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눈 뜬 젊은이들, 분명 희망이 보인다

헤브론교회 현지 젊은이들 헌신적 봉사 ‘가슴 뭉클’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8/25 [11:19]
▲ 헤브론병원 3층에 자리 잡은 간호대학의 실습 장면. 30년 경력의 간호사 출신인 양명숙 선교사가 지도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은 지난해 10월 간호대학을 설립했다. 캄보디아 왕립프놈펜대학과 연계하여 학위를 주는 과정으로 수업을 모두 영어로 진행하고 있다. 현재 학생은 모두 29명. 왕립프놈펜대학 간호대학 2학년 학생 200명 중 특별히 선발했다. 교수진도 쟁쟁하다. 박사학위를 소지한 선교사뿐 아니라 믿음으로 무장한 10여 명의 교수진이 자비량 봉사를 하고 있다.
 
이 대학은 3년 과정으로 일 주일 중 4일은 헤브론 캠퍼스에서 강의를 듣고 금요일과 토요일 오전은 왕립프놈펜대학에서 강의를 듣는다.
 
김우정 원장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을 얻는 것은 선교사역의 자랑이요 열매라고 생각한다”면서 “사람을 길러 세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는 마음을 주셔서 그 첫 단계로 간호대학을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간호대학은 후에 의과대학을 세우는 전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 안에 잘 훈련된 능력 있는 간호사들이 배출되고 그들 중에 일부는 다른 나라에도 진출하여 캄보디아에 유익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꿈을 꾸어봅니다.”
 
간호대학은 문을 열자마자 지역사회에 큰 화젯거리가 됐다.
 
특이한 것은 무슬림인 부모들도 이곳에 자녀들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은 같다. 내 자녀를 항상 사랑해주고, 잘 이끌어 주는 선생님에게 보내는 것이다.

▲ 헤브론병원 간호대학 대외협력처장 양강용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간호대학 건물 건축 중, 의과대학 추진

현재 헤브론병원 뒤편으로 간호대학 건물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 건물이 완공되면 강의실과 12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기숙사, 도서관, 행정실 그리고 컴퓨터실 등이 들어설 것이다.
 
대외협력처장인 양강용(69) 선교사는 “한국에서도 영어로 강의하며 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품는 학교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라며 “물론 능력 있는 간호사들을 길러내는 것이 목표이지만 간호대학 건물이 완공되면 기숙사를 통하여 신앙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대학교 있을 때 보니까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하고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학생들하고 졸업할 때 보면 신앙이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이 알게 모르게 신앙이 스며들어가지고 세례도 받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지도자가 되더라고요. 기숙사를 하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     ©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 간호대학이 설립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많았다. 캄보디아 라이프대학 부총장이던 양강용 선교사가 헤브론간호대학 설립에 기초를 놓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헤브론병원에 온 것은 4년 전.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고생한 만큼 보람도 컸다. 
 
“당시만 해도 간호대학이나 의과대학은 외국사람들이 운영을 한다면 정식으로 허가를 내주지 않을 때거든요. 준비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실무자들도 좋다고 했는데 장관 결재가 안 나는 거에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왕립프놈펜대학과의 협력이었죠.”
 
양 선교사는 “왕립프놈펜대학과 끊임없이 조율을 해나가고 있다”며 “특별히 왕립프놈펜대학 쳇 체아리 총장도 헤브론간호대학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현재 이 나라의 교육이 이원화 현상으로 갈등이 심해요. 노 교수들은 프랑스 영향을 많이 받아서 불어를 고집하고 젊은 교수들은 영어로 강의하는데 왕립프놈펜대학은 노 교수들이 실권을 잡고 있거든요. 쳇 체아리 총장이 그걸 너무 잘 알아요. 그런데 자기들은 인적자원도 없고 또 그런 교수를 모셔올 수 있는 재정도 없고 교실도 부족하고 그래서 마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헤브론간호대학이 영어로 강의할 수 있어 희망이 있다고 말해요.”
 
