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부럽지 않다

캄보디아 정광수 선교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5/26 [12:28]
▲ 캄보디아 제2의 도시 바탐방에서 헌신하고 있는 정형외과 전문의 정광수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선교사로 불렀으면 황제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일찍이 제롬은 역설했다. 선교에 관한한 고전이라 할 만한 이 말은 선교의 소명자를 독려하며,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기도 한다.
 
선교사는 ‘하나님 나라의 황제’에 걸맞는 면류관을 쓸 것이기에, 세상의 황제가 누리는 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으리란 깊은 의미도 있다. 그럼에도 선교사로 떠나는 사람을 보며 안스런 마음으로 실눈을 뜨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그 선교사가 고국에서 ‘버리고 떠날 것’이 많을수록 사람들의 시선은 그러하다.
 
이달에 만난 정광수 선교사도 그런 인물 중에 하나였을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소위 ‘잘 나가는 정형외과 의사’로서 그가 선교사로 떠나면서 한국에 버리고 가야할 것들이 적지 않았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가 가서 ‘숨어사는 외톨이’처럼 선교일념으로 땀 흘리며 헌신하는 곳은 세상의 화려한 조명으로부터 훨씬 비켜나있다.
 
무엇이든 제1의 도시 중심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현실에, 그의 활동무대는 캄보디아 제2의 도시, 바탐방과 그곳으로부터 또 수십 킬로 들어가야 하는 변방이기 때문에 스펙이 많이 쌓인 ‘유명한 선교사’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갈매나무처럼 단단하다. 오랜 폭풍우를 견뎌낸 떡갈나무처럼 뿌리 깊은 영성을 가졌다. 김장철 배춧속처럼 꽉 차있다. 모든 일에 치밀하고 준비가 철저하다. 온유하다. 부드럽고 정갈하다. 목소리도 나직하고 봄바람 같다. 대화체로 인터뷰를 풀기로 했다.
 
▲ 순회진료 중인 정광수 선교사.     © 정광수

순회진료(Bantheay Cha, 2014) © 정광수


생활의 팍팍함, 신앙의 방황
 
- 먼저 선교사님의 신앙적인 배경을 듣고 싶군요, 가문에 선교의 소명에 관한 영성이라도 흐르고 있었나요?
 
“저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전형적인 유교적 환경의 부유한 집안에서 부모에게 풍성한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의사나 법관이 될 것을 바라시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 다녔습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러 들어가던 시대였지요. 고등학교는 세칭 일류라 불리는 서울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하여 온 세상을 내 손에 다 움켜 쥔 듯이 뻐기면서 지극히 이기적이며 교만하기 그지없는 학생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후 한 선배의 권유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저의 신앙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인격의 수련 장소로 활용하기로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 행복했던 시절은 잠시 지나가고, 일찌감치 사업에 성공하셨던 아버지께서 연거푸 세 번이나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정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일이었지요,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 했고, 저는 이 친구 저 친구 집에 옮겨 다니며 험난한 학교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급기야 채권자들의 협박에 시달리며 너무도 고통스런 그 환경을 이겨내기 힘들어 학교를 자퇴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와 교회 친구들의 위로와 설득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교회 근처에서 자취를 하면서 열심히 헤쳐나갔습니다.

▲ 가정교회 (Samraong Church)     © 정광수


그 무렵에는 교회에서 기도드릴 때마다 눈물 없이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고 얼마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첫 사랑의 관계가 이렇게 무르익어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생들의 과외지도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했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기도시간이나 토요일마다 모였던 고등부 모임은 저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재수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으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가정에 입주하여 과외지도를 하면서 식생활을 해결하였으며, 과외 팀을 무려 4팀이나 맡아서 정말로 하루하루를 처절하리만큼 바쁘게 보내야 했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 점차 하나님과의 관계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으나 점차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더니 급기야는 ‘남묘호렝게교’라는 신흥 종교(불교)에 흠뻑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달콤한 속삭임은 저를 영적으로 더욱 무디게 만들었으며, 하나님과의 첫 사랑은 그저 옛 추억거리로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1년여 기간 동안 사단의 간계로 빠져들게 된 우상과의 만남들은 점차 깊어만 갔으나 마음 한 곁에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한, 그래서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의 마음이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 가정의 어려움 못지않게 신앙의 여정도 파란만장할 만큼 참으로 팍팍한 생활을 보내셨군요.
 
