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은 필연입니다

리뷰초대석/재외한인학회 회장 윤인진 고려대 교수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2/01 [15:36]
이민, 그 뿌리 깊은 역사

성경처럼 다양한 이민 카테고리에 대하여 방대한 자료를 남긴 책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이미 국가적 차원에서 이민제도가 실시되기 이전부터 이민은 자연스런 삶의 방편이었음을 보여준다.
 
▲ 지난 해 9월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세계 한인 디아스포라와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를 주제로 강연하는 윤인진 교수.     © 크리스찬리뷰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겪게 되는 ‘강제추방이민’을 필두로, 아브라함의 ‘순종이민’, 리브가의 ‘결혼이민’, 야곱의 ‘도망이민’, 요셉의 ‘노예 취업(?) 이민’을 비롯하여 ‘가족초청’ 이민을 한 야곱가의 70명 가족이야기가 창세기에 나온다.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입양이민’으로 애굽 궁정에 들어갔다가, 미디안 광야로 ‘망명이민’ 과정을 거쳐, 온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대대적인 ‘역이민’을 주도하고 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교육이민’, 모압땅으로 온 가족이 ‘생계형 이민’을 떠났다가 10년 만에 남편과 두 아들을 불귀의 객으로 떠나보내고 패잔병처럼 역이민을 한 나오미, 시댁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며 이방 땅에서 유대로 이민 온 룻의 이야기도 눈물겹다. 신약에서는 주로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복음을 위하여 ‘선교이민’을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과감히 결행한다.

이처럼 성경에는 온통 ‘전쟁이민’, ‘결혼이민’, ‘역이민’ 그리고 ‘선교이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 이민자들 가운데는 외국 땅에서 ‘이민자’(혹은 히브리인, 유대인)라는 ‘장애딱지’를 극복하고 권력의 정점에 이른 요셉, 에스더, 다니엘, 느헤미야도 눈에 뜨인다. 뭐니 뭐니 해도 성경에 나온 이민의 백미는 예수님의 ‘소명이민’이고, 대미는 하늘나라 혼인잔치로 참여하면서 이루어질 우리의 ‘천국이민’이 아닐까? 굳이 성경을 들추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는 이민의 역사라 할 만큼 신대륙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이주와 모험과 탐험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민자의 삶! 이 말 속에 녹아있는 함축된 의미는 ‘뿌리 뽑힌 인생’ ‘영원한 아웃사이더’라고 비하하는 사람도 많다. 언어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문화 차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 차별은 필수코스이고, 투잡스 속에서 더욱 팍팍해져 가는 인간관계, 부부관계도 만만치 않다. 자녀교육을 위해 왔다고 하지만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자녀가 어떻게 커 가는지, 뭘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휩쓸고(청소), 누비며(재봉), 주름잡는(세탁) 일에 날이면 날마다 파김치가 되고, 물먹은 솜이 된다. 가슴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 같은 답답함을 어쩌다 누군가에게 풀어놓고 하소연이라도 하면, “신앙생활 잘 하며 감사하며 살라” “불평 그만 하고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라”는 등 들으나마나 뻔한 충고나 듣게 된다. 아니 꺼냄만 못한 걸 뼈저리게 느낀다. 

 
이민자는 개척자

이민자의 삶! 이 말 속에는 ‘개척자’라는 훈장도 붙어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903년 1월 13일 새벽, 하와이 호놀룰루 샌드 아일랜드 항구에 겔릭호를 타고 도착한 102명의 한인 최초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인천내리감리교회 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선교적 사명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개척자들이다. 이들은 부둣가에서 마중 나온 선교감리사 조지 피어슨 목사의 기도를 받고 바로 기차를 타고 오하우섬의 서북끝 모쿠라 농장으로 직행했다.

▲ 윤인진 교수의 강연을 경청하는 손치근 부총영사(왼쪽)와 교민들.     © 크리스찬리뷰

이날 하와이 일간 신문 이브닝 불리틴(Evening Bulletin)은 "오늘 도착한 한인이민은 실험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이 새로운 이민들이 좋은 일꾼이라는 것과 이들이 이곳에서 친절한 태도가 증명될 때 앞으로 동양에서 들어오는 선박에는 한인이민들이 계속 실려 올 것이 분명하다"고 논평했다. 이어 2월 26일자에는 "1월 13일 이곳 농장에 도착한 한인들은 몸이 건장하며 농업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만족하게 농장 일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임금은 가장 저렴한 것이 현실이다"고 보도했다.

