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길목에 선 풍차

새터민 출신 1호 목사, 새터교회 담임 강철호 목사

글|송기태, 사진|윤기룡 | 입력 : 2015/08/25 [10:59]
▲ 새터민 출신 1호 목사인 강철호 새터교회 담임목사는 북한 선교보다 탈북자 선교가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 크리스찬리뷰
 
광복 70년?

소위 ‘빼앗긴 들’에 봄이 온지 70년이다. ‘70’이란 굵은 숫자가 무색하게 아직도 우리의 조국은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이란 뼈아픈 태그를 달고 있다. 그 태그는 명품훈장은커녕 얼굴의 혹부리만도 못한 정말 떼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최근 지구 반대편 분단된 조국에서 들려온 소식만 추려 봐도 선뜩한 용어들이 난무한다.
 
‘발목 지뢰 사건’ ‘포격도발’ ‘준전시 상황’ ‘엄중대처’ ‘전방부대 군사행동 완료’ ‘전면전 불사’....
 
그렇게 부르짖던 ‘통일대박’이란 구호가 머쓱해졌다. 그럼에도 ‘평화통일’ ‘민족복음화’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꿈이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둠이 짙은 법이란 진부할 말은 이제 ‘약발’이 거의 먹히지 않는 몰핀 신세이다. 길이 보이지 않음에도 찾아야 하고, 칠흑의 어둠 속에도 기어코 헤쳐가야 하는 ‘통일의 길’이다.
 
강철호 목사, 그는 이토록 사방이 막힌 틈새로 비친 한줄기 희망의 빛줄기였다. 그는 새터민(탈북자) 출신으로, 탈북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목사, 아니 신앙조차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탈북대박’ 인생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시드니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대표 : 유종오 목사) 초청으로 시드니에 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악수하는 손에 힘이 없다. 47년의 힘겹게 살아온 세월이 전해지는 듯했다. 가장 바뀌기 어려운 것이 ‘말투’인데 그에겐 북한 어투가 거의 묻어나지 않았다.
 
“예, 신학교(감신대)에 가서 다양한 사람들 접하면서 바뀌었습니다. 처음엔 북한 사투리를 심하게 썼지요. 친구들이 흉을 보는 거예요. 그리고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 한국에 왔는데, 어디를 가도 ‘북한 사람’이라고 불러주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 한국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 서울 언어를 쓰기 위해 일부러 연필을 입에 물고 연습을 했습니다. 저를 보는 사람마다 ‘북한’을 강조하니 상처가 되었습니다.”
 
비록 악의는 없지만 호기심으로 또는 장난삼아 아무렇게나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마디씩 그의 이름 앞의 타이틀은 ‘북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줄 때도 어김없이 ‘북한(에서 온) 사람’하며 ‘별종인간’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소외감과 속상함이 컸다고 하였다. 그런 상처의 딱지를 떼어가면서 ‘북한 말투’도 함께 떼어간 것이다.

좌절된 교사의 꿈
 
그의 삶은 분단 한국의 아픔, 두 체제의 갈등을 처절하게 관류하고 있다. 어린 시절은 비교적 꿈이 있는 안정된 삶이었다. ‘독립운동가 가문’이란 영예를 열어준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체제’ 아래서는 아무리 좋은 가문도 하루아침에 반동으로 몰려 어떤 상황에 처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는 북한의 엘리트 가정으로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교과서 편성부서에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김일성 우상화’에 대한 비판으로 할아버지께서 잡혀간 사건 이후로 고통의 삶이었습니다.
 
제가 인민학교(초등학교) 때인, 69년도부터 소위 ‘교과서 역사개혁’이 있었습니다. 김일성 역사 중심으로 재편성하는 것이지요, 우리 역사를 아시는 조부께서 그것을 비판하신 겁니다.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정확한 역사를 알고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해야 한다면서 비판하셨지요.
 
그 이후 ‘반동가족’으로 낙인찍혀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북한에 김일성 찬양 구호판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이 바람에 넘어져도 우리가 잡혀가 취조 받아야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조금 문제가 일어나도 우리 가족은 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고통당했습니다.”
 