양강용 선교사는 미국에서 40년간 살면서 32년의 제약회사 경력을 갖고 있다. 마지막 회사인 아브라식스 바이오(ABRAXIS BIO Pharmaceutical))에서는 부사장과 Senior Director 자리에까지 올랐다. 아내 양명숙(67) 선교사는 30여 년간 간호사로 근무했고 라이프대학 교수로 봉사했다. 이들이 캄보디아에 온 것은 2008년 9월. 이제는 편안하게 노후를 즐길 수 있는 이들이 질병과 빈곤으로 고통 받는 척박한 이 나라를 찾아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 간호대학 학생들이 실습에 앞서 양명숙 선교사(오른쪽)로부터 기본수칙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저희 나이 또래면 역사의식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가 근대사에 들어와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잖아요. 미개한 나라였고요. 그런데 젊은이들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선교사들이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복음을 접할 수도 있었고요. 이제는 한국 분들이 갚아야 되지 않느냐 그런 마음이 저희 세대가 많았던 것 같아요.
 
퇴직 후 이런 선교사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그 후 실버미션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선교사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훈련받고 동북아시아, 러시아, 중국, 북한 등으로 탐방을 가봤는데 우리 두 사람이 봉사할 수 있는 곳이 캄보디아 라이프대학이었죠.”
 
양 선교사는 “재미있으니까 벌써 7년이 지났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양 선교사는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다. 73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세인트 존스대학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양 선교사는 “이제 겨우 땅을 파고 주춧돌을 단단하게 놓고 있는 과정에 있다”며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아이들이 큰 꿈을 가질 수 있도록 한국교회들이 더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 헤브론병원 간호대학의 영어 수업 장면     © 크리스찬리뷰
 

또 다른 천사들
 
“선교지에서 대학교수로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쳐왔는데 캠퍼스사역만 10년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가족과 함께한 것은 1년밖에 안돼요.”
 
지난 1월 중순 평양과학기술대학에서 헤브론간호대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삶을 시작한 임 다니엘(62) 선교사의 목소리에는 아이같은 설렘과 묘한 떨림이 동시에 묻어났다.
 
임 선교사는 “프놈펜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언어훈련을 받느라 바쁘게 살아왔다”며 “지금은 학생들을 이해하게 되고 아주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감사하죠. 제가 최선을 다해 잘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선교라는 확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학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에 마음이 뿌듯하고 기쁘고요.”
 
그런데 임 선교사의 이력이 특이하다. 그는 1988년도 보성고등학교 영어선생을 끝으로 호주 유학길에 올랐다. 캠퍼스 사역이 꿈이었던 임 선교사는 멜본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멜본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때 한국어 연구소를 유치한 장본인. 그런데 7년 후, 하나님은 그를 뉴질랜드로 보내셨다.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하셨고 목사 안수를 받아 교회를 일구게 하셨다.
 
그가 선교사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연변과학기술대학 김진경 총장과의 만남이었다. 

▲ 임다니엘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김진경 총장님이 2003년도 코스타 뉴질랜드에 참석하셨어요. 그때 저를 보더니 당신이 있을 곳은 캠퍼스다. 당신이 필요하니 캠퍼스사역을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저를 연단시키면서 다시 캠퍼스의 꿈을 주신 거지요. 그런 후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5년간 사역을 하고 태국국제대학에 입학해 3년간 박사학위 공부를 했어요. 이 기간 동안 가족을 만나 함께 생활할 수 있었고, 캄보디아를 오가며 온 가족이 캄보디아 라이프대학에서 사역하게 되었지요.”
 
마음속에 캠퍼스사역에 대한 비전은 계속 있었지만, 보통은 박사학위 이후에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태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임 선교사는 2012년 1월 태국국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는 이제 뉴질랜드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편히 살기를 원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더 말씀을 묵상하게 하셨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정말 뉴질랜드로 돌아가 편안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북한 동포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너 혼자 잘 살려는 것이냐. 왜 내가 너에게 학위를 준지 아느냐. 북한으로 가라’ 그런 마음을 주셨어요. 다시 가족들과 헤어져 북한으로 들어가 평양과학기술대학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캄보디아 라이프대학에서 함께 동역했던 양강용 선교사님이 ‘헤브론간호대학이 막 설립이 되었는데 교수요, 목사인 당신이 필요하니 도와 달라’는 연락을 받고 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내와 다시 만날 수 있었죠.”
 