이후 1905년 4월말까지 65척의 이민선에 실려 7,843명(어떤 자료에는 7,226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이민 온 것을 보면 이들은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는 것이 증명된다. 매일 노동은 새벽 5시에 울리는 증기고동 소리와 함께 기상했다. 기차로 농장에 가서 아침 6시부터 노동이 시작되어 11시 30분까지 계속 일을 했다. 노동자를 감시하는 루나(감독관)는 한인 노동자들을 소나 말을 다루듯이 채찍으로 다스렸고, 이름대신 번호로 호칭했다.

30분간 점심시간을 가진 후 오후 4시 30분에 일을 끝내고, 5시에 귀가하여 저녁식사하고 잠시 휴식 후, 저녁 8시에 증기고동 소리로 ‘소등시간’을 알리면 불을 끄고 취침했다. 이들의 하루 수입은 당시 하와이 지역신문에서 지적한 대로 일당 69센트(여성들은 50센트)로 가장 저렴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당을 3등분해 25센트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3분의 1은 현지 학교설립과 운영자금으로 내놓고, 나머지 20센트만으로 생활했다.

이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은 주일엔 곳곳에서 기도회를 가지다가 1903년 6월 몰로카이 농장에서 김이제 전도사 인도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 후 교회는 이민사회의 센터, 예배공동체, 이민교육, 한국문화와 역사 교육장, 반일애국운동 및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민의 선조들은 아리랑을 부르는 심정으로 알로하오에를 부르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했다.

이밖에 우리는 러시아, 중국,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한민족 공동체를 가진 '뿌리 깊은 이민 역사'를 갖고 있지만 이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참으로 빈약하다 못해 경악할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외 한인들을 연구하는 한 학회가 20년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재외한인에 관한 연구, 조사사업과 바람직한 재외동포정책수립을 위하여 연례학술회의, 특별심포지움, 학회지 <재외한인연구> 발간, 재외동포총서를 발간하는 해왔는데, 바로 재외한인학회이다. 우리는 이 학회를 이끌고 있는 윤인진 교수(고려대 사회학과)와의 만남을 의미 깊게 생각한다. 특별히 재외한인인 '우리'를 연구하고 있기에.

 
이민자 연구, 본격적인 궤도에 올리다

UTC 본관 입구에서 만난, 눈사람보다 더 부드러운 인상의 윤 박사는 필자의 과실로 약속 시간보다 30분 이상 늦게 도착했는데도 선한 눈매로 맞아주었다. 그는 한국 내 재외한인 연구로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인 이광규 서울대 명예교수(인류학)의 뒤를 이어 재외한인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소위 제 2세대 학자이다. 이민자 연구를 본격적인 궤도에 끌어올린 그의 연구 편력은 우연이 가장된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 윤인진 교수는 각 분야에서 재외동포들 간의 네트워크를 만들면 상당한 유익이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 크리스찬리뷰

