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의료선교사들에 의해 심겨진 씨앗

연 5만여 명 무료 진료, 캄보디아 연합선교의 모델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4/27 [09:52]
▲   5월호 표지  ©크리스찬리뷰
 
연재를 시작하며


참 신기한 일이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헤브론병원’이란 이름은 기자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취재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낯선 땅을 찾아 길을 떠났었다. 중국으로 일본으로 몽골로 뉴질랜드로 그리고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 부산과 경남지방으로 취재여행을 떠났었다. 영혼 가득 번지던 그 설렘과 흥분 이후 이런 떨림은 오랜만이었다.
 
기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헤브론병원에 대해 얘기를 듣던 날을 기억했다. 절대 빈곤국가인 캄보디아에서 희망을 불어넣고 있는 그들의 사역은 실로 기적에 가까웠고 캄보디아의 미래가 서려져 있었다. 그들은 성업 중인 병원을 뒤로하고, 편안함과 미래가 보장된 청사진을 포기하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 생선의 가운데 토막같은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자기의 나라, 부모, 친척, 고향을 떠났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남들이 가지 않는 곳을 지향하게 했을까?
 
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살아 있음으로 하여 겪어야 하는 애상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던”(고전 4:1) 그들의 비밀을 열어보고 싶은 간절함에 사로잡히고 만다.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하고 캄보디아인들의 친구가 되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헤브론 사람들. 그 비밀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권순형 발행인과 함께 캄보디아로 길을 떠났다.
 
사실 선교병원들이 문을 닫는 일들은 이제 그리 놀랄 일도 아닌 상황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를 기념하면서 세운 ‘슈바이처병원’도 문을 닫았고 최근엔 몽골 연세친선병원도 문을 닫았다. 선교병원이라는 초기에 가졌던 정체성을 잊어버린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헤브론병원은 ‘헤브론 정신’을 가슴에 품고 종합병원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지금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헤브론병원 전경(오른쪽) 왼쪽은 선교사 숙소로 사용하는 게스트 하우스.     © 크리스찬리뷰

한국의 70년대 시골풍경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4월의 캄보디아는 30~40도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라 했다. 말라리아에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생활용수도 말이 아니라고 했다. 가방을 챙기다말고 정말 떠나야하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려움과 맞서는 감정도 있었다. 그것은 떠나야 한다는 것, 그곳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녹음기와 카메라, 세수수건, 슬리퍼 그리고 옷 몇 벌 챙겨 넣으니 가방이 불룩했다. 거기에다 헤브론병원에 기증할 의약품들이 많았다.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에 의약품을 지원합시다’라는 캠페인을 보고 후원자들이 보내준 후원금으로 서울에서 구입한 의약품들이다.
 
기자는 수첩을 꺼내 3월 31일자를 펼쳤다. 수첩에는 그날 날짜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에게 작은 재주를 허락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열매가 있다면 이번 헤브론병원을 취재하면서 숨어있는 신앙인들의 원석을 캐내어 다듬어 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4월 1일 밤 11시, 비행기가 캄보디아 프놈펜 공항에 내려앉자 활주로에 뿌연 모래바람이 일어났다. 활주로 주변의 포장이 덜 된 탓이다. 국제공항이란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초라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공항. 오늘 출발한 인천공항과 비교하니 더욱 그렇다. 입국 비자와 입국 수속, 세관검사를 위해 줄을 섰는데 살벌하고 으스스한 공기로 가득 찬 듯 까닭 없이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위기를 그토록 살벌하게 만드는 원인을 한 가지씩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입국 수속을 해주는 담당 관원들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몸놀림에서부터 오는 것이었다. 입국 수속을 받아야 하는 여행객들 앞에는 노란 줄이 엄중하게 그어져 순서가 아닌 사람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물론 다른 나라 공항에도 이렇게 노란 줄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어느 동양계 초로의 부인 하나가 여행이 처음인 듯 두리번거리다가 그 황선 안까지 들어서자, 여권을 검사하던 담당자 하나가 무슨 중죄인을 심문하는 눈초리처럼 무서운 눈을 하고 부인을 향해 부라리며 턱으로 ‘물러가 있으라’고 지시를 했다. 천당과 지옥의 갈림길인들 이보다 더 엄숙하고 살벌할까.
 
다행히 헤브론병원 행정실에서 섬기는 김동균(52) 선교사가 입국장 안까지 들어와 수속을 도와줘 순조롭게 나올 수 있었다.
 