임 선교사는 “낮에는 전공과목을 강의하고 저녁에는 특별활동을 하면서 성경공부를 할 계획이다”며 “실제적인 동아리를 만들어 사역하겠다”고 말했다.

▲ 메르스와 사스 등 각종 전염병 예방차원에서 실시한 헤브론병원전 직원들의 보건 교육.     © 크리스찬리뷰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때가 선교사로 훈련받은 혹독한 시간이었다. 오늘의 사역을 위한 준비였기에 하나님은 정신 차릴 새 없이 그를 다루고 흔들어 대셨던 것.
 
“학생들을 실력 있게 키우고,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나라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헤브론의 비전이자 저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임 선교사는 잠을 줄여가며 그동안의 노하우를 담은 성실한 강의안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깊고 깊은 경륜을 이해해 가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아내와 떨어져 선교사역을 하다가 이번에 이곳 헤브론간호대학에서 다시 만나 함께 선교사역을 할 수 있게 돼서 기쁘다”며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아내 임 한나 선교사는 헤브론 간호대학의 건물이 완공되면 기숙사 사감으로 섬기게 된다.
 
발전기와 배전반을 살피고 있는 윤갑상(68. 주안장로교회) 장로를 만나기 위해 그의 작업실로 갔다. 작업실이래야 발전기와 공기구들이 쌓여 있는 조그마한 공간. 안으로 들어가니 숨이 턱 막히면서 땀이 비오듯 흐른다.
 
“장로님, 선풍기가 있는데 왜 안 트십니까?”
 
“전기를 아껴야죠.”
 
윤 장로는 “캄보디아에는 발전소가 없어서 전기를 다른 나라에서 사다 쓰는 형편이다”며 “전압도 고정적이지 못해서 220볼트가 190볼트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등 전기사정이 불안전한 상태라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그러기에 정전이 잦은 캄보디아에서 발전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 간호대학 건축을 위해 선교사로 파송받은 윤갑상 장로. 그는 전기공사를 비롯한 건축 현장을 총감독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전기공사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와서 봉사한다는 윤 장로는 조은전기 대표이다.
 
- 사업을 하시는 사장님이신데 자꾸 자리를 비워도 괜찮습니까?”
 
“웬만한 건 다 정리를 해놓고 다녀요. 또 손해를 보면 얼마나 보겠습니까. 그리고 현장소장이 있으니까요.”
 
윤 장로는 간호대학 건축현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필요한 자재가 없는 게 더 많고요, 있어도 찾아다니는 게 너무나 힘들어요. 그리고 저 일하는 캄보디아사람들 보세요. 급할 게 없어요. 책임감도 없고요. 옛날 같았으면 나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텐데, 내가 참 많이 변했어요. 어쩝니까. 알고 있으니까 미리미리 대처해야죠.”
 
윤 선교사는 2012년 1월 30일 헤브론병원과 첫 인연을 맺었다.
 
“선교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자비량선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서울 충무교회 이정석 장로님이 헤브론병원을 도와달라고 그래요. 그분하고는 형제 같은 사이였으니까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윤 장로는 총회에서 실시하는 선교사훈련 프로그램을 받고 총회 파송선교사로 이곳에 왔다.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직접 작업지시도 하고 일을 시켜야하는데 언어에 불편이 없느냐고 물었다.
 
“벙어리도 사는데요, 뭐.”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저 사람 좋게 웃고 마는 얼굴. 그 얼굴엔 섬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며 지낸 시간으로 훈장 같은 주름이 달려있다. 하지만 웃음만은 여전히 함박웃음이다.

▲ 윤갑상 장로의 작업실. 그는 숨막히는 작은 공간에서 경제적인 건축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뜨거운 공사 현장을 지키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윤 장로가 이렇게 섬김의 사람이 된 데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 지금은 조은전기를 운영하며 부활의 날개를 폈지만 인생의 나락을 경험했다.
 
윤 장로는 13년 다니던 직장이 통일교로 넘어가면서 회사를 뛰쳐나왔고, 1986년 전기공사기업 ‘갑을전기’를 설립했다. 사업은 해마다 번창했다. 하지만 1992년 10월 전기 고압변압기가 터져 온몸에 불이 붙었다. 담당의사는 포기하고 장례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가족에게 권했다.
 