"학부(고려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85년 시카고대로 유학을 가서 석·박사 과정을 그곳에서 하게 된 계기는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의 도시문제를 연구해서 한국의 도시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자고 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81년도에 대학에 입학하여 활발하게 데모하며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던 전형적인 386세대인 저 역시 '한국의 발전 문제'를 두고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마다 달란트도 다르고, 기여할 수 있는 방법도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길거리 데모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도시문제가 한국의 큰 문제라 생각하고, 도시문제를 연구하여 사회에 큰 기여하고자 유학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도시사회학이 처음 생긴 시카고대로 유학을 갔다. 처음 공부하러 갔을 땐 한국과 같은 개도국의 도시문제를 공부하고자 했는데, 정작 그곳에서 도시사회학은 개도국의 도시문제가 아닌 미국 내 도시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지도교수의 전공이 미국 도시 내 이민자 집단을 연구하는 분이었습니다. 시카고 도심 내 이태리인, 흑인, 그리스인 등이 한 지역에서 살면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가는가를 연구하셨습니다. 그분의 도시사회학 강의 중에 흑인지역 내 한인상인들을 말하더군요. 귀가 번쩍 뜨이고 흥미가 가는 주제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누나와 매형들이 시카고에 함께 살고 있었고 이분들이 자영업에 종사하셨던 것이 제가 한인 이민자들의 자영업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인을 포함한 미국 내 이민자 집단의 자영업을 연구하여 석사학위를 받았고, 계속하여  미국의 한인 이민에 대해 연구를 심화시켰다. 처음 유학 가서 2-4년 정도는 흑인 지역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의 인종 갈등을 비롯하여 한흑 갈등과 관련된 연구를 하였다. 그는 시카고대에서 91년도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시카고대 공공정책 대학원 포스트 닥터 연구원을 거쳐, 92년부터 95년까지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아시안 아메리카 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그는 미국에 사는 한인들을 포함한 아세안 아메리컨들의 미국에서의 생활, 정체성, 인종간의 갈등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여러 해 동안 소수민족의 연구축적을 한 그는 95년 2학기부터 모교인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95년 당시 한국에서는 이제껏 연구했던 이민, 인종, 소수민족의 문제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인종 문제는 외국에서나 하는 것이지, 한국에서는 '네가 이제까지 공부한 것이 의미가 없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제가 미국 이민자들만 연구했는데, 97년부터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연구하면서 재외동포를 비교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현지조사, 설문 조사 등을 병행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97년 말 외환위기가 몰려오면서, 많은 한인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2000년도에는 2년 동안 캐나다 한인들을 현지 조사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0년 동안 재미동포를 연구하고, 한국에 와서는 중국 청도, 연변, 북경 등지의 조선족, 중앙아시아 고려인, 캐나다의 한인동포들을 조사하면서 재외동포들의 비교 연구 범위를 확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연구 결과는 2004년도에 『코리안 디아스포라 - 재외한인의 이주, 적응, 정체성』이란 제목으로 고대출판부에서 집대성하여 출판했다. 그리고 이 책은 2005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처음 미국 한인들의 연구로 시작한 것이 95년 한국에 나오면서 다른 지역의 동포들을 연구한 것의 산물입니다. 만일 미국에 계속 있었다면 미국 이민자들만 연구했을 것입니다. 한국으로 나가게 된 것이 재외동포들을 비교적 다방면으로 보게 된 계기가 됩니다. 앞으로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영어로 완성하여 하와이대출판부로 낼 예정인데, 한 장을 호주의 이민자들에 관한 내용으로 추가할 계획입니다."

 
이민자 연구, 디아스포라 개념으로 

이 책에 대하여 한성대 이태주(문화인류학) 교수는 조선일보 서평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출간으로 이전까지 해외 한인, 해외 동포, 한민족 등으로 다루어졌던 민족주의적 시각과 자민족 중심적인 관점으로부터 탈피하여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초국가적 상황에서 복잡한 민족 관계와 시민권 문제, 문화적 다중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해외 한인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연구서이다.(중략)
 
 
▲ 한국에서의 다문화는 학문적 정책적으로 많은 관심을 갖고 한국에 적합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인진 교수.     © 크리스찬리뷰

15년 넘게 줄곧 해외 한인 문제를 연구해온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던지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문화적 특성과 함의는 무엇일까? 저자는 한인 디아스포라는 거의 예외 없이 교육열이 매우 강하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고국에 대한 향수와 민족 애착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전문직에의 진출과 경제적 안정, 도시 자영업을 통한 한인 경제망의 확립, 한인 교회의 역할, 이주 과정에서 여성의 적극성, 근면성과 뛰어난 적응력 등이 어떤 지역에서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라고 보고 있다. 동시에 타문화에 대한 폐쇄성과 주류화 실패도 발견된다. 한인 디아스포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문제다.

원정 출산, 조기 유학, 기러기 가족,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이슈와 현상들은 모두 디아스포라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한인들의 이주와 정착 과정을 부석한 연구서의 가치뿐 아니라 한인 디아스포라를 통해 탈경계의 초국가적 현실 속에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기회도 제공한다"라고 평했다. 

서울대 정근식(사회학) 교수는 동아일보 서평에서    "이 책에서 세계화 시대에 다시 분산 이주하고 있는 재외한인의 모습을 국제이주, 망명, 난민, 이주노동자, 민족공동체, 문화적 차이, 정체성 등으로 광범위하게 정의되는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원용해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탈냉전 시기에 새롭게 전개되는 중국 조선족의 연해주 지역 재이주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러시아로의 재이주를 직업, 거주패턴, 민족관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정체성의 변화로 나누어 설명한다. 또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일본의 한인, 흑인이나 히스패닉계와의 민족관계라는 새로운 현실과 마주한 미주교포, 그리고 가장 최근의 신흥 이주지인 캐나다의 토론토를 분석하고 있다. 즉 세계화시대에 세계적으로 ‘새롭게’ 분산 이주하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종합적으로 담아내는 담대한 노력을 이 책은 보여준다"고 했다.