“그렇지요. 의과대학의 처음 2, 3년간은 남들 다 해보는 그 흔한 미팅 한번 제대로 못해볼 정도로 낭만과는 거리가 먼 삶과의 처절한 투쟁 속에서 보내야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 중에도 우등상을 받으며 장학생의 모습으로 비교적 건강한 생활을 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갈수록 무거운 짐들을 이겨내기 힘들어 지쳐만 갔고, 수업을 빼먹고 당구장으로 카드놀이로 현실을 도피하려는 시도가 연속되었습니다. 그렇게 방황하고 있던 어느 해(1981년 12월 23일) 지금의 아내인 최은희 집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의사가 되고,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는 모든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은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공부방이 없어서 학교 병원의 락커룸에 환자용 침대를 갖다 놓고 기거하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학교 병원이 증축되고 있어서 감시가 소홀하여 그런 생활이 가능했지요. 연탄가스 냄새로 원인 모를 두통과 함께 힘겹게 살아야 했던 반 지하 월세 방에서의 생활도 하고 말입니다.
 
어쨌든 참으로 수많은 역경과 시련을 극복해가며 우리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 자며 일하며 공부해야 했던 전공의 시절에도 스승님들이나 환자, 간호사들에게서 받는 칭찬으로 보상받으며 살아갔지만, 삶의 목적을 잃은 채 그저 열심히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속 한 곁에 자리 잡고 있는 허전함과 무상함이 이제 저의 생각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잃었던 하나님과의 첫 사랑에 대한 그리움도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장시간의 골절 환자에 대한 수술을 마치고 그날 저녁 동료 의사와 함께한 회식 자리에서 만취된 상태가 된 채 늦은 밤에 병원 근처의 어느 교회 수돗가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횡설수설하며 눈물로 절규하였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그 시절의 저의 영적 혼란 상태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폭우로 파손된 다리 재난복구 현장을 방문한 정광수 선교사     © 정광수


하나님과의 열애시간
 
- 전문의가 되고 나선 생활이 많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을 터이고 말입니다.
 
“예, 94년도에 정형외과 병원을 개원하여 15년간 열심히 활동을 하였습니다. 1994년에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사람이 좀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매주 수요일마다 목사님을 모시고 환자들과 병원 식구들이 함께 로비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내방하는 모든 환자들은 더 이상 환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전도 대상자가 되었고, 입원한 환자들은 어김없이 주일이면 병원 봉고차에 실려와(?)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발이 부러져 기브스를 했던 환자까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배가 마쳐지면 야외로 나가서 맛있는 점심을 대접하며 매주 그렇게 소풍을 갔었지요. 아마도 환자들은 그 맛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병원에는 TV가 없었습니다.
 
대신 하루 종일 복음송이 잔잔하게 흘렀고 환자들은 한 번 내방하면 물리치료 시간까지 포함하여 1시간 가량을 복음송을 들으며 곤한 잠을 청하기도 했지요. 또한 신문도 없었습니다. 대신에 국제기드온협회에서 만든 소형 성경책을 수십 권씩 비치해 두고 심심하면 그것을 읽든지 가져가든지 하도록 했었습니다.
 
직원들은 틈나는 대로 껌에 일일이 성구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그리하여 내방하는 모든 환자들에게 그 껌을 나눠주며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입원 환자들에게도 점심시간에 그 껌을 식판에 올려주었는데요, 저녁 회진 시간 때면 껌에 붙여있는 성구 한절씩을 다 암송해야 했지요. 불교 신자들도 다 외우더라구요. 

▲ 깨끗한 물 마시기 보건 교육     © 정광수


그러나 이 과정이 결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죠. 병실을 회진돌 때 때로는 어르신들 앞에서 춤도 춰가며 온갖 원맨쇼를 다했었죠.
 
‘원장이 저렇게까지 하는데 그래 까짓것 한번 외워주자.’ 뭐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레 암송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수술 할 때면 환자의 입으로 함께 ‘아멘’을 하고서야 집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병원 식구들과 함께 ‘누가의료선교단’이라 하여 병원자제적으로 선교단을 결성했습니다. 병원 식구들이 그때부터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직원들과 함께, 그리고 주일에는 분당중앙교회 의료선교단과 함께 의료 선교차 시골 교회를 방문하면서 진료를 했습니다. 그렇게 선교하는 병원이 되기를 꿈꾸며 활기차게 성장해 갔습니다.
 
