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넘어 의료 교육으로 ‘희망 씨앗’

현지 의료진과 매달 2회 마을 순회 진료 및 어린이 사역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7/27 [10:21]
▲ 캄보디아 의사들과 회진을 돌며 세심하게 환자를 보살피는 강재명 선교사(왼쪽)     ©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에서 기적의 현장을 보는 건 참 벅찬 감격이다.
 
친바낙(남. 37)씨가 연로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진료실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아들의 병을 치료해 달라”며 눈물부터 쏟았다. 친바낙 씨의 질환은 십이지장 궤양에 의한 출혈. 혈액소가 2(정상인 13)로 생명이 위험한 상태였다.
 
강재명(45. 내과전문의) 선교사는 난생 처음 보는 수치에 정신이 멍해졌다. 헤브론병원에서는 지혈시술이나 주사치료 등을 할 수 없는 처지.  뾰쪽한 수가 나올 리 만무했고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친바낙 씨는 간절한 눈길로 강 선교사를 바라보았다. 강 선교사는 자신에 대한 이 맹목적인 믿음을 저버릴 수도, 그렇다고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강 선교사는 자신이 대학시절 만성 활동성 감염을 앓아 치료약이 없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눈물로 기도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눈물을 닦은 강 선교사는 담담해졌다.
 
강 선교사는 친바낙 씨에게 “짧은 시간에 병을 고칠 수는 없지만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친바낙 씨는 알콜 중독자였고 치료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강 선교사는 결코 그의 고통을 좌시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에 보낸 이유가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강 선교사는 그를 입원시켜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간의 약과 수혈 외에는 도울 수가 없었다. 이 극한 상황에서 강 선교사는 하나님께 바싹 매달렸다. 강 선교사는 그에게 복음을 전했고 진심은 통했다. 기적적으로 출혈이 멈추고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강 선교사는 퇴원하는 친바낙 씨에게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친바낙 씨가 퇴원 후 일 주일 만에 몰라보게 호전된 모습으로 병원에 나타났다. 그는 마태복음 16장까지 읽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친바낙 씨는 거듭 고마움을 표시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 헤브론병원 의사들의 하루 일과는 QT로 시작된다.     © 크리스찬리뷰
 
하루하루가 은혜
 
포항 선린병원에서 근무하던 강재명 선교사가 김사라(42) 선교사와 함께 한솔(14)이를 데리고 헤브론병원에 온 것은 2011년 1월 5일이다.
 
“아내와 결혼하면서 선교사에 대한 비전을 나누며 서원했는데 바로 나가지 못하고 스리랑카 등지로 단기 의료봉사를 다녔습니다. 하나님이 훈련을 시키신 거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다니고 있던 포항 충진교회 목사님이 헤브론병원을 소개해 주셨어요. 그런 후 2009년 이곳에 단기선교로 왔었는데 하나님이 우리 부부를 이곳으로 부르심을 확신하게 되었죠.”   
 
강 선교사는 “처음 이곳으로 올 때는 꿈을 많이 가지고 슈바이처처럼 이 사람들을 돕고 캄보디아에 큰 일들을 남기고 싶었다”며 “그런데 5년이 지나 돌이켜보면 이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사람들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선교사님들이나 캄보디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얼마나 개성이 많은 사람인지 알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의사로서 잘 살았으면 제가 믿음이 좋고 굉장히 헌신된 사람으로 착각하며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현장에 와서 여러 가지 일들을 부딪치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무엇이든 할 수가 없구나, 많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강 선교사는 “하나님은 네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말고 너는 조연이 되어 이 사람들이 캄보디아 선교의 주인공이 되도록 도와주라, 그런 마음을 주셨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 외래환자 진료하는 강재명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처음에는 그 말씀이 너무 섭섭한 거에요. 나름대로 한국에서 올 때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뭔가 나타나고 싶은데 주연을 하지 말고 조연을 하라 하니까 많이 섭섭하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정말 하나님 말씀이 맞아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줄 때도 저는 캄보디아 말이 서투니까 열심히 듣기는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에요.
 