그의 조부가 잡혀간 이후 그의 가정은 대격변을 겪어야 했다. 먼저 부모가 처참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고위부에 가서 아버지가 항의하셨습니다. ‘독립운동가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그건 용서가 되지 않느냐?’하면서 따진 것이지요. 그것 때문에 아버지마저 고문당하신 것입니다. 며칠 동안 집에 못 돌아 오셨는데, 나중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집에 오셨습니다. 권력기관에 잡혀가 매 맞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얼마나 억울하셨겠습니까? 그 억울함을 못이겨 고위부 담장에 휘발류를 뿌려 불을 지르셨습니다. 그러자 최고위부를 해하려 했다는 엄중한 죄목을 쓰고 공개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충격을 못이겨 홧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꿈이 있었기에 그 고통의 벽을 넘어보기 위해 무진장하게 노력했다. 그러나 한 번 찍힌 낙인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대학교에 가서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내가 충성하면 북한에서 인정받지 않겠느냐?’‘할아버지처럼 되지 않고 충성하여 가족을 다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버텼습니다. 그렇게 함흥사범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했습니다. 졸업할 때 저보다 공부는 못해도 가정환경이 좋은 학생들은 좋은 학교 배치(발령)받는데, 저는 배치 자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제가 그런 가족들보다 공부를 더 잘했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사상검토를 받아야 하는 시간이 있어서 배치가 못되었습니다.”
 
▲ 시드니평화통일 구국 기도대회에서 “올바른 통일운동을 통해 북한 동포들의 인권이 개선되고 깨어나길 바란다”라고 강철호 목사는 역설했다.     ©크리스찬리뷰
 
탈북감행, 교회와의 첫 만남
 
오직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성심만 강조하는데 환멸을 느꼈다. 그 사회에 대한 불공정한 형편, 인권탄압을 보고 체험하면서 ‘탈북’을 도모했다. 그때가 97년,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마침 그가 살던 함흥에는 중국 화교들이 많았다. 그들을 많이 만나면서 중국 사회에 대해 적지 않게 들었다. 중국의 개방과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에 솔깃했다. 조선족이 자유롭게 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북한이 더욱 싫어졌다. 그들을 통해 중국으로 가는 길, 즉 탈북 루트를 알게 되어 탈북을 감행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님은 결혼하고, 기숙사에서 살던 저는 홀몸이니 탈북을 빨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압록강을 건너니 장백현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그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도움의 손길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마치 ‘섭리의 손길’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움직이는 듯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조선족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제가 탈북자임을 알고 그곳은 잡혀갈 위험이 많은 곳이니 깊이 안쪽, 조선족 많은 곳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분의 배려로 심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디 가서 도움 받을 수도 없고, 탈북자라 말도 못하니 아파트 공사현장 지하에서 사흘이나 지내야 했습니다. 중국은 아파트 건설이 다 안되어도 건설하면서 입주하여 살곤 해요. 삼 일째 되는 날, 그 아파트에 입주해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새벽기도를 나가시다 지하에 사람 신음소리가 내려와 저를 보고 깨우셨습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자느냐? 교회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 ‘교회’란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교회 가면 잠자리도 있고, 밥도 먹여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교회에 따라갔다. 조그만 교회였다. 할머니와 15명 정도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걸 보는 순간 북한에서 교육받던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사상을 해제하기 위해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합니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철저히 교육합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하늘의 신을 믿어야 한다고 협박하여 나쁜 짓을 다하고, 건강한 사람 죽여 장기를 빼고 매매하여 미국에 보낸다는 등등의 잔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났지요, 게다가 할머니들이 죄 지어 잡혀온 사람처럼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못 왔나? 할머니가 나를 꼬셔 이곳으로 데려왔나?’하는 맘이 들었습니다. 순간 ‘잘못 왔다’는 맘에 정신이 번쩍 들어 도망쳤습니다.
 
교회 앞 철문을 여는 순간, 그 교회 여자 목사님이 흰 가운을 입고 들어서는 거예요. 그분을 보는 순간 귀신 만난 것으로 착각하여 쓰러져 기절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을 시켜 목사님이 방에 데려다 놓고 기도하시는 겁니다. 그래도 저는 사람을 죽인다는 선교사들이 생각나 ‘이젠 죽었구나’하면서 그 목사님 손을 잡고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교회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충격 속에 이루어졌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부모님 별세 이후 처음으로 받아본 호의였다.
 
“그때 목사님이 저를 품어주며 북한에서 받은 교육이 거짓말이라고, 차근차근 3년 동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해 안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제게 제일 먼저 성경을 10장을 읽어야 밥 먹을 자격 주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런데 읽으면 읽을 수록, 놀랍게도 성경이 주체사상과 너무 흡사한 거예요. 북한의 김일성 조선노동당당 10대원칙이 십계명과 비슷하고, 김일성 혁명노작 말씀 공부하는데 성경책과 너무 흡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이 북한의 이런 책을 모방한 책이 아니냐?’고 따지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은 교회 권사님이고, 김일성도 기독교 가정 출신이며, 북한 공산주의 사상이 기독교를 그럴듯하게 모방한 사실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걸 듣자 비로소 이해가 되어 열심히 목사님 따라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이 들어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3년쯤 지난 어느 날 중국공안이 들이닥쳤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북한사람 왔다고 고발했는지 그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 이때 그는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다.
 