병원 근무를 마치고 저녁마다 부원장과 함께 분당 중앙 공원에서 노방 전도를 했던 기분 좋은 기억도 있네요. 어느 한 해엔 부원장은 100명을 전도하며 전도왕 상까지 받았지요. 이때는 정말이지 반쯤 미친 사람 같았어요. 하나님과의 열애기간이라고 할까요. 뭐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돈도 적지 않게 벌었었지요. 또 복지부 장관 표창이나 의료인 공로상 대상 등을 받으며 나름대로 명예도 쌓아갔습니다.”
 
- 해외의료선교의 비전도 자연히 꿈틀거렸겠습니다.
 
당연히 그런 소망도 있었고 결심도 했지요. 병원 개원하던 93년도 이전엔 솔직히 깊이 있는 신앙생활 못했습니다. 제가 전문의 트레이닝 받을 당시 한번은 술을 많이 먹게 되었습니다. 정형외과 수술 후 선배들이 고기 사주며 함께 어울리던 시절이었지요, 어느 날 술로 인하여 아내에게 실수로 폭행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그 이후 남편인 저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아내가 서원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뭔지 서원기도가 뭔지도 모를 때, ‘남편을 의사로 온전히 만들어 주시면 선교사로 헌신케 하겠습니다’는 기도를 드렸다고 해요, 하나님께서 아내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지요, 94년도에 병원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감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구요.
 
그러던 중, 97년 2월 27일에 가족이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병원 때문에 가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고, 아내와 딸 셋이 먼저 갔습니다. 2000년도에 딸이 다니던 뉴질랜드 은총교회 중고등부에서 피지로 선교 간다고 전화가 왔어요, 저에게 약품을 사갖고 오라고 하며 같이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해요. 그래서 1천만 원치 사서 함께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온 가족이 굉장한 도전과 감동을 받았고,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었습니다. 2주일 동안 피지에서 생활하면서 환자나 상황을 보살필 때 그 말씀이 선교사역 내내 필터링을 해주었습니다. 말씀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돌아와서도 그 말씀을 중심으로 간증문을 썼습니다. 제가 출석하던 분당중앙교회가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선교에 전혀 관심을 못갖던 시절이었는데, 너무 감동이 커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을 열심히 졸라서 1월과 7월에 단기 선교팀이 피지에 갔습니다.  이후 해마다 7월에 갑니다. 

▲ 마을 순회 어린이 사역     © 정광수


2000년도에 처음 가족이 다 같이 피지에 갈 때, 말씀을 받아서 체험한 것이 너무 큰 감동이라, 교회에서 갈 때도 말씀을 받아서 갔습니다. 말씀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메모해 둡니다. 놀랍게도 그 말씀이 현장에서 생활화 돼요. 말씀에 은혜가 되어 말씀 중심으로 생활하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다음 해 선교를 위해 말씀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말씀을 붙잡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생활에서도 조금씩 말씀중심의 삶으로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말할 수 없는 병원부조리가 많았는데, 그런 것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말씀중심으로 사니 2001년도에 네팔을 가게 되었을 때가 기억나네요. 네팔에는 정형외과 환자가 그렇게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정말 선교지에서 저를 쓰시려면 네팔로 보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상황들이 길이 열리지 않고 답답했습니다. 선교지 갈 때마다 은혜는 받았지만, 네팔의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보내는데 2004년에 딸들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딸이 다니는 교회에서 캄보디아 선교간다고 이번에도 똑같은 요청을 해왔어요, 당시 저는 해마다 선교를 가야만 했고, 예산을 미리 편성해 두었습니다. 일주일 가려면 항공권, 대진할 의사의 주급 등등으로 1천만원 정도 떼어놓아야 합니다. 그 해는 7월에 이미 다녀왔는데, 9월에 요청이 왔습니다.
 
도저히 돈이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파트 청약통장 2개를 몰래 준비해둔 것이 있는데 이것을 해약해서 가자했지요. 그런데 뜻밖에 2,3일 후에 우리 병원 인테리어 해준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나이가 어린데도 넉살이 좋아서 너무 오래간만에 전화를 해서 안부를 주고받는 동안에 이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잠깐만 기다려주세요’해요. 그 사장 부친이 충무교회 장로님이었는데, 갑자기 공돈같은 1천만 원이 생겼는데, 선교에 쓰고 싶었다고 해요.
 
