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은 성숙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야 한다

크리스찬리뷰 20년 엿보기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2/01 [15:05]

한 아이가 출생했습니다. 이 아이는 출생할 때 많은 사람의 기대도 한 몸에 받았지만, 시기와 질시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그 아이가 자라서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것이지요. 당연히 홀로서기를 해야 할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독불 장군 미래 없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믿고 있기에, ‘더불어 함께’ 걷기를 고집합니다.

▲     ©크리스찬리뷰

우리는 그 아이의 이름을 ‘크스리’(크리스찬리뷰)라 합니다. 여아인지 남아인지 모를 크스리는 이름만 보면 여아의 이름이지만, 투박한 생김새는 남아를 꼭 빼어닮았습니다.
어쨌거나 20여 년을 살아오면서 우여곡절도 많았고, 사춘기를 넘어오면서 ‘만인의 연인’으로 자리매김했고, 이웃 동네 연적들의 그 많은 시기와 배신에도 꿋꿋이 야생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철따라 꽃피우고 열매 맺으며, 방황하는 순례자, 오가는 나그네들을 즐겁게 하며, 위로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 크스리가 이땅에 씨앗을 파종하며, 뿌리를 내리고 연한 순을 틔우고, 점점 자라 뿌리깊은 나무가 되어 샘이 깊은 물을 흠뻑 마시며 꽃피우고 열매맺은 일을 잠깐 되돌아 보고자 합니다. 자화자찬 같고, 민망하지만, 지난 세월을 지켜주신 에벤에셀, 임마누엘의 하나님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럽고, 이날까지 한 번도 결본호 없이 지켜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잡지사(雜誌史), 특히 이민 잡지역사에서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요 ‘맨손으로 풀베기’였기에 성장과정별로 기록하여 ‘성년의식의 기념품’으로 간직하려 합니다.     

 
영유아기 

이 아이의 임신기간은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더군요, 1989년 10월 19일에 임신하여 그해 성탄절, 어쩌면 예수님 탄생하신 날과 그렇게 맞추어 출생했는지요. 3개월만의 출생이라 소위 ‘미숙아’이긴 했지만, 워낙에 손(孫 )이 귀한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인큐베이터 속에 있어도 그저 좋아 싱글벙글했습니다. 그때 유모로 지켜보신 분들로는 김창식, 어윤각, 이상택, 최승호, 홍관표, 홍길복, 이상규 목사님들인데, 각 교단을 대표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산파로 수고하신 분들로는 아예 요람부터 만든 권순형 생부(生父), 그 산고를 지켜보며 지금까지 ‘고놈의 정 때문에’ 산부인과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조산파들이 바로 김명동, 조성일, 박성남, 천옥주 제씨들입니다. 물론 유모로, 산파로 눈물겹게 지켜보신 분들 가운데 세월의 퇴적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세계 속에 흩어져 계시지만 ‘첫사랑의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싶습니다.  

특히 아이의 배내옷(창간특집)을 꾸며 주신 분이 계신데,  이상규 목사님입니다. 당시 선교 2세기를 맞아 한·호 선교 100주년의 참뜻을 새겨보고 한호선교 역사와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호주장로교회의 한국교회 산고’로 배내옷을 만드셨습니다. 이 배내옷은 아이의 체형이 자라도 여전히 예전에 초등학생들의 명찰 밑에 붙인 손수건처럼 따라붙어 열 살 가까이 함께 있었습니다. 2000년 10월까지 100회 연재한 것은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국 기독교 잡지 역사상 최장기 연재물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다음해 11월, 아직 첫 돌도 안된 아이의 가슴에는 한국 최초의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 목사 (Rev. Joseph Henry Davies)의 육필 일기 전문을 영어 원문과 함께 8회에 소개했습니다. 이때는 원광연 목사님이 번역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 일기는 크스리가 열아홉 살 되던 작년(2009) 7월 16일에 호주에서 한국에 열 번째로 입국한 엥겔 선교사의 육필일기를 합쳐서 ‘쥬야 나를 불샹히 넉여 도아 주쇼셔’란 제목으로 한·호 선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펴내기도 했습니다. 결혼도 안한 크스리(잡지)가 단행본이란 옥동자를 낳은 셈이지요.

