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도단(YWAM) 창설자 오대원 목사

한국에서 추방되어 한반도를 섬기는 사람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4/27 [10:29]
▲ 예수전도단을 창설한 오대원 목사가 금년에 팔순을 맞아 지난 3월 시드니예수전도단 베이스에서 팔순잔치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영화 '올드보이'(Old Boy)를 아는가? 주인공 이름이    '오대수'이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살자'라는 뜻이다.
 
한국 '예수전도단(YWAM)' 설립자를 알고 있는가? 그의 이름은 오대원(David E. Ross)이다. 성은 로스(Ross)와 가장 유사한 발음이 '오'씨라서, 함께 살던 한옥집 주인인 오복균 장로의 ‘오’씨가 됐다. 이름은 대원군의 ‘대원’으로 지었다. 대원군은 나라를 아끼고 사랑했으나,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인물이었다. 대원군같이 한국을 사랑하고, 대원군과는 반대로 '기독교를 잘 전파하라'는 뜻의 역설적인 이름이다.
 
오 목사는 한국말을 한국인 이상으로 잘한다.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 물었다.
 
"저는 오 목사님처럼 한국말을 잘하는 백인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떻게 한국말을 잘하게 되었습니까?"
 
▲ 오대원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 후 영락교회에서 대학생 영어성경공부를 인도했다. 1961년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오대원 선교사.     © 예수전도단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사랑을 나누고 싶듯이,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니까 그들과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인을 사랑하게 되니 한국어도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오목사는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기 전에 한국어를 미리 배우지 않았다. 사투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억양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처음 배웠다.
 
한국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종로 거리를 누비며 대화를 시도했다. 빵집과 다방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생활 한국어를 익혔다. 뿐만 아니라 부인인 엘렌과도 한국어로 대화했다. 인터뷰 내내 오 목사는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함은 물론이고, 우리말에 담겨 있는 정서를 느끼면서 감정을 싣고 이야기를 하였다.
 
언어란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 이상으로, 언어 안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다.

▲ 시드니예수전도단 DTS 개강예배에 참석한 오대원 목사와 부인 엘렌 사모.     © 크리스찬리뷰

3주간 배를 타고 한국으로 - 1961년
 
오 목사가 선교사의 소명을 갖게 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53년 여름, 청소년수련회에 참석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 그때 ‘다른 민족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열방에 나가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뜨거운 소망이 일어났다. 또 그리스도의 구원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방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선교사로 살기로 결심했다.
 
미국 테네시 주 킹대학에 다닐 때 ‘선교동호회’(Missionary Society)에 가입했다. 선교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선교지에 대해 연구하고 중보기도하는 모임이었다.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엘렌 역시 선교사로 소명을 받은 후 모임에 참여했다. 엘렌의 부친은 목사이자 성서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였다. 독실한 기독교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따뜻했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난 어린시절 부친이 돌아가신 후 내향적인 아이가 됐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꿋꿋하게 양육하셨고 늘 내 편이 돼주셨다. 내가 선교사로 결단했을 때 말리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셨다."
 
부인인 엘렌과 오 목사는 가정환경과 성격이 달랐지만 선교에 대한 동일한 관심으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치된 마음을 갖고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졸업 후 함께 버지니아 주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 진학해 한 학기 다닌 후 1957년 한 가정을 이루었다.
  
▲ 오대원 목사 팔순 오찬 모임에 참석한 홍관표 목사 부부, 오대원 목사 부부, 하태식 목사 부부(오른쪽부터)     © 크리스찬리뷰

신학교로 진학하면서 대학선교에 마음을 두게 된 둘은 선교지로 대학선교를 함께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흔들림 없이 선교사로서의 길을 준비했다.
 
그러다 한국인 선교사들을 만나는 기회가 주어졌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University Bible Fellowship) 배사라, 대전지역의 농촌 선교사로 헌신했던 R K 로빈슨 목사와의 만남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국 교환학생들도 만나게 되면서 한국을 관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과 관련된 여러 사람을 만나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선교지를 한국으로 결정했다.
 
부부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에서 일 년간 캠퍼스 사역을 하였다. 곧 바로 한국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총회에서는 일 년간의 선교사 준비기간을 요구했기에 60∼61년 교회와 대학 캠퍼스에서 사역했다.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은 배움과 열정이 있는 열려있는 학교였다.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수양회를 열어 말씀을 전했다. 한 장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기도 하였지만, 주로 대학교 선교에 힘썼다.