그런데 이 친구들은 복음을 전할 때 자기나라 말이니까 환자들이 너무 행복해 하는 거에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요. 이때 느꼈어요. 그리고 현지인들을 실력 있는 의사로 신앙있는 의사로 잘 키워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강 선교사는 이 과정에서 민낯의 자아를 발견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달았다. 그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 후에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어차피 성장의 조건 속에는 방해와 질병, 모순들이 있게 마련. 강 선교사의 간증을 들으며 기자는 그 완전무결하지 못한 인간적인 측면에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졌다.
 
강 선교사는 내과 진료파트를 담당해 오면서 현지 의료인, 의대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현지 의료진들과 의대생들이 미래의 꿈을 말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사라 선교사는 고엘 공동체 지체들을 섬기고 있다. 고엘 공동체는 캄보디아 전통의 천연염색 기술로 천을 만들어 베개, 옷, 인형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주민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내 경제적 자립을 돕는 역할을 하는 한편 주민들에게 베틀 기술을 알려주는 교육센터 역할도 하는 곳이다.
 
고엘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히브리 전통 개념으로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어려움 당한 자를 구해줄 의무와 권리가 있는 자’를 말한다.
 
강 선교사는 “아내는 결혼 전에 패션업계에서 마케팅을 했다”며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 우리에게 주신 은사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고 계셨다”고 말했다.
 
“사실 아내가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10년 동안 자격증 10여 개를 땄어요. 한국어 강사, 화장품 만드는 기술, 국악 등 등. 그런데 기도하면서 막상 연결된 곳이 고엘 공동체입니다.”
 
김사라 선교사의 증조할아버지는 한센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흥종(1880-1966) 목사다.
 
최흥종 목사는 광주 출신으로 최초 교인, 최초 장로, 최초 목사이다. 의사로 광주기독병원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의 땅을 기증하고 숙소를 지어 본격적으로 나환자들을 섬기는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면서 빈민, 여성, 나환자를 위해 평생 헌신의 삶을 살았다. 강 선교사는 4대째 모태신앙의 가정이었다.
 
“대학교 때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대학교 4학년 때 갑자기 병에 걸렸습니다. 만성 활동성 감염이었는데 지금은 치료하는 약들이 많은데 그 당시는 치료약이 없었어요. 학교를 휴업할 수밖에 없었고 인생을 포기할 정도의 상황이었죠. 병원에서는 치료를 못하니까 기도를 하러 산속으로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건강도 회복되고 학교도 복학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예배가 선교라는 생각을 들었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죠.”
 
강 선교사는 “이곳에 있는 것이 너무 좋다. 하루하루가 은혜다”며 “내 인생에 가장 감사한 일은 선교사가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 헤브론병원 내에 고엘 공동체에서 생산한 올가닉 의류와 인형 등을 판매하는 전시장이 있다.     © 크리스찬리뷰
 
영원히 하나님 병원이길
 
손영옥(52. 간호사)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입원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환자들과 온종일 씨름하는 곳. 함께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며 때로는 기도와 눈물이 부어지는 사랑터다. 언젠가 이런 감격스러운 일이 있었다.
 
“작은 못에 손이 찔려 그냥 집에서 소독하고 지내다가 그것이 감염이 되어 나중에는 손이 거의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어요. 마침 부산 호산나교회 봉사팀이 왔었는데 정형외과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요. 그 선생님이 보시더니 당장 수술해야 된다는 거 에요.
 
수술 전 예수님을 소개하고 수술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수술할 수 있는 여건이 어려웠어요. 마취도 제대로 못하고 수술을 하는데 이 환자가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 된 거에요. 제가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라’고 말해줬죠. 수술이 끝난 후 깨어났는데 이 사람이 수술 중 환상을 보게 된 거에요. 자기 침상 옆에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와서 ‘이제부터는 아프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말했대요. 그리고 이 사람이 깨끗이 나았어요.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를 도우신 예수님’을 병원 3층에 있는 교회에서 간증을 했어요.”
 