헤브론병원은 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듣던 대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남루하게 걸친 옷차림에 대개는 슬리퍼를 신었고 희번덕거리는 눈빛이 기자를 긴장시켰다.
 
공항에서 헤브론병원으로 들어가는 길 주변은 음식점과 유흥주점이 즐비했다. 주점에는 붉은 조명을 받은 여성들이 손님들과 어울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수년 전에 벌써 폐차를 했을, 형편없는 고물차들이 연방 경적을 울리면서 질주를 했다. 늦은 밤인데도 오토바이와 오토바이를 개조한 택시 ‘뚝뚝’이와 사람의 홍수, 뽀얀 먼지와 여기에 자전거와 도로 공사까지 뒤엉켜 길을 내주지 않았다. 서울과 시차는 불과 2시간뿐이지만 마치 1970년대 어느 시골에 내린 듯 심리적 시차는 무척 큰 느낌이다.
 
흔히 보이는 광고판에 혼다 오토바이를 탄 신부의 사진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는 남자가 혼수를 장만하는데 오토바이는 기본 혼수품목이다. 오토바이는 무법천지로 다니는 ‘뚝뚝’이와 자동차를 알아서 피했다. 자동차와 ‘뚝뚝’이도 방향 지시등을 켜지 않은 채 중앙선을 넘나들었다. 역주행도 하지만 화내거나 말하는 사람은 없다. 

▲ 달 밝은 헤브론병원의 야경.     © 크리스찬리뷰

아! 캄보디아
 
캄보디아 하면 13세기 초에 건립된 세계 7대 불가사의 유적지 중 하나인 ‘앙코르 왕족’의 유적과 20세기 말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즈에 의해 200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킬링필드’가 먼저 떠오르는 나라다.
 
지리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이 나라는 베트남과 태국사이에 끼여 역사적으로 전란이 많았다. 권력을 움켜쥐려는 자들에 의해 자행된 오랜 내전으로 역사와 문화가 단절되고, 정치 경제에서 발전이 정체됐다. 13세기 동남아시아를 주름잡았던 앙코르 왕국은 오늘날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했다. 캄보디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15달러(2014년 기준)에 불과하다.
 
우리 한반도 크기만 한 국토의 중앙부는 넓은 평원으로 전 국토의 4분의 3을 차지하며, 그 주변에는 낮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1천5백만 국민의 대부분은 크메루족(90%)이고, 참족과 베트남족으로 구성돼있다. 원래 크메르족은 힌두교였다. 15세기 이후부터 불교를 믿었는데, 그 불교의 특징은 힌두교와 정령숭배의 요소들이 가미된 것이다. 95%가 불교도인 캄보디아인들은 기독교를 서구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1970년도 초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한때 교회성장은 괄목할 만했으나 폴 포트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핍박은 심했고, 교회는 큰 상처를 안았다. 그러나 최근 제한된 종교의 자유지만 교회는 회복되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민족주의와 불교 사이의 괴리현상으로 학생과 지식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폴 포트는 이 나라를 송두리째 망가뜨린 장본인 중의 하나. 그는 공산주의자로서 1970년 민족해방군 최고사령부 부의장이 되어 캄보디아 내전을 지휘했다. 75년 론놀정권 타도에 성공한 후 총리가 된 그는 중국 모택동식의 ‘이상적 농경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앞세워 도시인구를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 화폐와 종교, 사유재산을 없애고 집단농장을 만드는 등 급진적인 사회주의를 실험했다. 그가 1979년 베트남 지원을 받은 반대세력에 밀려 태국 국경근처 밀림지대인 안롱 벵 지역으로 퇴각할 때까지 강제노역, 고문, 기아, 대학살 등으로 희생시킨 국민의 수는 약 2백만 명에 달한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6백만 명이었으니 국민 3분의 1이 이 땅에서 사라진 셈이다. 주로 전직 군인, 공무원, 지식인, 부자와 그 가족 등이 대상이었다. 당시 안경을 썼다는 것과 유학을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한마디로 이 나라의 엘리트를 포함한 지도층 한 세대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결국 국토는 황폐화되고, 경제는 물론 인권과 도덕은 땅에 떨어졌으며, 나라의 기강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내전도 그치지 않았다.
 