그리고 교수신문에서는 이 책에 대하여 "한마디로 여태껏 이뤄진 해외 한인연구의 결산내지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 이러한 서평들은 이제껏 그의 연구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과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민자 연구에 '디아스포라 개념'을 재외민족의 시련과 집단 경험 및 정체성을 설명하는 분석적 개념으로 사용했다 

 
상흔을 넘어 네트워크로

"성경에서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로 그리스에서 해외에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쓰여졌다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던 유대인'으로 의미가 고착되었습니다. 어원으로 보면 그들이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면서 그들의 고유의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염원으로 쓰였다가 최근에는 유대인만 아닌 다른 이주민의 용어로 쓰입니다.
 
 
▲ ‘세계 한인 디아스포라와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를 주제로 시드니한인회관 강당에서 열린 강연회 전경.     © 크리스찬리뷰
 
 
이주민은 희생자로 끌려간 것이 아닌 상업의 목적 등으로 폭넓게 확대하여 쓰여진 것으로 이 용어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방랑처럼 보느냐 등의 측, 다양한 형태의 이주민을 포함하니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성경적인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 본다면, 일종의 더 넓게 인간의 역사, 좁게는 한민족의 역사하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나 한 개인의 예기치 않은 결과로, 여러 나라로 여러 시기에 떠나갔지만, 당장 먹고 살기 어렵고 급박하게 떠났지 큰 목적으로 떠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곳에서 온갖 역경을 딛고 지금 같은 큰 공동체, 그로 인해 나타난 700만 재외동포는 엄청난 자산, 거의 전 세계, 대부분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과 같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에 포진한 것, 어떠한 원인 계기로 된 것인지 누구도 모르지만, 현 시점에서 볼 때 나타난 결과는 정말 중요한 인적 자원, 글로벌할 수 있는 자원들입니다."

한인 디아스포라는 한국의 식민지 역사와 근대화 과정에서 경험한 극심한 단절과 왜곡, 차별과 배제, 착종과 굴절 현상을 보여주는 스펙트럼과도 같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까레이스키’(고려인),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 멕시코의 애니깽 농장, 일본에서 극심하게 차별받았던 ‘조센진’(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서독에 간 간호사와 광부들, 미국으로 간 ‘양공주’와 아메리칸 드림, 전쟁고아와 해외 입양 등등 한인 디아스포라는 조국의 아픈 상흔을 더 많이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흔을 딛고선 재외동포는 이제 북한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큰 보배'라는 게 윤 교수의 진단이다.

"외국 국적을 가진 재외동포들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남북한 교류의 물꼬 튼 사람들입니다. 남북한의 정치적인 교류가 있기 전 재외동포는 남한 정부가 할 수 없는 화해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습니다. 1860년부터 시작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처음에는 각자 나름대로의 목적과 수단으로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다가 140년이 더 지난 오늘까지, 오랜 과정 속에 나타난 여러 세계 지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하나하나가 정말 값진 '진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호주의 코리안들은 '오팔'이고, 중국의 조선족은 '옥'입니다. 지금까지는 흩어져 있으면서, 자신들이 호주의 한인, 중국의 조선족,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으로 생각했지 '한민족'이란 큰 틀에서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보석들을 이어주는 것이 코리안 글로벌 네트워크가 시급합니다. 그렇게 하여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많습니다."

그는 세계화상(華商)대회 즉 화교들이 화상을 모델로 한 세계한상대회가 퍽 고무적이라고 하였다. 재외동포와 모국, 재외동포들 간의 비즈니스 네트워크로 출발했지만, 비즈니스뿐만 아닌 여러 분야에도 네트워크화 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세계 한인 정치인 한인 포럼, 재외동포 정책 세미나, 세계한인기자대회, 여성네트워크, 과학기술자 네트워크 등 여러 분야 동포들 간의 네트워크를 비롯하여, 임용근 전 오레곤주 상원의원 등 한인으로서 주류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과 각 분아에서 재외동포들 간의 네트워크를 만들면 굉장한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21세기는 네트워크 사회입니다. 처음엔 이런 네트워크가 없으면 안 됩니다. 서로가 잘 활용하면 좋은 게 됩니다." 

 
이민자 연구, 믿음 위에 세운 학문

그는 이민자 연구는 자신의 신앙과 믿음 위에 세운 학문임을 밝혔다.