두 살 때인 1991년  6월 14일엔 '굶주린 이웃을 도웁시다'를 타이틀로 호주 월드비전이 펼치는 40시간 금식운동에 동참하며, 한인사회와 교회를 중심으로 모금 운동 전개하여 $9,386.73 성금을 전달하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아이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금운동은 그 후 여러 차례 계속 모금하여 40만 불 넘는 액수를 북한과 아프리카 난민 등지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동포 북한에는 옷가지와 앰블란스를 보내기도 했지요.  

두 살이 되면서 이 아이는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땅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괴롭히는 이단을 척결하고 올바른 신앙을 심어드리기 위해, 한국에서 이단 연구 전문가로 순교까지 하신 탁명환 소장님이 이끄시던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월간 현대종교와 의형제를 맺고, 탁명환 소장님을 양아버지(편집고문)로 삼았습니다. 두 살 생일을 맞던 때 양아버지 탁명환 소장님을 모시고, 호주 순회 '이단종파특별강연회'로 시드니와 멜본에서 두 돌 잔치를 했습니다.

세 살이 되어가면서 이 아이는 문화에도 눈을 떴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는 운동에도 눈을 떠 걸음마도 하기 전에 턱걸이 대회, 골프대회도 개최하며 체중에 과부담이 되곤 했지요, 계속하여 크스리는 ‘언론의 문화적 사명’이란 교과서적 성장이론에 맞추어 운경합창단 초청 아프리카 난민돕기 자선음악회(다문화음악회)를 개최하여 수익금 전액 $8,303.52을 월드비전을 통해 남아프리카 앙골라 지역 난민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감리교 전국여선교회 연합합창단 초청하여 '특별성가의 밤'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네 살 되던 해에는 처음으로 산파 중에 한 분인 김명동 목사님을 중국 선교현황을 취재하도록 파견하기도 했고, 한국창조과학회장 김영길 박사 초청 '창조론' 특별 강연회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 해 연말 김영삼 대통령 내외 호주 국빈방문 동행취재를 했습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내외분,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 이명박 대통령 내외분 등 모국의 대통령들이 호주를 국빈 방문하실 적마다 꼬박꼬박 빼놓지 않고 따라다니며 이야기거리를 생산해 냈습니다.

이 취재기록은 호주에서 발행하는 한인 언론 중에서 과히 독보적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만큼 크스리가 가진 ‘기독교 잡지’의 한계를 벗어나 훨씬 지평을 넓히며 크스리를 대하는 모든 분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심어드리고자 했습니다.

 
소년기  

다섯 살 되던 해, 새해벽두엔 제1회 기독교 문예작품 및 신앙수기 공모 입상작을 발표했습니다. 시 부문에는 당선작을 냈지만(이정민의 ‘은혜'), 나머지 부문에서는 가작을 내는데 그쳤습니다.

여섯 살 때는 한국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을 호주 공연에 유치하여 시드니, 캔버라, 멜본에서 공연했는데, 특별히 캔버라에서는 연방 국회의사당 그레이트홀에서 공연하여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일곱 살 때가 되던 해 7월 9일에는 시애틀 '샛별무용단' 초청 공연했습니다. 이 무용단은 미국의 입양아 및 어머니, 2세 교포 자녀들로 구성된 한국 전통 무용단(26명)인데,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이 공연은 다시 열아홉 살 되던 작년에, 역시 입양아 출신으로 워싱톤주 상원 부의장으로 계신 신호범 박사도 함께 오셔서 앵콜 공연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통상 여덟 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크스리도 여덟 살 되던 해인 1998년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그랬는지 모르나 호적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크스리가 찾은 호적은 그해 5월 호주-뉴질랜드 종교기자협회(Australasian Religious Press Association) 회원사로 가입한 것입니다. 이는 호주에서 영어 이외의 문자로 발행되는 매체로서는 첫 번째로 정식 호적에 올린 것입니다. 그 다음 달인 6월 11일엔 한국기독교잡지협의회에 정식 등재하여 역시 해외 한인 잡지로서는 크스리가 처음으로 호적을 찾은 것입니다.