“목사님이 저를 커텐 뒤에 숨겨놓고 태연하게 앉아계셨습니다. 공안들이 들어와 저를 내놓으라고 하는데도, 도망갔다고 담대히 말씀하시는 거예요. 북한 사람을 숨겼다는 게 발각되면 교회가 폐쇄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를 내주면 평안할 수 있었는데... 너무 감동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역사하셨는지 공안이 수색 안하고, 다음에 오면 신고하라고 하고 가더군요. 뒤에서 보니 목사님의 온 몸에서 땀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만일 수색하여 제가 잡혀가면 목사님도 잡혀가는데 제게 뭘 원하십니까?’라고 여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지금 내가 네 목숨을 살려주지 못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무슨 말씀을 드리겠느냐?’하시는데 너무 감동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너도 나중에 나처럼 남을 도와주라’고 하셨어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서 하나님 말씀이 김일성의 맹목적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구나라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그 목사님을 영적 어머니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의 신앙의 잔뼈는 굵어졌다. 젖 뗄 시기, 홀로 설 시기가 되었다.
 
“어느 날 목사님이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중국에선 불안해서 못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조선족으로, 문화대혁명 때 20대였는데,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잡혀가 벽돌 굽는 강제노동 10년을 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살던 때와 똑같았습니다.
 
그렇게 그를 한국으로 보내려는 ‘작업’은 진행됐다. 먼저 한국에서 세운 대학, 해외 선박회사 선원 양성훈련소인 연변해양대학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연변 조선족을 개선시켜 주고자 세운 학교였다. 당시 경쟁률도 엄청나게 셌다. 그곳에 가면 경제적으로 활짝 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입학하기엔 ‘국적’이 문제였다. 북한 국적으로는 입학 자격이 안됐다.
 
“저를 그 학교에 보내기 위해 조선족으로 소위 ‘국적세탁’을 해야 했습니다. 돈을 주면 불법국적을 살 수 있었지요. 제가 무슨 돈이 있나요? 그 목사님께서 중국돈 1만 원(한국 돈 1억 원) 정도 되는 엄청난 많은 돈을 들여 국적을 만들어 위장된 신분으로 그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3년 동안 공부하여 해기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것으로 오사카 선박에 취직했습니다. 김포공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오는 것이 목적이었던 그는, 그렇게 늘 기도해왔대로 김포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릴 때 한국경찰을 찾아 귀순의사를 밝혔다. 그들이 국정원에 연락해 조사받았다.
▲ 본지와 인터뷰 중인 강철호 목사(왼쪽). 오른쪽은 초청자인 시드니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대표 유종오 목사.            ©크리스찬리뷰
 
한국에서의 결혼과 정착

 
그렇게 ‘새로운 조국’의 품에 안긴 그는 믿음이 너무 소중한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만일 하나님을 모르고 귀순했다면 지금 제 모습은 어땠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 다짐하고 한국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를 담당한 국정원 정착 도우미가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어느 날 예수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중국에서 예수님 믿은 간증을 하니 그분이 품어주면서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신앙을 가지면 너무 할 일 많다고, 앞으로 잘 적응하려면서 그 신앙을 변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6개월 동안 국정원 교육을 받고 나올 때, 그 장로님이 과천은파감리교회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목사님을 찾아뵈니 교회에서 매달 탈북자에게 50만 원씩 도와주었습니다. 그게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6개월 지나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교회 건축 중인데 늘 철야예배 때 재정을 위해 기도하는데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찾아가 안받겠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가양동에서 과천까지 다니려니 너무 힘들기도 했구요, 그 핑계로 안받고 안다니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화를 내시며 그냥 아무 걱정말고 받으며, 열심히 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만두지 못하고 그 교회를 4년간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 적령기에 꽉 찬 그에게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은 탈북 여성들이 많지만 그 당시는 거의 없었다. 1년에 새터민 20-30명쯤 될 때인데, 대부분이 남자였다. 그때 한국 여성들을 만나 선을 보기도 했다. 한결같이 그에게 묻는 질문이 있었다.
 
“제일 먼저 ‘왜 한국에 왔느냐? 살다가 마음에 안 들면 또 도망가려느냐?’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선 볼 때마다 거의 똑같은 질문을 받고 보니 아예 혼자 살려고 했습니다. 그냥 통일될 때까지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4년 동안 일은 안하고, 교회에서 목사님께 훈련만 받았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께서 교회에서 사무 보는  목사님의 처조카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만한 교회 목사님의 딸이나 친척쯤이면 좋은 혼처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를 담임목사 사모님의 오빠 딸을 소개시켜 주신 것입니다. 목사님 배려로 선 보고, 사실 반 강제적으로 몇 달 만에 결혼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혼은 꿈도 못꾸었을 겁니다.”〠 <다음 호 계속>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윤기룡|크리스찬리뷰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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