"저는 집안이 기독교 집안입니다. 모태신앙이고, 장로님 가정입니다. 밑의 동생이 시카고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적인 영향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기도하면서 '믿음 위에 학문을 세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마이너리티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신앙적인 이유가 큽니다. 소수자는    '천대'의 상징어 아닙니까? 기독교가 약자들의 종교, 낮은 계층, 노예, 여자, 배척당한 사람들, 사회의 약자들에 대해서 대변하고, 보호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회정의를 이야기하는 종교 아닙니까?

소수자에 관심과 마음이 가는 것도 신앙적인 작용이 컸습니다. 학자들이 연구하고 정책을 세울 때, 그 정책 연구자들의 사상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등, 정의, 사회의 소수자, 약자들을 배려하고 보호하는데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정책을 세울 때 사회개혁은 기득권자들이 양보할 때 일어나지, 그렇지 않으면 개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기득권자들이 양보해야 하는 데 한국사회를 보면서 참 어렵습니다,"

그는 신앙인들은 비신앙인들과 달리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크게 평가했다.

"신앙인들이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신앙적으로 해석한다면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재외동포들 가운데 60-70%가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모국의 성도들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여러 이유로 세속화는 경우가 많은데, 재외동포들은 순수한 신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닮교회 집사로서 성가대 봉사를 하며 북한선교위원회에 관여하며, '한국인이면서 한국 내 이민자'인 탈북자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95년도 한국에 가서, 학자로서 아이덴티티를 한국적 상황에서 학문적인 돌파구로 찾게 된 것이 '한국에서의 소수자들이 누군가?'하여, 97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이 탈북자들입니다. 같은 동포이지만 한국에서는 이주민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적응의 어려움 걸쳐 있습니다. 계속 연구하여 북한 이주민에 대한 책이 집문당에서 『북한이주민: 생활과 의식, 그리고 정착지원정책』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12월에 출판되었습니다.

과거 냉전체제에서는 이들이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이제는 매 년 3천여 명이 들어옵니다. 남한에 약 1만 6천여 명이나 됩니다. 올해 들어오는 수를 합치면 내년에 2만 명이 되는데, 계속 특별한 대우를 한다면 그들의 정신 자세에도 부정적이 됩니다. 상당부분 의존성도 많이 생기지요. 탈북자와 남한 사회 정체성, 정책 등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과거 포상적 차원의 지원은 국민들이 공감도 못하고, 탈북자들 스스로 자립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부 차원의 지원은 이주민의 새로운 정착금의 차원이지, 목숨 걸고 자유 찾아온 사람들에게 초기 적응 단계의 지원을 넘어서면 곤란합니다."

탈북자 연구이 개척자가 된 그는 이들을 연구하여 책을 낼 때 책 제목 정하는 일부터 참 어려웠다고 회상했  다.

"처음엔 '자유북한인'이라고 썼고, 서문도 그런 맥락에서 썼습니다. 97년도에 처음 탈북자 연구를 시작할 때는 참 어려웠습니다. 국정원을 통해야 했습니다. 한사람씩 소개받아 면접하는 식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던 탈북자는 북한에서 옥수수를 연구하는 농학자였습니다. '옥수수가 중국에는 잘 자라는데, 왜 북한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가?' 이런 것을 연구하면서 그렇게 몇 번 중국을 드나들다 걸려서 러시아로 망명했다가 한국으로 왔습니다.

북한의 인민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의 복음화 운동을 하려다 북한으로 삐라를 뿌리는 풍선으로 처음 시작한 분입니다. 그분이 그때 자유를 찾아온 북한인연합회를 결성하면서 ‘자유북한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탈북자를 호칭하는 명칭은 귀순용사, 귀순자, 북한이탈주민, 새터민 등 다양합니다. 책의 서문에 이런 용어의 변천과정을 설명했습니다.

탈북자를 어떻게 호칭하느냐는 남한 사람과 탈북자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런 분들 중에 의식있는 사람은 자신들을 '자유북한인'으로 불러달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찾아 온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정말로 자유로운가를 질문하기 위해 ‘자유북한인’이라고 제목을 정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소하게 느낄 수 있는 제목을 정하게 되면 혼란을 가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로운 제목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한 제목이 ‘북한 이주민’인데 이 제목을 통해 탈북자를 더 이상 특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야 하는 이주민의 관점에서 보고자 했습니다. 

 
한국 내 이민자들

그의 연구 영역은 한국의 새로운 이민자 집단들로 더욱 확장되었다.