아홉 살이 되던 해, 4월 1일엔 크스리는 사진도서관(Photo Library)을 개관하여 그동안 축적해온 자료들을 함께 나누고자 했고, 한국지사도 열었고, 예배와 성숙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하며 신앙생활의 길잡이가 되고자 했습니다.

5월 14일엔 '시드니 로얄 이스터 쇼'를 취재 보도한 호주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한 시상식에서 크스리는 다문화 언론(Multicultural Media) 부문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8월엔 한기총 탈북 난민보호 UN청원을 위한 1천 만 명 서명운동 전개하여 1천 5백여 명으로부터 서명받아 한기총 호주지부(장경순 목사)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열 살이 되던 2000년은 시드니 올림픽으로 크스리도 덩달아 바빠졌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장애자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지추촌 예수 대행진’에 2천 명 규모의 한인합창단이 참가할 계획을 추진하여, 퀘스트 사무실에서 한인교회 대표자 첫 번째 준비모임을 갖고 소위원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크스리의 생부인 권순형 산파는 서울 사랑의교회를 방문하고 옥한흠 목사님에게 ‘지구촌 예수 대행진’ 취지를 설명한 후 지휘자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여 그 교회 호산나성가대 지휘자 김홍식 집사를 객원지휘자로 초청하게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열 살이 되면서 크스리의 활동 영역도 점점 넓어지고 구체적이 되었습니다. 그해 3월 3일~15일, 크스리는 열 돌을 맞아 한·호 선교 110년을 재조명해 보는 특별기획으로 호주 선교사들이 사역했던 부산, 경남지방의 선교현장을 순회하며 구석구석 이야기거리를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는 권순형 생부, 김명동 산파, 엄상익, 정창길 한국 연락책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고, 이들의 움직임에는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창신학교를 지금 책임지고 계시는 강병도 총장님이 크게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크스리의 생부는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를 비롯한 호주 선교사들의 한국 사역을 기념하는 ‘한국 선교 기념비 건립’ 추진 모금 운동 전개하며 이를 위해 한국의 언론(부산일보, 기독교방송, 국민일보)들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해 9월 15일~10월 1일에 크스리는 시드니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그 얼굴에 담아냈으며,  10월 18일~29일에는 시드니장애인올림픽은 더욱 뜨겁게 이야기거리를 쏟아냈습니다. 이때 크스리 가족은 한국민속풍물사진전 수익금 $6,000을 시드니장애인올림픽조직위원회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열 살을 보내는 세월의 길목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대한기독교교육협회)란 첫아들을 낳아서 출판기념회를 UTC강당에서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열한 살이 되던 해 크스리는 지평을 일본으로 넓혔습니다. 4월 30일~5월 12일 동안 ‘일본 속의 재일동포와 한인교회 발전사 그리고 일본 선교의 비전’을 주제로 일본 선교 현황을 파악하며, 일본 속의 재일동포와 한인교회 발전사를 추적하기 위해 일본으로 잠입하여 11회에 걸쳐 일본선교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크게 이야기거리를 발굴하는데 도움을 주신 분으로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일본 현지교회인, 오사카 우에마치교회(손일구 목사), 에이와교회(김안홍 목사), 오사카중앙침례교회(함광옥 목사)입니다.