유난히 사랑 많고 다정다감한 손 선교사는 모든 환자들과 현지 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다. 따사로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손 선교사에게 그들은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 손영옥 선교사(간호사)     © 크리스찬리뷰
 
손 선교사가 마산 태봉병원을 마지막으로 헤브론병원에 온 것은 2011년 2월 11일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선교에 대해 기도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선교훈련을 받고 빨리 나오고 싶었는데 길이 안 열렸어요. 하나님은 더 기도하게 하시고 훈련을 더 받게 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장순복 교수님과 연결이 되어 헤브론병원을 소개받았지요.”
 
손 선교사는 “특별히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것 같다”며 “교회를 도와서 섬기고 세우는 일에 기쁨이 있다”고 말했다.
 
“헤브론병원에 왔을 때도 교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제 앞에 헤브론병원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가 서있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아하, 하나님이 이 병원에도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기뻐하시는구나. 그래서 이 병원 안에 교회가 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계속 했는데 2013년 1월 교회가 시작됐지요.”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손 선교사는 이내 눈물을 보였다. 손 선교사는 “사실 그것이 가장 큰 영적 전쟁이다”며 “정말 혼자 와서 사역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갈등도 많이 했다”고 토로했다.
 
손 선교사는 4년이 넘도록 이곳을 섬기고 있지만 정작 그의 남편과 가족은 한국에 살고 있다. 이곳에 올 때 정말 가족의 반대가 없었느냐고, 대놓고 물었다. 손 선교사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요,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훈련시키셔서 우리 가족 모두의 마음속에 선교적인 마인드가 돼 있어요.”
 
손 선교사는 이곳으로 떠나올 때 자신의 마음을 남편과 아이들에게 나눴다. 다행히도 남편과 두 아들, 막내딸 모두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고 힘을 실어 주었다.

▲ 손영옥 선교사가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캄보디아 간호사들과 찬양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손 선교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동생이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먼저 교회에 다녔어요. 동생이 믿었던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동생을 통해서 듣고 나도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한 때라는 감동이 왔어요. 그래서 동생이 다니고 있는 그 교회를 수요예배 때 찾아갔어요. 그때부터 새벽기도회에도 나가게 되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지요.”
 
손 선교사는 “헤브론병원이 중심을 잃지 않고 복음으로 섬기는 초심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정말 복음을 위해서 끝까지 영원히 하나님의 병원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손 선교사는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급히 병실로 들어갔다. 환자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면서 위로하고 기도하는 손 선교사의 모습 위로 병자를 치료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진다.

▲ 태국인 목사 일행이 헤브론병원을 방문, 김우정 원장으로부터 병원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인터뷰를 하던 날, 태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태국인 목사 일행이 한국인 선교사의 안내로 시설을 견학하러 병원을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김우정 원장은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도하게 하시는지 모른다.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일하신다”며 “현지에 있다 보면 120년 전 한국에 들어온 외국선교사들이 한 사람을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을지 짐작이 간다”고 전했다.
 
이어 김 원장은 “20년 후에는 모든 사역을 현지인에게 넘겨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깜뽕 스프 체첸네 마을 봉사현장
 
토요일. 헤브론병원의 리닌 전도사, 다빈, 사디, 메알리아, 쏘말리, 메리, 팻, 밴데이, 그리고 김우정 원장 등 9명이 한 팀이 되어 마을 봉사활동에 나섰다. 여기에 밴데이의 젖먹이 아기와 우리 일행까지 합하면 총 12명이다.
 
밴데이(36)는 심콘(41)의 아내이다. 심콘은 헤브론병원 의사로 헤브론교회 안수집사이기도하다. 이들은 헤브론병원의 부흥을 통해 캄보디아 복음화를 바라는 ‘열혈’ 크리스찬이다. 그녀는 밝고 활발한 인상이었다. 딸만 다섯인 그녀는 활기차고 애교가 넘쳐흐르는 여인이었다. 젖먹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연신 찬양을 불렀다.
 