▲ 본지 영문편집위원 김환기 사관이 오대원 목사와 인터뷰를 마친 후 그레노리에 위치한 시드니 예수전도단 베이스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예수전도단 설립 - 1972년

한국 예수전도단은 1961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된 오대원(David E. Ross) 목사에 의해 1972년에 설립되었다. 오대원 목사의 사역은 젊은 층, 특별히 대학생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선교는 1967년 서울공대 기독학생회 사역으로 시작되었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오히려 말씀으로 돌아가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그 뜨거운 열정을 주께 돌이키면 좋겠다는 비전을 품었다.
 
예수 전도단의 출발은 '화요기도모임'을 시작하였다. 한동안 매주 화요일 광화문에 있는 '구세군회관'을 빌려 집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예수전도단'이 활발하게 활동할 때 YWAM(Youth With a Mission)은 국제적인 단체로 성장하여 한국에 지부를 설립할 가능성을 타진했다. 1973년에 YWAM이 '예수전도단'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단기선교를 왔다. YWAM은 오 목사에게 통합을 제안하였지만 거부를 했다. 만약 미국에서 선교사들이 대량으로 밀려오면 한국인 리더를 양육하는데 장애가 있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 목사는 YWAM과 교류는 하였지만 통합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79년 안식년 중에 오 목사 부부는 YWAM의 열방대학에서 예수제자훈련학교(DTS, Disciple- ship Training School) 교육 받을 기회가 있었다. 이 때 오 목사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이미 세계적인 베이스 캠프를 가지고 있는 YWAM과 통합을 한다면, 한국의 젊은이들을 세계로 파송할 수 있는 비전을 갖게 된다.
 
인터뷰 중에 진정으로 오 목사는 한국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통합의 거부도, 통합의 결단도 자기중심이 아닌 한국인 중심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79년 9월 28일 예수전도단 사역을 YWAM과 연합하기로 결심하였고, 이에 따라 1979년 말에는 남장로교 선교사 직분을 사임하였다. 1980년 초 태국 치앙마이 봄 선교대회에서 통합이 이루어졌고, 오대원 목사가 한국 대표로 임명되었다. 정식 한국어 이름은 '예수전도단'으로, 영어 이름은 YWAM Korea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 탈북자들은 통일한국을 대비한 마중물과 같은 사람들이다라고 강조하는 오대원 목사.     © 크리스찬리뷰

예수전도단과 YWAM의 통합 - 1980년
 
'To Know God and Make Him known'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리자), YWAM의 모토이다. YWAM은 1960년 설립된 국제적인 선교단체이다.
 
창립자 로렌 커닝햄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파도와 같은 물결이 전 세계의 대륙을 덮은 환상을 보여주셨다.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어나서 큰 파도와 같이 전 세계의 각 나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YWAM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된 모든 세대들을 일으켜 복음을 열방에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며 파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적이고도 초교파적인 선교단체이다. 예수전도단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주님께 예배하고 순종하는 것은 물론, 그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가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열방을 제자 삼는 데 부름 받았다.
 
국제YWAM과의 연합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과 도전을 받은 것이다. 국내라는 지역적 한계에서 벗어나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갖게 됐다.
 
예수전도단은 최재선 선교사를 처음 해외에 파송하면서 열방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국제 YW AM과 차이점이 있다면, 전도단은 단기보다는 장기 선교사를 기르는 데 초점을 둔 것이다. 이후 예수전도단은 예수제자훈련학교(DTS), 대학생제자훈련학교(UDTS), 성경연구학교(SBS) 등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성장해 갔다.
 
오늘날 YWAM은 전 세계 180개 국에 1천여 개의 지부를 두고 18,000여 명의 전임사역자들이 함께 사역하는 단체로 발전하였으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는 세계선교를 위한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별히 열방대학을 근간으로 예수제자훈련학교, 선교사훈련학교, 성경연구학교 등의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교육, 훈련하여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와 방법을 사용하여 8개의 사회 각 영역(8 Mind Molders:정치, 경제, 교육, 매스미디어, 예술, 종교, 과학기술, 가정)과 9개의 최전방 개척지(9 Front- iers:이슬람권, 힌두권, 불교권, 공산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25세 미만의 사람들, 인구 백만 이상의 대도시들, 미전도 종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등의 모든 영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 팔순 축하 모임에서 오대원 목사 부부     © 크리스찬리뷰

뜻하지 않은 한국 추방 - 1986년
 
88서울올림픽을 앞둔 정부는 해외 선교사들이 거리에 많이 다니면 후진국가로 보인다며 선교사들의 활동을 원치 않았다. 급기야 정부는 오 목사에게 한국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61년 이 땅에 발을 디딘 오 목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에 머물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정부의 추방명령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1986년 오대원 목사가 추방을 당할 때 '예수전도단'은 와해의 위기까지 오게 되었다. YWAM의 관계자들은 미대사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진정서를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떠나는 오 목사뿐 아니라 남아 있는 예수전도단도 '위기'였다.
 