그해 9월엔 프레드 나일 목사님(NSW주 상원의원, 호주기독민주당 총재)께서 크스리 권순형 생부를 기독민주당 9월 정기 월례회 강사로 초청하여 NSW주 국회의사당 와라타 룸에서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이때 생부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문서선교사로서의 크스리의 역할과 사명 등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호주 기독교계에서 연한 순처럼 자라오던 크스리의 존재감을 인정해준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이어 9월 호에 빌라우드 이민수용소에 3년 4개월째 감금되어 있던 서재오 씨 인권문제를 처음으로 크스리가 알리자 한국의 주요 언론기관, 인권단체,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에서 깊은 관심을 가질 정도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SBS TV 문성근의 다큐세상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팀에게 크스리가 갖고 있던 모든 자료를 제공했으며, 최상재 PD가 시드니 현지로 와서 서재오 씨를 비롯한 시드니총영사 등 관계자들을 만나 취재하고 11월 3일 전국에 방송되었습니다. 크스리의 영향력이 재삼 확인되는 순간이었고, ‘작은 영웅 크스리’의 역할을 재삼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크스리는 내친김에 서재오 씨 인권유린 문제와 관련하여, 빌라우드 이민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서 씨의 진상조사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호주지부 법률가 존 클럭스턴 씨를 3번이나 만나 앞으로의 전망과 한국 교민사회가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열두 살이 되면서 크스리는 호주 속의 한국, 한국인의 애환을 추적하고 싶었습니다. 그해 중반기(6월)부터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호주 속의 디아스포라 한국인’을 주제로 5만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 호주 전지역을 순회하며 지역교회들의 발전사와 교민 선교현황을 점검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민자들의 삶을 함께 나누는 기획취재 12개월 간 진행했습니다. 이때 우리 교포들의 크스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재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크스리 주최의 문화행사가 부쩍 많아져 바빠지기도 했습니다. 김은지 권사가 제작한 패션 드리마 ‘이 옷 입고 신부되어’가 윌로비 타운홀에서 공연할 때 인기 탤런트 정애리, 우상민, 박용, 김태리 외 뮤지컬 배우 15명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열세 살 될 때는 1월에 한국장로성가단(단장 안종호) 초청 연주회를 비롯하여, 4월엔 복음의 씨를 뿌린 호주 선교사들의 사랑에 감사하며 경남부산 지역의 성가단과 시드니 몇몇 교회 성가대가 함께 제1회 성가대합창제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콘서트 홀에서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4월엔 크스리가 호주 디아스포라를 구석구석 들춰 추적하면서 눈물겹게 만난 호주 가정에 입양된 우리의 핏줄을 위로하고자 한국 진흥문화(대표 박경진)와 연결하여 ‘해외 입양인 모국 방문단’을 모집, 한국 방문을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호주 가정에 입양된 입양아와 부모, 자원봉사자 등 24명 참가했습니다.

7월에는 크스리의 원형적인 족보를 추적하는 기획특집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그 뿌리를 찾아서'라고 이름 붙여, 고구마 뿌리를 캐는 농부의 심정으로 한국의 기독교 1번지 정동거리부터 우리 민족의 상록수여, 영원한 누나인 최용신(심훈의 ‘상록수’ 주인공)의 사역현장인 안산 상록마을까지 17개월이나 찾아 헤맸습니다.

열네 살 되던 해 연말부터는 크스리의 겉옷(표지)이 칙칙한 더블톤에서 원색 때때옷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 되던 해(2005년) 정초에는 그동안 고집해오던 크스리 문패(제호)도 붓으로 썼던 것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박수근 화백의 자제분으로 크스리의 산파역부터 예쁜 옷을 해입혀 온 박성남 화백께서 새롭게 도안을 했습니다. 새옷을 입고 새 문패를 달고 신이 난 크스리는 바로 그달부터 호주의 바로 이웃인 뉴질랜드 속의 디아스포라를 두루두루 살펴보며 일 년 동안 이야기거리를 거침없이 쏟아내었습니다.

2월에는 동남아 초대형 지진 및 해일 대재앙 ‘쓰나미’ 모금 운동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전해 9월 켐시에서 가스폭발사고로 부모와 동생들을 잃고 웨스트미드 아동병원 중환자실에서 화상의 고통 속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사투하던 손한주 군(8세) 돕기 모금운동 전개하여 고통당한 이웃 나라, 상처입은 우리 동포의 아픔에 동참하려 하였습니다. 나중에 손 군에게는 $6,831.40을 모금하여 전달했고, 쓰나미 참사에는 $53,841.20을 전달했습니다.

