 수가 있게 되었다.
 
국회는 그의 목회지였다. 그는 국회에서 목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확실한 표적을 세 가지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기도한 대로 정확하게 3가지 증거를 보여 주셨다. 첫째 표적은, 전혀 기대치도 않은 곳에서 보여 주셨다. 의사당으로 처음 출근하는 날 아침, 그곳 경비원이 말했다.
 
"나일 목사님, 이 건물이 옛날에는 교회였던 것을 아세요? 이리와 보세요. 처음 선적을 해왔던 궤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과연 그랬다. 상원의사당 건물은 옛날에 주철로 떠서 조립식으로 만든 성공회교회 건물이었다.
 
둘째 표적은, 국회가 개회하는 날이다. 아침에 개회할 때 의장과 모든 의원들, 그리고 방문자들이 일어서서 기도하는 것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당신의 축복을 이 국회에 내려주시기를 겸손히 간구합니다. 우리의 토의를 인도하사 당신께는 영광을 돌리고 우리 주와 호주 전체 국민들의 진정한 복리를 증진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아멘." 

 
▲ 마디그라 반대 집회에서 강연하는 프레드 나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그 다음에 모든 의원들은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렸다. 1901년부터 연방 의회는 관습을 따라 매일 이러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 기도문은 로마서 13장 1-7절을 기초한 것이다. 정부가 하나님의 종이고, 장관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영어로 장관을 목사(Minister)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둘째 표적이었다.
 
셋째 표적은, 나일 목사는 NSW 의회에서 사역한 첫 번째 목사가 아니었다. 최초의 호주법은 주 총독이 신민지(호주) 통치에 도움을 받기 위해 5명을 사회의 지도급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임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처음 임명 받은 5명 가운데는 식민지의 부주교였던 '토마스 스콧' 목사가 있었다. 그는 1824년 11월 16일부터 1829년 9월 16일까지 주의회 상원에서 봉사하였으며, 1827년에는 국회 실행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하나님은 나일 목사에게 기도한 세 가지 표적을 다 보여주심으로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국회는 나의 목회지’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사역하게 되었다.
 
1988년 선거 때에는 부인인 일레인도 정치 동역자가 되었다. 그는 선거 전에 함께 일할 수 있는 후보자를 위하여 기도했다. 어느 날 아침 하나님은 "네가 원하는 사람은 네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으로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아침 식사 때 부인에게 그 말을 했고 함께 의미를 알아내려고 노력을 했다.
 
결국 나일 목사는 그 의미를 알게 되었고 일레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바로 내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오. 당신이  '호주부름당'의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주어야겠소." 그녀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나일 목사에게 설득을 당했다. 선거는 예상을 뒤엎고 20만 표 가까이 얻어호주 국회 역사상 처음으로 부부 국회의원이 탄생하였다.
 
▲ 마디그라 행진에서 열광하는 게이들     © 크리스찬리뷰

일곱 번째 선택 - 기독민주당(Christian Democratic Party)
 
1999년 당명을 호주부름당에서 현재의 '기독민주당' (Christian Democratic Party)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국민들이 '호주부름당'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당이라면 당명에서 그 이름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일 목사는 기독민주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 희망, 새 비전, 새로운 각오’로 새천년을 준비하게 되었다.
 
1999년 3월 27일 나일 목사는 '기독민주당'의 후보로 출마하여 3선의 기적을 이루었다. 새로 탄생한 기독민주당은 무척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당원 숫자도 증가했고 재정도 튼튼해졌다.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나일 목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윌버포스는 존 뉴턴의 영향을 받아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영국 국회의 하원의원이었던 윌버포스는 두 개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두 가지 목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노예제도를 금지하고, 그런 풍습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세계 최고의 노예 매매국가였다. 윌버포스의 20년간 피나는 노력으로 드디어 1807년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영국 하원에서 283대 16으로 통과되어 노예거래가 금지되었다.
 
만약 윌버포스가 '크리스찬 국회의원'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07년에 노예제도 폐지 200주년을 맞이하여 윌버포스의 일대기를 담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영화가 발표되었다.
 