그렇다, 그것은 '위험'일 수도 있고 '기회'일 수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야 하나님께서 예수전도단에게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젖을 떼는 기간과 같았다. 오대원 목사만 의지했던 예수전도단은 이제 오 목사 없이 홀로서기 시작했다. 오 목사는 추방 후 몇 년을 아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추방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오 목사는 이 사건을 후에 이렇게 간증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우리를 떠나게 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너무 바쁘게 일해 왔습니다. 그 결과 ‘주님과 함께 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일하는 시간은 주님의 임재를 기뻐하고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기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너무나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난 선교사로서 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 동안 난 약간의 칭찬을 받는 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나를 한국 밖으로 옮기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셨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선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침묵해야 들리는 소리가 있고, 눈을 감아야 보이는 세계가 있으며, 떠나야 품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오목사는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만 품었지만, 추방됨으로 '한반도'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안디옥 국제선교 훈련원(AIIM) - 1994년
 
오 목사는 1994년 시애틀에 ‘안디옥선교훈련원’(AIIM: Antioch Institute for International Ministries)을 개원했다. 훈련원은 국제 YWAM 소속단체로 선교 훈련, 북한연구학교, 캠퍼스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 훈련원은 선교사를 훈련하는 ‘세계선교 센터’, 선교사와 교회 봉사자들이 재충전하는 ‘희년 쇄신 센터’, 북한 선교를 위한 ‘새 코리아 센터’로 구성됐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전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훈련하여 열방을 향한 부름에 순종하며 살게 하고, 교회를 동원하여 영육간의 잃어버린 자를 찾게 하며, 선교사와 다민족 공동체의 예배와 기도를 돕는 것이다.
 
오 목사는 ‘안디옥선교훈련원’ 설립 목적을 4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선교센터의 중심사역은 4가지가 있다. 첫째 북한선교사역, 둘째로 선교사 모집과 이들을 훈련시키는 사역, 셋째로 장기 선교사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사역, 넷째 대학생 선교 및 구제사역 등이다.
 
특별히 그는 한반도의 결렬된 틈 사이에 들어가 중보하며 남과 북이 함께 변화되어 새로운 하나의 코리아를 만들자는 ‘뉴코리아’(New Korea) 운동을 펼치며, 한국과 해외에서 통일관련 캠프와 훈련학교(NKSS), 세미나(NK seminar) 등을 열고 있다.
 
원래 NKSS(North Korea Study School)는 '북한연구학교'의 약자였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뉴 코리아 섬김학교(New Korea Servant School)로 의미를 확장시켰다. ‘뉴코리아’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강력한 힘을 갖고 한국으로부터 세계 모든 국가에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남과 북에 있는 백성들이 합쳐지도록,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한반도에서 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오 목사는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도 유별나다. "남북한 통일을 이루는 하나의 열쇠는 북에서 내려온 2만 7천여 명의 탈북주민입니다. 북에서 남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내려 보내신 하나님의 커다란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적인 해답은 그들이 박해 때문에 내려왔거나 북에 있는 그들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남과 북의 사람들이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북에서 남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 탈북자들은 통일한국을 대비한 '마중물'과 같은 사람들이다.

▲ 팔순 축하 케익 촛불을 끄는 오대원 목사 부부     © 크리스찬리뷰
 
모세를 부른 나이 - 2015년
 
오 목사는 1935년 생으로 모세가 소명 받을 때의 나이와 같다. 80세인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40년을 더 살았다. 시편 150편 중 모세가 쓴 90편 10절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다. 자신은 120세까지 살았으면서, 왜 후대 사람에게는 이런 가혹한(?)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 목사의 ‘팔순 감사예배’가 시드니예수전도단 318 베이스에서 열렸다. 이날 설교를 맡은 홍관표 목사는 사도행전 20:17-20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오대원 목사의 80년 사역을 사도 바울의 사역과 비교하여 말씀을 전했다. 
 
"바울이 '겸손, 눈물, 인내'로 사역한 것처럼 오 목사님도 그렇게 사역하셨습니다." 언급한 세 가지 덕목 중에서 겸손이 오 목사님에게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입니다.
 
그를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식사를 하면서 홍 목사는 오 목사에게 90세 생일도 본인이 설교를 해야 한다며 본문과 제목을 미리 알려 주었다. 딤후 4:7절 ‘의의 면류관’이다. 이에 오 목사도 질세라 “저보다 4살 연배인 홍 목사님의 90세 생신 때 제가 먼저 설교를 해야죠”라고 웃으며 화답했다.
 
오대원 목사를 소개할 때 사용하는 많은 미사여구가 있지만, 그와 인터뷰하며 느꼈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대신하며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그는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님의 가슴으로 세상을 품어, 주님의 손으로 세상을 돕는 사람이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 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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