다음 날 아침에 ‘다 통과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만나기 원합니다’하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사역 내역을 써서 토요일에 가니 현금으로 1천만 원을 주셨습니다. 약품도 엄청나게 들어왔습니다. 그때 돈이 너무 많이 남아서 매년 같이 갔던 치과의사를 초청해서 같이 갔습니다. 그렇게 네 사람이 짐을 290킬로를 가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한 고비는 있었지만 정말 하나님의 섭리로 인천공항에서 아무 제재 없이 짐을 전부 무료로 바탐방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 쁘레이선 마을 화장실 및 쓰라떡 공사 현장(20 12.6.)     ©정광수
 
네팔이 닫히고, 캄보디아가 열리다
 
- 그렇게 점점 선교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가셨군요?
 
“2000년부터는 해마다 1~2회씩 해외 단기선교를 다녀오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해외선교, 특히 네팔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난날들을 회상해보면 2000년부터 해외선교에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해마다 선교의 열정은 뜨거워 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그 길을 확정해서 보내 주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시간을 끄시는 것에 대하여 한편으로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주여 언제 보내 주시렵니까? 아직도 제가 부족합니까?’라고 허공을 향해 절규의 외침도 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광수야, 내 백성들을 위하여 내가 너를 저 땅 끝 마을로 보내려 한다마는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이는구나. 무슨 세상의 끈이 네 마음에 그렇게 가득하더냐. 그래 이것들을 끌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내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 짐들은 이제 내게 맡기고 가벼운 내 십자가 짐을 대신 매고 가지 않으련?’ 이렇게 말씀과 연결된 하나님의 음성이 내면으로부터 들렸습니다.
 
그렇게 잘 운영되던 아름다운 병원을 포기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들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전문의 자격증을 내려놓고, 장관 표창장이나 의료인 공로상 대상과 같은 것을 받으며 쌓았던 세상의 명예를 내려놓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어요. 지위와 지식과 제물 등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그만큼 더 힘든 과정이 요구될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에 더 깊이 빠져있을수록 그만큼 더 고통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내는 또 많은 것들을 내려놓으면서 얼마나 심한 고통을 이겨 나왔는지 모릅니다. 한때는 정형외과 원장의 아내로서 이런저런 세상적인 부요함을 누려 볼만도 한데 해외여행이라고는 그저 못사는 나라 선교여행이 전부였던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선교사가 된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서 가시처럼 찔러댈 때가 있습니다.
 
그나마 선교여행 덕택으로 여러 나라들을 비행기타고 다닌 것으로 억지 위로를 하며 우리 주님 십자가를 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아내와 저는, 중풍 병자로 치매 환자로 남겨지게 된 양가 부모님들로부터 떠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지요.”
 
▲ 진찰을 받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     © 정광수


- 정말 선교사의 길로 걷는 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군요.
 
“저에게 온갖 시련과 고통의 굴레에서 훈련케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아내의 간절한 기도를 더 이상 간과하지 않으시고 기나긴 암흑 터널에서 끌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병원 개원하고 선교에 미친 듯이 몰입하던 중에 둘째딸이 중3 올라갈 때, 하루는 영어시험 문제를 물어보았어요. 한 문장을 끊어 연결시키는 문제였습니다. 내용이 ‘우리가 사는 것은 이 작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는...’이런 것인데 'small world'리는 단어가 확 들어왔습니다. ‘아 너네들 시대에는 작은 세계, 작은 영어의 필요성이 크겠다’는 생각이 확 들었습니다.
 
그해 7월, 뉴질랜드 친구에게 연락해서 여행을 했습니다. 사실 그때 아내는 뇌종양이 있었습니다. 여행 후 뉴질랜드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압박감이 있어서 곧바로 뉴질랜드 이민을 결행했습니다. 선교적인 사고의 움직임도 있었지요.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기러기 아빠로 4년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대학 들어가고 나서 아내랑 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아내는 뉴질랜드 살면서 뇌종양이 특별한 치료를 안 해도 회복되었습니다. 약을 끊어도, 증세도 없어지고 해서 한국 가서 보니 치료가 되었더라고 해요.’
 
- 터널과도 같은 고통의 세월도 겪으셨군요. 네팔을 마음에 품었다가 왜 캄보디아로 바뀌었습니까?
 