나일 목사는 법을 만드는 심장부에서 크리스찬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자신뿐 아니라 크리스찬들은 정부나 기독교정당에 참여하여 세계 모든 나라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정부를 수립해야 하고, 기독 국회의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국회에 제출하고 토론한 내용들의 법안을 보면 그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약의 피해 방지법, 낙태 시술 제한법, 금연법, 성추행자 등록법, 교육의 자유법, 다문화주의에 대한 법, 토지세의 공정법 그리고 게이 및 레즈비언 축제인 '마디그라'를 반대하는 법” 등이다.
 
특별히 나일 목사는 얼마 전 금연법을 소개하여 담배 광고나 전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공공장소에서도 금연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특별히 아이들이 동승한 차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함으로, 아이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 
 
▲ NSW주 총선을 앞두고 기독민주당을 지지해 달라는 대형 홍보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사진= 제임스루스 드라이브, 파라마타)     © 크리스찬리뷰


여덟 번째 선택 - 마디그라 (Mardi Gras) 
 
‘마디그라’란 원래 ‘사순절’ 직전의 축제였으나, 시드니에 상륙하면서 ‘동성애자’들의 축제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시드니 ‘마디그라’는 1978년 호주의 동성애자들이 시드니의 ‘옥스ㅋ퍼드’ 거리에 모여 '세계 게이 단합의 날'을 선포하고 인권 보호를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78년도의 첫 모임은 경찰의 무장 진압 아래 피를 흐리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79년도에 ‘마디그라’라는 명칭으로 다시 모여 시위를 벌였다. 
 
지금은 시드니의 연중행사로 자리매김을 했다. 이들의 공식 명칭은 ‘Sydney Gay & Lesbian Mardi Gras’ 이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날 밤의  ‘퍼레이드’이다.  자신들만의 축제가 아닌 ‘시드니’를 ‘동성애자’의 ‘산실’로 만들겠다는 악한 마귀의 전략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이루어지는 마디그라 행사에 대하여 나일 목사는 국회에서 법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주정부 31조 ‘정부의 투명 정책법’에 의거하여, 장관은 어느 자금에서 ‘2012 시드니 마디그라’를 지원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가? 이 행사를 통해 얻은 이익금이 동성애자 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정부는 지역사회에 유익한 프로그램과 단체의 예산을 삭감한 것을 알고 있는가? 반 폭력운동 단체, ‘이제 그만 합시다’(Enough is enough)와 같은 단체는 6만 불 이상 예산이 삭감된 것을 알고 있는가? 정부는 다른 단체 예산은 일괄적으로 삭감하면서, ‘2012년 시드니 마디그라’와 관련된 필름 축제는 왜 그러지 않았는가?”
 
뿐만 아니라 나일 목사는 마디그라 행진 때마다 피켓을 들고 적극적으로 저지하였다. 한번은 나일 목사는 동료들과 함께 프랑카드로 행진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하지만 나일 목사의 신변을 걱정한 경찰의 간곡한 요청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일 목사는 마디그라 측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과 테러를 당했다. 행진 때 '세례 요한'의 목을 들고 행진하며 '프레드 나일'의 목이라고 하기도 하고, 계속되는 협박 전화는 물론이고 차량 폭파의 위협도 받았다. 하지만 나일 목사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경찰에 고소하지도 않았다.
 
그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는 성경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열정으로 나일 목사는 2007년에 시작한 '시드니성시화대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경찰과 카운슬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던 ‘시가행진’과 ‘마틴 플레이스 집회’는 아마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여섯 번이나 한국을 다녀왔다. 그 중 가장 잊지 못하는 행사는  PPP 십자가 행진이다.  'PPP’(Cross Parade of Peace for all Peoples) 행진이란 부산에서부터 십자가를 메고 판문점을 거쳐 평양까지 가자는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행진이다. 이 집회에서 나일 목사는 십자가를 지고 선두에서 행진을 했다. 판문점이 가까워지면서 언제 어디서 서야 할지 몰라 조금은 당황했다고 한다.
 
“누군가 나보고 그만 가라고 해야 하는데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군사경계선을 넘어가면 어떡하나, 다시 못 돌아오는 것은 아닌가?” 
 
나일 목사는 인터뷰 도중 그날을 생각하며 잠시 미소를 지었다.
 