그해 2월은 무척 바빴습니다. ‘현시대의 이단과 그 대처 방안’을 주제로 호주, 뉴질랜드 지역에서 양부의 아드님들인 탁지원 소장님과 탁지일 교수님 두 형제분께서 이단종파 비판 강연회를 하시도록 주선했습니다.

10월에는 한·호 선교 116주년을 맞아 마산 창신대 제 2캠퍼스에 호주 선교사 순직 기념비 제막식을 갖기도 했습니다. 창신대학에 부지 2천 평을 제공했으며, 크스리에서 시드니 여러 교회들에서 모금한 $13,500로 취지문을 포함한 9개의 기념비를 세웠다가, 이 기념비는 다시 작년에 조성된 경남 지역 선교사 묘역으로 옮겨갔습니다.

2006년 크스리 나이 열여섯 살이 되던 해, 크스리는 드디어 200명의 형제들을 낳았습니다(지령 200호). 이를 기념하여 ‘몽골 기병 대해부-몽골 선교 바람을 따라서’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크스리의 생부, 유모, 이웃사촌 아저씨 장경순 목사님이 몽골로 날아가 징키스칸의 후예들인 몽골기병들의 체취를 뽑아왔습니다. 


열일곱 살, 청년기를 한 해 앞둔 정월엔  성신여대 교수님인 테너 이단열 초청 독창회 개최 바다가 보이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아담한 방에서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쯤 창간호부터 2007년 2월 호까지 호주연합신학대학 한국어 도서부에 206권을 기증했더니 클라이브 피어슨 학장님은 권순형 크스리 생부에게 감사패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해 3월부터는 크스리의 속옷을 컬러풀하게 입혔습니다. 나날이 예쁘게 단장되는 크스리의 모습과 더불어 더욱 성숙해가는 듯합니다. 

 
청년기  

열여덟 살이 된 크스리는 새해 첫날부터 큰 일(특종)을 터뜨렸습니다. 호주에서 한국에 간 최초의 호주인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님의 여권과 비자(1890년, 조선시대)를 발굴하여 세상에 빛을 쪼이게 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고령화 사회가 세계적인 추세임을 감안할 때, 시드니 한인사회도 노인 문제에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될 시점에 왔음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시드니에 거주하시는 우리 어르신들의 고민은 무엇이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대안은 무엇이지 3개월 동안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그동안 크스리는 한·호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충분한 자료 축적과 더불어 한호선교 120년을 앞두고 세부 행사를 계획하고 취지문도 발표했지만, 열 아홉 살 되던 해, 4월 23일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대회 개최를 예장 통합 총회와 호주연합교회 총회가 공동개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크스리는 교회일치와 연합정신에 의해 개최권을 양보하고 기념대회를 지원하고 협력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성년의 생일을 앞둔 크스리의 20번째 생일잔치는 2월 5일 UTC 채플에서 가질 예정이며, 이날 오페라 주연급 가수인 김창환(테너), 이미선(소프라노) 두 성악가의 축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조촐한 성년을 맞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은 크스리 ‘성년의 생일’을 기념하여 한국에서 날아온 축하객인 ‘이화 발레 앙상블’이 오후 4시, 7시 30분에 두 번 공연할 예정입니다.

오늘의 ‘성인 크스리’가 있기까지, 우리는 결코 혼자 잘 나서 저절로 쑥쑥 자란 것이 결코 아님을 고백합니다. 무엇보다 이날까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돌보아 주시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지켜보며 섬겨주신 아름다운 분들이 계시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그만큼 오늘도 크스리는 호주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성도님들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김이로 거듭나면서 보다 큰 성숙을 위하여 성큼성큼 걸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성인크스리’가 크고 굳건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20년 동안 한결같이 진자리마른자리 갈아누이며, 빠듯한 살림에 쌈지돈을 조금도 아낌없이 꺼내 놓으신 가장 큰유모이자 양어머니인 광고주들에게 가장 먼저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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