깜뽕 스프 체첸네 마을은 프놈펜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에 병원용 랜드 크루저 지프를 리닌 전도사(34)가 운전을 했다. 리닌 전도사는 다정한 눈에 아름답게 다듬어진 콧날 그리고 약간은 장난 끼를 머금은 듯한 입매 등, 귀염성스러운 청년이었다. 그는 운전 솜씨도 민활했다.
 
리닌 전도사는 캄보디아대학교를 졸업했다. 2011년 8월 김우정 원장의 주선으로 캄보디아장로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현재 4학년이다. 헤브론교회 전도사로 협력사역을 하고 있는 리닌 전도사의 꿈은 마을마다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는 신학대학교를 졸업하면 계속 박사과정을 공부할 예정이다.
 
프놈펜 시내를 벗어나자 광막한 들판 사이로 비포장도로가 우리를 맞이했다. 캄보디아의 특유의 폭염이 우리를 감싼다. 손바닥만 한 그늘도 아쉽게 하는 태양. 자동차안의 열기는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소떼들은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무덤덤하게 흩어져 풀을 뜯는가하면 대로상에서 오물을 배설하기도 한다.
 
그런데 집집마다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물 항아리들이다. 흔히 캄보디아는 물이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맞는 말이다. 우기가 되면 물이 철철 흘러넘친다. 그러나 우기가 지나면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기가 다가온다. 수도라도 설치돼 있으면 건기에도 끄떡없겠지만,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에서 수도가 설치돼 있는 곳은 프놈펜 등 일부 지역에 지나지 않는다.

▲ 깜뽕 스프 체첸네 마을에서 만난 어린이들과 물항아리.     © 크리스찬리뷰
 
이런 까닭에 캄보디아에서 물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는 필수적이다. 빗물을 받아 보관하거나 웅덩이에 고인 물에 섞인 이 물질을 가라앉힐 때 사용한다. 그런데 이 물 항아리의 가격이 만만치 않아 거의가 웅덩이 물을 먹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마을 주민들이 식수용으로 이용하는 웅덩이는 오리나 개, 돼지 등이 똥오줌을 누거나 뒹굴며 뛰어놀기도 한다.
 
항아리가 없는 주민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물그릇으로 휘저어 눈에 보이는 이물질만 제거한 뒤 그대로 마신다. 그래서 만성적인 설사와 복통과 피부병에 시달리지만 병원에 갈 돈이 없다. 왕복 5달러에 달하는 교통비가 없어 프놈펜에 나가지 못한 이들도 대다수다. 더욱 비참한 것은 이런 물조차 귀해서 함부로 낭비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건기가 막바지에 이르면 이 물마저도 말라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깜뽕 스프 체첸네 마을로 들어섰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120여 가구의 이 마을은 1960년대 한국 농촌모습과 흡사했다. 맨발에 다 헤어진 옷을 걸친 아이들이 먼저 달려와 해맑은 미소로 우리 일행을 맞았다. 어린이 사역은 금호교회에서 지어 기증한 금호교회 선교관에서 진행됐다. 사방이 확 트인 건물로 이동 진료, 어린이 사역, 또 예배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참으로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구상에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알아내 헤브론병원이 이 구석까지 구제의 손길을 뻗쳤을까 하는 것이다. 세계 어느 곳이나 코카콜라가 안 들어간 곳이 없다지만 헤브론병원은 코카콜라가 닿지 않는, 다시 말해 문명의 손길이 전혀 못 미치는 그곳까지 사랑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기자를 감동시켰다.

▲     © 크리스찬리뷰
 
김우정 원장이 말을 꺼냈다.
 
“3년 전부터 왔는데요. 심장병 아이들을 수술하기 전 아이들의 집들을 방문하거든요. 그때는 이곳에서 수술할 때가 아니고 한국으로 보낼 때입니다. 이 마을은 아마도 거의 어두워질 무렵쯤에 도착을 했어요.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가까스로 왔는데 많이 가난해 보이고 외부사람들이 오니까 5- 60명이 금방 모이는 거에요. 잠깐 기도하고 심장수술에 대해 설명을 했어요.
 