오늘날 캄보디아에는 전문 인력과 지식인이 부족한 상황이다. 20대 이하가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한다. 부정부패가 만연돼 있고, 남자가 부족하며, 과부가 30% 정도나 돼 성윤리도 상당히 도전받고 있다. 아울러 에이즈 노출도 심각하다. 교육시킬 사람도 돈도 없다. 교사 급여가 너무 낮아 오전에만 수업이 이뤄지고, 오후에는 교사가 자기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외수업을 해서 생계를 꾸려간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그들은 경제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고, 또한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 때문에 서방의 여러 구호단체(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와 선교단체들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시장바닥처럼 붐비는 이골목저골목을 지나 드디어 헤브론병원에 도착했다. 십자가가 보였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빛이었다. 그제야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긴 시간 여행으로 침잠하던 마음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주님, 이제 시작입니다. 도와주셔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실을 만지고 싶습니다.”
기자는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수첩을 꺼내서 손에 꼭 쥐었다.
 
병원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섰다. 정면으로 ‘헤브론 정신’에 대한 현판이 붙어있었다. 헤브론 정신은 건조하던 기자의 영혼을 자극했다. 기자는 한 자 한 자 읽어 나갔다.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 심장 수술 받은 어린이가 검사를 받기 위해 엄마와 ­­­­병원을 찾았다.     © 크리스찬리뷰


헤브론 정신
 
이스라엘 역사에서 헤브론은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소돔의 번영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 신앙의 땅이요(창 13:18), 갈렙이 믿음과 개척자 정신으로 일 군 약속의 땅이요(수 14:13), 다윗이 7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준비된 땅입니다(삼하 2:11).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은 헤브론 정신에 입각해 의료, 선교, 구제 전반에 걸친 사명을 감당하고자 설립 된 병원입니다. 현재 프놈펜에 자리한 이 병원을 통해 캄보디아인들에게 선진화된 의료 활동을 펼치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홀로 마음이 들뜬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이것만으로도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이것을 연구하면 헤브론병원의 전략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장엄한 외침이 한동안 가슴에 웅웅 울리며 떠나지 않았다.
  2007년 9월 설립, 2014년 8월 심장센터 개설
 
헤브론병원은 2007년 9월 crm1505p6일 김우정 원장(62. 소아과 전문의)을 비롯해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이철(53. 부원장) 선교사, 치과 전문의 최정규 선교사 등 캄보디아에서 사역해 온 의료선교사들이 연합해 세웠다. 각기 다른 곳에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이 힘을 합쳐 결실을 맺은 것은 캄보디아는 물론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사례다. 처음에는 클리닉으로 출발해 환자를 돌보았다. 그러다가 2010년 9월, 대지 2천 평 총건평 1천332평의 3층 건물을 신축해 진료를 시작했다.
 
▲ 소나기 내린 후 물에 잠긴 헤브론병원 정문 앞 도로. 현재 이 도로는 포장 공사 중에 있다.     © 크리스찬리뷰

더욱 놀랍게도, 이들 중 이 정도 크기의 병원을 운영해 봤거나, 건축해 본 경험을 가진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김 원장은 “단지 의사 여럿이 모이면 효율적으로 진료할 수 있을 것 같아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18억 원의 건축비용을 한국교회와 미국 및 캐나다 한인교회들로부터 모금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결국 조금도 빚을 지지 않고 완공했다.
 
헤브론병원은 수술실 3개와 7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원실 등 선교병원 중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다. 현재 헤브론병원은 연 5만여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찾아 진료를 받고 있다. 수술환자 역시 백내장 수술을 받은 120명을 포함해 연간 1천여 명에 이른다. 한국으로 데려가 한국병원에 의탁해 수술한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도 100명을 넘어섰다.
 
2014년 8월에는 심장센터를 개설해 지금까지 총 35명의 심장병 환자들이 이곳에서 수술을 받아 새 생명을 얻었다. 이전에 캄보디아에서 심장 수술이 가능한 곳은 프놈펜 칼메트병원이 유일했다. 이곳에서는 한 해 100명 가량이 수술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 성인이다. 소아심장병의 경우 간단한 치료만 할 뿐 수술은 엄두도 못 낸다.
 