▲ NSW주총선에서 기독민주당을 지지해 달라는 투표용지 견본     © 크리스찬리뷰

아홉 번째 – 재혼
  
나일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의 연인인 일레인 여사가 2011년 10월 암으로 별세할 때까지 53년간 함께해 왔다. 부인을 잃은 후 그는 눈물을 흘리며 "내 삶에 큰 공백이 생겼다"면서 "내가 하고 있던 일에 아내가 어느 정도 목적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인은 15년 동안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나일 목사와 정치 동역자이기도 했다. 나일 목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레인 여사는 유언으로 꼭 재혼할 것을 부탁했다.
 
"당신은 혼자 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제가 죽거든 꼭 재혼하십시오."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병석에 있던 3년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장지는 물론 비문의 말까지 구체적으로 유언을 남겼다.
 
"내 비문에는 요한복음 3:16절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조문하러 오는 사람에게까지 비문을 통하여 전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8백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했고, 그 중 국회의원들도 30여 명이나 되었다.
 
부인을 보내고 얼마 후 그는 기독민주당 집회에서 우연하게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집회에 참석한 그녀를 보고 나일 목사는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름은 ‘실바나 네로’(Silvana Nero), 세 자녀의 어머니로서 셋째 아이를 출산할 때 남편에게 버림받았던 비련의 여인이다. 남자에 대한 불신과 상처를 가진 그녀는 재혼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하고 20년 이상을 독신으로 살았다.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을 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기독민주당에서 발간하는 신문에 2013년 12월 15일 그녀와 결혼한 날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하나님은 나에게 놀라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헌신적이며, 진정한 크리스찬입니다.” 
 
실비나 역시 나일 목사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를 통하여 그녀의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바나는 20년 이상 교사로 봉직한 겸손하고 지적인 여인이다. 이번 3월 28일 선거에 그녀는 기독민주당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열 번째–마지막 출사표
 
그는 생애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기도하고 있다.
 
“나는 기독민주당의 총재로 '로스 클리포드'와 함께 3월 28일에 있을 상원의원 선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당선이 되더라도 나는 8년 임기를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 적절한 시기가 오면 후임자에게 기독민주당의 총재 자리를 물려주고 조용히 정계에서 은퇴할 예정입니다.
 
이번 선거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NSW주 상원의원(42명)의 임기는 8년이고, 하원의원(93명)의 임기는 4년이다. 하원의원이 그만 두면 보궐 선거를 해야 하지만, 상원의원은 그렇지 않다. 후임자를 지명하면 다음 순서의 사람이 ‘상원의원’이 된다. 따라서 나일 목사가 그만 두더라도 ‘기독민주당’의 자리 수에는 변동이 없게 된다. 나일 목사는 그의 후임자로 ‘로스 크리포드’(Ross Clifford)를 마음에 두고 있다.
 
그는 침례교 목사이며 변호사이고 침례교 신학대학 Morling College의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에서 20년 중 18년을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그가 봉직하는 동안 대학은 질적인 발전은 물론이고 양적으로도 700명 이상의 학생이 증가하였다.  
 
나일 목사는 1981년에 NSW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지금까지 34년째 봉직하고 있다. 한때 은퇴를 생각하여 보았지만 아직 목회지인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 마지막으로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그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의지하여 '국회는 나의 목회지이고, 정부는 하나님의 사역자이다'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 보수적인 사람들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려고 하지만, 종교와 정치 모두가 세상 속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했지, 교회나 크리스찬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살아온 삶 중에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 물어 보았다.
 
나일 목사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첫째 영적인 하이라이트로 자기를 반대하고 핍박하던 의원이 전도를 받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지금은 그 어떤 사람보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돕는 우군이 되었던 일이다. 이번 사바나의 캠페인에도 적극적으로 돕기로 하였다고 한다.
 
나일 목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임을 힘 주어 강조했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하이라이트이다. NSW 상원의원 42개 좌석 중 기독민주당은 2 좌석이다. 따라서 다수당인 자유당과 노동당에 밀려 자신이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마약, 담배, 알코올 등의 법을 제출하라고 했다. 사실 이런 법은 통과되기가 힘들다. 노동당의 실행위원 중에 담배회사 회장이 있었다. '금연법'을 제안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나일 목사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실지로 그것을 입증하였다. 나일 목사는 자신이 상정한 법이 통과되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될 때까지 매년 상정할 각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나일 목사는 시드니에 살고 있는 교민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하였다.
  
"시드니의 그 어떤 민족보다 한국인같이 적극적으로 시드니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민족은 없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민족이 연합하여 기도함으로, 시드니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계절이 찾아오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 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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