그런 후 어린 쌔틴이 한국에 가서 수술을 받고 와서 건강해졌어요. 그 다음에 보고 싶으면 왔었고, 단기선교 팀이 오면 이곳으로 연결시켜 집도 지어주고, 집 수리도 해주고,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주말을 이용하여 우리 병원 스탭들이 자원해서 다녀요. 착하지요. 주말에 쉬고 싶을 텐데.”
 
내방객을 보자 작은 개 한 마리가 두어 번 컹컹 짖어보더니 이내 경계를 풀고 잠잠해졌다.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나오는 듯 손님을 맞이하는 쌔틴의 어머니는 허드레옷에 손에는 흙이 묻어있었다. 그녀는 수줍고도 앳된 표정으로 김우정 원장을 안을 듯이 반갑게 맞이했다. 자기들을 찾아준 은인(恩人)에 대하여 그토록 지극하게 존경을 나타내주는 그 자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세상에!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같았다. 사람을 기리는 일도 신앙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랑이 있고서야 눈이 열리고 눈이 열려야 뜻이 빛 가운데로 드러나고 그렇게 드러난 뜻이라야 자라고 꽃 피고 열매 맺는 것 아니겠는가. 그녀는 연신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아, 세상에! 깡마른 체격에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어린이들, 충분한 영향을 섭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총한 눈! 눈 !눈! 선교관 안은 생기로 넘쳤다. 그 선교관 안은 순결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비의 타임머신을 타고 현세를 껑충 뛰어넘어 아주 멀리 속악(俗惡)한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내려앉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이 사역 팀은 찜통더위 속에 구슬땀을 흘려가며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하며 자연스럽게 전도했다. 영화가 상영되고 이어 달리기, 율동, 게임 등을 진행하며 이곳 어린이와 주민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찬양소리에 선교관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 캄보디아 밝은 미래를 밝혀줄 총총한 눈빛의 어린이들.     ©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에서는 모두가 성직자
 
김우정 원장이 마을을 돌아보자고 하자 쌔틴 어머니가 안내를 했다.
 
마을길은 좁았으나 더없이 다정하고 재미있었다. 마을은 그 집의 숟가락이 몇 개며 웃음소리와 한숨소리까지를 다 알 만큼 그렇게 정다운 크기였다.
 
그래서 전원(田園)은 하나님이 만드신 솜씨를 감사하며 가꾸는 곳이고, 대도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걷어내고 사람이 멋대로 만든 곳이라 하였던가.
 
“병원에서만 일하다 보면 의사 대 환자로밖에 못 만나니까 마음이 메말라지더라고요. 문제는 많고 복잡하고 내 스스로 속상한 일이 생기고 안 좋더라고요. 내 스스로를 위해서 충전이 되고 은혜가 되는 곳을 다녀야 되겠다고 어렴풋이 생각을 했는데, 그때 심방을 하게 된 거에요. 심방을 하다보니까 좀 더 깊이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으면서 충전이 되더라고요.
 
저는 시골에 오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요. 이들의 삶에 뭐가 어렵고 뭐가 부족하고 뭘 필요로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뭘 중요하게 여기고 사는지 그런 걸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죠. 제게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사님들 보고도 마음이 메마르고 은혜가 필요하면 시골로 가자고 그래요. 그리고 이동진료도 실제로 많이 다니고 있어요. 어린이 사역에는 오늘 처음으로 동행했고요.
 
이 마을 주변으로 20여 개의 마을이 모여 있어요. 그리고 2km쯤 가면 큰 학교가 있는데 대규모 단기봉사 팀이 올 때는 그 학교를 아예 빌려가지고 그곳에서 진료를 해요. 교장선생님도 잘 알고 이 마을 이장도 잘 압니다.”
 