"예기치 않게 90년대 초반부터 외국인 근로자들이 계속 증가했습니다. 90년대 초반부터 처음 조선족과 농촌 총각들과 국제결혼이 늘어나다가 2천년 초부터는 국제결혼 중개업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친척 소개나 지방자치 단체에서 주도하다가, 결혼중개업소가 뛰어들면서 우후죽순으로 늘어났습니다. 농촌 마을에 '100%보장, 도망가지 않습니다' 등 낯 뜨거운 플래카드가 걸릴 정도였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결혼이민자가 13만 명, 이중 결혼이민여성들이 11만 명 정도 있습니다. 조선족, 베트남, 한족,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58,000명입니다. 그리고 한국 거주하는 3개월 이상의 장기 체류 외국인이 80만 명 이상입니다. 다양한 인종적, 문화적 배경의 외국인이 2000년대에 들어서 증가하면서 한국사회에서는 다문화에 대한 관심이 사회전반으로 커졌습니다."

노무현 정권 들어 외국인 근로자 인권이 강화되어 사회통합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잘 통합할 수 있도록 국무총리실 소속 외국인정책위원회에 윤 교수도 민간위원으로 일하며 이민정책에 관여했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부위원회입니다. 이민 외국인 다문화 정책을 심의하고 방향 설정하는 심의기관입니다. 그러면서 정부에서도 여러 부처가 다문화 정책과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시행합니다. 어떻게 보면 과도하다 할 정도로 집중 지원도 일어납니다. 구청 간의 경쟁도 심할 정도로 다문화가 사업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한국에서의 다문화에 대해 인식을 갖기 이전에 이민, 소수 인종 문제를 계속해 오던 것이 지금은 국제이주와 다문화란 좀 더 큰 틀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윤 교수는 인터뷰 후 시드니대 사회학자 네 사람과 만날 예정이라면서 아직 호주 이민사의 연구에 미흡함을 인정했다.

"안산 다문화 국제 포럼에서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해서 발표했습니다. 시드니대학 크리스틴 잉글스 교수는 호주의 다문화주의를 발표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시드니 온다는 것을 서로 알게 되어 그분과 다른 사회학자들과 미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주의 사회학자들과 이민자들도 코리안 이민자들에 관심이 많지만 여태껏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기대가 많습니다. 앞으로 호주 한인 이민사, 한인들의 호주에서의 생활 실태 정체성, 차세대 문제를 연구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국내에서도 잘 안된 지역분야가 호주입니다. 한국에서의 다문화가 학문적, 정책적으로 많은 관심을 갖고 한국에 적합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시점인데 호주의 경우가 모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려할 샘플이, 호주이민 정책을 비교연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볼 때 한국에서 호주의 다문화 연구는 깊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호주의 다문화 관심 목적은 우리나라가 개발하기 위한 사례 중에 하나로 채택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다문화정책의 하나로 호주의 다문화주의 정책을 연구하다 보니, 좀 연구의 깊이나 넓이가 제약됩니다. 호주 정부의 다문화 정책을 소개하거나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정도이지, 호주의 구체적인 현상들에 대한 연구는 적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호주에서의 다문화주의에 관련된 것도 굉장히 광범위한 주제입니다."

그리고 도시사회학을 공부한 그답게, 지역적으로 서울중심의 사람이 지방으로 자원분배하는 하는 것도 참 문제라고 했다. 지금 한국에서 뜨거운 감자인 세종시 등의 문제도 들었다.

"서울에 모든 자원이 집중된 사회에서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캔버라 행정도시를 연구하고 싶습니다. 서울의 과도한 팽창과 모든 권력과 자원의 집중을 막기 위해서는 권력과 자원이 지방으로 분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들도 학교 전체를 지방으로 옮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새로운 단과대학들은 지방 캠퍼스에 설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개혁이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양보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기득권의 질서에 도전하신 겁니다. 결국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회개혁이란 인간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소수자에 대해 관심 보호하는데 우선순위를 둔 것 아닙니까?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교회를 바라보면 걱정이 많이 됩니다.

한국의 기성교회는 수구세력이 되었습니다. 대형교회, 보수교회는 기득권층과 같이 움직이면서 사회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대형교회들은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성장, 교단의 성장, 교회의 성장에만 치중했지, 주위 사람과 나누는데 너무 인색한 것이 기독교가 비판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서로 물건을 통용하던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원자폭탄같은 큰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윤 박사를 만나면서, 21세기 글로벌시대에 세계를 가슴에 품고, 지경을 넓혀가려는 한국사회를 위한 최선의 치료법, 세계선교를 위한 식이요법은 바로 마이너러티, 즉 이민자 연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글/송기태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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