“여러 차례의 해외 단기 의료 선교를 다녀오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을 향한 복음의 열정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 11월 캄보디아 정탐 여행 중 하나님께서 캄보디아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향한 특별한 소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기에 우리 부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즉각적인 결단을 하게 되었고, 총신대학교 선교대학원 과정을 은혜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매번 선교 여행을 떠날 때마다 특별한 말씀을 품게 하셨는데 그 말씀들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니 놀랍게도 그 말씀들 가운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저는 장기선교사로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제 몸은 이미 고속 질주하는 선교열차에 실려 있기에 발을 내려놓을 수도 없는 처지가 돼버렸습니다. 이제는 선교의 사명을 생각치 않고는 제 인생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출근길에 기독방송 틀고 가는 시간 동안, 기도시간이 확보 안되어 차 안에서 왕복 출퇴근 시간을 통성으로 기도시간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방송에서 말씀 한 마디가 탁 나오는 것이 감동이 되기도 해요. 다양한 통로로 말씀을 주시면 그것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캄보디아로 단기선교 떠날 때 말씀이 없어서 아주 마음이 불안했는데, 넷이서 바탐방에서 이사야 54장 3절 말씀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캄보디아를 주노라’는 말씀으로 받았지요, 그 뒤로는 뭐가 그쪽으로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까지 말씀을 나열해보니 놀라운 것은 제 삶도 그 말씀 중심으로 살려고 했던 것같았습니다.
 
선교사로 가는데 첫째 덕목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베이스이고, 마지막 캄보디아로 채워졌습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캄보디아로의 단기 의료선교의 기회가 열리며 여러 상황들이 캄보디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교지임을 점점 확신하게 하였고 드디어 출석하던 교회에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아내는 엄청나게 산을 좋아하고, 걷기를 좋아합니다. 스트레스가 좀 쌓이면 산에 가서 풀고 옵니다. 네팔에 가게 되었으면 아내는 정말 행복했을 것입니다. 산에 가서 정말 풀었을 것 같은데, 캄보디아로 결정되었을 때도 너무 흡족해 했습니다.
 
저희 속에 있던 견고한 진들을 1년 동안 다 토해내게 하시는 현장에서의 선교훈련, 백그라운드를 쭉 보았을 때, 저희의 생각으로가 아니니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인도하신 길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레 카페에서 직원(제자)들과 함께.     © 정광수


나의 사랑, 나의 소명, 캄보디아!
 
- 그렇게 캄보디아로 떠나셨는데 선교 지정학적으로 본 캄보디아의 중요성, 의의, 역할이라면 무엇입니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있는 나라이며 선교에 대하여 우호적이지는 않더라도 선교에 대하여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 있으므로 이 나라가 인도차이나의 선교의 메카가 될 수 있는 여건이 될 수 있어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의 인근 나라들에 선교적 기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국가로 판단됩니다.”
 
- 현재 주로 캄보디아에서 역점을 두고 있는 사명선언(mission statement)은 어떤 것들입니까?
 
“예. 첫째는 CHE(Community Health Evangelism)입니다. 마을 개발 사역과 함께 복음사역을 진행하여 마을의 총체적인 기독교적 변혁을 목표로 하는 사역입니다.
 
둘째는 보건향상 프로젝트를 통한 복음사역입니다. 물 부족 현상과 깨끗한 물이 없음으로 인한 건강의 문제, 화장실의 절대 부족으로 인한 수인성 질환에 열악한 문제, 열악한 의료환경의 개선을 통하여 기초질병으로부터 예방과 치료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입니다.
 
셋째는 의료비 지원사업입니다. 마을 순회진료를 진행하면서 기초 질병에 대한 치료를 감당할 뿐만 아니라 중환자들에 대하여 1인당 U$1,000 내에서 치료비를 지원함으로써 가난하여 치료를 포기해야만 하는 주민들을 보살핍니다.
 
넷째는 가정교회 개척 및 교회지도자 훈련입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사역들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가정교회들이 세워지게 되면, 이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하여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하고 보다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다섯째는 인재 양육 사역입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중에 학교 성적이 우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장차 크리스천 오피니언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학사 사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BAM(Business As Mission) 사역입니다. 사역의 재정 자립을 목표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약국 개설을 준비하기 위해 펀드레이징 중에 있습니다.”
 
▲ 체사역의 일환으로 카페와 약국 사역도 진행 중이다.     © 정광수


- 이런 사명들 위에서 구체적으로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습니까?
 
“처음 본 교회에서는 바탐방을 전략지역으로 삼았습니다. 선교지에 선교병원을 짓기로 하고 병원을 통해 사역하고, 병원을 관리하는 선교사로 파송받았습니다. 제가 분당중앙교회 1호 파송 선교사입니다. 곧 목사님이 학교 사역을 위해 오십니다.
 