프놈펜에는 큰 병원이 5개가량 있지만 병원에 가려면 15- 20불은 있어야 하니, 1불 이하로 사는 사람들은 살이 썩어가고 뼈가 부러지고 고열이 나도 병원에 갈 엄두를 못 낸다. 그래서 200km나 떨어진 곳에서도 차비를 들여가며 헤브론병원을 찾아온다. 그들은 육체뿐 아니라 마음의 병이 든 사람도 많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의사와 환자’로만이 아닌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 원장은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도하게 하시는지 모른다.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일하신다”며 “현지에 있다 보면 120년 전 한국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한 사람을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을지 짐작이 간다”고 전했다.
▲ 프놈펜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킬링필드의 현장인 청아익 대량 학살 센터에 세워져 있는 위령탑. 캄보디아 전역에 300여 개의 킬링필드 현장이 산재해 있다.     ©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은 현재 한국인 의사 10명, 현지인 의사 11명 그리고 한국인 선교사 30명, 캄보디아 직원 70명이 있는데 한국인 선교사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헤브론병원은 ‘연합’과 ‘사람을 길러 세우는 것’에 맞춰져있다. 김 원장은 “헤브론을 직역하면 ‘친구들의 마음’이며 의역을 하면 ‘연합’ ‘협력’이라는 뜻이다”며 “헤브론병원은 처음부터 연합을 하고 협력을 해서 세워진 병원으로 캄보디아 사람들과 친구가 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년에는 간호대학을 설립했다. 앞으로 의과대학도 설립해 현지 의료인을 양육하고 암 센터 등 특성화 병원을 설립한 후 현지인들에게 병원을 이양할 계획이다. 치료비는 대부분 무료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병원이 자립해 현지인에 의해 운영될 수 있도록 혈액 검사 등 일부 비용을 유료화했다. 하지만 비싸진 않다. 심장센터의 수술비도 현지 병원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100달러에 불과하다.
 
“캄보디아는 지금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요. 앞으로 20년 후에는 지금 선교사들은 모두 손 털고 나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크리스찬 의사 간호사를 키워 간다면 이들이 사회의 주축이 될 뿐더러 크리스찬 리더로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겠지요.”
 
▲ 헤브론병원은 매일 아침 QT로 하루를 시작한다.(김우정 원장이 주도하는 직원 QT)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은 매일 아침 7시 30분 큐티로 하루가 시작된다. 오전 8시부터는 250- 300명의 환자들과 함께 매일 예배를 드린다. 헤브론병원은 차후 라오스와 미얀마로까지 헤브론선교병원의 확대를 꿈꾸고 있다.
 
▲ 헤브론병원 직원들은 오전 진료를 마친 후 로비에서 찬양과 기도로 오전 일과를 마무리한다. 왼쪽 뒷벽에 헤브론 정신에 대한 현판이 붙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새벽 2시부터 몰려드는 환자들
 
눈이 번쩍 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0분. 녹음기와 수첩을 챙겨가지고 병원 정문 앞으로 가보았다. 설마 했는데 이미 대 여섯 명이 와서 병원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5시가 되자 정문 앞은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경비원이 병원 출입문을 열자 환자들은 스스로 8명씩 차례대로 줄지어 앉았다.

▲ 진찰을 받기 위해 새벽부터 헤브론병원을 찾아온 환자들.     ©크리스찬리뷰
 
병원 직원은 그들에게 진료권을 나눠주었고, 경비원은 환자들의 팔에 일일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혼잡을 막기 위해 진료권을 나눠주었는데 이를 돈 받고 되파는 일이 있어, 팔뚝에 도장까지 찍어준다고 했다.
 
갓난아이를 안고 온 어린 엄마부터, 주름에 삶의 고단함이 짙게 밴 노인까지 마당에 늘어선 줄이 끝이 없다. 경직된 표정의 사람들이 눈만 마주치면 웃는다. 너나 할 것 없이 합장하고 수줍게 인사한다. 넉넉하지 않아도 소박한 삶속에서 희망을 찾는 이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심장이 아파서 왔어요.”
  “저는 배가 아파서 왔어요.”
  “먼 지방에서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무료로 진료를 해주니까요.”
 
▲ 헤브론병원에서 지난 3월, 9명의 어린이가 심장수술을 받았다.     © 크리스찬리뷰


평생 동안 의사에게 진료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환자들도 있었다. 장애인들도 많았다. 가슴이 저려왔다. 문득 이런 말씀 하나가 떠올랐다.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세상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보면 나를 돌보는 것과 같다’는 이 말씀이 기자의 영혼을 흔들며 울려왔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제대로 된 병원 진료를 받을 돈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헤브론병원은 정말 생명이었고 희망이었다.
 
아침인데도 후덥지근하고 더웠다. 옥구슬 같은 눈망울을 가진 어린애가 울어댄다. 준비해간 코알라 인형을 주자 언제 울었냐며 딱 울음을 그쳤다. 아이 엄마가 ‘어꾼 찌란’(캄보디아어로 ‘많이 감사하다’라는 말)하며 합장을 했다. 기자는 이 천국의 풍경에 감동하여 어쩌지 못했다.〠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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