“장례준비를 하는데 깨어났어요. 그런 후 1년 넘게 병원에 있으면서 시편을 읽기 시작했죠. 읽고 또 읽고, 아마 수백 번은 읽은 것 같아요. 하나님은 시편을 통해 위로하시고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어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견디며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성경 말씀 때문이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지만 회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94년 전기공사와 분체도장공장인 (주)주영산업 재창업에 성공했다. 회사는 월평균 매출 4천만 원으로 순항했다. 하지만 1997년 IMF가 한국경제를 흔들었고 그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루 아침에 부도가 일어났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다. 신용 하나로 사업을 지켜온 그에게 지인들은 격려를 해줬고, 다음 해 ‘갑을전기’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가 있었다.
 
디젤발전기와 드라이 오븐을 제작해 중국으로 수출했다. 회사는 월평균 2억 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리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일단 정상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그는 2002년 회사상호를 (주)포테리온으로 변경하면서 사업의 확장을 꾀했다. 하지만 시장자체가 삐걱거리며 그의 꿈은 공중으로 사라졌다.

▲ 진찰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이 사랑스런 눈길로 아기를 바라보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는 신앙의 갈등을 겪었다. 하나님에 대해 야속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하나님이신가. 끝까지 왜 축복 안하시는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하나님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믿음이 연약할 때는 자칫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얕은 생각과는 다르신 분임을 나중에야 깨닫고 회개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편 39편 7절의 말씀을 다시 붙들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는 진실로 엄격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받아 주십사 하고 기도했다. 이후 그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변했다. 덤으로 얻은 인생을 소외된 자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불같았던 성격도 이때 바뀌었다.
 
세상의 검은 덫에 걸려 값비싼 수업료를 내야했던 그는 조은전기를 다시 설립했고, ‘섬김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시골에 있는 미자립교회들의 열악한 환경을 알게 되었다. 교회 제7남선교회를 설득하여 팀을 만들었고, 곧바로 작은 교회를 찾아가 회원들과 함께 예배당리모델링 봉사를 시작했다.
 
물론 자비량이었다. 회원 대부분이 건축경험이나 지식이 없는 초보자들이었지만 하나하나 배우면서 전력을 다했다. 노하우가 생기자 미자립교회를 매년 선정하여 리모델링 봉사를 지금껏 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들이 리모델링한 교회는 수십여 곳.
 
“회원들은 그런 허드렛일을 해본 사람들이 아니에요. 학교 선생님, 교장선생님, 공장 사장님 등등 벽돌 한 장 만져본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처음으로 봉사했던 진천 성산교회인 경우 교회당이 슬레이트지붕인데 비가 오면 줄줄 새요. 목사님은 아이들이 6명인데 옆에 있는 사택도 가보니까 돼지우리 같더라고요. 그 모든 것을 참고 목회를 하시는데 돕는 손길이 없는 거에요.
  
저희들이 수리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할 줄 알아야지요. 할 수 없이 돈도 안 받고 공사장을 전전하며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기술을 배워 수리를 해줬어요. 리모델링봉사 후 서로 껴안고 펑펑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 뚝뚝이를 타고 병원을 찾아 온 환자.     © 크리스찬리뷰
 

윤 장로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시절.
 
“6.25 전쟁으로 피난살이하다가 아버지와 형님은 헤어지고 어머니와 누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 이문동에 정착했어요. 당시는 먹고살기가 힘들었으니까 교회 가면 강냉이와 밀가루를 줬어요. 그래서 주일학교에 다니게 됐어요.”
 
젊었을 때 그는 신림동 어깨였다. 도장을 운영하며 신림동, 노량진 일대를 꽉 잡았다. 이때 방황하는 수많은 젊은 청소년들을 모아 교회로 인도했다. 대학교 때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교를 개설하기도 했던 그가 장로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다.
 
윤 장로는 덤으로 얻은 인생 남에게 감화를 주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재능기부라고 말한다. 전기전문가로서 봉사를 통해 예수님을 알리는 일에 열중하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확실히 변화된 삶을 사람들에게 알려야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마음을 두드린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참 기뻐하실 것이다.〠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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