인터서버에서는 선교사 부인은 단순히 남편의 헬퍼가 아닌 따로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보조사역으로 하면 부인들이 우울증에 잘 걸리고 선교지에서 안좋기 때문에 개인적인 사역을 갖게 합니다.
 
한국교회가 어려움이 어려워지면서 영적 물적 후원이 전혀 안되는 상황입니다. 저의 아내는 언어 배우고 바탕방에서 고아원 사역하려니 그해 고아원 설립 금지령 생겼습니다. 둘 다 예정된 사역을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예견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다행히 체(CHE)사역을 합니다. 체사역을 오랫동안 훈련받고, 파송될 때도 교회적인 사역은 선교병원을 받아서 진행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마을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체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페 사역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일할 사람을 뽑을 때, 이왕이면 학생을 뽑아 ‘사람도 키우고 카페도 운영하는게 어떻게 할까?’하여 학사사역의 출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분당중앙교회가 3대 비전 중에 하나가 인재를 키워 세상을 변화시키자인데, 신앙생활에 인재 개발에 투자합니다. 19년 동안에 200억을 투자하여 크리스찬 오피니언 리더를 양육합니다. 이왕 똑똑한 사람들, 학교 성적과 현지 목회자 추천받아 같이 삽니다. 초기에는 멘토링했다가 지금은 부모 자식의 연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카페도 운영하면서 같이 삶을 하면서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는 후원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을 사역이 교회가 무너져가고 있는데도 사역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이루어져 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때 인터서버 이사장이 글로벌 케어 이사장, 메디칼 엔지오 지부장으로 코이카 마을 보건향상을 위한 프로젝트 내어 통과돼 마을 사역이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엔지오와 함께 하는 체사역의 모델을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 체사역을 잠시 중단하고, 마을의 물 개선, 화장실(70개 정도 새로 지음), 순회 진료가 이루어집니다. 최근에는 4년 반, 이렇다 할 열매가 없습니다. 체사역이 곧바로 예수님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눈에 띄는 업적은 없고, 교회가 생기지만 자발적이고 자생 가능한 토착적인 교회가 생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먼저 가정교회가 자연스럽게 생겨 가정교회들이 서로 예배당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최근 작년 의료비 지원 사업을 진행하는데 한국의 어떤 기관과 협력되어 1인당 1천 불 미만에서 의료비 지불합니다. 마을의 환자가 발생하면 데려와 여러 형태로 지원합니다. 그 치료 끝에 중환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합니다. 복음에 대해 문이 많이 열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복음을 아주 잘 흡수합니다.
 
그들이 가정교회가 되는 것이 최근에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있습니다. 선교사역을 토탈로 정리해보니 가장 신바람 나고 즐겁고 재미나는 것이 사역이 결국은 사람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체감합니다.”

▲ 순회 진료하는 정형외과의 정광수 선교사.     © 정광수


- 이제 단답형으로 재치있는 대답을 해주세요.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는 일은?
 
“‘인재를 키워 세상을 변화시키자’라는 핵심가치를 가지고 현지인 지도자 및 크리스찬 오피니언 리더 양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내일 우주의 종말이 와도 오늘 이 일만큼은 하고 싶다는 일이 있다면?
 
“아내와 함께 못해본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 10년 후, 20년 후의 꿈이라면?
 
“은퇴하고 나면 선교동원가로서 아내와 함께 세계를 일주하는 것.”
 
- ‘선교’란 한 마디로?
 
“사랑으로 포옹하는 것.”
 
-‘선교지'’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애통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곳.”
 
-‘신앙’이란 한 마디로?
 
“삶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
 
-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 후배들에게 간단히 멘토링이 될 만한 내용은?
 
“‘My life is my message’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지향하며 평소의 삶을 조정해가며 살려고 노력하면서 평시의 삶을 살고, 가능한 Vision Trip 형태로 현장 방문의 기회를 많이 가져 보시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쌓아 보세요.”
 
열대지방을 데우는 열정
 
바탐방에는 그의 베이스캠프가 있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고 어떤 방법으로든 쓰임받으려고 한다. 포놈펜에 있는 헤브론병원과는 6시간 거리(200킬로)이지만 유기적인 연대를 갖고, 정형외과 의사 카카오토크로 연락하고 지낸다고 한다. 간호대학 출강도 한다고 한다.
 
그의 ‘인생 후반전’은 일 년 내내 내려 쪼이는 열대지방에서 선교의 열정으로 그 대륙을 더욱 뜨겁게 데우며 하루해가 더욱 짧아지고 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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