곳곳에 피어있는 꽃들은 진하고 향기로웠다. 그러나 너무나도 조용했다. 움직임이 없었다. 김 원장은 팜 트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동네가 열대성 기후에서 자라는 팜 나무의 꽃에서 채취한 수액으로 설탕을 만들어 팝니다. 저는 오늘도 조금 사가야겠습니다”
 
왜 어려운 길을 가느냐고 물었다. 한마디로 왜 사서 고생하는가? 후회는 안 드는가?
 
“후회는 안 해봤어요.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감사하고요. 아니면 제가 한국에서 계속 있었으면 어떡하면 더 맛있는 것 먹을까, 좀 더 멋있는데 구경 갈까, 그러고 그냥 살았을 텐데, 하여튼 편하게 살지는 말아야죠. 아내와 둘이 앉아서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이야기를 가끔 나눠요. 선교사가 되려고 그렇게 애쓴 사람들도 아니고 선교사 꿈을 꾸고, 키우고, 훈련한 사람들도 아니고 먹는 것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고 똑같이 그렇게 살던 사람들인데요. 감사하죠.”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선교관 쪽으로 가니 거의 프로그램이 끝나고 있었다. 김 원장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이들의 눈이 참 예뻐요. 눈이 보배고 보석이에요. 제가 이 애들 눈 때문에 반해서 왔거든요. 제가 소아과 의사잖아요. 손이나 발이 얼마나 지저분해요. 흙으로 묻어있고 땀으로 젖어 있잖아요, 그런데 눈만은 참 예뻐요. 얼마나 눈이 크고 예쁜지.”

▲     © 크리스찬리뷰
 
이들이 가져온 부활절기념으로 삶은 달걀, 칫솔, 풍선, 그리고 시드니에서 가져온 볼펜과 코알라 인형 등의 한보따리 선물은 이날 봉사활동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현지인 사역자들은 5분만 가만히 서 있어도 등에 땀줄기가 맺히고, 이마에도 송알송알 땀이 맺히는데도 많은 아이들을 통솔하며 웃음 가득한 시간들을 만들어냈다. 그 불꽃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그 기쁨, 추진력, 당당함 그리고 겸손과 확신 그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지없이 순하고 착하고 착하기만 한 얼굴들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꿈도 갖게 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축복을 받기만 하고 그대로 있을 순 없잖아요”
 
이들의 헌신은 미래를 짊어질 어린이들의 눈망울에 초롱초롱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이날 봉사활동은 ‘마을축제’였다. 우리를 태운 자동차가 움직였을 때 마을 사람들은 따라오면서 계속 손을 흔들었다. 황톳길을 달리는 차 속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오늘 수고한 이들과 자리를 함께 하기로 하고 어느 식당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둘러앉은 것은 저녁 7시경. 화제는 어쩔 수 없이 오늘의 봉사활동에 집중되었다.
 
“오늘 이곳에 와서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 참 기뻤어요. 왜냐하면 저는 어렸을 때 예수님을 한 번도 들을 기회가 없었거든요.”
 
“저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오늘 봉사활동을 하면서 예수님을 더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더욱 믿음이 자라기를 원합니다.”
 
“저는 오늘 깜뽕 스프에 와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제 고향에서 예수님을 듣고 믿게 되었는데, 오늘 이 꼬마들이 커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이곳에서 좋은 성도들이 많이 나올 것 같았어요.”
 
“저는 헤브론교회 찬양 팀을 섬기고 있고 관광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회사 사장님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니까 주님이 도와주시는 걸 느꼈어요. 오늘 함께 지냈던 그 꼬마들이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잘 알아서 커가면서 잘 믿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여 정하셨고 배역을 맡기셨겠지만 이곳 젊은이들이 말하는 장면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보기에 좋으셨을까.
 
목회자이든,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든, 좌절에 빠져 생의 의미를 잃은 사람이든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은 헤브론병원의 신앙과 가르침에 저도 모르게 동화된다.
 
헤브론병원에서는 모두가 성직자이다. 〠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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